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꾸는 거야?”민도준의 코웃음 섞인 말투는 권하윤의 환상을 깨버렸다. 이에 하윤은 입을 삐죽거렸지만 그렇다고 도준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울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럼 조금이라도 풀렸어요?”“화가 풀렸냐고? 하윤 씨가 외국놈이랑 시시덕거리는 걸 보고 화를 풀까? 아니면 죽상이 된 꼴을 봐서 화를 풀까?”하윤은 도준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외국놈? 크흠…….’“설마 던 씨 말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어찌나 깔끔 떠는지 손에서 땀이 나 바지에 닦았다고 소독해주고 불쾌함을 내비치는 인간이랑 제가 뭐가 있을 리가 있겠어요?”도준은 하윤의 말에 비추어 잠깐 생각한 끝에 어찌된 영문인지 단번에 파악했다.‘한민혁 이 등신 같은 게, 말을 전하려면 제대로 전했어야지.’하윤의 말에 도준은 손에서 주물러 이미 납작해진 담배를 던져버리고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음? 아쉬워하는 말투네. 뭐 던이 마음에 들어 하면 어떻게 해볼 생각이었나 봐?”자기의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하윤은 이내 말투를 한껏 누그러트리고 충심을 표했다.“그럴 리가요. 제 마음 속에는 도준 씨뿐이에요. 도준 씨가 매일 저 무시해서 속상한데 다른 생각할 겨를이 있겠어요? 매일 보내는 문자에 답도 하지 않고. 저 잊은 건 아니죠? 왜 계속 무시해요?”“내 탓이다?”도준이 콧방귀를 뀌자 하윤은 제 발 저려 얼른 대답했다.“아니요. 제 탓이죠.”이윽고 도준의 태도가 약간 느슨해진 걸 발견하고는 은근슬쩍 말했.“도준 씨, 혹시 저 걱정돼서 전화했어요?”하윤이 은근히 내비치는 즐거움을 도준이 모를 리는 없었다.하윤이 제일 잘하는 게 은근히 기어오른다는 걸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조금만 잘해주면 더한 것을 요구해 아주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타려 한다는 걸.한편 대답을 듣지 못한 하윤은 또다시 풀이 죽었다.“공씨 가문에서도 안 놔주고 도준 씨도 저 무시하는데 그냥 이대로 죽기를 기다리죠 뭐.”도준은 하윤을 가볍게 무시하려고 했지만 하윤은 제멋에 연기하더니
한민혁의 목소리는 약간 낮게 들렸다.“하윤 씨, 기다리느라 힘들었죠? 제가 오늘 내로 모시고 여기서 나갈게요.”“아니요, 급할 거 없어요!”권하윤은 한민혁이 민도준을 대신해 불평등한 계약조건에 동의했을까 봐 다급히 막았다.“저 지금 안전하니까 아직은 상의하지 말아요.”“어…….”한민혁은 공씨 가문 왕 사모님인 공미란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려 전화를 막고 낮게 소곤거렸다.“그런데 저 이미 협상 끝났는데요.”하윤은 이내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민혁 씨, 내 말 들어요. 도준 씨가 민혁 씨더러 저를 공씨 집안에서 구해내라고 말한 거 알아요. 그런데 하루만 기다려줄 수 있어요? 내일도 나가지 못하면 그때 다시 데리러 와요.”“그건…….”하윤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민혁 씨도 도준 씨 생각해야 하잖아요. 만약 공씨 집안에서 받을 것만 홀랑 빼먹고 저 안 풀어주면 어떻게 할래요? 제가 직접 시도해 보는 게 좋아요.”민혁은 눈앞에 앉아 있는 공미란을 힐끗 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능청스럽게 연기했다.“신호가 안 좋은데, 뭐라고 하셨나요?”그러면서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여보세요? 저 나왔는데 들려요?”“지금은요?”“뭐라고요? 더 널찍한 곳으로 가달라고요?”이윽고 방 안의 사람들은 민혁이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정원으로 나가 완전히 사라지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민혁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공미란 옆에 있던 하인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이더니 상석에 앉아 있는 공미란에게 물었다.“잡아올까요?”전등을 싫어하고 너무 밝은 것도 싫어하는 공미란 때문에 촛불만 피운 방안 광선은 흐릿했다.이에 어둠 아래, 공미란의 얼굴에 나 있는 주름이 그림자가 드리워 움푹 파인 골짜기처럼 느껴졌다.“사람이 내 손에 있는 한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다.”오늘은 더 이상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더니 뿔뿔이 흩어졌다.그때 생강차 한 잔이 공미란 손 옆에 놓여 졌고, 공미란은 한 모금 살짝 마시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누군가 음식을 배달해 왔다.