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척에 있는 대문을 보자 권하윤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하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눈에 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경비원만 해도 4명인 데다 방 안에서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까지 포함하면 하윤이 혼자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하윤이 한창 고심하고 있을 때 한참 동안 조용하던 전화에서 진동이 울렸다.문자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하루 종일 사라졌던 던이었다.[던: 실례합니다만 혹시 살아 있나요?]하윤은 화가 나다 못해 눈이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살아 있냐고?’‘살아있어도 당신 때문에 화병 나 죽겠어!’하윤은 잔뜩 화가 난 채로 액정을 힘껏 두드렸다.[살아 있어요! 그런데 곧 죽게 생겼네요.][던: 제 목숨이 위협받지 않는 선에서 무얼 도와줄 수 있을까요?]하윤은 필요 없다고 확 질러버릴까 하다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대문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다.‘이대로 기다리는 건 방법이 아니야. 밖에 나가서 던 씨 도움을 받는 게 더 희망 있어.’그때 하윤의 눈이 종이돈과 촛불을 넣은 상자에 멈춰 서더니 갑자기 대담한 수가 떠올랐다.5시 반.아침 교대 경비원이 방에 들어가 교대하는 사이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불이야! 불이야!”경비원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한 쌍의 남녀가 불 난 상자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불을 보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피하기 마련이다.때문에 경비원은 뒤로 물러나면서 소리질렀다.“거기 두 사람! 어디 가는 겁니까?”그때 하윤이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그거 당장 밖에 버려요. 안에 종이라서 불길이 집에까지 번지면 큰일 나요.”그 말을 듣자 경비원은 더 이상 두 사람을 막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화재 사고라도 발생하면 그들 모두 끝이니까.“버리고 당장 돌아오세요!”대문을 나선 하윤은 주위를 빙 둘러봤다.흰색 차 한 대가 문에 가로 막힌 채 약 100미터 정도 되는 곳에 세워 있었다.이에 하윤은 상자를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빛을 보내더니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앗 뜨거
기사 아저씨의 운전 솜씨 덕에 차 두 대는 이미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하지만 공씨 집안 경비원들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기에 남은 차 두 대는 하윤이 탄 차를 바싹 뒤따라 따돌리기 쉽지 않았다.하윤은 차창을 통해 뒤를 확인할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그러던 그때, 뒤따르던 차가 속도를 살짝 줄여 거리를 두는가 싶더니 이내 쏜살같이 달려왔다.상대가 무얼 하려는 지 눈치챈 하윤은 놀란 듯 소리쳤다.“조심해요!”기사 아저씨도 눈치챈 듯했으나 이미 늦었다.속도가 너무 빠른 상태라 이대로 부딪히면 차가 뒤집어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윤을 잡아가야 한다는 게 바로 경비원들의 목적이었다.하윤은 그저 한 장의 카드에 불과하기에 죽지만 않으면 그 효력은 여전하니까.너무 빠른 속도 때문에 엔진에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차가 부딪히려는 순간, 하윤은 손잡이를 꼭 잡은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하지만 예상했던 무중력 감은 느껴지지 않았다.“쾅!”이윽고 굉음이 울렸다.하윤은 커다란 소리에 흠칫 놀랐고 기사 아저씨도 놀라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어리둥절해서 눈을 천천히 뜬 하윤은 십자가에서 하윤이 탄 차를 들이 받으려 하던 차가 처참한 상태로 뒤집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그리고 그 옆에는 이미 폐차 수순을 밟아야 할 낯선 지프가 서 있었다.‘저건…….’시선 속에 들어온 지프차의 변형된 차 문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가더니 안에서 잔뜩 눈살을 찌푸린 남자가 언짢은 듯 손부채질 하면서 안에서 걸어 나왔다.이윽고 남자는 완전히 뒤집어진 차에서 애써 기어 나오는 경비원 옆으로 걸어가더니 경비원의 손을 그대로 밟아 버렸다.“아!”비명 소리와 함께 경비원의 머리채가 잡힌 채 목이 뒤로 꺾였다.두피가 찢겨 나갈 듯한 고통에 남자는 반강제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다음 순간 잔인하게 웃는 악마 같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뒤를 쫓으려면 쫓기만 하면 될 것이지 목숨 갖고 장난쳐?”경비원이 대답하기도
