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나영이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채영이 귀를 막고 중얼대는 걸 보자 권하윤은 속이 시원했다. 한순간 무대 위는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고 무대 아래 사람들 역시 패닉에 빠졌다. 그러던 그때, 하윤이 엄석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엄석규 부총장님, 아니 엄석규 씨, 당신이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혹시 우리 아버지가 당신 꿈에 찾아가지 않았나요? 절친한 친구면서 왜 그랬냐고 물어보지 않던가요?” 엄석규는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 채 옆에 있는 경비원에게 버럭 소리쳤다. “당장 소란 피우는 자들을 끌어내리라고!” 그 말에 스무 명이 되는 경비들이 일제히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 모습을 본 케빈은 손으로 끌고 있던 스피커를 경호원들에게 던지면서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케빈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경비원들이 하윤을 끌어내리려던 찰나,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쿠! 남자들이 떼거지로 몰려 들어 여자 하나 때리려 하다니 집에 가서 엄마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래?” 흠칫 놀라 천천히 고개를 돌린 하윤은 무대 위에 있는 경호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데리고 나타난 한민혁과 눈이 마주쳤다. 민혁이 데려온 패거리들은 무대를 세 바퀴 정도 둘러쌌고 무대 아래에 어느 새 대포만한 카메라 한 대가 하윤을 겨누고 있었다. “계속 말해요. 누가 감히 움직이는지 제가 지켜볼 테니까.” 긴급한 상황이라 하윤은 민혁을 향해 감사하다는 듯 미소 짓고는 다시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 모든 관객들은 하윤에게 집중했다. “저의 아버지는 이성호 교수님입니다. 유명한 음악가이기도 하죠. 제 아버지는 수많은 학생들이 우러러보는 선생님이자 학생들의 길을 빛내주는 등불 같은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이 악독한 사람들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신자살을 택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의 행복한 가정도 산산조각 나버렸고요. 그뿐만 아니라 저도 오나영의 악의적인 유도하에 인터넷으로 수많은 언어 폭력을 당해 왔
가까스로 집에 도망쳐 온 오나영은 신발이 벗겨진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심지어 누가 잡아당겼는지 두피마저 찌근거렸고 전화벨 소리가 목숨을 재촉하는 듯 쉴 새 없이 울려댔다. “너 이제 끝났어. 전에 계약했던 브랜드사에서도 위약금을 요구하는 상황이고. 이 문제는 모두 네가 초래한 거니까 위약금은 네가 해결해!” 늘 입만 열면 우리 귀염둥이 우리 여신 하면서 떠받들던 매니저의 싸늘한 말투에 가뜩이나 겁에 질려 있던 오나영은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언니, 언니마저 저 버리면 안 돼요. 언니가 저 이미지 복구하는 거 도와주면 그래도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이미 증거가 그렇게나 많이 나왔는데 어떻게 다시 일어서? 얼른 위약금 물 방법이나 생각해!” “…….” “언니? 언니!” 오나영은 몇 번 외치고 나서야 전화가 한참 전에 이미 끊어졌다는 걸 알아챘다. “이 속물들! 나 광고 몇 개만 찍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어!” 오나영이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분노를 표출할 때 전화가 벨이 다시 울렸다. 매니저가 다시 전화한 줄로 착각한 오나영은 다시 희망을 품고 전화를 받았다. “언니, 저 대신 방법 좀 생각…….” “악독한 X! 사람 목숨으로 쌓아 올린 성에서 여왕 놀이하니까 재밌었어?” “누구야? 당신 누구야?” 오나영이 버럭 화내며 소리쳤지만 전화는 이내 끊겼다. 하지만 곧이어 다음 전화가 걸려 왔다. “돈 돌려줘! 내가 선물 쏜 거 다 돌려달라고!” 오나영은 당황한 듯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헛수고였다. 전화를 끊으니 이내 메시지가 수도 없이 쏟아져 내렸으니까. 심지어 항상 오나영 편에 서 있던 팬덤까지 등을 돌려 돈을 돌려내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제야 오나영은 무서운 게 뭔지 까달았다. 심지어 핸드폰 전원을 꺼버려도 주위에서 수많은 눈이 자기를 분노와 증오의 눈빛으로 보는 것 같았고 욕설을 퍼붓는 것 같았다. 오나영은 미친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내가 피해자야. 내가 피해자라고!”
