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자리에 두 분의 옛 친구가 와 계십니다. 그 친구분이 두 분의 창창한 앞날을 위해 축복의 메시지를 준비했다고 하니 무대 위로 모시겠습니다.” “자, 진은영 학생, 무대 위로 올라와 주세요.” 물론 조금 의외긴 했지만 무대 아래에 수많은 카메라가 있는 데다가 또 친구 사이의 정으로 이슈 몰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오나영은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진은영이 무대에 올랐을 때 오나영은 포옹으로 그녀를 맞이하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은영아, 너도 왔구나.” 채영도 보여주기 식으로 진은영과 포옹했다. 하지만 진은영은 싸늘한 눈으로 자기를 손에 쥐고 놀았던 ‘친구들’을 바라보더니 사회자 손에서 마이크를 받아 들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 내가 영상을 준비했어.” 말이 끝나기 바쁘게 스크린에는 영상 하나가 재생되었다. 쓱쓱 스쳐 지나가는 영상의 맨 앞에는 세 사람이 대학 시절 함께 찍었던 사진이 담겨 있었다. 풋풋한 미소는 세 사람의 청춘을 그대로 사람들 앞에 보여주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앵글은 바로 화장실로 바뀌었다. “너 뭐 하자는 거야? 우리가 위증을 했다는 걸 시윤이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쟤가 우리를 찾아온 게 자랑하러 온 것만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아니면 엄석규 쌤 한테 물어볼까?” “…….”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모든 사람은 미처 반응도 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 엄청난 사실을 알아버렸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 시각 무대 위에 있던 오나영과 채영은 벙찐 얼굴로 서 있다가 겁에 질린 얼굴로 스크린을 응시했다. 엄석규도 많이 당황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자기가 쌓아 올린 모든 게 무너졌음을 직감했다. 한편 상영실에 있던 사람도 뭔가 잘못됐음을 그제야 눈치챈 듯 바로 화면을 꺼버렸지만, 진은영이 마이크를 든 채 버럭 소리쳤다. “너희 둘 그때 나한테 거짓말했잖아. 교수님이 너희 성추행했다고 나를 속여 위증까지 하게 한 것 때문에 교수님이 억
오나영이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채영이 귀를 막고 중얼대는 걸 보자 권하윤은 속이 시원했다. 한순간 무대 위는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고 무대 아래 사람들 역시 패닉에 빠졌다. 그러던 그때, 하윤이 엄석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엄석규 부총장님, 아니 엄석규 씨, 당신이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혹시 우리 아버지가 당신 꿈에 찾아가지 않았나요? 절친한 친구면서 왜 그랬냐고 물어보지 않던가요?” 엄석규는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 채 옆에 있는 경비원에게 버럭 소리쳤다. “당장 소란 피우는 자들을 끌어내리라고!” 그 말에 스무 명이 되는 경비들이 일제히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 모습을 본 케빈은 손으로 끌고 있던 스피커를 경호원들에게 던지면서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케빈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경비원들이 하윤을 끌어내리려던 찰나,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쿠! 남자들이 떼거지로 몰려 들어 여자 하나 때리려 하다니 집에 가서 엄마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래?” 흠칫 놀라 천천히 고개를 돌린 하윤은 무대 위에 있는 경호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데리고 나타난 한민혁과 눈이 마주쳤다. 민혁이 데려온 패거리들은 무대를 세 바퀴 정도 둘러쌌고 무대 아래에 어느 새 대포만한 카메라 한 대가 하윤을 겨누고 있었다. “계속 말해요. 누가 감히 움직이는지 제가 지켜볼 테니까.” 긴급한 상황이라 하윤은 민혁을 향해 감사하다는 듯 미소 짓고는 다시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 모든 관객들은 하윤에게 집중했다. “저의 아버지는 이성호 교수님입니다. 유명한 음악가이기도 하죠. 제 아버지는 수많은 학생들이 우러러보는 선생님이자 학생들의 길을 빛내주는 등불 같은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이 악독한 사람들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신자살을 택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의 행복한 가정도 산산조각 나버렸고요. 그뿐만 아니라 저도 오나영의 악의적인 유도하에 인터넷으로 수많은 언어 폭력을 당해 왔
