민씨 저택. 민시영은 소리 없이 하품을 하며 얼어붙은 것처럼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한번 훑어보더니 이내 시계를 힐끗 스쳐봤다. 벌써 4시. 민재혁네 식구가 요즘 얌전해서 그나마 편히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솔직히 방금 새벽 3시 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려 안채로 부를 때, 시영은 할아버지가 다시 살아 돌아온 줄 알고 섬뜩했었다. 그런데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오늘 잠 자기는 글러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끝내 참지 못한 시영은 슬금슬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나선 시영은 계단 앞에서 저도 모르게 습관 적으로 손을 들었다. 이건 야맹인 시영의 습관이다. 하지만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걸 문뜩 인지한 순간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걸렸다. ‘내가 진짜 잠을 못 자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네. 내 손으로 직접 해원으로 보냈으면서 부축해 주길 바라다니.’ 홀로 난원에 돌아간 시영은 창가에 서서 고요한 저택을 살폈다. 그 순간 어두운 창에 희미한 그림자가 비쳤다. 한편, 해원에 있는 케빈도 창가에 서서 네온사인으로 물든 강을 구경하고 있었다. 밤이 저물자 흥도 점점 식어갔다. …… 다음날. 하윤이 깨어났을 때 핸드폰 베터리가 나가 전원이 꺼져 있었다. 그건 하윤의 핸드폰도 마찬가지였다. 하윤은 얼른 핸드폰을 충전하고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 그러고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할 때 그 핸드폰을 케빈에게 돌려주었다. “죄송해요, 어제 케빈 씨 핸드폰을 제가 가져가 버려서.” 케빈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에 하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하기 시작하더니 한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오늘 누구 좀 만나야 할 것 같아요.” 하윤은 진은영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몇 년 전 오나영과 채영 모두 하윤의 아버지가 자기한테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고발했지만 진은영은 그저 증인 신분으로 증언했다. 때문에 계획을 실행하기 전 하윤은 진은영이 오나영과 채영과 함께 돈을 받
권하윤의 말에 어느 정도 태도가 누그러졌던 진은영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시윤아, 나 원래 네 아빠와 너는 다르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만약 네 아버지를 위해 변명이라도 하려고 찾아온 거라면 미안한데 그만 나가 줄래?” “저 변명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아빠 정말 억울하게 당한 거라고요. 오나영과 채영이 돈을 받고 아빠를 모함했어요.”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선배도 아빠 밑에서 오랫동안 배웠잖아요. 그런데도 제 아빠 인성을 못 믿어요?” “내가 애초에 교수님을 너무 믿었던 게 문제야. 그래서 그걸 직접 목격했을 때 더 구역질 났던 거고!” 진은영의 표정은 분노 때문에 일그러졌다. “교수님 밑에서 배웠던 게 수치스러울 만큼!” 상대가 아버지를 폄훼하자 더 이상 냉정을 취할 수 없었던 하윤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제가 볼 때는 아빠가 선배 같은 제자를 둔 게 치욕이에요!” “뭐라고?” 진은영이 버럭 소리 지르자 하윤은 곧바로 어제 찍어 두었던 영상을 재생해 진은영에게 던져 주었다. “직접 봐요.” 진은영은 의아해하며 핸드폰을 건내 받았다. 그렇게 보게 된 영상 속에는 오나영과 채영이 화장실 거울 앞에서 대화하는 모습이 들어 있었다.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대화의 첫 마디를 듣는 순간 진은영은 할 말을 잃었다. “너 뭐 하자는 거야? 우리가 위증을 했다는 걸 시윤이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진은영은 마치 머리라도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 충격에 빠트린 건 그 뒤에 이어진 둘의 대화였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에 진은영은 영상이 끝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하윤이 진은영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입을 열었다. “이래도 제 아버지가 두 사람을 추행하는 걸 선배 눈으로 직접 봤다고 할 수 있어요?” 진은영은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 순간 진은영의 얼굴에는 미안함, 분노 그리고 비통함이 섞여 있었다. 심지어 혼이라도 나간 것처럼 말도 더듬었다.