하지만 음식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도 안 된 데다 입맛도 없는 터라 하윤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저 의기수침해서 정원에 앉아 있었다.‘이대로 도준 씨가 와서 구해 주길 기다려야 하나?’해가 지자 낮에는 울긋불긋, 푸릇푸릇하던 꽃과 나무는 그저 칙칙하게 그림자를 바닥에 드리울 뿐이었다.‘이렇게 큰 정원에 왜 가로등도 없어?’으스스한 밤바람이 불자 나뭇가지들이 흔들거렸다.하윤은 발에 난 닭살을 비비며 고개를 돌려 2층짜리 집을 바라봤다가 주위를 둘러봤다.‘이 집은 참 아무리 봐도 너무 무서워.’그러던 그때, 어둠 속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오더니 다음 순간 정원 문 앞에 그림자 하나가 움직였다.하윤은 머리가 곤두섰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설, 설마 귀신?’그림자의 끝에 흰 원피스를 입은 채 흔들림 없는 눈으로 하윤을 바라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저 사람은…….’“고은지 씨?”오랜만에 보는 낯익은 얼굴에 하윤은 말 못할 감정이 밀려왔다.“은지 씨가 어떻게 여기 있어요?”“공태준 씨 덕분이죠.”고은지의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간단했다.하윤은 그제야 태준이 전에 고은지더러 공은채를 대체하여 공씨 집안 둘째 아가씨가 되게 하겠다던 말이 생각났다.그때 태준은 그렇게 되면 누구도 하윤네 가족이 공은채를 해친 걸 탓하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하지만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했다.‘그 누가 대체 누구지?’‘고은지 씨가 지금 여기 나타난 건 무엇 때문이고?’하윤은 고은지를 바라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저는 왜 찾아왔어요?”고은지는 안을 가리키며 안에 들어가 말하자는 듯한 암시를 했다.이 건물은 밖에서 보면 귀신의 집처럼 보이는데 안에 들어오니 그런 느낌이 더 심해졌다.건물 안 곳곳에 고택의 모습이 보였고 특히 붉은 벽은 마치 아래로 흐르는 피 같았다.이에 하윤은 매우 밝은 곳을 찾았다.“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거예요?”고은지는 하윤을 빤히 바라봤다.“하윤
고은지는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공씨 가문에서 민 사장님의 칩을 독점하겠다고 했는데 민 사장님이 거절하지 않았어요.”권하윤은 그 말에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그럴 리가…….”‘그 칩은 단지 이익뿐만 아니라 도준 씨 부모님의 심혈이 담겨 있는 물건인데 그렇게 쉽게 내어주겠다고 하다니?’이윽고 정신을 가다듬은 하윤은 확신하듯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요. 도준 씨는 절대 그런 일을 할 리 없어요.”“공씨 가문에서 민 사장님과 합작을 제안해 왔는데 하윤 씨가 공씨 저택에 갇혀 있으면 공씨 가문은 하윤 씨를 핑계로 원하는 걸 모두 뽑아낼 거예요. 조급하지 않아요?”고은지는 하윤을 빤히 쳐다봤다.“만약 하윤 씨가 동의하면 제가 하윤 씨를 도와 공씨 저택 벗어나게 해드리죠.”이번 일이 도준과 관련되자 하윤은 아까처럼 확신에 찬 말투로 말할 수 없었다.결국 하윤도 그저 이기적인 사람인 거다. 태준보다는 도준이 더 중요하니까.‘하지만 내가 공태준과 친구도 무엇도 아닌데 뭐로 거래하지?’“기한은 딱 2년이면 돼요. 공씨 가문 가주와 2년간만 부부로 지내면 돼요.”언제나 차갑고 흔들림 없던 고은지의 눈동자가 어쩌다가 정서를 내비쳤다.솔직히 말하면 고은지는 고씨 가문을 이용해 민씨 집안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될 수양딸이 된 거다. 그리고 민씨 가문을 이용해 공씨 집안의 아가씨가 된 거고.하지만 고은지는 지금도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방금 공태준과 결혼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 공씨 가문 가주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위로 올라가려는 목적이 뭐지?’고은지는 하윤의 의아함을 눈치챈 듯 입을 열었다.“제 개인적인 문제예요. 그 누구한테도 영향 주지 않을 거예요.”하윤은 그 말을 듣고도 완전히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그러면 왜 직접 공태준과 상의하지 않았어요?”그 물음에 고은지는 약 2초간 머뭇거리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기쁨의 미소가 아니라 속이 텅 비어 있었다.“하윤 씨한테 쉬운
