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아직 몇 시간이 남았지만 고은지의 말이 끝나자 하윤은 조급해졌다.“남원호가 어디죠? 그 시간에 저택 하인들과 마주치지 않아요?”“저택 곳곳에 하인이 있어요. 그러니까 조심해야 해요.”이윽고 고은지는 하인에게 발각됐을 때 숨을 수 있는 곳 몇 개를 가르쳐주었다.“저 4시 15분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더 늦으면 사람들에게 발각될 수 있어요.”물론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이건 하윤에게 유일한 기회다.이에 하윤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그래요, 알았어요.”고은지를 보내고 나니 하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을 잘 수 없었다.하윤은 자기가 시간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강제로 전원을 꺼둔 핸드폰을 다시 켜 알람을 맞췄다.알람을 맞춘 지 얼마되지도 않아 들리는 진동음에 하윤은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하윤이 갑자기 연락을 끊어서인지 도준의 말투에는 화가 잔뜩 묻어 있었다.“얌전히 있으라고 한 말 잊었어? 내 말 귓등으로 들은 거야?”“아니요. 저 이미 공씨 저택에서 나갈 방법 찾았어요.”하윤의 계획을 들은 도준은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지금 이게 애들 장난처럼 보여? 도망칠 시간이 주어진다고 생각해?”도준의 말에도 하윤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고은지 씨가 이미 준비를 끝냈대요.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어요.”“걱정할 거 없다고? 내가 걱정하지 않게 생겼어?”도준의 화난 말투에 하윤은 익숙한 듯 사과를 건넸다.“잘못했어요. 이번 한 번만 마음대로 하고 다음부터는 꼭 도준 씨 말 들을게요.”도준은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는 하윤의 태도에 이가 근질거렸다.‘진작부터 이럴 줄 알고 있었으면 다리라도 분질러 버리는 건데.’하윤은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 몸서리를 쳤지만 어렵게 다시 회복된 사이가 자기 때문에 다시 금이 갈까 봐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한 번만 시도해 볼 게요. 공씨 집안 사람들은 저를 인질로 삼아야 해서 발견하더라도 저한테 어떻게 못할 거예요. 게다가 도준 씨가 있는데 누
무섭다라…….이건 민도준과 너무 먼 단어다.도준은 태어날 때부터 무서운 게 뭔지 모르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처럼 다른 사람이 무서워하는 것에 오히려 짜릿함을 느껴왔다.딱 한 번만 제외하고…….그건 도준이 무서운 게 뭔지 알게 된 유일한 한번이다.그런 느낌은 너무 괴로웠다. 심지어 모두 헛수고인 걸 알면서도 바보처럼 속아 넘어 간 갔다.그걸 지금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말이다.하윤은 한참 동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삐진 듯 되물었다.“왜 대답 안 해요? 에휴, 역시나, 거리를 둬야 아름다움이 생긴다는 건 다 개 소리네. 아름다움은 무슨, 소홀함만 생기네. 됐어요, 저는 혼자 있을게요.”이윽고 목소리 톤을 바꾸어 가며 불만을 호소했다.분명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도준은 하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 다는 걸 알 수 있었다.순간 수많은 감정이 전화기 너머에서 도준의 마음 속 깊은 곳의 무언가를 끄집어냈다.이윽고 도준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있어.”하윤도 사실은 그저 도준한테 장난치려던 것뿐이었는데 진짜로 있다고 하니 순간 흥미가 돋았다.“정말 있어요? 도준 씨도 무서워하는 게 있다니 신기하네요. 언제였는데요?”‘하윤 씨가 강에 빠진 날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했을 때.’도준의 눈은 살짝 어두워졌다.도준이 바보처럼 결과도 보이지 않는 헛짓거리를 끊임없이 한 건 그때가 처음이다.만분의 1이라는 가능성을 위해 잠도 자지 않고 인력과 물력을 총동원해서 구조 작업을 했었는데.그 결과 하윤은 어떻게 했던가?공태준과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지.‘X발, 차라리 빠져 죽으면 덜 억울하겠네.’하윤은 자기의 질문이 어느새 예전의 일을 들추어 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꼬치꼬치 캐물었다.“얼른 말해요. 어떤 일이었냐니까요? 누구랑 상관 있어요?”순간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연기가 도준의 나른한 톤을 끌어냈다.“아주 양심 없는 사람이 있어. 먹여주고 입혀줬는데 배신한 사람.”“…….”도준의 숨은 뜻