생각을 정리한 권하윤은 깊은 숨을 들이켰다. “은영 선배, 우리 아빠가 돌아가셨다지만 저는 아빠가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걸 볼 수 없어요. 선배가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진은영을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진은영의 눈에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가득했다. “네가 그런 말 하지 않아도 교수님 결백을 증명하고 싶었어. 교수님은…….” 한창 말하던 진은영의 눈시울은 이내 붉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어리석었어. 내가 교수님을 오해하다니, 교수님은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 진은영은 하윤의 손을 꼭 잡았다. “차라리 나 때려. 욕해도 돼.” 하윤은 텅 빈 눈으로 진은영을 바라봤다. ‘지금 때린다고 뭐가 달라지나? 아빠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아버지가 그런 누명까지 쓰면서 뛰어내린 건 공은채를 위한 거잖아.’ 그 순간 눈 앞에 어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렸고 귓가에 확신을 가진 채 말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난 네 아빠 믿어.” 눈을 감은 순간 눈물이 하윤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진은영의 집을 떠날 때, 하윤의 다리는 마치 철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겁기 그지없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앉아 휴식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호텔로 돌아간 하윤은 던을 찾아갔다. 하지만 던의 방문을 한참 동안 노크해도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던이 없으니 하윤은 자기 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공간에서 하윤은 점점 생각에 잠겼다. ‘아빠는 왜 공은채랑 껴안고 있었던 거지?’ 그 순간 오나영이 식사 자리에서 비아냥거리듯 말했던 한 마디가 떠올랐다. “학생과 불륜을 저지르는 게 무슨 음악가라고…….” ‘그 말은 단지 나를 찍어 누리기 위해 했던 걸까? 아니면 뭘 알고 하는 얘기였을까?’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했다. 심지어 거대한 소용돌이가 하윤을 삼켜버리는 것만 같았다. …… 오후에 방으로 돌아온 던은 하윤의 안색을 보고는 예의껏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고 커피를
권하윤은 우는 소리를 내며 귀를 쫑긋 세우고 전화 건너편의 소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목이 쉬도록 울어 댔지만 건너편에서는 한마디 위로의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에 신호가 안 좋은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귀에서 떼어내 관찰하고 있을 때 전화 건너편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 울었어?”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하윤은 하마터면 핸드폰을 그대로 던져버릴 뻔했다. 하지만 그런 충동을 누른 채 의아한 듯 물었다. “저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전화 오면 지역이 뜨는 거 몰랐어?” 하윤은 순간 난처했다. 하지만 이내 의문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내가 전화한 걸 알면서도 전화 받았다는 건가?’ 그걸 인지한 순간 난처함은 기쁨으로 변했고 손가락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 변두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울려고 했는데 도준 씨 목소리를 들으니까 울기 싫어 졌어요.” “또 병이 도졌어?” 감정을 알 수 없는 목소리에 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 ‘설마 내가 또 속인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 저는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어젯밤…….” “뚜뚜뚜…….”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끊어진 전화에 하윤은 풀이 죽었다. 하지만 도준과 말이라도 했다는 생각을 하니 충전이라도 한 것처럼 힘이 솟아났다. 이에 하윤은 다시 침대에 엎드린 채 엄석규의 자료를 펼쳐봤다. 엄석규는 이성호와 마찬가지로 해원 음악 대학의 선생이다. 물론 이성호는 교수이고 엄석규는 부교수였지만. 그런데 지금 엄석규는 학교의 부총장으로 승진했다. 엄석규는 이성호처럼 평생 음악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관직에 더 집착했다. 보통 사람이 위로 올라가려면 필요한 요소는 적지 않다. 인맥, 스펙, 직함 그리고 배경 등등. 엄석규와 이성호는 대학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는데 집안은 그나마 풍족하게 사는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앞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엄석규가 위증을 하고 난 뒤 고작 몇 년 동안 부교수에서 바로 교수, 학과장, 부학장,
