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건너편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내용은 듣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선택제를 좋아하나 보네? 좋아. 그렇다면 네 머리를 박살내 줄까 아니면 척추를 부러트려 줄까? 선택해 봐.” 한민혁은 자기 머리를 슬쩍 만져보더니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기, 그러니까 하윤 씨의 계획이 아주 성공적인 것 같아. 지금 엄석규의 배후에 있는 사람까지 추적한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어, 그러니까…….” 우물쭈물하는 민혁의 말투에 인내심이 바닥 난 도준은 끝내 참지 못하고 윽박질렀다. “계속 우물댈 거면 어떻게 죽고 싶은지부터 골라.”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생명의 위협을 느낀 민혁은 얼른 자기가 본 걸 그대로 뱉어냈다. “형 명령대로 하윤 씨를 따라다녔는데 던이 차에서 하윤 씨 엉덩이를 만지고 손을 조물딱거리는 걸 봐 버렸어.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 전화 건너편에서 이어지는 침묵에 민혁은 감히 숨조차 쉬지 못했다. 심지어 귓가에 들리는 전류 소리마저 차가운 바람이 되어 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난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윽고 민혁이 무릎이라도 꿇고 전화 받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전화 건너편에서 남자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민혁은 더 이상 도준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얼른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사진 찍었는데, 혹시 직접 볼래?” 잠시 뒤, 몇 장의 사진이 도준의 핸드폰에 도착했다. 거리 때문에 화면이 흐릿했지만 매일 문자에서 자기한테 애교 부리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손을 맞잡고 있는 걸 확인하는 데는 방해되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날뛰던 분노가 끝내 밖으로 점점 흘러나왔다. ‘진실을 파헤쳐 보라고 보내줬더니 이젠 다른놈을 만나고 다녀?’ ‘아주 잘하고 있네.’ 도준의 주위를 맴도는 기운이 너무 무서워 사무실에 들어왔던 민싱영은 한 바퀴 빙 돌아 그대로 다시 나가버렸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순간 매번 반기를 들며 시비를 걸어오던 대외무역 팀 부장과 마
민시영은 민도준의 화가 풀어지기는커녕 더 심해진 걸 보고 다시 슬그머니 뒷걸음 쳤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시영을 불러 세웠다. “여기가 무슨 관광지야?” 시영은 그 말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리가. 난 오빠가 내 말 들어줄 기분이 아닌 것 같아서 나가려고 한 거야.” 뒤집힌 의자를 바로 세운 시영은 바닥에 있는 핏자국을 보며 끌끌 혀를 찼다. “대외무역 팀 팀원은 모두 민병철 쪽 사람인데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이거 또 소란이 있을 것 같은데.” “하.” 도준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곧바로 연기와 함께 도준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됐네. 오늘 마침 제대로 놀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시영은 도준의 안색을 살피더니 한참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해원 쪽에 무슨 일 있어?” “…….” 비록 대답을 얻지 못했지만 해원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섬뜩하게 변하는 도준의 눈빛을 보고 시영은 답을 얻어냈다. 이윽고 시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 귀국하고 아직 해원에 가본 적 없네. 요즘 내가 제안한 프로젝트가 모두 무산되었으니 이 참에 놀러 가고 싶은데 혹시 휴가 내줄 수 있어?” 담배꽁초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상공에 닿을것처럼 굴다가 이내 에어컨 바람에 의해 흩어졌다. 그리고 한참 뒤, 소파에 앉아 있던 도준이 문뜩 시영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접었다. 그 순간 시영은 등골이 오싹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 왜 그렇게 봐?” 남자의 입꼬리는 위헙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더니 이내 그 사이로 말이 튀어나왔다. “해원은 나중에 가.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따스한 햇살이 사무실 안에 비쳐 들어왔지만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시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한 편, 차안에서 부는 찬 바람에도 하윤의 조급함을 가라앉지 않았다. 벌써 20여 분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자 하윤은 끊임없이 시계를 확인하며 이런저
