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 씨, 괜찮아요?” 민시영의 목소리를 듣자 권하윤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공허한 마음과 함께 코끝이 시큰거릴 뿐. “저 괜찮아요.” 시영은 하윤의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번 일은 제가 처리할 테니까. 이제 그런 소리 듣지 않아도 돼요.” 하윤은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공황에서 벗어나려 했다. “괜찮아요, 시영 언니는 상관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시영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래요, 그럼 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시영이 잠깐 멈칫하는 사이 하윤은 순간 뭔가를 느꼈는지 꺼졌던 희망이 다시 불타올랐다. 그걸 모르는 시영은 전화 건너편에서 하윤이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고 있을까 봐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인터넷 댓글은 너무 신경 쓸 거 없어요. 그 사람들이 싫어하는 악한 사람인데 윤이 씨는 아니잖아요.” “네, 알겠어요.” “다른 일 없으면 이만…….” “시영 언니.” 전화를 끊으려던 시영이 멈칫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그 순간 하윤이 핸드폰을 꽉 쥐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처럼. “도준 씨랑 혹시 같이 있어요?” “…….”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한밤중에 전류를 타고 방 안에 흘러 들었다. 이에 시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몇 초 뒤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오빠가 저랑 같이 있겠어요? 도준 오빠는 아마 자고 있겠죠.” 물론 시영의 말이 맞는 말이었지만 하윤은 믿을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하윤은 마치 도준이 전화 건너편에서 자기를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시영 언니가 아니라고 하니, 아마 도준 씨가 나랑 말 걸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도준이 듣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하윤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늦었는데 걱정시켜서…….” 환한 거실 안, 시영은 난감한
민씨 저택. 민시영은 소리 없이 하품을 하며 얼어붙은 것처럼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한번 훑어보더니 이내 시계를 힐끗 스쳐봤다. 벌써 4시. 민재혁네 식구가 요즘 얌전해서 그나마 편히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솔직히 방금 새벽 3시 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려 안채로 부를 때, 시영은 할아버지가 다시 살아 돌아온 줄 알고 섬뜩했었다. 그런데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오늘 잠 자기는 글러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끝내 참지 못한 시영은 슬금슬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나선 시영은 계단 앞에서 저도 모르게 습관 적으로 손을 들었다. 이건 야맹인 시영의 습관이다. 하지만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걸 문뜩 인지한 순간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걸렸다. ‘내가 진짜 잠을 못 자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네. 내 손으로 직접 해원으로 보냈으면서 부축해 주길 바라다니.’ 홀로 난원에 돌아간 시영은 창가에 서서 고요한 저택을 살폈다. 그 순간 어두운 창에 희미한 그림자가 비쳤다. 한편, 해원에 있는 케빈도 창가에 서서 네온사인으로 물든 강을 구경하고 있었다. 밤이 저물자 흥도 점점 식어갔다. …… 다음날. 하윤이 깨어났을 때 핸드폰 베터리가 나가 전원이 꺼져 있었다. 그건 하윤의 핸드폰도 마찬가지였다. 하윤은 얼른 핸드폰을 충전하고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 그러고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할 때 그 핸드폰을 케빈에게 돌려주었다. “죄송해요, 어제 케빈 씨 핸드폰을 제가 가져가 버려서.” 케빈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에 하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하기 시작하더니 한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오늘 누구 좀 만나야 할 것 같아요.” 하윤은 진은영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몇 년 전 오나영과 채영 모두 하윤의 아버지가 자기한테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고발했지만 진은영은 그저 증인 신분으로 증언했다. 때문에 계획을 실행하기 전 하윤은 진은영이 오나영과 채영과 함께 돈을 받