따져 묻는 공아름을 민도준은 가볍게 무시한 채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반쯤 끌어안은 권하윤을 데리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내 차는 망가져서 못 써. 하윤 씨 차 타자.”도준의 말에 하윤은 슬쩍 공아름의 표정을 살폈다. 그랬더니 독을 품은 듯한 한 서린 눈은 마치 하윤을 갈기갈기 찢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놀란 하윤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하지만 다음 순간 도준이 하윤의 턱을 잡은 채 고개를 돌리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어디를 함부로 봐? 밤에 악몽이라도 꾸면 어쩌려고?”안 그래도 하윤은 공아름의 얼굴을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는데 목 뒤에서 자꾸만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더 볼 수 없었다.도준에게 의해 차 안으로 들어가기 바쁘게 뒤에서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어디 가려고 그래요?”공아름은 차에 오르려는 도준의 손을 잡아 끌었고 도준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듯 그 손을 뿌리쳤다.“죽고 싶어 환장했어?”공아름은 도준이 자기를 뿌리쳤다는 게 믿기지 않는 것처럼 도준을 빤히 바라봤다.“저는 도준 씨 도와주려고 온 거예요. 그런데 왜 저랑 말도 안 섞어요?”공아름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우리 집안 사람들이 도준 씨 노리고 있는데 지금 해원 오면 위험해서 도와주려고 한 것뿐이라고요.”차 안에서 그걸 듣는 하윤의 가슴은 쪼그라들었다.도준처럼 눈에 띄는 사람이 모든 사람이 노리고 있는 지금 해원에 왔다는 건 살아있는 표적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다.한 순간이라도 이 곳에 더 있는다면 위험이 그만큼 더 커진다.차창 밖.도준은 공아름의 말에 상냥한 입꼬리를 올리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나를 도와주겠다고?”공아름은 고개를 들며 꿋꿋한 모습을 보였다.“맞아요.”공씨 가문에서 태어난 공아름은 해원에서 원하는 걸 다 얻을 수 있다고 자부하기에 이 순간 도준의 도움이 될 거라고 자신했다.‘적어도 사사건건 도준 씨의 발을 잡는 저 천한 X 보다야 내가 100배 낫지.’“도와주겠다라…….”도준은 부러 말꼬
권하윤은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내질러 버리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전에도 할 말 안 할 말 안 가려서 사이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겨우 다시 나아지려고 하는데 또 말을 함부로 하면 어떡해?’잘못을 인지한 하윤은 도준이 말하기도 전에 바로 사과했다.“죄송해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하윤은 애써 자기 잘못을 돌이키려고 했지만 말을 내뱉는 순간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도준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먹처럼 검은 눈동자로 하윤을 바라봤다.“그런 뜻이 아니면? 아주 잘만 말하네. 방금 뭐라고 그랬어? 죽든 살든 상관하지 말라고 했지? 간단하네. 기사님, 차 세워주세요.”기사 아저씨는 도준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카리스마 있는 명령구에 대뇌가 저절로 반응하여 브레이크를 밟아버렸다.도준이 진짜로 떠나려 하자 하윤은 당황한 듯 도준의 팔을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가지 말아요. 일부러 그런 말 한 거 아니에요. 저도…… 그냥 놀라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요. 도준 씨가 밤을 새우며 저 구하러 와줬는데 제가…….”‘표적이 될 줄 알면서 나 구해주겠다고 온 사람한테 내가 뭐라고 한 거야? 도준 씨가 왔으니 이제 공씨 집안 사람들은 나를 더 잡지 못해 안달일 텐데…….’미안함이 몰려오자 하윤은 다급히 횡설수설 설명했다.“도준 씨가 저 생각하는 거 알아요. 저 그런 말 하면 안 됐어요.”도준은 팔을 잡아당겨 빼려고 했지만 하윤은 마치 샴쌍둥이처럼 도준에게 꼭 붙어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기사 아저씨한테 도움을 청하기까지 했다.“아저씨 빠리 운전해 주세요. 이 사람 도망가지 못하게.”기사 아저씨는 백미러로 뒤쪽 상황을 슬쩍 살펴봤다. 키와 덩치 여자의 두배 가까이 되는 남자가 여자의 팔에 꼭 붙들린 채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본 기사 아저씨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이거 처자가 저 총각 붙잡아 두는 거 맞아? 그 반대 아니고?’‘게다가 가려면 그 작은 체구로 막지 못할 것 같은데.’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서로 원하