권하윤은 던의 차에 오르자마자 이어폰을 귀에 꼈다. 그때 손깎지를 낀 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던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앞에 차에 타지 않죠?” “엄석규 사무실에 뒀던 도청기에 신호가 잡혀서 들어보려고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하는 하윤의 모습에 던은 피식 웃었다. “재밌네요. 그러니까 지금 민 사장을 믿지 않는 거네요.” 그 말에 하윤은 일순 멈칫했다. “뭐라고요?” “설마 윤이 씨가 엄석규의 말을 도청하는 걸 민 사장이 아는 게 싫어서 제 차에 탄 거 아닌가요?” 던의 말에 하윤은 그제야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방금 확실히 민혁이 자기 계획을 듣는 걸 무의식적으로 배척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설마 나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도준 씨가 범인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이 들자 하윤은 순간 짜증이 치밀어 던을 돌아봤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사실을 말했을 분이에요.” 그 말에 하윤은 고개를 홱 돌려 더 이상 던과 얘기를 나누지 않고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엄석규는 누군가와 전화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는데 말투에는 조급함이 느껴졌다. “그 계집애가 돌아온 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가 볼 때 오래전부터 계획한 게 틀림없어요. 이제 어떡합니까!” 대화를 대충 들어도 그 계집이라는 사람이 바로 하윤 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윤은 상대의 말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이어폰을 귀로 꾹 막았지만 건너편에서는 조급한 발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알았어요. 늘 보던 곳에서 만나죠.” 엄석규가 갑자기 전화를 끊자 하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끝이라고?’ 그러다가 이어폰에서 문소리가 들리자 하윤은 얼른 고개를 돌려 던을 바라봤다.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은 ‘나 목적 있어요’ 라는 의도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던 씨.” 던은 하윤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슬쩍 움직였다. “왜요?” “저 차 좀 빌립시다.” “그래서요?” “좀 내려 주실래요?”
“띠띠!” 짤막한 경적 소리는 이내 권하윤의 주의를 끌었다. 평범한 검은색 폭스바겐이 엄석규 앞에 멈춰 서자 엄석규는 두말없이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그것만으로도 차 안의 사람과 엄석규가 아는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윤은 먼저 자동차 번호판을 사진 찍은 뒤 차가 출발하자 이내 시동을 걸어 그 뒤를 따랐다. 물론 발각될까 봐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며칠 동안 실마리를 찾다가 이제야 뭔가 단서를 잡은 것 같다는 생각에 하윤은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윽고 운전하는 틈에 손을 바지에 쓱 문질러 땀을 닦아냈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던은 머리가 쭈뼛 곤두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바싹 뒤를 쫓던 하윤은 앞에서 가던 차가 웬 찻집에서 멈춰선 걸 발견했다. 엄석규가 차에서 내리자 그가 타고 있던 차는 홀연히 사라졌다. 엄석규가 찻집으로 들어가자 하윤은 그 뒤를 따라붙으려 했지만 한편으로는 발각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에 하윤은 고개를 돌려 던을 바라봤고 하윤과 거리를 유지하던 던이 얼른 입을 열었다. “저 사람 나도 봤어요.” ‘하긴, 그렇다면 누굴 찾아야 하지?’ “아, 케빈은 어때요?” ‘케빈…….’ 사실 한민혁 일행이 나타난 뒤로 하윤은 케빈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케빈이 여기까지 오려면 한참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은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케빈은 하윤 앞에 나타났다. “저희 흩어졌던 거 아니었어요?” 의아해하는 하윤을 보더니 케빈은 묵묵히 대답했다. “저는 하윤 씨 안전을 지켜줘야 합니다.” 케빈이 계속 자기를 따라왔다는 생각에 하윤은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케빈 씨를 태워야 한다는 걸 깜빡했어요.” 그 말에 케빈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아무것도 없는 곳에 버려둔 뒤 자기 보다 늦게 돌아오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던 민시영과 비교하면 하윤은 인자한 편에 속했다. 케빈이 찻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본 하윤은 그 뒤로도 한참
