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내질러 버리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전에도 할 말 안 할 말 안 가려서 사이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겨우 다시 나아지려고 하는데 또 말을 함부로 하면 어떡해?’잘못을 인지한 하윤은 도준이 말하기도 전에 바로 사과했다.“죄송해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하윤은 애써 자기 잘못을 돌이키려고 했지만 말을 내뱉는 순간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도준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먹처럼 검은 눈동자로 하윤을 바라봤다.“그런 뜻이 아니면? 아주 잘만 말하네. 방금 뭐라고 그랬어? 죽든 살든 상관하지 말라고 했지? 간단하네. 기사님, 차 세워주세요.”기사 아저씨는 도준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카리스마 있는 명령구에 대뇌가 저절로 반응하여 브레이크를 밟아버렸다.도준이 진짜로 떠나려 하자 하윤은 당황한 듯 도준의 팔을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가지 말아요. 일부러 그런 말 한 거 아니에요. 저도…… 그냥 놀라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요. 도준 씨가 밤을 새우며 저 구하러 와줬는데 제가…….”‘표적이 될 줄 알면서 나 구해주겠다고 온 사람한테 내가 뭐라고 한 거야? 도준 씨가 왔으니 이제 공씨 집안 사람들은 나를 더 잡지 못해 안달일 텐데…….’미안함이 몰려오자 하윤은 다급히 횡설수설 설명했다.“도준 씨가 저 생각하는 거 알아요. 저 그런 말 하면 안 됐어요.”도준은 팔을 잡아당겨 빼려고 했지만 하윤은 마치 샴쌍둥이처럼 도준에게 꼭 붙어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기사 아저씨한테 도움을 청하기까지 했다.“아저씨 빠리 운전해 주세요. 이 사람 도망가지 못하게.”기사 아저씨는 백미러로 뒤쪽 상황을 슬쩍 살펴봤다. 키와 덩치 여자의 두배 가까이 되는 남자가 여자의 팔에 꼭 붙들린 채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본 기사 아저씨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이거 처자가 저 총각 붙잡아 두는 거 맞아? 그 반대 아니고?’‘게다가 가려면 그 작은 체구로 막지 못할 것 같은데.’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서로 원하
며칠 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다시 만나서인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더욱 끈적했다.기사 아저씨는 눈치껏 차를 호텔로 돌렸고 하윤은 차에서 내려서부터 도준에게 안긴 채 한시도 발을 바닥에 붙이지 않았다.다행히 이른 시간이라 호텔에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엘리베이터 거울에 진득하게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반사되었고 위로 올라가는 작은 공간이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를 가두었다.“쾅.”도준은 호텔 방문을 열기 바쁘게 하윤을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눈 깜짝할 사이에 문에 밀쳐진 하윤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발견하자 마자 애써 정신을 되찾았다.“잠. 잠깐만요. 샤…… 샤워…….”도준은 하윤의 가슴에 찰싹 붙은 채 나지막하게 웃었고 미세하게 전해지는 떨림이 하윤의 심장을 매혹했다.“난 하윤 씨 더럽다고 생각 안 하는데.”하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맥없이 도준의 가슴을 내리쳤다.“제가 싫어요. 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이 땅에서 붕 뜨더니 코알라 자세로 도준에게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하윤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뭐 하는 거예요?”“더러운 거 싫다며? 샤워하는 거 지켜봐야 하지 않겠어? 내가 밑지는 기분이지만 보게는 해줄게.”“…….”욕실 속에서 물소리가 낮은 신음과 밭은 숨소리에 뒤덮이는가 싶더니 짙은 물안개가 욕실 안을 뒤덮었다.하룻밤의 스릴 넘치는 탈출의 긴장함은 이 순간 모두 사라져 버렸다.반나절이 지난 뒤.오후 2시, 따뜻한 햇빛이 바닥에 떨어져 대에 닿을 락 말 락 했다.이불 밑에서 하윤은 베개 위에 얼굴을 파묻은 채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욕실에서 나온 뒤 도준은 마치 정신이 맑아진 것처럼 손을 들어 하윤의 어깨를 꾹 눌렀다.“일어나, 밥 먹자.”한바탕 전쟁 같은 정사를 치르고 나자 하윤은 말투마저 변했다.“바닥 내려갈 힘 없어요, 안 먹을래요.”도준은 손가락으로 하윤의 얼굴을 살짝 튕겼다.“왜? 잠 자고 나니까 이제 또 심술이 도졌어?”이에 하윤이 화가 난 듯 투덜거렸다.