가까스로 집에 도망쳐 온 오나영은 신발이 벗겨진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심지어 누가 잡아당겼는지 두피마저 찌근거렸고 전화벨 소리가 목숨을 재촉하는 듯 쉴 새 없이 울려댔다. “너 이제 끝났어. 전에 계약했던 브랜드사에서도 위약금을 요구하는 상황이고. 이 문제는 모두 네가 초래한 거니까 위약금은 네가 해결해!” 늘 입만 열면 우리 귀염둥이 우리 여신 하면서 떠받들던 매니저의 싸늘한 말투에 가뜩이나 겁에 질려 있던 오나영은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언니, 언니마저 저 버리면 안 돼요. 언니가 저 이미지 복구하는 거 도와주면 그래도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이미 증거가 그렇게나 많이 나왔는데 어떻게 다시 일어서? 얼른 위약금 물 방법이나 생각해!” “…….” “언니? 언니!” 오나영은 몇 번 외치고 나서야 전화가 한참 전에 이미 끊어졌다는 걸 알아챘다. “이 속물들! 나 광고 몇 개만 찍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어!” 오나영이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분노를 표출할 때 전화가 벨이 다시 울렸다. 매니저가 다시 전화한 줄로 착각한 오나영은 다시 희망을 품고 전화를 받았다. “언니, 저 대신 방법 좀 생각…….” “악독한 X! 사람 목숨으로 쌓아 올린 성에서 여왕 놀이하니까 재밌었어?” “누구야? 당신 누구야?” 오나영이 버럭 화내며 소리쳤지만 전화는 이내 끊겼다. 하지만 곧이어 다음 전화가 걸려 왔다. “돈 돌려줘! 내가 선물 쏜 거 다 돌려달라고!” 오나영은 당황한 듯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헛수고였다. 전화를 끊으니 이내 메시지가 수도 없이 쏟아져 내렸으니까. 심지어 항상 오나영 편에 서 있던 팬덤까지 등을 돌려 돈을 돌려내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제야 오나영은 무서운 게 뭔지 까달았다. 심지어 핸드폰 전원을 꺼버려도 주위에서 수많은 눈이 자기를 분노와 증오의 눈빛으로 보는 것 같았고 욕설을 퍼붓는 것 같았다. 오나영은 미친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내가 피해자야. 내가 피해자라고!”
권하윤은 던의 차에 오르자마자 이어폰을 귀에 꼈다. 그때 손깎지를 낀 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던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앞에 차에 타지 않죠?” “엄석규 사무실에 뒀던 도청기에 신호가 잡혀서 들어보려고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하는 하윤의 모습에 던은 피식 웃었다. “재밌네요. 그러니까 지금 민 사장을 믿지 않는 거네요.” 그 말에 하윤은 일순 멈칫했다. “뭐라고요?” “설마 윤이 씨가 엄석규의 말을 도청하는 걸 민 사장이 아는 게 싫어서 제 차에 탄 거 아닌가요?” 던의 말에 하윤은 그제야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방금 확실히 민혁이 자기 계획을 듣는 걸 무의식적으로 배척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설마 나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도준 씨가 범인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이 들자 하윤은 순간 짜증이 치밀어 던을 돌아봤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사실을 말했을 분이에요.” 그 말에 하윤은 고개를 홱 돌려 더 이상 던과 얘기를 나누지 않고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엄석규는 누군가와 전화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는데 말투에는 조급함이 느껴졌다. “그 계집애가 돌아온 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가 볼 때 오래전부터 계획한 게 틀림없어요. 이제 어떡합니까!” 대화를 대충 들어도 그 계집이라는 사람이 바로 하윤 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윤은 상대의 말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이어폰을 귀로 꾹 막았지만 건너편에서는 조급한 발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알았어요. 늘 보던 곳에서 만나죠.” 엄석규가 갑자기 전화를 끊자 하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끝이라고?’ 그러다가 이어폰에서 문소리가 들리자 하윤은 얼른 고개를 돌려 던을 바라봤다.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은 ‘나 목적 있어요’ 라는 의도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던 씨.” 던은 하윤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슬쩍 움직였다. “왜요?” “저 차 좀 빌립시다.” “그래서요?” “좀 내려 주실래요?”
