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저 사람 오나영 선배 아니야?” “정말이네? 나영 선배도 오늘 행사에 참석하나 봐.” 시선이 집중된 곳에서 오나영은 스포티한 옷차림으로 식당에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오나영의 팬인 여자 후배가 용기 내어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저 선배님 오래 전부터 팬이었어요. 오늘 이렇게 보게 돼서 너무 기뻐요.” 오나영은 후배의 말에 입을 가리며 웃었다. “나도 너희들한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돼서 기뻐.” “선배님 멘탈 진짜 짱이네요. 요즘 악녀한테 괴롭힘 당했다면서요? 그 소식 듣고 엄청 걱정했어요.” 오나영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걔도 아버지 때문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거니까. 물론 내 인생이 걔네 아버지 때문에 망치긴 했어도 그 애를 탓하지는 않아. 그냥 하루빨리 진실을 보는 안목을 기르기를 바랄 뿐이야.” “선배님은 어쩜 그렇게 착해요? 제가 만약 그렇게 악독한 부녀를 만났다면 먼저 주먹부터 날라갔을 텐데.” 조소와 악랄함이 섞인 단어들은 칼자루처럼 하윤의 가슴을 찔러댔다. 이에 입맛조차 사라진 하윤은 식판을 들고 바로 식판 회수 창구로 향했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뒤에 있던 오나영이 하윤을 알아봤다. “시윤?” 마침 쥐처럼 숨어 다니는 하윤을 보며 오나영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너 왜 그런 차림으로 있어? 설마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그래?” 오나영은 일부러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소개할게. 이 사람이 바로 이성호 딸이자 내 후배야.” 오나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 학생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왔지?” “그러게 말이야. 설마 학교 행사를 망치려고 온 건 아니겠지?” “진짜 뻔뻔하다.” 그때 흥분한 남자 후배가 오나영의 앞을 막아서며 하윤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너 같은 건 우리 학교에 올 자격 없어!” “당장 나영 선배한테서 떨어져!” 하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들에게 둘러 쌓였고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분노 가
며칠 사이에 권하윤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득의양양해하는 오나영을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죽고 싶어 발악을 하는 건 너지. 내가 아니라.” “이게!” 발끈하려던 오나영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 오늘 개쪽을 당하는 게 누구인지.” 오나영은 목소리를 내리깔며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이따가 무대 위에서 너랑 네 아비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거 세상 사람들한테 까발릴 거야.” 뒤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케빈이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막 나서려고 하자 하윤은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하지만 오나영은 케빈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뒤집더니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의기양양해서 떠나갔다. “혹시 화 안 나세요?” 케빈은 잠깐 동안의 침묵을 깨고 말을 내뱉었다. 이에 하윤은 덤덤하게 웃었다. “오히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저 여자의 반응이 더 궁금해요.” …… 오후 1시. 몇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콘서트홀은 어느새 꽉 찼다. 맨 앞줄은 학교 지도자들과 초대를 받은 교육기관 관원들이었고 뒤에는 초대를 받은 우수 졸업생들과 현재 재학 중인 학생들이었다. 심지어 좌석 사이의 빈 공간에는 각종 촬영 장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생방송용 카메라와 후속 보도를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있는 각 매체 기자들도 있었다. 엄석규는 행사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 홀에 도착해 학교측 지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게다가 사전에 기자들에게 이번에 받을 후원은 자기가 끌어들인 거라고 기자들에게 말해 두어 스펙에 한 획을 그을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한편 하윤은 이번에 후원을 한 던의 신분이 폭로되어 오나영 일행이 의심하는 걸 피하기 위해 학교측에 대표님이 사람 많은 걸 싫어해서 맨 마지막 줄을 비워달라는 부탁을 했다. 때문에 이 시각 하윤은 맨 마지막 줄에 앉아 무대 위에서 행사 오픈 연설을 준비하는 엄석규를 지켜봤다. 엄석규는 이성호와 나이가 비슷하고 새치가 섞여 있는 중단발을 하고
