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스로 집에 도망쳐 온 오나영은 신발이 벗겨진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심지어 누가 잡아당겼는지 두피마저 찌근거렸고 전화벨 소리가 목숨을 재촉하는 듯 쉴 새 없이 울려댔다. “너 이제 끝났어. 전에 계약했던 브랜드사에서도 위약금을 요구하는 상황이고. 이 문제는 모두 네가 초래한 거니까 위약금은 네가 해결해!” 늘 입만 열면 우리 귀염둥이 우리 여신 하면서 떠받들던 매니저의 싸늘한 말투에 가뜩이나 겁에 질려 있던 오나영은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언니, 언니마저 저 버리면 안 돼요. 언니가 저 이미지 복구하는 거 도와주면 그래도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이미 증거가 그렇게나 많이 나왔는데 어떻게 다시 일어서? 얼른 위약금 물 방법이나 생각해!” “…….” “언니? 언니!” 오나영은 몇 번 외치고 나서야 전화가 한참 전에 이미 끊어졌다는 걸 알아챘다. “이 속물들! 나 광고 몇 개만 찍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어!” 오나영이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분노를 표출할 때 전화가 벨이 다시 울렸다. 매니저가 다시 전화한 줄로 착각한 오나영은 다시 희망을 품고 전화를 받았다. “언니, 저 대신 방법 좀 생각…….” “악독한 X! 사람 목숨으로 쌓아 올린 성에서 여왕 놀이하니까 재밌었어?” “누구야? 당신 누구야?” 오나영이 버럭 화내며 소리쳤지만 전화는 이내 끊겼다. 하지만 곧이어 다음 전화가 걸려 왔다. “돈 돌려줘! 내가 선물 쏜 거 다 돌려달라고!” 오나영은 당황한 듯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헛수고였다. 전화를 끊으니 이내 메시지가 수도 없이 쏟아져 내렸으니까. 심지어 항상 오나영 편에 서 있던 팬덤까지 등을 돌려 돈을 돌려내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제야 오나영은 무서운 게 뭔지 까달았다. 심지어 핸드폰 전원을 꺼버려도 주위에서 수많은 눈이 자기를 분노와 증오의 눈빛으로 보는 것 같았고 욕설을 퍼붓는 것 같았다. 오나영은 미친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내가 피해자야. 내가 피해자라고!”
권하윤은 던의 차에 오르자마자 이어폰을 귀에 꼈다. 그때 손깎지를 낀 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던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앞에 차에 타지 않죠?” “엄석규 사무실에 뒀던 도청기에 신호가 잡혀서 들어보려고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하는 하윤의 모습에 던은 피식 웃었다. “재밌네요. 그러니까 지금 민 사장을 믿지 않는 거네요.” 그 말에 하윤은 일순 멈칫했다. “뭐라고요?” “설마 윤이 씨가 엄석규의 말을 도청하는 걸 민 사장이 아는 게 싫어서 제 차에 탄 거 아닌가요?” 던의 말에 하윤은 그제야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방금 확실히 민혁이 자기 계획을 듣는 걸 무의식적으로 배척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설마 나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도준 씨가 범인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이 들자 하윤은 순간 짜증이 치밀어 던을 돌아봤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사실을 말했을 분이에요.” 그 말에 하윤은 고개를 홱 돌려 더 이상 던과 얘기를 나누지 않고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엄석규는 누군가와 전화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는데 말투에는 조급함이 느껴졌다. “그 계집애가 돌아온 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가 볼 때 오래전부터 계획한 게 틀림없어요. 이제 어떡합니까!” 대화를 대충 들어도 그 계집이라는 사람이 바로 하윤 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윤은 상대의 말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이어폰을 귀로 꾹 막았지만 건너편에서는 조급한 발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알았어요. 늘 보던 곳에서 만나죠.” 엄석규가 갑자기 전화를 끊자 하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끝이라고?’ 그러다가 이어폰에서 문소리가 들리자 하윤은 얼른 고개를 돌려 던을 바라봤다.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은 ‘나 목적 있어요’ 라는 의도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던 씨.” 던은 하윤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슬쩍 움직였다. “왜요?” “저 차 좀 빌립시다.” “그래서요?” “좀 내려 주실래요?”