전화 건너편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내용은 듣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선택제를 좋아하나 보네? 좋아. 그렇다면 네 머리를 박살내 줄까 아니면 척추를 부러트려 줄까? 선택해 봐.” 한민혁은 자기 머리를 슬쩍 만져보더니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기, 그러니까 하윤 씨의 계획이 아주 성공적인 것 같아. 지금 엄석규의 배후에 있는 사람까지 추적한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어, 그러니까…….” 우물쭈물하는 민혁의 말투에 인내심이 바닥 난 도준은 끝내 참지 못하고 윽박질렀다. “계속 우물댈 거면 어떻게 죽고 싶은지부터 골라.”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생명의 위협을 느낀 민혁은 얼른 자기가 본 걸 그대로 뱉어냈다. “형 명령대로 하윤 씨를 따라다녔는데 던이 차에서 하윤 씨 엉덩이를 만지고 손을 조물딱거리는 걸 봐 버렸어.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 전화 건너편에서 이어지는 침묵에 민혁은 감히 숨조차 쉬지 못했다. 심지어 귓가에 들리는 전류 소리마저 차가운 바람이 되어 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난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윽고 민혁이 무릎이라도 꿇고 전화 받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전화 건너편에서 남자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민혁은 더 이상 도준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얼른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사진 찍었는데, 혹시 직접 볼래?” 잠시 뒤, 몇 장의 사진이 도준의 핸드폰에 도착했다. 거리 때문에 화면이 흐릿했지만 매일 문자에서 자기한테 애교 부리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손을 맞잡고 있는 걸 확인하는 데는 방해되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날뛰던 분노가 끝내 밖으로 점점 흘러나왔다. ‘진실을 파헤쳐 보라고 보내줬더니 이젠 다른놈을 만나고 다녀?’ ‘아주 잘하고 있네.’ 도준의 주위를 맴도는 기운이 너무 무서워 사무실에 들어왔던 민싱영은 한 바퀴 빙 돌아 그대로 다시 나가버렸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순간 매번 반기를 들며 시비를 걸어오던 대외무역 팀 부장과 마
민시영은 민도준의 화가 풀어지기는커녕 더 심해진 걸 보고 다시 슬그머니 뒷걸음 쳤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시영을 불러 세웠다. “여기가 무슨 관광지야?” 시영은 그 말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리가. 난 오빠가 내 말 들어줄 기분이 아닌 것 같아서 나가려고 한 거야.” 뒤집힌 의자를 바로 세운 시영은 바닥에 있는 핏자국을 보며 끌끌 혀를 찼다. “대외무역 팀 팀원은 모두 민병철 쪽 사람인데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이거 또 소란이 있을 것 같은데.” “하.” 도준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곧바로 연기와 함께 도준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됐네. 오늘 마침 제대로 놀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시영은 도준의 안색을 살피더니 한참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해원 쪽에 무슨 일 있어?” “…….” 비록 대답을 얻지 못했지만 해원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섬뜩하게 변하는 도준의 눈빛을 보고 시영은 답을 얻어냈다. 이윽고 시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 귀국하고 아직 해원에 가본 적 없네. 요즘 내가 제안한 프로젝트가 모두 무산되었으니 이 참에 놀러 가고 싶은데 혹시 휴가 내줄 수 있어?” 담배꽁초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상공에 닿을것처럼 굴다가 이내 에어컨 바람에 의해 흩어졌다. 그리고 한참 뒤, 소파에 앉아 있던 도준이 문뜩 시영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접었다. 그 순간 시영은 등골이 오싹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 왜 그렇게 봐?” 남자의 입꼬리는 위헙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더니 이내 그 사이로 말이 튀어나왔다. “해원은 나중에 가.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따스한 햇살이 사무실 안에 비쳐 들어왔지만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시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한 편, 차안에서 부는 찬 바람에도 하윤의 조급함을 가라앉지 않았다. 벌써 20여 분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자 하윤은 끊임없이 시계를 확인하며 이런저