권하윤의 말에 어느 정도 태도가 누그러졌던 진은영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시윤아, 나 원래 네 아빠와 너는 다르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만약 네 아버지를 위해 변명이라도 하려고 찾아온 거라면 미안한데 그만 나가 줄래?” “저 변명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아빠 정말 억울하게 당한 거라고요. 오나영과 채영이 돈을 받고 아빠를 모함했어요.”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선배도 아빠 밑에서 오랫동안 배웠잖아요. 그런데도 제 아빠 인성을 못 믿어요?” “내가 애초에 교수님을 너무 믿었던 게 문제야. 그래서 그걸 직접 목격했을 때 더 구역질 났던 거고!” 진은영의 표정은 분노 때문에 일그러졌다. “교수님 밑에서 배웠던 게 수치스러울 만큼!” 상대가 아버지를 폄훼하자 더 이상 냉정을 취할 수 없었던 하윤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제가 볼 때는 아빠가 선배 같은 제자를 둔 게 치욕이에요!” “뭐라고?” 진은영이 버럭 소리 지르자 하윤은 곧바로 어제 찍어 두었던 영상을 재생해 진은영에게 던져 주었다. “직접 봐요.” 진은영은 의아해하며 핸드폰을 건내 받았다. 그렇게 보게 된 영상 속에는 오나영과 채영이 화장실 거울 앞에서 대화하는 모습이 들어 있었다.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대화의 첫 마디를 듣는 순간 진은영은 할 말을 잃었다. “너 뭐 하자는 거야? 우리가 위증을 했다는 걸 시윤이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진은영은 마치 머리라도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 충격에 빠트린 건 그 뒤에 이어진 둘의 대화였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에 진은영은 영상이 끝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하윤이 진은영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입을 열었다. “이래도 제 아버지가 두 사람을 추행하는 걸 선배 눈으로 직접 봤다고 할 수 있어요?” 진은영은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 순간 진은영의 얼굴에는 미안함, 분노 그리고 비통함이 섞여 있었다. 심지어 혼이라도 나간 것처럼 말도 더듬었다.
생각을 정리한 권하윤은 깊은 숨을 들이켰다. “은영 선배, 우리 아빠가 돌아가셨다지만 저는 아빠가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걸 볼 수 없어요. 선배가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진은영을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진은영의 눈에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가득했다. “네가 그런 말 하지 않아도 교수님 결백을 증명하고 싶었어. 교수님은…….” 한창 말하던 진은영의 눈시울은 이내 붉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어리석었어. 내가 교수님을 오해하다니, 교수님은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 진은영은 하윤의 손을 꼭 잡았다. “차라리 나 때려. 욕해도 돼.” 하윤은 텅 빈 눈으로 진은영을 바라봤다. ‘지금 때린다고 뭐가 달라지나? 아빠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아버지가 그런 누명까지 쓰면서 뛰어내린 건 공은채를 위한 거잖아.’ 그 순간 눈 앞에 어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렸고 귓가에 확신을 가진 채 말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난 네 아빠 믿어.” 눈을 감은 순간 눈물이 하윤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진은영의 집을 떠날 때, 하윤의 다리는 마치 철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겁기 그지없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앉아 휴식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호텔로 돌아간 하윤은 던을 찾아갔다. 하지만 던의 방문을 한참 동안 노크해도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던이 없으니 하윤은 자기 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공간에서 하윤은 점점 생각에 잠겼다. ‘아빠는 왜 공은채랑 껴안고 있었던 거지?’ 그 순간 오나영이 식사 자리에서 비아냥거리듯 말했던 한 마디가 떠올랐다. “학생과 불륜을 저지르는 게 무슨 음악가라고…….” ‘그 말은 단지 나를 찍어 누리기 위해 했던 걸까? 아니면 뭘 알고 하는 얘기였을까?’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했다. 심지어 거대한 소용돌이가 하윤을 삼켜버리는 것만 같았다. …… 오후에 방으로 돌아온 던은 하윤의 안색을 보고는 예의껏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고 커피를