며칠 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다시 만나서인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더욱 끈적했다.기사 아저씨는 눈치껏 차를 호텔로 돌렸고 하윤은 차에서 내려서부터 도준에게 안긴 채 한시도 발을 바닥에 붙이지 않았다.다행히 이른 시간이라 호텔에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엘리베이터 거울에 진득하게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반사되었고 위로 올라가는 작은 공간이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를 가두었다.“쾅.”도준은 호텔 방문을 열기 바쁘게 하윤을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눈 깜짝할 사이에 문에 밀쳐진 하윤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발견하자 마자 애써 정신을 되찾았다.“잠. 잠깐만요. 샤…… 샤워…….”도준은 하윤의 가슴에 찰싹 붙은 채 나지막하게 웃었고 미세하게 전해지는 떨림이 하윤의 심장을 매혹했다.“난 하윤 씨 더럽다고 생각 안 하는데.”하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맥없이 도준의 가슴을 내리쳤다.“제가 싫어요. 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이 땅에서 붕 뜨더니 코알라 자세로 도준에게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하윤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뭐 하는 거예요?”“더러운 거 싫다며? 샤워하는 거 지켜봐야 하지 않겠어? 내가 밑지는 기분이지만 보게는 해줄게.”“…….”욕실 속에서 물소리가 낮은 신음과 밭은 숨소리에 뒤덮이는가 싶더니 짙은 물안개가 욕실 안을 뒤덮었다.하룻밤의 스릴 넘치는 탈출의 긴장함은 이 순간 모두 사라져 버렸다.반나절이 지난 뒤.오후 2시, 따뜻한 햇빛이 바닥에 떨어져 대에 닿을 락 말 락 했다.이불 밑에서 하윤은 베개 위에 얼굴을 파묻은 채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욕실에서 나온 뒤 도준은 마치 정신이 맑아진 것처럼 손을 들어 하윤의 어깨를 꾹 눌렀다.“일어나, 밥 먹자.”한바탕 전쟁 같은 정사를 치르고 나자 하윤은 말투마저 변했다.“바닥 내려갈 힘 없어요, 안 먹을래요.”도준은 손가락으로 하윤의 얼굴을 살짝 튕겼다.“왜? 잠 자고 나니까 이제 또 심술이 도졌어?”이에 하윤이 화가 난 듯 투덜거렸다.
민도준은 권하윤의 말에 곧바로 동의하는 태도를 보였다.“그래, 아까 어디까지 말했더라? 나 보고 싶었다고 했지? 그냥 생각만 했어? 나 생각하면서 혼자 뭐 한 거 없어?”하윤은 약 2초 간 멍해 있다가 그제야 도준의 뜻을 이해하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제가 말한 보고 싶다는 순…… 순수한 뜻이었다고요!”“그래?”도준은 말꼬리를 길게 끌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하윤의 귀에 대고 입이 닿을 락 말 락하게 말했다.심지어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난 또 혼자 외로움이라도 달랬나 생각했지.”하윤은 귀가 간지러워 도준의 괴롭힘을 살짝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그러는 도준 씨는요? 저 안 보고 싶었어요?”“보고 싶었지.”가벼운 대답에 하윤의 입꼬리는 날아갈 것처럼 올라갔다.“하지만 내가 생각한 건 순수한 게 아니야. 예를 들면 하윤 씨가 내 아래에서…….”야릇한 말에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하윤은 손을 들어 도준의 입을 막았다.“그만 말해요.”하지만 도준은 하윤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하윤 씨가 물어본 거면서 이제는 듣기 싫어? 자기야, 사람이 이렇게 쉽게 변하면 어떡해?”하윤은 귀를 막으며 버럭 소리쳤다.“저 배고파요. 밥 먹을래요.”호텔에서 묵는 건 역시 편리했다. 전화 한 통에 바로 음식이 배달되니 말이다.종업원은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바로 자리를 떴다.음식의 향긋한 냄새에 거의 등에 붙을 지경인 하윤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하지만 하윤은 도준을 먼저 챙겨야 했다.“도준 씨 먹어 봐요. 여기 군만두가 특히 맛있어요.”도준은 배고파 하는 하윤의 모습에 음식 하나를 집어 하윤의 접시에 담아 주었다.“자, 먹어. 침이 그릇에 떨어지겠어.”확실히 오랫동안 굶어 배가 고팠던 하윤은 너무 급하게 먹은 탓에 이내 배가 불렀다.이윽고 하윤은 도준에게 국을 담아 주며 음식을 권하기 시작했다.“도준 씨, 이거 한번 먹어 봐요. 제가 어릴 때부터 먹던 거예요.”하윤
