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민 사장도 다음 주에 기술팀을 데리고 회사로 방문하여 우리 회사 선박의 내비게이션 기술 시스템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겠다고 했고요…….” 마리는 보고를 할 때도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녀의 보스가 누군가와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오늘 그가 오늘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마리는 오히려 의아했다. 얼굴을 비추지 않을 거면 여기까지 따라올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때 청회색의 눈동자가 마리에게로 옮겨지더니 채 마르지 않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마리의 젖은 어깨 위에 멈췄다. 물에 젖은 자국이 마치 얼룩처럼 셔츠 어깨 라인을 따라 점점 퍼져 남자의 마음은 오히려 심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짜증나는 듯 시선을 다른 데로 옮겼다. “알았어. 나가 봐.” 마리도 자기 어깨에서 점점 번지는 물 자국 때문에 보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걸 눈치채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급히 나오다 보니. 저는 이만 돌아가서 선박 모델에 관한 정보를 정리하겠습니다. 내일 귀국할 텐데 비행기 티켓 예약할까요?” ‘귀국…….’ 남자는 자기의 메일과 부재중 전화 기록을 샅샅이 살폈지만 낯선 번호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소원이 없나?’ 그렇다면 그도 번거롭게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래. 내일 오후 2시 거로 예약해.” “네.” …… “솨…….” 욕실의 따뜻한 물줄기가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 위에 떨어지더니 여자의 긴 머리카락과 남자의 손등을 지나 바닥에 떨어졌다. 원래는 아름답고 온화해야 할 분위기가 정신이 혼미 해 있는 여자 때문에 깡그리 망가졌다. 머리를 씻을 때 잔뜩 취한 하윤이 글쎄 사레까지 들린 거다. 심지어 혼잣말로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저 이대로 죽는 거 아니에요? 저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도준은 잔뜩 울상이 된 하윤의 모습에 오히려 피식 웃더니 샤워기 헤드를 내려 거품이 가득한 하윤의
일어나 앉은 민도준은 권하윤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뭐가?” 하윤은 다른 걸 신경 쓸 겨를 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알면서 뭘 물어요?” 도준의 시선이 하윤의 쇄골 아래로 흘러내렸다. 심지어 그 눈빛은 노골적이기까지 했다. “잊어버렸는데.” “아니!” 하윤은 목이 메어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제 그렇게 미친 듯이 해댔는데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어떡하지?’ 하윤은 자기의 일만으로도 혼란스러워 미칠 지경인데 만약 여기에서 다른 일까지 더해지면 아마 살아갈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하윤은 얼른 바닥에 흐트러진 옷을 대충 몸에 걸치고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발을 떼기도 전에 도준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심하게 반응해?” 하윤은 마구 버둥댔다. “이거 놔요.” 지금이라도 당장 나가 약을 하고 싶었다. 더 늦었다간 효과가 없으면 안 되니까. 도준은 조급해하는 하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녀를 침대 위에 내팽개쳤다. “왜? 내 아이 갖는 게 그렇게 싫어?” 하윤도 순간 욱해졌는지 버럭 소리쳤다. “애를 낳든 말든 제 자유예요. 아무리 도준 씨라도 제가 모르는 상황에서 임신하게 할 자격 없다고요!” 어제부터 오늘까지 너무나 많은 일이 예상을 빗겨 나갔다. 도준이 가족을 모셔오겠다는 말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도준과 잠자리를 가진 것도. 더욱 두려운 건 하윤도 완전히 빠져 버렸다는 거다. 물론 알코올의 작용도 있겠지만 눈 앞의 남자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게 더욱 컸다. 하윤의 몸과 마음은 이미 도준을 담고 있기에 계기만 있다면 어렵게 쌓아 올린 벽이 모두 무너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 하윤은 도준한테 화나는 동시에 자기한테 더 화가 났다. 분명 모든 사실을 알아낼 때까지 도준과 거리를 두고 절대 흔들리지 않으려 했건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분했다. 끝내 참고 있던 눈물이 눈시울을 넘쳐나 창백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구는 하윤을 보자