“띠띠!” 짤막한 경적 소리는 이내 권하윤의 주의를 끌었다. 평범한 검은색 폭스바겐이 엄석규 앞에 멈춰 서자 엄석규는 두말없이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그것만으로도 차 안의 사람과 엄석규가 아는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윤은 먼저 자동차 번호판을 사진 찍은 뒤 차가 출발하자 이내 시동을 걸어 그 뒤를 따랐다. 물론 발각될까 봐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며칠 동안 실마리를 찾다가 이제야 뭔가 단서를 잡은 것 같다는 생각에 하윤은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윽고 운전하는 틈에 손을 바지에 쓱 문질러 땀을 닦아냈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던은 머리가 쭈뼛 곤두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바싹 뒤를 쫓던 하윤은 앞에서 가던 차가 웬 찻집에서 멈춰선 걸 발견했다. 엄석규가 차에서 내리자 그가 타고 있던 차는 홀연히 사라졌다. 엄석규가 찻집으로 들어가자 하윤은 그 뒤를 따라붙으려 했지만 한편으로는 발각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에 하윤은 고개를 돌려 던을 바라봤고 하윤과 거리를 유지하던 던이 얼른 입을 열었다. “저 사람 나도 봤어요.” ‘하긴, 그렇다면 누굴 찾아야 하지?’ “아, 케빈은 어때요?” ‘케빈…….’ 사실 한민혁 일행이 나타난 뒤로 하윤은 케빈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케빈이 여기까지 오려면 한참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은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케빈은 하윤 앞에 나타났다. “저희 흩어졌던 거 아니었어요?” 의아해하는 하윤을 보더니 케빈은 묵묵히 대답했다. “저는 하윤 씨 안전을 지켜줘야 합니다.” 케빈이 계속 자기를 따라왔다는 생각에 하윤은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케빈 씨를 태워야 한다는 걸 깜빡했어요.” 그 말에 케빈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아무것도 없는 곳에 버려둔 뒤 자기 보다 늦게 돌아오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던 민시영과 비교하면 하윤은 인자한 편에 속했다. 케빈이 찻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본 하윤은 그 뒤로도 한참
전화 건너편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내용은 듣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선택제를 좋아하나 보네? 좋아. 그렇다면 네 머리를 박살내 줄까 아니면 척추를 부러트려 줄까? 선택해 봐.” 한민혁은 자기 머리를 슬쩍 만져보더니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기, 그러니까 하윤 씨의 계획이 아주 성공적인 것 같아. 지금 엄석규의 배후에 있는 사람까지 추적한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어, 그러니까…….” 우물쭈물하는 민혁의 말투에 인내심이 바닥 난 도준은 끝내 참지 못하고 윽박질렀다. “계속 우물댈 거면 어떻게 죽고 싶은지부터 골라.”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생명의 위협을 느낀 민혁은 얼른 자기가 본 걸 그대로 뱉어냈다. “형 명령대로 하윤 씨를 따라다녔는데 던이 차에서 하윤 씨 엉덩이를 만지고 손을 조물딱거리는 걸 봐 버렸어.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 전화 건너편에서 이어지는 침묵에 민혁은 감히 숨조차 쉬지 못했다. 심지어 귓가에 들리는 전류 소리마저 차가운 바람이 되어 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난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윽고 민혁이 무릎이라도 꿇고 전화 받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전화 건너편에서 남자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민혁은 더 이상 도준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얼른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사진 찍었는데, 혹시 직접 볼래?” 잠시 뒤, 몇 장의 사진이 도준의 핸드폰에 도착했다. 거리 때문에 화면이 흐릿했지만 매일 문자에서 자기한테 애교 부리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손을 맞잡고 있는 걸 확인하는 데는 방해되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날뛰던 분노가 끝내 밖으로 점점 흘러나왔다. ‘진실을 파헤쳐 보라고 보내줬더니 이젠 다른놈을 만나고 다녀?’ ‘아주 잘하고 있네.’ 도준의 주위를 맴도는 기운이 너무 무서워 사무실에 들어왔던 민싱영은 한 바퀴 빙 돌아 그대로 다시 나가버렸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순간 매번 반기를 들며 시비를 걸어오던 대외무역 팀 부장과 마
