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씨 저택?”“맞아.”민도준은 핸들을 꺾으며 무심한 듯 대답했다.“저 공씨 저택으로 데려가려고요?”권하윤은 순간 머리가 멍해지더니 그날 어렵게 도망쳤던 기억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그런데 그토록 고생하며 도망쳤던 곳을 다시 돌아오다니!‘이거 미친 거 아니야?’도준이 자기 때문에 너무 화가 나 이성을 잃은 거라고 생각한 하윤은 도준의 팔을 잡았다.“농담하지 마요. 네? 공씨 저택으로 가면 저뿐만 아니라 도준 씨도 위험하잖아요.”다른 곳에서 온 사람은 아무리 강해도 지방 조무래기를 당하지 못한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도준은 경성에서 아무리 대단해도 그 영향력은 경성만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해원에서 자란 하윤은 공씨 집안이 해원에서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도준이 해원에 오지 않더라도 공씨 가문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도준의 약점을 잡으려고 애쓰는데, 이렇게 직접 해원에 행차하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하윤은 입이 닳도록 공씨 가문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했지만 도준은 고작 하윤을 힐끗 흘겨보는 게 끝이었다.“그걸 알면서 여기에서 안 가겠다고 버텨?”도준의 한 마디는 하윤이 하려던 말까지 모두 꺼버려 하윤은 자신 없게 중얼거렸다.“저, 저도 방법이 없어서 그랬어요.”곧이어 차는 공씨 저택 문 앞에서 멈춰 섰다.하윤은 공씨 저택의 문을 보는 순간 전날의 기억이 생각나 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미 내린 도준은 조수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하윤을 보며 차키를 빙빙 돌렸다.“내가 끌어내려줄까?”하윤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척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존재감을 숨겼지만 도준은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잠깐만요.”도준이 몇 걸음 채 떼지도 않았을 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하윤이 도준을 따라잡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잠깐만 기다려요.”
이건 권하윤이 처음으로 공씨 집안 왕 사모님을 만나는 순간이다.예전에 하윤은 계략적인 민상철의 모습이 충분히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공씨 집안 왕 사모님을 뵙고 나니 지금껏 느껴본 것과 다른 공포감이 느껴졌다.간단히 말해서 눈앞에 있는 사람보다 민상철은 적어도 자상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어찌 됐든 민상철은 가끔 인생 어르신다운 모습을 보여 줬으니까.하지만 공미란은 마치 머리 위에 있는 희미한 불빛처럼 이제 더 밝은 불빛을 낼 수 없는 존재 같았다. 이미 고초를 겪어 더 이상 환한 빛을 내지는 못하지만 어두운 불빛이 방안 여기 저기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숨을 곳도 숨을 수도 없어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어둠 속에서 사라져갈 운명 같았다.하윤의 조심스러운 동작과 달리 도준은 대충 의자 하나를 끌어 앉았다.심지어 자리를 맨 끝자리에 준비해 뒀는데 의자를 끌고 중앙에 멈춰 서더니 아예 공미란을 마주보기까지 했다.이윽고 도준은 방 안의 억눌린 분위기를 무시한 채 중앙에 떡 자리잡고 앉더니 다리를 꼰 채 턱을 들고 공미란을 바라봤다.“해원에서 왕 사모님을 또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요즘 몸은 괜찮으십니까?”그 말을 내뱉자 원래도 조용하던 홀 안은 바늘이 덜어져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또 뵙는다고? 몸이 괜찮다고?’‘대체 무슨 말이지? 왜 아직도 살아 있냐는 뜻인가?’하윤은 눈앞이 캄캄해져 고개를 숙인 채 표정을 숨겼다.그런 질문 방식에 공미란도 적응하지 못했는지 안색이 어두워졌다.어두운 불빛 아래 공미란 얼굴에 난 주름은 마치 검은 굴 같았다.“민 사장, 여긴 공씨 저택이지 민씨 저택이 아니네.”그 말인 즉 여기는 해원이니 그만 나대라는 뜻이었다.도준은 재밌다는 듯 손을 의자 뒤에 올려 놓으며 입을 열었다.“여기가 확실히 민씨 저택은 아니죠.”공미란의 표정은 마치 하등한 인간을 보는 듯한 사람 같았다. “그래서…….”막 뭐라고 하려던 찰나, 도준이 악랄한 미소를 지은 채 끼어들었다.“그런데 공씨 성이 싫증나서