곧바로 권하윤의 생각은 증명되었다.공씨 저택이 시야에 보이자 하윤은 자기의 생각이 맞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 한구석의 돌멩이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그래도 공씨 가문이라서 다행이야.’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 차를 세워 두고 묵묵히 모든 상황을 지켜봤다.공태준의 개인 저택도 사람의 손에 정교하게 꾸며져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공씨 본가 저택은 더욱 놀라웠다.고층 건물이 즐비한 해원에 이토록 조용한 곳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공씨 본가 저택은 사실 옛 황족의 저택이기에 벽은 지금 자주 사용하는 철근과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대신 거의 도자기처럼 정교하게 지어졌다. 때문에 면적이 너무 크지 않아도 그 값어치는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이곳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이기에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다.그 노인은 차에서 내린 뒤 정문 옆에 있는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심지어 문 앞 경호원은 아무런 검문도 하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번거로운 규칙이 가득한 공씨 가문에서 이렇게 저택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공씨 가문 사람뿐이다.하윤은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러니까 엄석규를 포함한 사람들이 공씨 집안 사람의 사주를 받았다는 거네?’그 사주를 내린 사람일 가능성이 제일 많은 사람은 바로 공채령의 아버지 공천하다.‘만약 아빠가 정말 공채령과 그런 사이라면…….’‘공채령을 그토록 통제하던 공천하가 아빠를 망가트리는 것도 말이 돼.’하윤의 눈에는 막연함이 차올랐다.‘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일이라고?’분명 명확해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하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정말 이렇게 간단하다면 도준 씨가 왜 계속 답을 알려주지 않았을까?’‘내가 아빠의 죽음에 관해 물었을 때 어느 정도 자기와 상관이 있다는 답은 또 뭐였고?’‘공태준이 나를 보여준 사진 속에 왜 도준 씨가 그것도 아빠가 투신하기 전 건물에 있었지?
차 문이 열리자 케빈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제 직책은 사모님을 보호하는 겁니다. 제 생사를 상관하지 마세요.”권하윤은 케빈의 말을 무시한 채 차에서 내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진정을 되찾았다.“괜찮아요. 마침 공씨 집안의 어떤 분이 보자고 하는지 궁금했으니까.”낚시를 하면 하는 사람이 미끼로 물고기를 낚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도 낚싯줄을 타고 낚시꾼을 찾을 수 있으니까.탓하려면 대어를 낚겠다고 행적을 노출한 하윤 본인을 탓해야 한다.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하윤은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이제 겨우 진실에 가까워졌는데 포기할 수 없어.’그때 맨 앞에 선 경호원이 하윤을 향해 손짓했다.“이시윤 씨, 들어가시죠.”하윤은 케빈을 바라봤다.“케빈 씨는 이만 가보세요.”케빈은 다리에 난 상처를 힐끗 보고는 따라가면 짐만 된다는 판단 하에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하윤은 그래도 던에게 뭐라도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는데,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다시 주위를 살펴보니 던은 이미 7,8 미터 떨어진 곳에서 하윤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도망 한번 빨리 치네.’그렇게 하윤은 공씨 집안 경호원들의 감시하에 공씨 저택에 발을 들였다.경호원들을 따라 들어간 건 여전히 옆문이었다.문턱을 넘어서니 맞은편에 벽이 막혀 있어 시선마저 차단되었다.하지만 하윤이 벽면에 새겨진 무늬를 찬찬히 확인하기도 전에 등 뒤의 문이 닫혀 버렸다.그와 동시에 길가에서 들리던 인기척 소리도 문밖으로 차단되어 하윤은 왠지 조금 불안해졌다.벽을 지나자 초목이 우거진 정원에 도착하자, 커다란 나무가 정원에 세워져 있는 석상에 드리우면서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주홍색으로 칠한 기둥을 지나자 어느새 정원의 끝이 눈에 들어왔다.분명 울긋불긋한 꽃과 버드나무가 가득하고 호수가 놓인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곳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곳곳에서 침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그 원인은 바로 곳곳에 숨어 있는 저택 하인들 때문이었다.그들은 모두 어깨를 한껏