민도준은 권하윤의 말에 곧바로 동의하는 태도를 보였다.“그래, 아까 어디까지 말했더라? 나 보고 싶었다고 했지? 그냥 생각만 했어? 나 생각하면서 혼자 뭐 한 거 없어?”하윤은 약 2초 간 멍해 있다가 그제야 도준의 뜻을 이해하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제가 말한 보고 싶다는 순…… 순수한 뜻이었다고요!”“그래?”도준은 말꼬리를 길게 끌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하윤의 귀에 대고 입이 닿을 락 말 락하게 말했다.심지어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난 또 혼자 외로움이라도 달랬나 생각했지.”하윤은 귀가 간지러워 도준의 괴롭힘을 살짝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그러는 도준 씨는요? 저 안 보고 싶었어요?”“보고 싶었지.”가벼운 대답에 하윤의 입꼬리는 날아갈 것처럼 올라갔다.“하지만 내가 생각한 건 순수한 게 아니야. 예를 들면 하윤 씨가 내 아래에서…….”야릇한 말에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하윤은 손을 들어 도준의 입을 막았다.“그만 말해요.”하지만 도준은 하윤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하윤 씨가 물어본 거면서 이제는 듣기 싫어? 자기야, 사람이 이렇게 쉽게 변하면 어떡해?”하윤은 귀를 막으며 버럭 소리쳤다.“저 배고파요. 밥 먹을래요.”호텔에서 묵는 건 역시 편리했다. 전화 한 통에 바로 음식이 배달되니 말이다.종업원은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바로 자리를 떴다.음식의 향긋한 냄새에 거의 등에 붙을 지경인 하윤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하지만 하윤은 도준을 먼저 챙겨야 했다.“도준 씨 먹어 봐요. 여기 군만두가 특히 맛있어요.”도준은 배고파 하는 하윤의 모습에 음식 하나를 집어 하윤의 접시에 담아 주었다.“자, 먹어. 침이 그릇에 떨어지겠어.”확실히 오랫동안 굶어 배가 고팠던 하윤은 너무 급하게 먹은 탓에 이내 배가 불렀다.이윽고 하윤은 도준에게 국을 담아 주며 음식을 권하기 시작했다.“도준 씨, 이거 한번 먹어 봐요. 제가 어릴 때부터 먹던 거예요.”하윤
잔득 찔린 듯한 권하윤의 표정에서 민도준은 이미 답을 알아차리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역시 조금도 발전이 없어.’‘어떻게 이렇게 사람 마음을 홀리는 얼굴로 이토록 양심 없는 짓만 골라 하지?’도준이 밀어내자 하윤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혔고 멍한 표정으로 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바라봤다.한참 차이 나는 키때문에 두 사람의 거리가 한층 더 멀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무형의 압박감이 하윤의 모든 행동을 제약했다.“도준 씨…….”“옷 갈아 입어.”하윤은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갈아 입을 게요.”그러다가 뒤늦게야 뭔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다시 들었다.“우리 어디 나가요?”도준은 하윤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그 사이 하윤은 옷을 갈아 입으며 문밖의 동태를 살피더니 최단 시간 내로 대충하고 밖에 나왔다. 그러고는 도준이 아직 가지 않은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모기 목소리로 말했다.“저 옷 다 갈아 입었어요.”도준은 담배를 눌러 끄며 긴 다리로 성큼성큼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하윤은 그런 그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거의 달리다시피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한민혁이 어느새 새로운 지프차를 밖에 준비해 두었다.도준이 차 옆에 도착하자 하윤은 은근슬쩍 문을 열어 주었다.“도준 씨, 머리 조심해요.”도준이 와서 그런지 하윤은 여느 때보다 더 예쁘게 화장한 모양이다.립스틱 색은 하윤의 새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민트 색 치마는 하윤의 잘록한 허리를 더 가늘게 잡아 주었으며 급히 터널을 돈 차 때문에 치마가 옆으로 비뚤어지며 아름다운 라인을 그대로 드러냈다.하윤은 최선을 다 해 도준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도준이 운전석에 앉자마자 조수석에 올라탔다.하지만 차에 올라타려고 하던 그때, 손목이 덥석 잡혔다.“저는 그저 안전 벨트를 매주려고 한 것뿐이에요.”팔목에서 느껴지는 힘에 팔이 으스러지는 건 아닌가 생각하던 그때,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하윤은 어안이 벙