공미란은 민도준의 말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따지러 왔다고? 우리 공씨 가문이 민 사장과 무슨 원한을 졌다고?”도준은 등 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그와 동시에 자기의 존재감을 애써 숨기고 있던 하윤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방 안에 있던 시선들이 하나들 하윤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공미란뿐만 아니라 주위에 앉아 있던 공씨 가문 어르신들까지 말이다.한참 동안 한 마디 말도 내뱉지 않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번뜩이는 빛을 반사하며 저를 바라보고 있자 하윤은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이윽고 뻣뻣하게 굳은 모습으로 도준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도준의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준이 커다란 손으로 하윤을 잡아 자기 옆으로 끌어당기며 톡톡 두드렸다.“소개하죠. 이 사람은 저의…….”숨죽이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하윤도 도준의 말에 집중했다. 그때 도준이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민씨 가문의 사모님입니다.”‘저 말 왜 이렇게 낯설지가 않지?’김종서가 말했던 ‘해운 그룹 사모님’이라는 말이 갑자기 떠오른 하윤은 목을 움츠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오히려 그 말을 들은 공미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민 사장이 결혼한 줄도 몰랐군.”도준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맞받아 쳤다.“왜요? 부조금이라도 주게요? 지금 줘도 늦지 않았습니다.”이윽고 하윤의 허리를 살짝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가서 공씨 가문 왕 사모님한테 인사해.”하윤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도준도 이렇게 말한 마당에 할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발걸음을 옮겼다.“왕 사모님, 안녕하세요.”공미란은 하윤처럼 아무런 배경도 없는 데다 본분을 지키지 않는 여자를 가뜩이나 싫어하는데, 자기 손녀딸 공아름과 결혼시키려던 도준의 신부 자리를 눈앞에 있는 말괄량이 같은 계집이 차지하자 더 불쾌했다.그 때문에 하윤의 인사에도 공미란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했다.“그래.”하윤은 인사를 마치고 다시 도준의 곁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등 뒤에 있던 도준이 하윤
공미란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그렇게 천한 아비를 둔 계집과 결혼하면 뒤에서 헐뜯는 사람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괜찮겠나?”가족에 관한 말이 오가자 권하윤은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어 끼어들었다.“당신들이 그때 사실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결론 짓고 결론을 짓고 아버지한테 죄를 뒤집어 씌운 거 제가 모를 줄 알아요?”“저 이미 다 알아냈어요. 당신들이 사람을 매수해 제 아버지한테 누명을 씌웠더군요. 그러면서 어떻게 제 아버지를 범인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죠?”민도준의 말에 자극을 받은 공미란은 이미 화를 주체할 수 없었는데 하윤마저 버럭버럭 따지고 들자 안색이 아내 어두워졌다.“허무맹랑한 말로 시비를 일으키다니, 이토록 교양 없는 계집을 봤나! 너 같은 계집은…….”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도준의 행동에 공미란의 말은 끊기고 말았다.이윽고 도준은 하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잔뜩 화가 난 하윤을 자기 쪽으로 잡아 끌며 공미란을 향해 웃어 보였다.“왕 사모님의 말이 이 사람보다 훨씬 많아 보이는데.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왕 사모님 같은 사람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탁 트인 홀은 순간 먹구름이 낀 것처럼 우중충해졌고 당장이라도 비바람이 몰아칠 것처럼 고요해졌다.이쯤 되면 이제 서로 감정이 틀어진 거나 다름없었다.하윤은 공씨 가문이 도준에게 불리하게 작용할까 봐 불안한 듯 도준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도준은 오히려 하윤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아 주며 턱을 들어 올렸다.“이만하죠. 나이도 드신 분한테 따지는 것도 웃긴 일이니 사과만 받겠습니다. 만약 그 사과가 마음에 들면 용서해 드리죠.”“민도준!”분노를 한껏 억누른 공미란의 목소리는 귀청 찢어질 듯 거칠었다. 심지어 얼굴에 자리 잡은 주름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자 물고기 아가미가 움찔거리는 듯한 공포감을 더해줬다.더 이상 도준과 말할 생각이 없어진 공미란은 자기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다.“혼자 민씨 가문과 회사일을 맡아 하는 데다 칩