권하윤은 우는 소리를 내며 귀를 쫑긋 세우고 전화 건너편의 소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목이 쉬도록 울어 댔지만 건너편에서는 한마디 위로의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에 신호가 안 좋은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귀에서 떼어내 관찰하고 있을 때 전화 건너편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 울었어?”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하윤은 하마터면 핸드폰을 그대로 던져버릴 뻔했다. 하지만 그런 충동을 누른 채 의아한 듯 물었다. “저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전화 오면 지역이 뜨는 거 몰랐어?” 하윤은 순간 난처했다. 하지만 이내 의문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내가 전화한 걸 알면서도 전화 받았다는 건가?’ 그걸 인지한 순간 난처함은 기쁨으로 변했고 손가락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 변두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울려고 했는데 도준 씨 목소리를 들으니까 울기 싫어 졌어요.” “또 병이 도졌어?” 감정을 알 수 없는 목소리에 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 ‘설마 내가 또 속인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 저는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어젯밤…….” “뚜뚜뚜…….”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끊어진 전화에 하윤은 풀이 죽었다. 하지만 도준과 말이라도 했다는 생각을 하니 충전이라도 한 것처럼 힘이 솟아났다. 이에 하윤은 다시 침대에 엎드린 채 엄석규의 자료를 펼쳐봤다. 엄석규는 이성호와 마찬가지로 해원 음악 대학의 선생이다. 물론 이성호는 교수이고 엄석규는 부교수였지만. 그런데 지금 엄석규는 학교의 부총장으로 승진했다. 엄석규는 이성호처럼 평생 음악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관직에 더 집착했다. 보통 사람이 위로 올라가려면 필요한 요소는 적지 않다. 인맥, 스펙, 직함 그리고 배경 등등. 엄석규와 이성호는 대학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는데 집안은 그나마 풍족하게 사는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앞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엄석규가 위증을 하고 난 뒤 고작 몇 년 동안 부교수에서 바로 교수, 학과장, 부학장,
행사 당일. 하윤은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던의 서류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스폰서인 던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심지어 학장이 직접 두 명의 학과장과 영어 통역을 도와줄 영어 선생님을 데리고 마중 나왔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던에게 영어 선생님은 사실 필요 없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던은 매번 한국어 발음을 또박또박 하려고 애쓰다 보니 외국인이 한국어 듣기 평가 시험 문제를 읽는 것 같다는 착각을 주기는 했다. 학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런 던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해원 음악 대학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선 학교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점심은 학교 귀빈실에 준비해 뒀습니다. 그리고 행사는 오후 1시에 옆에 있는 콘서트홀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학장은 말하면서 영어 선생님을 바라봤고 영어 선생님이 통역을 하는 동안 던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경청했다. 하지만 영어 선생님이 어렵사리 통역을 마치자 그제서야 유창한 한국어로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 말에 학장과 영어 선생님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다가 본관에 도착하자 존재감을 숨기고 있던 하윤이 갑자기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고, 앞에서 걸어가던 던이 발걸음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이 건물은 조금 특이해 보이네요.” 학장과 학과장은 일제히 퇴색한 낡은 건물을 바라봤다. 이윽고 귀빈의 취향을 모르는 학장은 마지못해 맞장구 치며 대답했다. “네, 뭐 고풍스럽고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물이긴 하죠.” “그렇게 칭찬하니 들어가 보고 싶네요.” 던은 사람들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말을 마치자마자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 저기…….” 학장은 이내 던을 막으려 했지만 곧이어 반시간도 넘는 사무실 관광이 이어졌다. 교실부터 교사들의 사무실, 심지어는 도구실까지 던은 꼼꼼히 살폈다. 그렇게 총장실에 도착하자 학장은 너무 놀라 머리가 곤두섰다. “저기……, 총장실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그