공천하는 덤덤하게 자기를 자극하는 권하윤을 바라봤다.“결백? 네 아비가 결백하다면 왜 자기 스스로 해명하지 않았을까?”그날 천지를 뒤덮을 듯 들려왔던 부정적인 기사들을 다시 떠올리자 하윤은 다시 그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학생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아버지를 파렴치한 사람으로 몰던 그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주림 선배가 나서서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려 했다.기억을 뒤로한 채 애써 현실로 돌아온 하윤은 공천하를 바라봤다.“우리 아버지를 고발했던 학생들은 이미 사람의 사주를 받았다는 걸 확인했어요. 그리고 그 사주한 사람이 바로 공씨 집안 사람이라는 것도 확인했고요. 이런 말을 하는 건 남의 이목을 현혹하려는 목적인가요, 아니면 자기가 한 짓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발뺌하는 것인가요?”몇 초간 침묵이 흐르더니 공천하는 그제야 몸을 돌려 처음으로 하윤을 정면으로 바라봤다.공천하는 이제 더 이상 공씨 집안 가주가 아니지만 타고난 카리스마는 사람을 강하게 압박했다. 심지어 예의 바르고 고귀한 분위기 속에 남보다 뛰어나다는 자신감이 내재되어 있었다.“네 아비처럼 하등한 인간한테 내가 그렇게 시간 낭비하며 상대할 필요가 있을까?”사람을 버러지만도 못한 취급을 하는 듯한 한마디는 너무나도 모욕적이었다.하지만 하윤은 이를 꽉 악문 채 화를 눌러 참았다. ‘화내면 안 돼. 화를 내면 공천하한테 말리는 거야.’하윤은 심호흡을 하더니 오히려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건 모르죠. 만약 하등한 인간이 고귀한 인간이 꿈에 그리던 걸 가지고 있었다면 시간과 공을 들여 상대할 필요가 있지 않겠어요?”싸늘한 눈빛이 하윤을 쏘아봤지만 하윤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여기까지 온 이상 하윤은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그때 하윤과 눈을 마주치고 있던 공천하가 시선을 거두더니 이내 재스민을 바라봤다.“어쩐지 태준이가 가주 자리도 포기하고 너를 지키려 들더니, 역시나 보통내기가 아니군.”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뜻이죠?”공천하는 손을 들어 꽃
권하윤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공태준은 지금 어때요?”공천하는 어울리지 않는 꽃을 뽑아버리고는 만족스러워하며 테이블에 놓인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여기 있다 보면 언젠가 만나게 돼 있어.”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제가 언제 여기 있겠다고 했죠?”공천하는 하윤에게 답을 하지도 않고 무시한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하윤도 따라나서려 했지만 문 앞에서 하인들이 막고 있어 나갈 수 없었다.끝까지 유지하고 있던 침착함마저 사라진 하윤은 공천하의 뒤에 대고 악에 받쳐 물었다.“당신이 우리 아버지 죽였어? 공은채는 우리 아버지와 무슨 사이지?”공천하는 하윤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하윤의 모든 질문은 마치 모래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뜨거운 태양에 증발되어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힘이 빠진 하윤은 정원에 놓인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공천하와의 대화를 다시 되새겨 봤다.지금의 모든 게 아버지와 공은채 사이에 뭔가 있었다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어떻게. 아빠가 어떻게 그런 일을…….’그때, 하윤은 갑자기 아버지를 위해 결백을 증명해 주려 하던 주림이 생각났다.‘주림 선배가 아빠를 도운 건 선생님에 대한 신뢰였을까? 아니면 뭔가를 알고 있었던 걸까?’하윤은 주림의 소식을 김종서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김종서가 이익을 탐하는 성격이지만 인맥이 넓고 소식이 빨라 아마 며칠 뒤면 소식을 접할 수 있을 수도 있었다.게다가 아버지의 시체를 수습한 병원과 경찰서도 이미 조사중이고.하윤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공씨 저택에 갇혀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다행인 건 핸드폰을 빼앗기지 않아 하윤은 먼저 케빈한테 전화했다. 하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던의 핸드폰도 마찬가지였고.‘어떻게 된 일이지?’소식을 접할 길 없자 하윤은 점점 불안해졌다.‘먼저 떠난 건가? 설마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니겠지?’이렇게 세상과 단절된 듯한 느낌에 하윤은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끝내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도준의 번호를 눌렀다.도준의 이