공미란은 꿋꿋한 태도로 밀어붙였다.“서로 좋자고 이러는 거네. 빨리 동의할수록 덜 고생할 텐데.”공미란의 말을 입증하듯 경호원들은 두 사람을 향해 몇 걸음 더 다가왔다.그러던 그때 하인 한 명이 도준 앞에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그건 당연히 칩 기술의 특허권을 공씨 가문과 나눠 가지겠다는 합의 서였다.앞에 놓인 합의서에 사인하느냐, 아니면 하윤을 데리고 빽빽이 둘러 싼 경호원을 상대하느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의도였다.하윤은 공씨 집안 사람들이 도준을 정말 죽이기라도 하거나 갑자기 습격일도 할까 봐 도준의 뒤에 막아서며 방패막이 역할을 자처했다.하지만 하윤의 작은 동작은 도준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하윤의 그림자에 도준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그 작은 몸으로 무얼 막는다고.’아니나 다를까 선명한 키 차이 때문에 하윤은 도준의 가슴을 막아주기도 역부족이라 머리는 그대로 적에게 노출되었다.“탕!’도준은 서류를 테이블 위에 던져 버렸다.“이런 합의서는 가주가 동의해야 하는 거 아닌가? 공태준은 어디 있죠?”공미란은 콧방귀를 뀌었다.“공태준의 가주 신분은 내가 준 거니 내가 공씨 가문을 대표하네.”“이미 다 늙어 빠진 몸으로 앞으로 몇 년 더 버틴다고 본인이 공씨 가문을 대표한다고 망발을 늘여 놓는지.”“공태준이 아무리 골골거려도 왕 사모님보다는 몇 년 정도 더 버틸 것 같은데, 왕 사모님이 저 세상 가기라도 하면 다시 공태준과 번거롭게 얘기하는 수고는 덜고 싶은데.”“건방진 것!”공미란의 낮은 고함에 앞에 있던 경호원들이 일제히 총기를 꺼내 들고 도준의 머리를 겨냥했다.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하윤은 조급해서 무의식적으로 도준의 앞에 막아섰다.“당신들 뭐 하는 거야? 이 사람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민씨 가문에서 당신들 가만 안 둘 거야!”하윤은 겉으로 이렇게 말했지만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도준이 해원에 온 게 자기 때문이라는 걸 도준이 말하지 않아도 하윤은 알 수 있었다. 물론 무엇 때문에 공씨 저택으로
민도준은 권하윤이 불안한 듯 헐떡이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면서 그녀가 놀라지 않기를 기도했다.이윽고 엄지 손가락으로 하윤의 손바닥을 쓸며 위로를 보냈다.하지만 이미 정서에 젖어 있던 하윤은 도준이 자기와 작별하는 줄 알고 곁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상관하지 않은 채 도준의 품에 파고들었다.“미안해요, 다 저 때문이에요.”도준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하윤을 품에서 끄집어내려고 할 때, 하윤이 고개를 쳐들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도준을 바라봤다.“걱정하지 말아요. 도준 씨한테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저 기다릴게요. 도준 씨가 죽으면 같이 죽을게요.”‘듣기는 좋은데 시기가 좀 안 맞네.’하윤의 이런 행동은 오히려 적의 기세를 북돋아주고 자기의 위엄을 떨어트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뭐라 꾸짖으려고 했지만 도준은 하윤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이내 말머리를 틀었다.“음? 나를 따라 죽기라도 하겠다는 거야?”도준의 말에 하윤의 마음은 한층 더 식어버렸다.하지만 죽음 앞에서 체면 따위는 버려 두기로 한 하윤은 도준의 품에 매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네, 도준 씨가 죽으면 저도 안 살래요.”아예 막 나가기로 한 하윤과 원체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도준 때문에 공기는 순간 어색함이 맴돌았다.심지어 총기를 꺼내 들고 두 사람을 협박하던 경호원들조차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하지만 도준은 갑자기 하윤에게 장난치고 싶어져 자기를 끌어안고 있던 하윤의 팔을 풀며 떼어냈다.“내가 뭐라고 따라 죽는대?”“도준 씨는…….”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부끄러웠지만 하윤은 후회하게 될까 봐 도준의 목을 팔로 두른 채 발꿈치를 들더니 도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제 남편이잖아요.”하윤은 말을 마치자마자 도준의 턱에 입을 맞추더니 도준이 듣지 못했을까 봐 남편이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도준은 호칭에 크게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기에 가끔 하윤을 놀리려고 부끄러운 호칭으로 불러대는 것 외에 하윤이 자기를 어떻게 부르던 크게