권하윤은 김종서의 입을 당장이라도 틀어막고 싶은 심정으로 뒤쪽을 힐끔거렸다.“뭐, 그냥 그렇죠. 너무 내외하지 마요.”하지만 하윤의 그런 상황을 알 리 없는 김종서는 오히려 더 아첨을 떨었다.“그게 어떻게 그냥 그런 정도야? 던 대표님이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우리가 다 봤는데. 나중에 네가 해운 회사 사모님이 되면 우리 잊지 마…….”거침없이 아부의 말을 늘어 놓던 김종서는 차에서 내린 남자를 보는 순간 하려던 말을 목구멍으로 삼킨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뭐지? 왜 낯선 것 같지?’‘아무리 사람 얼굴 잘 구분 못해도 색맹 까지는 아닐 텐데. 전에 봤을 때는 청회색 눈동자였는데 왜 검은 색으로 변했지?’‘아니야, 머리도 곱슬이 아니잖아…….’김종서는 아무리 스스로 세뇌를 해 봐도 도준과 던을 같은 사람으로 연상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창 엉뚱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도준이 김종서의 앞에 나타났다.이미 사회생활을 하며 익혀 온 경험과 눈썰미로 김종서는 눈앞의 남자가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이토록 건방진 태도는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으니까.김종서가 도준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하윤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입을 열었다.“오빠, 왜 내렸어요?”갑작스러운 호칭에 도준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입안에서 굴렸다.“오빠?”하윤은 도준의 표정을 감히 직시할 수 없어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말을 덧붙였다.“여긴 내 사촌 오빠예요.”하윤이 이렇게 소개하는 건 사실 방법이 없어서였다. 전에 그렇게 떠들썩하게 던을 남자 친구라고 소개했는데 갑자기 남자 친구가 바뀌었다고 하면 의심을 살 게 뻔했으니까.게다가 앞으로 던의 신분으로 할 일도 있기에 이렇게 말하는 게 최선이었다.도준이 사촌 오빠라는 소리에 김종서의 표정은 아까보다 많이 편해지더니 얼른 자기의 명함을 꺼내 건넸다.“시윤한테 이런 오빠가 있을 줄 몰랐네요. 저는 김종서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공씨 저택?”“맞아.”민도준은 핸들을 꺾으며 무심한 듯 대답했다.“저 공씨 저택으로 데려가려고요?”권하윤은 순간 머리가 멍해지더니 그날 어렵게 도망쳤던 기억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그런데 그토록 고생하며 도망쳤던 곳을 다시 돌아오다니!‘이거 미친 거 아니야?’도준이 자기 때문에 너무 화가 나 이성을 잃은 거라고 생각한 하윤은 도준의 팔을 잡았다.“농담하지 마요. 네? 공씨 저택으로 가면 저뿐만 아니라 도준 씨도 위험하잖아요.”다른 곳에서 온 사람은 아무리 강해도 지방 조무래기를 당하지 못한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도준은 경성에서 아무리 대단해도 그 영향력은 경성만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해원에서 자란 하윤은 공씨 집안이 해원에서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도준이 해원에 오지 않더라도 공씨 가문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도준의 약점을 잡으려고 애쓰는데, 이렇게 직접 해원에 행차하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하윤은 입이 닳도록 공씨 가문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했지만 도준은 고작 하윤을 힐끗 흘겨보는 게 끝이었다.“그걸 알면서 여기에서 안 가겠다고 버텨?”도준의 한 마디는 하윤이 하려던 말까지 모두 꺼버려 하윤은 자신 없게 중얼거렸다.“저, 저도 방법이 없어서 그랬어요.”곧이어 차는 공씨 저택 문 앞에서 멈춰 섰다.하윤은 공씨 저택의 문을 보는 순간 전날의 기억이 생각나 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미 내린 도준은 조수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하윤을 보며 차키를 빙빙 돌렸다.“내가 끌어내려줄까?”하윤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척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존재감을 숨겼지만 도준은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잠깐만요.”도준이 몇 걸음 채 떼지도 않았을 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하윤이 도준을 따라잡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잠깐만 기다려요.”