민도준은 약 2 초간 침묵하다가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왜? 공씨 저택에 한번 들어가더니 느끼는 점이 많나 보네?”하윤은 도준과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냥 제가 참 사람 귀찮게 하고 재수 없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 돼서요.”자기 앞에서 머리를 굴리던 하윤이 밖에서 고생을 겪고 나서 오히려 고분고분해지자 도준의 눈에서 약간의 만족감이 새어 나왔다.이에 도준은 소파에 기대 하윤의 요구대로 인테리어 한 집안을 빙 둘러보며 입꼬리를 올렸다.“됐어. 도를 닦는 마음으로 하윤 씨랑 같이 있는 거니까. 그리고 미리 말해 두는데 이미 나한테 화를 입혔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해. 다른 마음 품었다간, 알지?”물론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 한방에 하윤의 마음 속에 있던 부정적인 생각이 말끔히 사라졌다.“누가 딴 생각했다고 그래요? 저는 한평생 도준 씨 하나뿐인데.”이윽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하윤은 또다시 자기 속마음을 슬그머니 내비쳤다.“그럼, 너그러운 도준 씨가 저 좀 용서해 주면 안 돼요? 앞으로 저 무시하지 마요.”도준의 눈에는 순간 흥미가 더해졌다.‘정말 잘해 주기만 하면 기어오른다니까.’“용서하기엔 일러, 하는 거 봐서 결정할게.”“좋아요. 제가 제대로 보여 줄게요…….”한창 말하고 있을 때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확인해보니 핸드폰 베터리가 20퍼센트 밖에 남지 않는다는 알람이었다.“아, 통화는 이만 해요. 저 핸드폰 배터리 다 나갔어요. 여기서 나가면 다시 연락할 게요.”다급하게 전화를 끈 하윤은 헐레벌떡 핸드폰을 저전력 모드로 설정해 두었다.그날 새벽 12시.분명 아까도 불안했지만 도준과 예기를 나눠서 그런지 편안해지면서 잠이 솔솔 몰려왔다.이에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창 밖의 어둠은 마치 정체된 것처럼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그러던 그때, 하윤의 고개가 갑자기 아래로 푹 떨어지더니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내가 어쩌다 잠들었지?’바로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아직
권하윤에게 남은 고민의 시간은 많지 않았다.이에 하윤은 이를 악물었다.‘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수는 없어. 왕복하면서 위험에 노출되는 것보다 한번 질러봐야겠어.’결심이 선 하윤은 허리를 숙이고 어둠 속에 숨어 발소리를 죽인 채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그랬더니 방금 봤던 인영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하지만 인영이 사라지자 눈앞에 보일 때보다 더 두려웠다.돌길 끝에는 아치형 문이 하나 있는데 그 곳이 바로 바람구멍이다.그래서인지 그 곳에 가까워질수록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불어 들기 시작했다.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또 한편으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는지 확인해야 했기에 하윤은 어느 때보다 더 긴장했다. 심지어 바람에 움직이는 나무 그림자를 보고도 흠칫 놀랐다.뜨거운 땀방울이 차가운 밤 바람 때문에 식어버린 채 등에 들러붙자 하윤은 몸이 오싹해 나 시작했다.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은 크지 않은 방이었는데 고은지 말로는 이 방은 오랫동안 버려져 아무도 들어오지 않기에 잠시 숨어 있어도 된다고 했다.하지만 하윤이 문 쪽으로 걸어 가자마자 돌길에 갑자기 인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하윤은 얼른 문을 당겼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잠겨 있었으니까.아까 흘렸던 땀이 겨우 반쯤 마를까 했는데 또다시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런데 하윤이 곰곰이 생각하기도 전에 세 명의 하인이 이미 돌길을 걸어오고 있었다.세 사람이 조금만 앞으로 걸어와도 하윤을 발견할 수 있는 긴박한 상황.하윤은 입술을 깨물며 진정하려고 애썼다.그러면서 소리 없이 방 옆쪽으로 돌아 가 벽 뒤에 몸을 숨겼다.하지만 이건 그저 잠시뿐인 안정이었다. 세 사람이 여기까지 걸어오면 발각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때문에 하윤은 세 사람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들이 자기 앞에 도착할 무렵 슬그머니 방문 뒤에 몸을 숨겨 세 사람의 시선을 피해 다른 쪽에 몸을 숨겼다.세 사람이 가까이에 다가오자 하윤은 심지어 그들이 손에 들고 온 과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조금씩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하윤