“오늘 이 자리에 두 분의 옛 친구가 와 계십니다. 그 친구분이 두 분의 창창한 앞날을 위해 축복의 메시지를 준비했다고 하니 무대 위로 모시겠습니다.” “자, 진은영 학생, 무대 위로 올라와 주세요.” 물론 조금 의외긴 했지만 무대 아래에 수많은 카메라가 있는 데다가 또 친구 사이의 정으로 이슈 몰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오나영은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진은영이 무대에 올랐을 때 오나영은 포옹으로 그녀를 맞이하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은영아, 너도 왔구나.” 채영도 보여주기 식으로 진은영과 포옹했다. 하지만 진은영은 싸늘한 눈으로 자기를 손에 쥐고 놀았던 ‘친구들’을 바라보더니 사회자 손에서 마이크를 받아 들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 내가 영상을 준비했어.” 말이 끝나기 바쁘게 스크린에는 영상 하나가 재생되었다. 쓱쓱 스쳐 지나가는 영상의 맨 앞에는 세 사람이 대학 시절 함께 찍었던 사진이 담겨 있었다. 풋풋한 미소는 세 사람의 청춘을 그대로 사람들 앞에 보여주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앵글은 바로 화장실로 바뀌었다. “너 뭐 하자는 거야? 우리가 위증을 했다는 걸 시윤이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쟤가 우리를 찾아온 게 자랑하러 온 것만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아니면 엄석규 쌤 한테 물어볼까?” “…….”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모든 사람은 미처 반응도 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 엄청난 사실을 알아버렸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 시각 무대 위에 있던 오나영과 채영은 벙찐 얼굴로 서 있다가 겁에 질린 얼굴로 스크린을 응시했다. 엄석규도 많이 당황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자기가 쌓아 올린 모든 게 무너졌음을 직감했다. 한편 상영실에 있던 사람도 뭔가 잘못됐음을 그제야 눈치챈 듯 바로 화면을 꺼버렸지만, 진은영이 마이크를 든 채 버럭 소리쳤다. “너희 둘 그때 나한테 거짓말했잖아. 교수님이 너희 성추행했다고 나를 속여 위증까지 하게 한 것 때문에 교수님이 억
오나영이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채영이 귀를 막고 중얼대는 걸 보자 권하윤은 속이 시원했다. 한순간 무대 위는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고 무대 아래 사람들 역시 패닉에 빠졌다. 그러던 그때, 하윤이 엄석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엄석규 부총장님, 아니 엄석규 씨, 당신이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혹시 우리 아버지가 당신 꿈에 찾아가지 않았나요? 절친한 친구면서 왜 그랬냐고 물어보지 않던가요?” 엄석규는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 채 옆에 있는 경비원에게 버럭 소리쳤다. “당장 소란 피우는 자들을 끌어내리라고!” 그 말에 스무 명이 되는 경비들이 일제히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 모습을 본 케빈은 손으로 끌고 있던 스피커를 경호원들에게 던지면서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케빈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경비원들이 하윤을 끌어내리려던 찰나,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쿠! 남자들이 떼거지로 몰려 들어 여자 하나 때리려 하다니 집에 가서 엄마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래?” 흠칫 놀라 천천히 고개를 돌린 하윤은 무대 위에 있는 경호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데리고 나타난 한민혁과 눈이 마주쳤다. 민혁이 데려온 패거리들은 무대를 세 바퀴 정도 둘러쌌고 무대 아래에 어느 새 대포만한 카메라 한 대가 하윤을 겨누고 있었다. “계속 말해요. 누가 감히 움직이는지 제가 지켜볼 테니까.” 긴급한 상황이라 하윤은 민혁을 향해 감사하다는 듯 미소 짓고는 다시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 모든 관객들은 하윤에게 집중했다. “저의 아버지는 이성호 교수님입니다. 유명한 음악가이기도 하죠. 제 아버지는 수많은 학생들이 우러러보는 선생님이자 학생들의 길을 빛내주는 등불 같은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이 악독한 사람들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신자살을 택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의 행복한 가정도 산산조각 나버렸고요. 그뿐만 아니라 저도 오나영의 악의적인 유도하에 인터넷으로 수많은 언어 폭력을 당해 왔