잔득 찔린 듯한 권하윤의 표정에서 민도준은 이미 답을 알아차리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역시 조금도 발전이 없어.’‘어떻게 이렇게 사람 마음을 홀리는 얼굴로 이토록 양심 없는 짓만 골라 하지?’도준이 밀어내자 하윤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혔고 멍한 표정으로 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바라봤다.한참 차이 나는 키때문에 두 사람의 거리가 한층 더 멀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무형의 압박감이 하윤의 모든 행동을 제약했다.“도준 씨…….”“옷 갈아 입어.”하윤은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갈아 입을 게요.”그러다가 뒤늦게야 뭔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다시 들었다.“우리 어디 나가요?”도준은 하윤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그 사이 하윤은 옷을 갈아 입으며 문밖의 동태를 살피더니 최단 시간 내로 대충하고 밖에 나왔다. 그러고는 도준이 아직 가지 않은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모기 목소리로 말했다.“저 옷 다 갈아 입었어요.”도준은 담배를 눌러 끄며 긴 다리로 성큼성큼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하윤은 그런 그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거의 달리다시피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한민혁이 어느새 새로운 지프차를 밖에 준비해 두었다.도준이 차 옆에 도착하자 하윤은 은근슬쩍 문을 열어 주었다.“도준 씨, 머리 조심해요.”도준이 와서 그런지 하윤은 여느 때보다 더 예쁘게 화장한 모양이다.립스틱 색은 하윤의 새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민트 색 치마는 하윤의 잘록한 허리를 더 가늘게 잡아 주었으며 급히 터널을 돈 차 때문에 치마가 옆으로 비뚤어지며 아름다운 라인을 그대로 드러냈다.하윤은 최선을 다 해 도준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도준이 운전석에 앉자마자 조수석에 올라탔다.하지만 차에 올라타려고 하던 그때, 손목이 덥석 잡혔다.“저는 그저 안전 벨트를 매주려고 한 것뿐이에요.”팔목에서 느껴지는 힘에 팔이 으스러지는 건 아닌가 생각하던 그때,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하윤은 어안이 벙
권하윤은 김종서의 입을 당장이라도 틀어막고 싶은 심정으로 뒤쪽을 힐끔거렸다.“뭐, 그냥 그렇죠. 너무 내외하지 마요.”하지만 하윤의 그런 상황을 알 리 없는 김종서는 오히려 더 아첨을 떨었다.“그게 어떻게 그냥 그런 정도야? 던 대표님이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우리가 다 봤는데. 나중에 네가 해운 회사 사모님이 되면 우리 잊지 마…….”거침없이 아부의 말을 늘어 놓던 김종서는 차에서 내린 남자를 보는 순간 하려던 말을 목구멍으로 삼킨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뭐지? 왜 낯선 것 같지?’‘아무리 사람 얼굴 잘 구분 못해도 색맹 까지는 아닐 텐데. 전에 봤을 때는 청회색 눈동자였는데 왜 검은 색으로 변했지?’‘아니야, 머리도 곱슬이 아니잖아…….’김종서는 아무리 스스로 세뇌를 해 봐도 도준과 던을 같은 사람으로 연상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창 엉뚱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도준이 김종서의 앞에 나타났다.이미 사회생활을 하며 익혀 온 경험과 눈썰미로 김종서는 눈앞의 남자가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이토록 건방진 태도는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으니까.김종서가 도준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하윤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입을 열었다.“오빠, 왜 내렸어요?”갑작스러운 호칭에 도준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입안에서 굴렸다.“오빠?”하윤은 도준의 표정을 감히 직시할 수 없어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말을 덧붙였다.“여긴 내 사촌 오빠예요.”하윤이 이렇게 소개하는 건 사실 방법이 없어서였다. 전에 그렇게 떠들썩하게 던을 남자 친구라고 소개했는데 갑자기 남자 친구가 바뀌었다고 하면 의심을 살 게 뻔했으니까.게다가 앞으로 던의 신분으로 할 일도 있기에 이렇게 말하는 게 최선이었다.도준이 사촌 오빠라는 소리에 김종서의 표정은 아까보다 많이 편해지더니 얼른 자기의 명함을 꺼내 건넸다.“시윤한테 이런 오빠가 있을 줄 몰랐네요. 저는 김종서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