잇따른 계획은 순조로웠다. 고은지는 권하윤을 데리고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공은채 씨 생일이면 새명 12시부터 5시 사이 장의사를 불러 제사상을 준비하거든요. 이 사람들은 모두 제가 밖에서 모셔온 분들이니 이따가 이분들 나가실 때 같이 나가요.”5시까지 20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각.하윤은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검은 옷차림의 일행을 바라보며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어쩐지 고은지가 걱정되었다.“그런데 은지 씨가 저 풀어주면 벌받지 않나요?”“아주 비참할 거예요.”“!”고은지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하윤의 표정을 보자 도준이 왜 하윤을 놀리기 좋아하는 지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확실히 재밌으니까.하윤의 얼굴에 자괴감이 더해지자 고은지는 처음으로 긴 말을 늘어놓았다.“마침 공태준 씨랑 함께 벌받을 수 있어서 괜찮아요. 공태준 씨가 하고 싶었던 일을 대신해줬으니 저한테 고마워할 테고. 제가 공태준 씨랑 결혼할 수 있을지는 윤이 씨가 도와줄 수 있지만 그 혼인 관계를 2년 동안 유지할 수 있는지는 저한테 달렸잖아요.”그 말을 들은 하윤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그래요, 그럼 조심해요.”고은지가 떠나기 전 하윤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끝내 물었다.“공태준이 정말 벌을 받나요? 공씨 가문 가주잖아요.”고은지는 고개를 들어 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보며 조소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가주가 뭐라고. 공씨 가문이라는 새장 속에서 누구도 사람 답게 살 수 없어요.”“…….”고은지가 떠나는 걸 눈으로 배웅하던 하윤은 점점 어둠 속에 사라지는 고은지의 모습이 더움에 삼켜지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참 수수께끼 같은 여자야…….’“이봐요, 저희 갈 시간이에요.”정신을 차리자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길에서 간단한 대화를 나눈 덕에 하윤은 리더를 다들 매화 언니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제사에 신경을 쓰는 집안이라면 보통 제사 당일 혹은 정월 대보름과
지척에 있는 대문을 보자 권하윤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하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눈에 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경비원만 해도 4명인 데다 방 안에서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까지 포함하면 하윤이 혼자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하윤이 한창 고심하고 있을 때 한참 동안 조용하던 전화에서 진동이 울렸다.문자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하루 종일 사라졌던 던이었다.[던: 실례합니다만 혹시 살아 있나요?]하윤은 화가 나다 못해 눈이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살아 있냐고?’‘살아있어도 당신 때문에 화병 나 죽겠어!’하윤은 잔뜩 화가 난 채로 액정을 힘껏 두드렸다.[살아 있어요! 그런데 곧 죽게 생겼네요.][던: 제 목숨이 위협받지 않는 선에서 무얼 도와줄 수 있을까요?]하윤은 필요 없다고 확 질러버릴까 하다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대문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다.‘이대로 기다리는 건 방법이 아니야. 밖에 나가서 던 씨 도움을 받는 게 더 희망 있어.’그때 하윤의 눈이 종이돈과 촛불을 넣은 상자에 멈춰 서더니 갑자기 대담한 수가 떠올랐다.5시 반.아침 교대 경비원이 방에 들어가 교대하는 사이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불이야! 불이야!”경비원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한 쌍의 남녀가 불 난 상자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불을 보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피하기 마련이다.때문에 경비원은 뒤로 물러나면서 소리질렀다.“거기 두 사람! 어디 가는 겁니까?”그때 하윤이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그거 당장 밖에 버려요. 안에 종이라서 불길이 집에까지 번지면 큰일 나요.”그 말을 듣자 경비원은 더 이상 두 사람을 막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화재 사고라도 발생하면 그들 모두 끝이니까.“버리고 당장 돌아오세요!”대문을 나선 하윤은 주위를 빙 둘러봤다.흰색 차 한 대가 문에 가로 막힌 채 약 100미터 정도 되는 곳에 세워 있었다.이에 하윤은 상자를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빛을 보내더니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앗 뜨거