가까스로 집에 도망쳐 온 오나영은 신발이 벗겨진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심지어 누가 잡아당겼는지 두피마저 찌근거렸고 전화벨 소리가 목숨을 재촉하는 듯 쉴 새 없이 울려댔다. “너 이제 끝났어. 전에 계약했던 브랜드사에서도 위약금을 요구하는 상황이고. 이 문제는 모두 네가 초래한 거니까 위약금은 네가 해결해!” 늘 입만 열면 우리 귀염둥이 우리 여신 하면서 떠받들던 매니저의 싸늘한 말투에 가뜩이나 겁에 질려 있던 오나영은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언니, 언니마저 저 버리면 안 돼요. 언니가 저 이미지 복구하는 거 도와주면 그래도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이미 증거가 그렇게나 많이 나왔는데 어떻게 다시 일어서? 얼른 위약금 물 방법이나 생각해!” “…….” “언니? 언니!” 오나영은 몇 번 외치고 나서야 전화가 한참 전에 이미 끊어졌다는 걸 알아챘다. “이 속물들! 나 광고 몇 개만 찍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어!” 오나영이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분노를 표출할 때 전화가 벨이 다시 울렸다. 매니저가 다시 전화한 줄로 착각한 오나영은 다시 희망을 품고 전화를 받았다. “언니, 저 대신 방법 좀 생각…….” “악독한 X! 사람 목숨으로 쌓아 올린 성에서 여왕 놀이하니까 재밌었어?” “누구야? 당신 누구야?” 오나영이 버럭 화내며 소리쳤지만 전화는 이내 끊겼다. 하지만 곧이어 다음 전화가 걸려 왔다. “돈 돌려줘! 내가 선물 쏜 거 다 돌려달라고!” 오나영은 당황한 듯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헛수고였다. 전화를 끊으니 이내 메시지가 수도 없이 쏟아져 내렸으니까. 심지어 항상 오나영 편에 서 있던 팬덤까지 등을 돌려 돈을 돌려내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제야 오나영은 무서운 게 뭔지 까달았다. 심지어 핸드폰 전원을 꺼버려도 주위에서 수많은 눈이 자기를 분노와 증오의 눈빛으로 보는 것 같았고 욕설을 퍼붓는 것 같았다. 오나영은 미친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내가 피해자야. 내가 피해자라고!”
권하윤은 던의 차에 오르자마자 이어폰을 귀에 꼈다. 그때 손깎지를 낀 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던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앞에 차에 타지 않죠?” “엄석규 사무실에 뒀던 도청기에 신호가 잡혀서 들어보려고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하는 하윤의 모습에 던은 피식 웃었다. “재밌네요. 그러니까 지금 민 사장을 믿지 않는 거네요.” 그 말에 하윤은 일순 멈칫했다. “뭐라고요?” “설마 윤이 씨가 엄석규의 말을 도청하는 걸 민 사장이 아는 게 싫어서 제 차에 탄 거 아닌가요?” 던의 말에 하윤은 그제야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방금 확실히 민혁이 자기 계획을 듣는 걸 무의식적으로 배척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설마 나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도준 씨가 범인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이 들자 하윤은 순간 짜증이 치밀어 던을 돌아봤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사실을 말했을 분이에요.” 그 말에 하윤은 고개를 홱 돌려 더 이상 던과 얘기를 나누지 않고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엄석규는 누군가와 전화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는데 말투에는 조급함이 느껴졌다. “그 계집애가 돌아온 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가 볼 때 오래전부터 계획한 게 틀림없어요. 이제 어떡합니까!” 대화를 대충 들어도 그 계집이라는 사람이 바로 하윤 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윤은 상대의 말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이어폰을 귀로 꾹 막았지만 건너편에서는 조급한 발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알았어요. 늘 보던 곳에서 만나죠.” 엄석규가 갑자기 전화를 끊자 하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끝이라고?’ 그러다가 이어폰에서 문소리가 들리자 하윤은 얼른 고개를 돌려 던을 바라봤다.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은 ‘나 목적 있어요’ 라는 의도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던 씨.” 던은 하윤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슬쩍 움직였다. “왜요?” “저 차 좀 빌립시다.” “그래서요?” “좀 내려 주실래요?”