“꿈 꾸는 거야?”민도준의 코웃음 섞인 말투는 권하윤의 환상을 깨버렸다. 이에 하윤은 입을 삐죽거렸지만 그렇다고 도준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울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럼 조금이라도 풀렸어요?”“화가 풀렸냐고? 하윤 씨가 외국놈이랑 시시덕거리는 걸 보고 화를 풀까? 아니면 죽상이 된 꼴을 봐서 화를 풀까?”하윤은 도준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외국놈? 크흠…….’“설마 던 씨 말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어찌나 깔끔 떠는지 손에서 땀이 나 바지에 닦았다고 소독해주고 불쾌함을 내비치는 인간이랑 제가 뭐가 있을 리가 있겠어요?”도준은 하윤의 말에 비추어 잠깐 생각한 끝에 어찌된 영문인지 단번에 파악했다.‘한민혁 이 등신 같은 게, 말을 전하려면 제대로 전했어야지.’하윤의 말에 도준은 손에서 주물러 이미 납작해진 담배를 던져버리고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음? 아쉬워하는 말투네. 뭐 던이 마음에 들어 하면 어떻게 해볼 생각이었나 봐?”자기의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하윤은 이내 말투를 한껏 누그러트리고 충심을 표했다.“그럴 리가요. 제 마음 속에는 도준 씨뿐이에요. 도준 씨가 매일 저 무시해서 속상한데 다른 생각할 겨를이 있겠어요? 매일 보내는 문자에 답도 하지 않고. 저 잊은 건 아니죠? 왜 계속 무시해요?”“내 탓이다?”도준이 콧방귀를 뀌자 하윤은 제 발 저려 얼른 대답했다.“아니요. 제 탓이죠.”이윽고 도준의 태도가 약간 느슨해진 걸 발견하고는 은근슬쩍 말했.“도준 씨, 혹시 저 걱정돼서 전화했어요?”하윤이 은근히 내비치는 즐거움을 도준이 모를 리는 없었다.하윤이 제일 잘하는 게 은근히 기어오른다는 걸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조금만 잘해주면 더한 것을 요구해 아주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타려 한다는 걸.한편 대답을 듣지 못한 하윤은 또다시 풀이 죽었다.“공씨 가문에서도 안 놔주고 도준 씨도 저 무시하는데 그냥 이대로 죽기를 기다리죠 뭐.”도준은 하윤을 가볍게 무시하려고 했지만 하윤은 제멋에 연기하더니
한민혁의 목소리는 약간 낮게 들렸다.“하윤 씨, 기다리느라 힘들었죠? 제가 오늘 내로 모시고 여기서 나갈게요.”“아니요, 급할 거 없어요!”권하윤은 한민혁이 민도준을 대신해 불평등한 계약조건에 동의했을까 봐 다급히 막았다.“저 지금 안전하니까 아직은 상의하지 말아요.”“어…….”한민혁은 공씨 가문 왕 사모님인 공미란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려 전화를 막고 낮게 소곤거렸다.“그런데 저 이미 협상 끝났는데요.”하윤은 이내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민혁 씨, 내 말 들어요. 도준 씨가 민혁 씨더러 저를 공씨 집안에서 구해내라고 말한 거 알아요. 그런데 하루만 기다려줄 수 있어요? 내일도 나가지 못하면 그때 다시 데리러 와요.”“그건…….”하윤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민혁 씨도 도준 씨 생각해야 하잖아요. 만약 공씨 집안에서 받을 것만 홀랑 빼먹고 저 안 풀어주면 어떻게 할래요? 제가 직접 시도해 보는 게 좋아요.”민혁은 눈앞에 앉아 있는 공미란을 힐끗 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능청스럽게 연기했다.“신호가 안 좋은데, 뭐라고 하셨나요?”그러면서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여보세요? 저 나왔는데 들려요?”“지금은요?”“뭐라고요? 더 널찍한 곳으로 가달라고요?”이윽고 방 안의 사람들은 민혁이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정원으로 나가 완전히 사라지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민혁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공미란 옆에 있던 하인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이더니 상석에 앉아 있는 공미란에게 물었다.“잡아올까요?”전등을 싫어하고 너무 밝은 것도 싫어하는 공미란 때문에 촛불만 피운 방안 광선은 흐릿했다.이에 어둠 아래, 공미란의 얼굴에 나 있는 주름이 그림자가 드리워 움푹 파인 골짜기처럼 느껴졌다.“사람이 내 손에 있는 한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다.”오늘은 더 이상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더니 뿔뿔이 흩어졌다.그때 생강차 한 잔이 공미란 손 옆에 놓여 졌고, 공미란은 한 모금 살짝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