방금 들어올 때 권하윤은 대충 정찰했는데 도청기를 숨기기 가장 적합한 곳은 바로 테이블 아래였다. 테이블은 하윤이 있는 정수기와 약 2,3 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학장이 계속 하윤을 보고 있는 바람에 쉽사리 손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하윤이 조급해할 때 던이 벽을 짚으며 입을 열었다. “이 사진들 재밌네요.” “아, 이 사진 말씀이시구나. 이건 저희 학교 부총장입니다…….” 학장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위치가 애매한 터라 고개만 돌리면 들킬 게 뻔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한 데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기에 하윤은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정했다. 컵을 정수기 위에 올려 놓은 하윤은 물을 내리는 버튼을 누르고는 기회를 엿봐 재빨리 테이블 쪽으로 몸을 숙였다. 대화 소리와 물 소리가 함께 들려오자 하윤의 심장은 더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종이컵에 물이 차는 건 한순간이기에 그 사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너무 긴장한 탓에 손이 떨리는 데다 손바닥에 땀이 차올라 하윤은 테이프를 떼어낼 때 몇 번이나 실패했다. 심지어 물이 컵에 차는 동안 물소리가 점점 변했다. 그런 변화는 마치 하윤의 명을 재촉하는 듯했고 빨리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었다. 다행히 물컵이 찬 순간 하윤은 도청기를 테이블 아래에 붙이는 데 성공했다. 하윤은 학장이 있는 방향을 감히 보지도 못한 채 얼른 정수기 쪽으로 달려가 버튼을 눌렀다. 불과 20초도 안 되는 사이 하윤의 등은 식은 땀에 흠뻑 젖었고 입을 가린 마스크 때문에 안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제야 하윤은 조심스럽게 학장이 있는 쪽을 바라봤는데, 그 시각 학장은 끊임없이 물어보는 던 때문에 정신이 팔려 하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 쉬며 하윤은 조심스럽게 넘쳐날 것처럼 찰랑거리는 물컵을 들고 던 쪽으로 걸어갔다. “드세요.” 여유만만하던 던은 물에 축축하게 젖어 있는 종이컵을 보더니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때마침 학장의 아부 섞인 목소리가 들
“야, 저 사람 오나영 선배 아니야?” “정말이네? 나영 선배도 오늘 행사에 참석하나 봐.” 시선이 집중된 곳에서 오나영은 스포티한 옷차림으로 식당에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오나영의 팬인 여자 후배가 용기 내어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저 선배님 오래 전부터 팬이었어요. 오늘 이렇게 보게 돼서 너무 기뻐요.” 오나영은 후배의 말에 입을 가리며 웃었다. “나도 너희들한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돼서 기뻐.” “선배님 멘탈 진짜 짱이네요. 요즘 악녀한테 괴롭힘 당했다면서요? 그 소식 듣고 엄청 걱정했어요.” 오나영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걔도 아버지 때문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거니까. 물론 내 인생이 걔네 아버지 때문에 망치긴 했어도 그 애를 탓하지는 않아. 그냥 하루빨리 진실을 보는 안목을 기르기를 바랄 뿐이야.” “선배님은 어쩜 그렇게 착해요? 제가 만약 그렇게 악독한 부녀를 만났다면 먼저 주먹부터 날라갔을 텐데.” 조소와 악랄함이 섞인 단어들은 칼자루처럼 하윤의 가슴을 찔러댔다. 이에 입맛조차 사라진 하윤은 식판을 들고 바로 식판 회수 창구로 향했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뒤에 있던 오나영이 하윤을 알아봤다. “시윤?” 마침 쥐처럼 숨어 다니는 하윤을 보며 오나영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너 왜 그런 차림으로 있어? 설마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그래?” 오나영은 일부러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소개할게. 이 사람이 바로 이성호 딸이자 내 후배야.” 오나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 학생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왔지?” “그러게 말이야. 설마 학교 행사를 망치려고 온 건 아니겠지?” “진짜 뻔뻔하다.” 그때 흥분한 남자 후배가 오나영의 앞을 막아서며 하윤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너 같은 건 우리 학교에 올 자격 없어!” “당장 나영 선배한테서 떨어져!” 하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들에게 둘러 쌓였고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분노 가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