민시영은 민도준의 화가 풀어지기는커녕 더 심해진 걸 보고 다시 슬그머니 뒷걸음 쳤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시영을 불러 세웠다. “여기가 무슨 관광지야?” 시영은 그 말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리가. 난 오빠가 내 말 들어줄 기분이 아닌 것 같아서 나가려고 한 거야.” 뒤집힌 의자를 바로 세운 시영은 바닥에 있는 핏자국을 보며 끌끌 혀를 찼다. “대외무역 팀 팀원은 모두 민병철 쪽 사람인데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이거 또 소란이 있을 것 같은데.” “하.” 도준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곧바로 연기와 함께 도준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됐네. 오늘 마침 제대로 놀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시영은 도준의 안색을 살피더니 한참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해원 쪽에 무슨 일 있어?” “…….” 비록 대답을 얻지 못했지만 해원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섬뜩하게 변하는 도준의 눈빛을 보고 시영은 답을 얻어냈다. 이윽고 시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 귀국하고 아직 해원에 가본 적 없네. 요즘 내가 제안한 프로젝트가 모두 무산되었으니 이 참에 놀러 가고 싶은데 혹시 휴가 내줄 수 있어?” 담배꽁초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상공에 닿을것처럼 굴다가 이내 에어컨 바람에 의해 흩어졌다. 그리고 한참 뒤, 소파에 앉아 있던 도준이 문뜩 시영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접었다. 그 순간 시영은 등골이 오싹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 왜 그렇게 봐?” 남자의 입꼬리는 위헙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더니 이내 그 사이로 말이 튀어나왔다. “해원은 나중에 가.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따스한 햇살이 사무실 안에 비쳐 들어왔지만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시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한 편, 차안에서 부는 찬 바람에도 하윤의 조급함을 가라앉지 않았다. 벌써 20여 분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자 하윤은 끊임없이 시계를 확인하며 이런저
곧바로 권하윤의 생각은 증명되었다.공씨 저택이 시야에 보이자 하윤은 자기의 생각이 맞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 한구석의 돌멩이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그래도 공씨 가문이라서 다행이야.’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 차를 세워 두고 묵묵히 모든 상황을 지켜봤다.공태준의 개인 저택도 사람의 손에 정교하게 꾸며져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공씨 본가 저택은 더욱 놀라웠다.고층 건물이 즐비한 해원에 이토록 조용한 곳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공씨 본가 저택은 사실 옛 황족의 저택이기에 벽은 지금 자주 사용하는 철근과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대신 거의 도자기처럼 정교하게 지어졌다. 때문에 면적이 너무 크지 않아도 그 값어치는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이곳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이기에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다.그 노인은 차에서 내린 뒤 정문 옆에 있는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심지어 문 앞 경호원은 아무런 검문도 하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번거로운 규칙이 가득한 공씨 가문에서 이렇게 저택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공씨 가문 사람뿐이다.하윤은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러니까 엄석규를 포함한 사람들이 공씨 집안 사람의 사주를 받았다는 거네?’그 사주를 내린 사람일 가능성이 제일 많은 사람은 바로 공채령의 아버지 공천하다.‘만약 아빠가 정말 공채령과 그런 사이라면…….’‘공채령을 그토록 통제하던 공천하가 아빠를 망가트리는 것도 말이 돼.’하윤의 눈에는 막연함이 차올랐다.‘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일이라고?’분명 명확해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하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정말 이렇게 간단하다면 도준 씨가 왜 계속 답을 알려주지 않았을까?’‘내가 아빠의 죽음에 관해 물었을 때 어느 정도 자기와 상관이 있다는 답은 또 뭐였고?’‘공태준이 나를 보여준 사진 속에 왜 도준 씨가 그것도 아빠가 투신하기 전 건물에 있었지?