분명 아직 몇 시간이 남았지만 고은지의 말이 끝나자 하윤은 조급해졌다.“남원호가 어디죠? 그 시간에 저택 하인들과 마주치지 않아요?”“저택 곳곳에 하인이 있어요. 그러니까 조심해야 해요.”이윽고 고은지는 하인에게 발각됐을 때 숨을 수 있는 곳 몇 개를 가르쳐주었다.“저 4시 15분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더 늦으면 사람들에게 발각될 수 있어요.”물론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이건 하윤에게 유일한 기회다.이에 하윤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그래요, 알았어요.”고은지를 보내고 나니 하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을 잘 수 없었다.하윤은 자기가 시간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강제로 전원을 꺼둔 핸드폰을 다시 켜 알람을 맞췄다.알람을 맞춘 지 얼마되지도 않아 들리는 진동음에 하윤은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하윤이 갑자기 연락을 끊어서인지 도준의 말투에는 화가 잔뜩 묻어 있었다.“얌전히 있으라고 한 말 잊었어? 내 말 귓등으로 들은 거야?”“아니요. 저 이미 공씨 저택에서 나갈 방법 찾았어요.”하윤의 계획을 들은 도준은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지금 이게 애들 장난처럼 보여? 도망칠 시간이 주어진다고 생각해?”도준의 말에도 하윤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고은지 씨가 이미 준비를 끝냈대요.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어요.”“걱정할 거 없다고? 내가 걱정하지 않게 생겼어?”도준의 화난 말투에 하윤은 익숙한 듯 사과를 건넸다.“잘못했어요. 이번 한 번만 마음대로 하고 다음부터는 꼭 도준 씨 말 들을게요.”도준은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는 하윤의 태도에 이가 근질거렸다.‘진작부터 이럴 줄 알고 있었으면 다리라도 분질러 버리는 건데.’하윤은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 몸서리를 쳤지만 어렵게 다시 회복된 사이가 자기 때문에 다시 금이 갈까 봐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한 번만 시도해 볼 게요. 공씨 집안 사람들은 저를 인질로 삼아야 해서 발견하더라도 저한테 어떻게 못할 거예요. 게다가 도준 씨가 있는데 누
무섭다라…….이건 민도준과 너무 먼 단어다.도준은 태어날 때부터 무서운 게 뭔지 모르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처럼 다른 사람이 무서워하는 것에 오히려 짜릿함을 느껴왔다.딱 한 번만 제외하고…….그건 도준이 무서운 게 뭔지 알게 된 유일한 한번이다.그런 느낌은 너무 괴로웠다. 심지어 모두 헛수고인 걸 알면서도 바보처럼 속아 넘어 간 갔다.그걸 지금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말이다.하윤은 한참 동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삐진 듯 되물었다.“왜 대답 안 해요? 에휴, 역시나, 거리를 둬야 아름다움이 생긴다는 건 다 개 소리네. 아름다움은 무슨, 소홀함만 생기네. 됐어요, 저는 혼자 있을게요.”이윽고 목소리 톤을 바꾸어 가며 불만을 호소했다.분명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도준은 하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 다는 걸 알 수 있었다.순간 수많은 감정이 전화기 너머에서 도준의 마음 속 깊은 곳의 무언가를 끄집어냈다.이윽고 도준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있어.”하윤도 사실은 그저 도준한테 장난치려던 것뿐이었는데 진짜로 있다고 하니 순간 흥미가 돋았다.“정말 있어요? 도준 씨도 무서워하는 게 있다니 신기하네요. 언제였는데요?”‘하윤 씨가 강에 빠진 날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했을 때.’도준의 눈은 살짝 어두워졌다.도준이 바보처럼 결과도 보이지 않는 헛짓거리를 끊임없이 한 건 그때가 처음이다.만분의 1이라는 가능성을 위해 잠도 자지 않고 인력과 물력을 총동원해서 구조 작업을 했었는데.그 결과 하윤은 어떻게 했던가?공태준과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지.‘X발, 차라리 빠져 죽으면 덜 억울하겠네.’하윤은 자기의 질문이 어느새 예전의 일을 들추어 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꼬치꼬치 캐물었다.“얼른 말해요. 어떤 일이었냐니까요? 누구랑 상관 있어요?”순간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연기가 도준의 나른한 톤을 끌어냈다.“아주 양심 없는 사람이 있어. 먹여주고 입혀줬는데 배신한 사람.”“…….”도준의 숨은 뜻