행사 당일. 하윤은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던의 서류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스폰서인 던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심지어 학장이 직접 두 명의 학과장과 영어 통역을 도와줄 영어 선생님을 데리고 마중 나왔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던에게 영어 선생님은 사실 필요 없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던은 매번 한국어 발음을 또박또박 하려고 애쓰다 보니 외국인이 한국어 듣기 평가 시험 문제를 읽는 것 같다는 착각을 주기는 했다. 학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런 던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해원 음악 대학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선 학교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점심은 학교 귀빈실에 준비해 뒀습니다. 그리고 행사는 오후 1시에 옆에 있는 콘서트홀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학장은 말하면서 영어 선생님을 바라봤고 영어 선생님이 통역을 하는 동안 던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경청했다. 하지만 영어 선생님이 어렵사리 통역을 마치자 그제서야 유창한 한국어로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 말에 학장과 영어 선생님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다가 본관에 도착하자 존재감을 숨기고 있던 하윤이 갑자기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고, 앞에서 걸어가던 던이 발걸음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이 건물은 조금 특이해 보이네요.” 학장과 학과장은 일제히 퇴색한 낡은 건물을 바라봤다. 이윽고 귀빈의 취향을 모르는 학장은 마지못해 맞장구 치며 대답했다. “네, 뭐 고풍스럽고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물이긴 하죠.” “그렇게 칭찬하니 들어가 보고 싶네요.” 던은 사람들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말을 마치자마자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 저기…….” 학장은 이내 던을 막으려 했지만 곧이어 반시간도 넘는 사무실 관광이 이어졌다. 교실부터 교사들의 사무실, 심지어는 도구실까지 던은 꼼꼼히 살폈다. 그렇게 총장실에 도착하자 학장은 너무 놀라 머리가 곤두섰다. “저기……, 총장실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그
방금 들어올 때 권하윤은 대충 정찰했는데 도청기를 숨기기 가장 적합한 곳은 바로 테이블 아래였다. 테이블은 하윤이 있는 정수기와 약 2,3 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학장이 계속 하윤을 보고 있는 바람에 쉽사리 손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하윤이 조급해할 때 던이 벽을 짚으며 입을 열었다. “이 사진들 재밌네요.” “아, 이 사진 말씀이시구나. 이건 저희 학교 부총장입니다…….” 학장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위치가 애매한 터라 고개만 돌리면 들킬 게 뻔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한 데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기에 하윤은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정했다. 컵을 정수기 위에 올려 놓은 하윤은 물을 내리는 버튼을 누르고는 기회를 엿봐 재빨리 테이블 쪽으로 몸을 숙였다. 대화 소리와 물 소리가 함께 들려오자 하윤의 심장은 더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종이컵에 물이 차는 건 한순간이기에 그 사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너무 긴장한 탓에 손이 떨리는 데다 손바닥에 땀이 차올라 하윤은 테이프를 떼어낼 때 몇 번이나 실패했다. 심지어 물이 컵에 차는 동안 물소리가 점점 변했다. 그런 변화는 마치 하윤의 명을 재촉하는 듯했고 빨리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었다. 다행히 물컵이 찬 순간 하윤은 도청기를 테이블 아래에 붙이는 데 성공했다. 하윤은 학장이 있는 방향을 감히 보지도 못한 채 얼른 정수기 쪽으로 달려가 버튼을 눌렀다. 불과 20초도 안 되는 사이 하윤의 등은 식은 땀에 흠뻑 젖었고 입을 가린 마스크 때문에 안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제야 하윤은 조심스럽게 학장이 있는 쪽을 바라봤는데, 그 시각 학장은 끊임없이 물어보는 던 때문에 정신이 팔려 하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 쉬며 하윤은 조심스럽게 넘쳐날 것처럼 찰랑거리는 물컵을 들고 던 쪽으로 걸어갔다. “드세요.” 여유만만하던 던은 물에 축축하게 젖어 있는 종이컵을 보더니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때마침 학장의 아부 섞인 목소리가 들