곧바로 권하윤의 생각은 증명되었다.공씨 저택이 시야에 보이자 하윤은 자기의 생각이 맞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 한구석의 돌멩이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그래도 공씨 가문이라서 다행이야.’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 차를 세워 두고 묵묵히 모든 상황을 지켜봤다.공태준의 개인 저택도 사람의 손에 정교하게 꾸며져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공씨 본가 저택은 더욱 놀라웠다.고층 건물이 즐비한 해원에 이토록 조용한 곳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공씨 본가 저택은 사실 옛 황족의 저택이기에 벽은 지금 자주 사용하는 철근과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대신 거의 도자기처럼 정교하게 지어졌다. 때문에 면적이 너무 크지 않아도 그 값어치는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이곳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이기에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다.그 노인은 차에서 내린 뒤 정문 옆에 있는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심지어 문 앞 경호원은 아무런 검문도 하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번거로운 규칙이 가득한 공씨 가문에서 이렇게 저택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공씨 가문 사람뿐이다.하윤은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러니까 엄석규를 포함한 사람들이 공씨 집안 사람의 사주를 받았다는 거네?’그 사주를 내린 사람일 가능성이 제일 많은 사람은 바로 공채령의 아버지 공천하다.‘만약 아빠가 정말 공채령과 그런 사이라면…….’‘공채령을 그토록 통제하던 공천하가 아빠를 망가트리는 것도 말이 돼.’하윤의 눈에는 막연함이 차올랐다.‘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일이라고?’분명 명확해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하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정말 이렇게 간단하다면 도준 씨가 왜 계속 답을 알려주지 않았을까?’‘내가 아빠의 죽음에 관해 물었을 때 어느 정도 자기와 상관이 있다는 답은 또 뭐였고?’‘공태준이 나를 보여준 사진 속에 왜 도준 씨가 그것도 아빠가 투신하기 전 건물에 있었지?
차 문이 열리자 케빈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제 직책은 사모님을 보호하는 겁니다. 제 생사를 상관하지 마세요.”권하윤은 케빈의 말을 무시한 채 차에서 내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진정을 되찾았다.“괜찮아요. 마침 공씨 집안의 어떤 분이 보자고 하는지 궁금했으니까.”낚시를 하면 하는 사람이 미끼로 물고기를 낚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도 낚싯줄을 타고 낚시꾼을 찾을 수 있으니까.탓하려면 대어를 낚겠다고 행적을 노출한 하윤 본인을 탓해야 한다.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하윤은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이제 겨우 진실에 가까워졌는데 포기할 수 없어.’그때 맨 앞에 선 경호원이 하윤을 향해 손짓했다.“이시윤 씨, 들어가시죠.”하윤은 케빈을 바라봤다.“케빈 씨는 이만 가보세요.”케빈은 다리에 난 상처를 힐끗 보고는 따라가면 짐만 된다는 판단 하에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하윤은 그래도 던에게 뭐라도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는데,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다시 주위를 살펴보니 던은 이미 7,8 미터 떨어진 곳에서 하윤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도망 한번 빨리 치네.’그렇게 하윤은 공씨 집안 경호원들의 감시하에 공씨 저택에 발을 들였다.경호원들을 따라 들어간 건 여전히 옆문이었다.문턱을 넘어서니 맞은편에 벽이 막혀 있어 시선마저 차단되었다.하지만 하윤이 벽면에 새겨진 무늬를 찬찬히 확인하기도 전에 등 뒤의 문이 닫혀 버렸다.그와 동시에 길가에서 들리던 인기척 소리도 문밖으로 차단되어 하윤은 왠지 조금 불안해졌다.벽을 지나자 초목이 우거진 정원에 도착하자, 커다란 나무가 정원에 세워져 있는 석상에 드리우면서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주홍색으로 칠한 기둥을 지나자 어느새 정원의 끝이 눈에 들어왔다.분명 울긋불긋한 꽃과 버드나무가 가득하고 호수가 놓인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곳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곳곳에서 침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그 원인은 바로 곳곳에 숨어 있는 저택 하인들 때문이었다.그들은 모두 어깨를 한껏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