민도준은 약 2 초간 침묵하다가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왜? 공씨 저택에 한번 들어가더니 느끼는 점이 많나 보네?”하윤은 도준과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냥 제가 참 사람 귀찮게 하고 재수 없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 돼서요.”자기 앞에서 머리를 굴리던 하윤이 밖에서 고생을 겪고 나서 오히려 고분고분해지자 도준의 눈에서 약간의 만족감이 새어 나왔다.이에 도준은 소파에 기대 하윤의 요구대로 인테리어 한 집안을 빙 둘러보며 입꼬리를 올렸다.“됐어. 도를 닦는 마음으로 하윤 씨랑 같이 있는 거니까. 그리고 미리 말해 두는데 이미 나한테 화를 입혔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해. 다른 마음 품었다간, 알지?”물론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 한방에 하윤의 마음 속에 있던 부정적인 생각이 말끔히 사라졌다.“누가 딴 생각했다고 그래요? 저는 한평생 도준 씨 하나뿐인데.”이윽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하윤은 또다시 자기 속마음을 슬그머니 내비쳤다.“그럼, 너그러운 도준 씨가 저 좀 용서해 주면 안 돼요? 앞으로 저 무시하지 마요.”도준의 눈에는 순간 흥미가 더해졌다.‘정말 잘해 주기만 하면 기어오른다니까.’“용서하기엔 일러, 하는 거 봐서 결정할게.”“좋아요. 제가 제대로 보여 줄게요…….”한창 말하고 있을 때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확인해보니 핸드폰 베터리가 20퍼센트 밖에 남지 않는다는 알람이었다.“아, 통화는 이만 해요. 저 핸드폰 배터리 다 나갔어요. 여기서 나가면 다시 연락할 게요.”다급하게 전화를 끈 하윤은 헐레벌떡 핸드폰을 저전력 모드로 설정해 두었다.그날 새벽 12시.분명 아까도 불안했지만 도준과 예기를 나눠서 그런지 편안해지면서 잠이 솔솔 몰려왔다.이에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창 밖의 어둠은 마치 정체된 것처럼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그러던 그때, 하윤의 고개가 갑자기 아래로 푹 떨어지더니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내가 어쩌다 잠들었지?’바로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아직
권하윤에게 남은 고민의 시간은 많지 않았다.이에 하윤은 이를 악물었다.‘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수는 없어. 왕복하면서 위험에 노출되는 것보다 한번 질러봐야겠어.’결심이 선 하윤은 허리를 숙이고 어둠 속에 숨어 발소리를 죽인 채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그랬더니 방금 봤던 인영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하지만 인영이 사라지자 눈앞에 보일 때보다 더 두려웠다.돌길 끝에는 아치형 문이 하나 있는데 그 곳이 바로 바람구멍이다.그래서인지 그 곳에 가까워질수록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불어 들기 시작했다.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또 한편으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는지 확인해야 했기에 하윤은 어느 때보다 더 긴장했다. 심지어 바람에 움직이는 나무 그림자를 보고도 흠칫 놀랐다.뜨거운 땀방울이 차가운 밤 바람 때문에 식어버린 채 등에 들러붙자 하윤은 몸이 오싹해 나 시작했다.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은 크지 않은 방이었는데 고은지 말로는 이 방은 오랫동안 버려져 아무도 들어오지 않기에 잠시 숨어 있어도 된다고 했다.하지만 하윤이 문 쪽으로 걸어 가자마자 돌길에 갑자기 인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하윤은 얼른 문을 당겼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잠겨 있었으니까.아까 흘렸던 땀이 겨우 반쯤 마를까 했는데 또다시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런데 하윤이 곰곰이 생각하기도 전에 세 명의 하인이 이미 돌길을 걸어오고 있었다.세 사람이 조금만 앞으로 걸어와도 하윤을 발견할 수 있는 긴박한 상황.하윤은 입술을 깨물며 진정하려고 애썼다.그러면서 소리 없이 방 옆쪽으로 돌아 가 벽 뒤에 몸을 숨겼다.하지만 이건 그저 잠시뿐인 안정이었다. 세 사람이 여기까지 걸어오면 발각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때문에 하윤은 세 사람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들이 자기 앞에 도착할 무렵 슬그머니 방문 뒤에 몸을 숨겨 세 사람의 시선을 피해 다른 쪽에 몸을 숨겼다.세 사람이 가까이에 다가오자 하윤은 심지어 그들이 손에 들고 온 과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조금씩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하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