“띠띠!” 짤막한 경적 소리는 이내 권하윤의 주의를 끌었다. 평범한 검은색 폭스바겐이 엄석규 앞에 멈춰 서자 엄석규는 두말없이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그것만으로도 차 안의 사람과 엄석규가 아는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윤은 먼저 자동차 번호판을 사진 찍은 뒤 차가 출발하자 이내 시동을 걸어 그 뒤를 따랐다. 물론 발각될까 봐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며칠 동안 실마리를 찾다가 이제야 뭔가 단서를 잡은 것 같다는 생각에 하윤은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윽고 운전하는 틈에 손을 바지에 쓱 문질러 땀을 닦아냈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던은 머리가 쭈뼛 곤두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바싹 뒤를 쫓던 하윤은 앞에서 가던 차가 웬 찻집에서 멈춰선 걸 발견했다. 엄석규가 차에서 내리자 그가 타고 있던 차는 홀연히 사라졌다. 엄석규가 찻집으로 들어가자 하윤은 그 뒤를 따라붙으려 했지만 한편으로는 발각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에 하윤은 고개를 돌려 던을 바라봤고 하윤과 거리를 유지하던 던이 얼른 입을 열었다. “저 사람 나도 봤어요.” ‘하긴, 그렇다면 누굴 찾아야 하지?’ “아, 케빈은 어때요?” ‘케빈…….’ 사실 한민혁 일행이 나타난 뒤로 하윤은 케빈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케빈이 여기까지 오려면 한참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은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케빈은 하윤 앞에 나타났다. “저희 흩어졌던 거 아니었어요?” 의아해하는 하윤을 보더니 케빈은 묵묵히 대답했다. “저는 하윤 씨 안전을 지켜줘야 합니다.” 케빈이 계속 자기를 따라왔다는 생각에 하윤은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케빈 씨를 태워야 한다는 걸 깜빡했어요.” 그 말에 케빈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아무것도 없는 곳에 버려둔 뒤 자기 보다 늦게 돌아오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던 민시영과 비교하면 하윤은 인자한 편에 속했다. 케빈이 찻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본 하윤은 그 뒤로도 한참
전화 건너편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내용은 듣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선택제를 좋아하나 보네? 좋아. 그렇다면 네 머리를 박살내 줄까 아니면 척추를 부러트려 줄까? 선택해 봐.” 한민혁은 자기 머리를 슬쩍 만져보더니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기, 그러니까 하윤 씨의 계획이 아주 성공적인 것 같아. 지금 엄석규의 배후에 있는 사람까지 추적한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어, 그러니까…….” 우물쭈물하는 민혁의 말투에 인내심이 바닥 난 도준은 끝내 참지 못하고 윽박질렀다. “계속 우물댈 거면 어떻게 죽고 싶은지부터 골라.”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생명의 위협을 느낀 민혁은 얼른 자기가 본 걸 그대로 뱉어냈다. “형 명령대로 하윤 씨를 따라다녔는데 던이 차에서 하윤 씨 엉덩이를 만지고 손을 조물딱거리는 걸 봐 버렸어.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 전화 건너편에서 이어지는 침묵에 민혁은 감히 숨조차 쉬지 못했다. 심지어 귓가에 들리는 전류 소리마저 차가운 바람이 되어 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난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윽고 민혁이 무릎이라도 꿇고 전화 받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전화 건너편에서 남자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민혁은 더 이상 도준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얼른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사진 찍었는데, 혹시 직접 볼래?” 잠시 뒤, 몇 장의 사진이 도준의 핸드폰에 도착했다. 거리 때문에 화면이 흐릿했지만 매일 문자에서 자기한테 애교 부리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손을 맞잡고 있는 걸 확인하는 데는 방해되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날뛰던 분노가 끝내 밖으로 점점 흘러나왔다. ‘진실을 파헤쳐 보라고 보내줬더니 이젠 다른놈을 만나고 다녀?’ ‘아주 잘하고 있네.’ 도준의 주위를 맴도는 기운이 너무 무서워 사무실에 들어왔던 민싱영은 한 바퀴 빙 돌아 그대로 다시 나가버렸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순간 매번 반기를 들며 시비를 걸어오던 대외무역 팀 부장과 마