이건 권하윤이 처음으로 공씨 집안 왕 사모님을 만나는 순간이다.예전에 하윤은 계략적인 민상철의 모습이 충분히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공씨 집안 왕 사모님을 뵙고 나니 지금껏 느껴본 것과 다른 공포감이 느껴졌다.간단히 말해서 눈앞에 있는 사람보다 민상철은 적어도 자상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어찌 됐든 민상철은 가끔 인생 어르신다운 모습을 보여 줬으니까.하지만 공미란은 마치 머리 위에 있는 희미한 불빛처럼 이제 더 밝은 불빛을 낼 수 없는 존재 같았다. 이미 고초를 겪어 더 이상 환한 빛을 내지는 못하지만 어두운 불빛이 방안 여기 저기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숨을 곳도 숨을 수도 없어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어둠 속에서 사라져갈 운명 같았다.하윤의 조심스러운 동작과 달리 도준은 대충 의자 하나를 끌어 앉았다.심지어 자리를 맨 끝자리에 준비해 뒀는데 의자를 끌고 중앙에 멈춰 서더니 아예 공미란을 마주보기까지 했다.이윽고 도준은 방 안의 억눌린 분위기를 무시한 채 중앙에 떡 자리잡고 앉더니 다리를 꼰 채 턱을 들고 공미란을 바라봤다.“해원에서 왕 사모님을 또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요즘 몸은 괜찮으십니까?”그 말을 내뱉자 원래도 조용하던 홀 안은 바늘이 덜어져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또 뵙는다고? 몸이 괜찮다고?’‘대체 무슨 말이지? 왜 아직도 살아 있냐는 뜻인가?’하윤은 눈앞이 캄캄해져 고개를 숙인 채 표정을 숨겼다.그런 질문 방식에 공미란도 적응하지 못했는지 안색이 어두워졌다.어두운 불빛 아래 공미란 얼굴에 난 주름은 마치 검은 굴 같았다.“민 사장, 여긴 공씨 저택이지 민씨 저택이 아니네.”그 말인 즉 여기는 해원이니 그만 나대라는 뜻이었다.도준은 재밌다는 듯 손을 의자 뒤에 올려 놓으며 입을 열었다.“여기가 확실히 민씨 저택은 아니죠.”공미란의 표정은 마치 하등한 인간을 보는 듯한 사람 같았다. “그래서…….”막 뭐라고 하려던 찰나, 도준이 악랄한 미소를 지은 채 끼어들었다.“그런데 공씨 성이 싫증나서
공미란은 민도준의 말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따지러 왔다고? 우리 공씨 가문이 민 사장과 무슨 원한을 졌다고?”도준은 등 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그와 동시에 자기의 존재감을 애써 숨기고 있던 하윤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방 안에 있던 시선들이 하나들 하윤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공미란뿐만 아니라 주위에 앉아 있던 공씨 가문 어르신들까지 말이다.한참 동안 한 마디 말도 내뱉지 않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번뜩이는 빛을 반사하며 저를 바라보고 있자 하윤은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이윽고 뻣뻣하게 굳은 모습으로 도준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도준의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준이 커다란 손으로 하윤을 잡아 자기 옆으로 끌어당기며 톡톡 두드렸다.“소개하죠. 이 사람은 저의…….”숨죽이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하윤도 도준의 말에 집중했다. 그때 도준이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민씨 가문의 사모님입니다.”‘저 말 왜 이렇게 낯설지가 않지?’김종서가 말했던 ‘해운 그룹 사모님’이라는 말이 갑자기 떠오른 하윤은 목을 움츠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오히려 그 말을 들은 공미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민 사장이 결혼한 줄도 몰랐군.”도준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맞받아 쳤다.“왜요? 부조금이라도 주게요? 지금 줘도 늦지 않았습니다.”이윽고 하윤의 허리를 살짝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가서 공씨 가문 왕 사모님한테 인사해.”하윤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도준도 이렇게 말한 마당에 할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발걸음을 옮겼다.“왕 사모님, 안녕하세요.”공미란은 하윤처럼 아무런 배경도 없는 데다 본분을 지키지 않는 여자를 가뜩이나 싫어하는데, 자기 손녀딸 공아름과 결혼시키려던 도준의 신부 자리를 눈앞에 있는 말괄량이 같은 계집이 차지하자 더 불쾌했다.그 때문에 하윤의 인사에도 공미란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했다.“그래.”하윤은 인사를 마치고 다시 도준의 곁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등 뒤에 있던 도준이 하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