기사 아저씨의 운전 솜씨 덕에 차 두 대는 이미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하지만 공씨 집안 경비원들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기에 남은 차 두 대는 하윤이 탄 차를 바싹 뒤따라 따돌리기 쉽지 않았다.하윤은 차창을 통해 뒤를 확인할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그러던 그때, 뒤따르던 차가 속도를 살짝 줄여 거리를 두는가 싶더니 이내 쏜살같이 달려왔다.상대가 무얼 하려는 지 눈치챈 하윤은 놀란 듯 소리쳤다.“조심해요!”기사 아저씨도 눈치챈 듯했으나 이미 늦었다.속도가 너무 빠른 상태라 이대로 부딪히면 차가 뒤집어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윤을 잡아가야 한다는 게 바로 경비원들의 목적이었다.하윤은 그저 한 장의 카드에 불과하기에 죽지만 않으면 그 효력은 여전하니까.너무 빠른 속도 때문에 엔진에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차가 부딪히려는 순간, 하윤은 손잡이를 꼭 잡은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하지만 예상했던 무중력 감은 느껴지지 않았다.“쾅!”이윽고 굉음이 울렸다.하윤은 커다란 소리에 흠칫 놀랐고 기사 아저씨도 놀라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어리둥절해서 눈을 천천히 뜬 하윤은 십자가에서 하윤이 탄 차를 들이 받으려 하던 차가 처참한 상태로 뒤집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그리고 그 옆에는 이미 폐차 수순을 밟아야 할 낯선 지프가 서 있었다.‘저건…….’시선 속에 들어온 지프차의 변형된 차 문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가더니 안에서 잔뜩 눈살을 찌푸린 남자가 언짢은 듯 손부채질 하면서 안에서 걸어 나왔다.이윽고 남자는 완전히 뒤집어진 차에서 애써 기어 나오는 경비원 옆으로 걸어가더니 경비원의 손을 그대로 밟아 버렸다.“아!”비명 소리와 함께 경비원의 머리채가 잡힌 채 목이 뒤로 꺾였다.두피가 찢겨 나갈 듯한 고통에 남자는 반강제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다음 순간 잔인하게 웃는 악마 같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뒤를 쫓으려면 쫓기만 하면 될 것이지 목숨 갖고 장난쳐?”경비원이 대답하기도
따져 묻는 공아름을 민도준은 가볍게 무시한 채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반쯤 끌어안은 권하윤을 데리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내 차는 망가져서 못 써. 하윤 씨 차 타자.”도준의 말에 하윤은 슬쩍 공아름의 표정을 살폈다. 그랬더니 독을 품은 듯한 한 서린 눈은 마치 하윤을 갈기갈기 찢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놀란 하윤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하지만 다음 순간 도준이 하윤의 턱을 잡은 채 고개를 돌리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어디를 함부로 봐? 밤에 악몽이라도 꾸면 어쩌려고?”안 그래도 하윤은 공아름의 얼굴을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는데 목 뒤에서 자꾸만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더 볼 수 없었다.도준에게 의해 차 안으로 들어가기 바쁘게 뒤에서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어디 가려고 그래요?”공아름은 차에 오르려는 도준의 손을 잡아 끌었고 도준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듯 그 손을 뿌리쳤다.“죽고 싶어 환장했어?”공아름은 도준이 자기를 뿌리쳤다는 게 믿기지 않는 것처럼 도준을 빤히 바라봤다.“저는 도준 씨 도와주려고 온 거예요. 그런데 왜 저랑 말도 안 섞어요?”공아름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우리 집안 사람들이 도준 씨 노리고 있는데 지금 해원 오면 위험해서 도와주려고 한 것뿐이라고요.”차 안에서 그걸 듣는 하윤의 가슴은 쪼그라들었다.도준처럼 눈에 띄는 사람이 모든 사람이 노리고 있는 지금 해원에 왔다는 건 살아있는 표적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다.한 순간이라도 이 곳에 더 있는다면 위험이 그만큼 더 커진다.차창 밖.도준은 공아름의 말에 상냥한 입꼬리를 올리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나를 도와주겠다고?”공아름은 고개를 들며 꿋꿋한 모습을 보였다.“맞아요.”공씨 가문에서 태어난 공아름은 해원에서 원하는 걸 다 얻을 수 있다고 자부하기에 이 순간 도준의 도움이 될 거라고 자신했다.‘적어도 사사건건 도준 씨의 발을 잡는 저 천한 X 보다야 내가 100배 낫지.’“도와주겠다라…….”도준은 부러 말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