“야, 저 사람 오나영 선배 아니야?” “정말이네? 나영 선배도 오늘 행사에 참석하나 봐.” 시선이 집중된 곳에서 오나영은 스포티한 옷차림으로 식당에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오나영의 팬인 여자 후배가 용기 내어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저 선배님 오래 전부터 팬이었어요. 오늘 이렇게 보게 돼서 너무 기뻐요.” 오나영은 후배의 말에 입을 가리며 웃었다. “나도 너희들한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돼서 기뻐.” “선배님 멘탈 진짜 짱이네요. 요즘 악녀한테 괴롭힘 당했다면서요? 그 소식 듣고 엄청 걱정했어요.” 오나영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걔도 아버지 때문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거니까. 물론 내 인생이 걔네 아버지 때문에 망치긴 했어도 그 애를 탓하지는 않아. 그냥 하루빨리 진실을 보는 안목을 기르기를 바랄 뿐이야.” “선배님은 어쩜 그렇게 착해요? 제가 만약 그렇게 악독한 부녀를 만났다면 먼저 주먹부터 날라갔을 텐데.” 조소와 악랄함이 섞인 단어들은 칼자루처럼 하윤의 가슴을 찔러댔다. 이에 입맛조차 사라진 하윤은 식판을 들고 바로 식판 회수 창구로 향했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뒤에 있던 오나영이 하윤을 알아봤다. “시윤?” 마침 쥐처럼 숨어 다니는 하윤을 보며 오나영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너 왜 그런 차림으로 있어? 설마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그래?” 오나영은 일부러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소개할게. 이 사람이 바로 이성호 딸이자 내 후배야.” 오나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 학생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왔지?” “그러게 말이야. 설마 학교 행사를 망치려고 온 건 아니겠지?” “진짜 뻔뻔하다.” 그때 흥분한 남자 후배가 오나영의 앞을 막아서며 하윤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너 같은 건 우리 학교에 올 자격 없어!” “당장 나영 선배한테서 떨어져!” 하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들에게 둘러 쌓였고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분노 가
며칠 사이에 권하윤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득의양양해하는 오나영을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죽고 싶어 발악을 하는 건 너지. 내가 아니라.” “이게!” 발끈하려던 오나영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 오늘 개쪽을 당하는 게 누구인지.” 오나영은 목소리를 내리깔며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이따가 무대 위에서 너랑 네 아비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거 세상 사람들한테 까발릴 거야.” 뒤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케빈이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막 나서려고 하자 하윤은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하지만 오나영은 케빈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뒤집더니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의기양양해서 떠나갔다. “혹시 화 안 나세요?” 케빈은 잠깐 동안의 침묵을 깨고 말을 내뱉었다. 이에 하윤은 덤덤하게 웃었다. “오히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저 여자의 반응이 더 궁금해요.” …… 오후 1시. 몇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콘서트홀은 어느새 꽉 찼다. 맨 앞줄은 학교 지도자들과 초대를 받은 교육기관 관원들이었고 뒤에는 초대를 받은 우수 졸업생들과 현재 재학 중인 학생들이었다. 심지어 좌석 사이의 빈 공간에는 각종 촬영 장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생방송용 카메라와 후속 보도를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있는 각 매체 기자들도 있었다. 엄석규는 행사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 홀에 도착해 학교측 지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게다가 사전에 기자들에게 이번에 받을 후원은 자기가 끌어들인 거라고 기자들에게 말해 두어 스펙에 한 획을 그을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한편 하윤은 이번에 후원을 한 던의 신분이 폭로되어 오나영 일행이 의심하는 걸 피하기 위해 학교측에 대표님이 사람 많은 걸 싫어해서 맨 마지막 줄을 비워달라는 부탁을 했다. 때문에 이 시각 하윤은 맨 마지막 줄에 앉아 무대 위에서 행사 오픈 연설을 준비하는 엄석규를 지켜봤다. 엄석규는 이성호와 나이가 비슷하고 새치가 섞여 있는 중단발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