공미란은 도준을 고발하면서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조관성이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더욱이 조관성의 도움을 받아보겠다고 접촉한 사람들은 모두 거절 당했었고.만약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도준을 자기 입맛대로 굴릴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조관성 때문에 공미란은 격지 않아도 될 번거로움을 겪었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성정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공미란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남의 편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더욱이 지금 증인과 증거 모두 있는 상황이라 민도준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에 공미란은 웃음이 절로 났다.공미란의 고발에 조관성은 이내 도준을 바라봤다.“사실입니까?”하윤은 조관성의 차가운 표정에 도준이 끌려갈까 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고 따라서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도준은 하윤이 놀라 기절할까 봐 하윤의 어깨를 꼭 잡은 채로 조관성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제 집사람이 겁이 많아서 그러는데, 혹시 저쪽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서로 안면이 있는 듯한 둘의 대화에 침착하기만 하던 공미란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자, 자네가 조 국장을 어떻게 아는가?”한편 하윤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심지어 자기가 손을 놓아 버리면 다시는 도준을 볼 수 없게 될까 봐 도준의 팔을 꼭 끌어안은 채 머리를 저었다.“저 무섭지 않아요. 여기서 말해요.”조관성은 날카로운 눈매를 찌푸리며 물었다.“방금 폭발 민 사장님이 낸 겁니까?”도준은 통쾌하게 인정했다.“네, 맞아요.”그 말에 공미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준이 조관성과 아는 사이든 아니든 죄를 인정했으니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거니까.군무기를 은닉하고 민가를 습격한 죄는 가볍게 처벌할 수 있는 죄목이 아니다.이에 공미란은 거드름을 피우며 끼어들었다.“조 국장님, 해원에서 이런 악랄한 사건이 일어나 가족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으니 부디 엄벌해 주세요.”조관성은 도준을 힐
민도준은 더 이상 말하기 귀찮았는지 외투 호주머니에서 4장의 종이를 꺼내 펼쳐 보이며 끝을 손가락을 툭 튕겼다.“여기 명확하게 적혀 있는데, 돋보기라도 껴야 잘 보이시려나?”종이에는 공씨 가문이 자발적으로 자택을 실험 기지로 내놓고 모든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게 명시되어 있었다.하지만 공미란은 아무리 봐도 믿기지 않았다. 특히 똑똑히 보이는 서명과 공인을 보자 더욱 황당했다.“조작하면 누가 모를 줄 알아?”그때 도준이 복도 끝에 나타난 인영을 힐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공 가주님, 그쪽 할머니께서 이 사인에 대해 묻는데요?”‘공태준? 공태준이 여기 있다고?’하윤은 도준의 눈길이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역시나 공태준이 어두운 곳에서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그 순간 하윤은 고은지와 공천하는 공태준이 벌을 받고 있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게, 태준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외상도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으니까.“합의서는 진짜예요. 제가 직접 사인했고요.”태준의 말에 공미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무서운 표정으로 공태준을 죽일 듯 노려볼 뿐.그때 도준이 손을 펴 보이며 말했다.“보세요, 조 국장님. 제가 말했잖아요. 저 착한 시민입니다.”조관성은 눈살을 찌푸린 채 도준과 몇 초간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눈을 피하고는 떠나기 전 낮게 경고했다.“도 넘는 행동하지 마세요.”“당연하죠.”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우여곡절 끝에 조관성마저 떠나자 하윤은 그제야 이 모든 게 도준이 계획한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렇다면 아까 생이별하는 것처럼 군 것도…….모두 거짓이라는 소리다.아까 자기가 했던 ‘진심어린’ 말을 떠올리자 하윤은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하지만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라서 태준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몇 초 뒤, 태준은 눈을 내리 깔더니 공미란을 향해 걸어갔다.“짝!”곧이어 뺨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하윤은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