차 문이 열리자 케빈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제 직책은 사모님을 보호하는 겁니다. 제 생사를 상관하지 마세요.”권하윤은 케빈의 말을 무시한 채 차에서 내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진정을 되찾았다.“괜찮아요. 마침 공씨 집안의 어떤 분이 보자고 하는지 궁금했으니까.”낚시를 하면 하는 사람이 미끼로 물고기를 낚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도 낚싯줄을 타고 낚시꾼을 찾을 수 있으니까.탓하려면 대어를 낚겠다고 행적을 노출한 하윤 본인을 탓해야 한다.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하윤은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이제 겨우 진실에 가까워졌는데 포기할 수 없어.’그때 맨 앞에 선 경호원이 하윤을 향해 손짓했다.“이시윤 씨, 들어가시죠.”하윤은 케빈을 바라봤다.“케빈 씨는 이만 가보세요.”케빈은 다리에 난 상처를 힐끗 보고는 따라가면 짐만 된다는 판단 하에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하윤은 그래도 던에게 뭐라도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는데,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다시 주위를 살펴보니 던은 이미 7,8 미터 떨어진 곳에서 하윤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도망 한번 빨리 치네.’그렇게 하윤은 공씨 집안 경호원들의 감시하에 공씨 저택에 발을 들였다.경호원들을 따라 들어간 건 여전히 옆문이었다.문턱을 넘어서니 맞은편에 벽이 막혀 있어 시선마저 차단되었다.하지만 하윤이 벽면에 새겨진 무늬를 찬찬히 확인하기도 전에 등 뒤의 문이 닫혀 버렸다.그와 동시에 길가에서 들리던 인기척 소리도 문밖으로 차단되어 하윤은 왠지 조금 불안해졌다.벽을 지나자 초목이 우거진 정원에 도착하자, 커다란 나무가 정원에 세워져 있는 석상에 드리우면서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주홍색으로 칠한 기둥을 지나자 어느새 정원의 끝이 눈에 들어왔다.분명 울긋불긋한 꽃과 버드나무가 가득하고 호수가 놓인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곳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곳곳에서 침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그 원인은 바로 곳곳에 숨어 있는 저택 하인들 때문이었다.그들은 모두 어깨를 한껏
공천하는 덤덤하게 자기를 자극하는 권하윤을 바라봤다.“결백? 네 아비가 결백하다면 왜 자기 스스로 해명하지 않았을까?”그날 천지를 뒤덮을 듯 들려왔던 부정적인 기사들을 다시 떠올리자 하윤은 다시 그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학생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아버지를 파렴치한 사람으로 몰던 그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주림 선배가 나서서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려 했다.기억을 뒤로한 채 애써 현실로 돌아온 하윤은 공천하를 바라봤다.“우리 아버지를 고발했던 학생들은 이미 사람의 사주를 받았다는 걸 확인했어요. 그리고 그 사주한 사람이 바로 공씨 집안 사람이라는 것도 확인했고요. 이런 말을 하는 건 남의 이목을 현혹하려는 목적인가요, 아니면 자기가 한 짓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발뺌하는 것인가요?”몇 초간 침묵이 흐르더니 공천하는 그제야 몸을 돌려 처음으로 하윤을 정면으로 바라봤다.공천하는 이제 더 이상 공씨 집안 가주가 아니지만 타고난 카리스마는 사람을 강하게 압박했다. 심지어 예의 바르고 고귀한 분위기 속에 남보다 뛰어나다는 자신감이 내재되어 있었다.“네 아비처럼 하등한 인간한테 내가 그렇게 시간 낭비하며 상대할 필요가 있을까?”사람을 버러지만도 못한 취급을 하는 듯한 한마디는 너무나도 모욕적이었다.하지만 하윤은 이를 꽉 악문 채 화를 눌러 참았다. ‘화내면 안 돼. 화를 내면 공천하한테 말리는 거야.’하윤은 심호흡을 하더니 오히려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건 모르죠. 만약 하등한 인간이 고귀한 인간이 꿈에 그리던 걸 가지고 있었다면 시간과 공을 들여 상대할 필요가 있지 않겠어요?”싸늘한 눈빛이 하윤을 쏘아봤지만 하윤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여기까지 온 이상 하윤은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그때 하윤과 눈을 마주치고 있던 공천하가 시선을 거두더니 이내 재스민을 바라봤다.“어쩐지 태준이가 가주 자리도 포기하고 너를 지키려 들더니, 역시나 보통내기가 아니군.”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뜻이죠?”공천하는 손을 들어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