민시영은 민도준의 화가 풀어지기는커녕 더 심해진 걸 보고 다시 슬그머니 뒷걸음 쳤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시영을 불러 세웠다. “여기가 무슨 관광지야?” 시영은 그 말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리가. 난 오빠가 내 말 들어줄 기분이 아닌 것 같아서 나가려고 한 거야.” 뒤집힌 의자를 바로 세운 시영은 바닥에 있는 핏자국을 보며 끌끌 혀를 찼다. “대외무역 팀 팀원은 모두 민병철 쪽 사람인데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이거 또 소란이 있을 것 같은데.” “하.” 도준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곧바로 연기와 함께 도준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됐네. 오늘 마침 제대로 놀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시영은 도준의 안색을 살피더니 한참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해원 쪽에 무슨 일 있어?” “…….” 비록 대답을 얻지 못했지만 해원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섬뜩하게 변하는 도준의 눈빛을 보고 시영은 답을 얻어냈다. 이윽고 시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 귀국하고 아직 해원에 가본 적 없네. 요즘 내가 제안한 프로젝트가 모두 무산되었으니 이 참에 놀러 가고 싶은데 혹시 휴가 내줄 수 있어?” 담배꽁초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상공에 닿을것처럼 굴다가 이내 에어컨 바람에 의해 흩어졌다. 그리고 한참 뒤, 소파에 앉아 있던 도준이 문뜩 시영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접었다. 그 순간 시영은 등골이 오싹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 왜 그렇게 봐?” 남자의 입꼬리는 위헙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더니 이내 그 사이로 말이 튀어나왔다. “해원은 나중에 가.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따스한 햇살이 사무실 안에 비쳐 들어왔지만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시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한 편, 차안에서 부는 찬 바람에도 하윤의 조급함을 가라앉지 않았다. 벌써 20여 분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자 하윤은 끊임없이 시계를 확인하며 이런저
곧바로 권하윤의 생각은 증명되었다.공씨 저택이 시야에 보이자 하윤은 자기의 생각이 맞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 한구석의 돌멩이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그래도 공씨 가문이라서 다행이야.’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 차를 세워 두고 묵묵히 모든 상황을 지켜봤다.공태준의 개인 저택도 사람의 손에 정교하게 꾸며져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공씨 본가 저택은 더욱 놀라웠다.고층 건물이 즐비한 해원에 이토록 조용한 곳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공씨 본가 저택은 사실 옛 황족의 저택이기에 벽은 지금 자주 사용하는 철근과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대신 거의 도자기처럼 정교하게 지어졌다. 때문에 면적이 너무 크지 않아도 그 값어치는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이곳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이기에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다.그 노인은 차에서 내린 뒤 정문 옆에 있는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심지어 문 앞 경호원은 아무런 검문도 하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번거로운 규칙이 가득한 공씨 가문에서 이렇게 저택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공씨 가문 사람뿐이다.하윤은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러니까 엄석규를 포함한 사람들이 공씨 집안 사람의 사주를 받았다는 거네?’그 사주를 내린 사람일 가능성이 제일 많은 사람은 바로 공채령의 아버지 공천하다.‘만약 아빠가 정말 공채령과 그런 사이라면…….’‘공채령을 그토록 통제하던 공천하가 아빠를 망가트리는 것도 말이 돼.’하윤의 눈에는 막연함이 차올랐다.‘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일이라고?’분명 명확해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하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정말 이렇게 간단하다면 도준 씨가 왜 계속 답을 알려주지 않았을까?’‘내가 아빠의 죽음에 관해 물었을 때 어느 정도 자기와 상관이 있다는 답은 또 뭐였고?’‘공태준이 나를 보여준 사진 속에 왜 도준 씨가 그것도 아빠가 투신하기 전 건물에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