“띠띠!” 짤막한 경적 소리는 이내 권하윤의 주의를 끌었다. 평범한 검은색 폭스바겐이 엄석규 앞에 멈춰 서자 엄석규는 두말없이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그것만으로도 차 안의 사람과 엄석규가 아는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윤은 먼저 자동차 번호판을 사진 찍은 뒤 차가 출발하자 이내 시동을 걸어 그 뒤를 따랐다. 물론 발각될까 봐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며칠 동안 실마리를 찾다가 이제야 뭔가 단서를 잡은 것 같다는 생각에 하윤은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윽고 운전하는 틈에 손을 바지에 쓱 문질러 땀을 닦아냈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던은 머리가 쭈뼛 곤두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바싹 뒤를 쫓던 하윤은 앞에서 가던 차가 웬 찻집에서 멈춰선 걸 발견했다. 엄석규가 차에서 내리자 그가 타고 있던 차는 홀연히 사라졌다. 엄석규가 찻집으로 들어가자 하윤은 그 뒤를 따라붙으려 했지만 한편으로는 발각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에 하윤은 고개를 돌려 던을 바라봤고 하윤과 거리를 유지하던 던이 얼른 입을 열었다. “저 사람 나도 봤어요.” ‘하긴, 그렇다면 누굴 찾아야 하지?’ “아, 케빈은 어때요?” ‘케빈…….’ 사실 한민혁 일행이 나타난 뒤로 하윤은 케빈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케빈이 여기까지 오려면 한참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은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케빈은 하윤 앞에 나타났다. “저희 흩어졌던 거 아니었어요?” 의아해하는 하윤을 보더니 케빈은 묵묵히 대답했다. “저는 하윤 씨 안전을 지켜줘야 합니다.” 케빈이 계속 자기를 따라왔다는 생각에 하윤은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케빈 씨를 태워야 한다는 걸 깜빡했어요.” 그 말에 케빈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아무것도 없는 곳에 버려둔 뒤 자기 보다 늦게 돌아오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던 민시영과 비교하면 하윤은 인자한 편에 속했다. 케빈이 찻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본 하윤은 그 뒤로도 한참
전화 건너편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내용은 듣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선택제를 좋아하나 보네? 좋아. 그렇다면 네 머리를 박살내 줄까 아니면 척추를 부러트려 줄까? 선택해 봐.” 한민혁은 자기 머리를 슬쩍 만져보더니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기, 그러니까 하윤 씨의 계획이 아주 성공적인 것 같아. 지금 엄석규의 배후에 있는 사람까지 추적한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어, 그러니까…….” 우물쭈물하는 민혁의 말투에 인내심이 바닥 난 도준은 끝내 참지 못하고 윽박질렀다. “계속 우물댈 거면 어떻게 죽고 싶은지부터 골라.”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생명의 위협을 느낀 민혁은 얼른 자기가 본 걸 그대로 뱉어냈다. “형 명령대로 하윤 씨를 따라다녔는데 던이 차에서 하윤 씨 엉덩이를 만지고 손을 조물딱거리는 걸 봐 버렸어.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 전화 건너편에서 이어지는 침묵에 민혁은 감히 숨조차 쉬지 못했다. 심지어 귓가에 들리는 전류 소리마저 차가운 바람이 되어 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난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윽고 민혁이 무릎이라도 꿇고 전화 받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전화 건너편에서 남자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민혁은 더 이상 도준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얼른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사진 찍었는데, 혹시 직접 볼래?” 잠시 뒤, 몇 장의 사진이 도준의 핸드폰에 도착했다. 거리 때문에 화면이 흐릿했지만 매일 문자에서 자기한테 애교 부리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손을 맞잡고 있는 걸 확인하는 데는 방해되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날뛰던 분노가 끝내 밖으로 점점 흘러나왔다. ‘진실을 파헤쳐 보라고 보내줬더니 이젠 다른놈을 만나고 다녀?’ ‘아주 잘하고 있네.’ 도준의 주위를 맴도는 기운이 너무 무서워 사무실에 들어왔던 민싱영은 한 바퀴 빙 돌아 그대로 다시 나가버렸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순간 매번 반기를 들며 시비를 걸어오던 대외무역 팀 부장과 마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