현격한 힘의 차이로 인해 버둥대는 게 소용없자 권하윤은 화가 난 듯 자기 옆을 짚고 있는 민도준의 팔을 물어버렸다. 하지만 도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하윤을 내려다봤다. 분노의 물결이 반짝이는 하윤의 눈을 보자 순간 길들지 않는 늑대 새끼를 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의 팔에 붙은 살을 뜯어낼 것처럼 물고 있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했다. 한참 뒤 도준이 더 이상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한 하윤은 그의 팔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빨간 피는 이미 하윤의 입술선을 타고 옆으로 퍼졌다. 깊숙하게 파인 이발 자국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걸 보고 나서야 하윤은 순간 흠칫했다. ‘내가 이렇게 세게 물었다고?’ ‘아니지. 도준 씨는 통증도 못 느끼나? 왜 움직이지도 않지?’ “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하윤의 눈빛에는 약간의 당혹함이 묻어 있었다. 심지어 입안에서 번지는 피비린내에 불안감까지 더해져 감히 도준을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도준은 피가 흘러나오는 상처를 힐끗 바라봤다. “하, 독하네.” 하윤의 분노는 어느새 사라져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고 버둥댔다. “제가 소독해 줄게요.” “됐어. 독이라도 탈까 봐 오히려 무서워. 얼른 씻고 밥 먹어.” 나란히 세면대에 서서 손을 씻을 때 하윤은 도준의 팔을 힐끗 바라봤다. 이미 진정을 되찾은 하윤은 그제야 약은 도준이 떠난 뒤 사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확실히 이렇게 모순을 격화할 필요까진 없었다. 더욱이 도준은 오히려 약한 태도를 보여야 약하게 나오는 사람인데 말이다. 하지만 방금 그렇게까지 한 건 순전히 아이를 낳아줄 여자가 널렸다는 말에 화가 나서였다. 한바탕 소란을 피운 덕분인지 아침 식사를 할 때 하윤은 많이 조용해졌다. 물론 여전히 눈을 굴리며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지만. 하지만 도준은 마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하윤에게 음식을 집어 주었다. “많이 먹어. 이렇게 말라서 어떡해? 힘만 쓰면 부러질까 봐 겁나.” 하윤은 묵묵히 식사를 하면
총총 걸음으로 침실로 달려가 휴지통을 확인한 권하윤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민도준은 방금 하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면서도 아이를 갖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애를 쓰는 하윤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건 내 자유야. 도준 씨가 잘 못한 거야.” 하윤은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답답함은 줄곧 가슴 속에서 맴돌았다. 그런 답답함음 권희연의 집에 도착해서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윤이 집에 도착하자 희연은 그녀에게 슬리퍼를 건넸다. “어서 와.” 하윤은 전에 로건의 집에 한번 와 본적이 있다. 그때의 집과 지금의 집은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또 곳곳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 의자 위에는 따뜻한 방석이 놓여 있었고 소파 커버도 예쁜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주방에 들어가 보니 로건이 냄비를 손에 들고 음식을 하고 있었는데 정상적인 크기의 냄비가 로건의 손에서 마치 장난감처럼 보였다. 그 옆에 있는 희연은 로건을 위해 소스를 만들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뒷모습은 여전히 커다란 빵과 그 위에 붙어 있는 참깨처럼 덩치 차이가 선명했다. 변한 게 있다면 두 사람 사이에 달콤한 분위기가 흘러 넘친다는 거였다. 그런 분위기에 물들었는지 식사를 할 때 하윤의 기분은 한결 가벼워졌다. 소파에 앉은 하윤은 행복한 희연의 모습에 대신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 “언니가 로건 씨랑 이렇게 알콩달콩 지내니 내가 다 기쁘네. 정말 잘 됐어.” 권희연은 그 말에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가 나를 권씨 가문에서 끌고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 이런 생활은 꿈도 못 꿨을 거야.” 그런 말을 들으니 하윤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언니가 용기 낸 거잖아.” 희연은 싱긋 웃으며 목을 축였다. “그리고 사실 너한테 말해줄 게 있어.” “뭔데?” “나 임신했어.” “정말? 언제 적 일인데?” 하윤이 놀란 듯 묻자 희연은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자기 배를 문질렀다. “한달 조금 넘었어. 사실을 알고 난 뒤 너
한 번은 로건이 또 포기하려고 할 때 권희연은 급한 마음에 자기는 아픈 것에 익숙하다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희연은 그때를 회상하며 권하윤을 바라봤다. “그랬더니 로건 씨가 뭐라 했는 줄 알아?” 하윤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희연은 표정은 약간 슬픔이 담겨 있었지만 이내 온화하게 변했다. “아픈 게 어떻게 익숙해질 수 있냐고 하더라고. 아픈 건 그냥 아픈 거라면서.” 희연은 눈시울이 붉어졋다. “그 순간 알겠더라. 내가 지금껏 뭘 두려워했는지. 난 나의 과거 때문에 로건 씨가 나를 함부로 대할까 봐 두려웠던 거였어. 내가 그런 아픔을 겪었으니 자기가 주는 아픔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까 봐.” “그런데 로건 씨가 그 말을 해주니까 내 마음 속의 매듭이 풀어지는 기분이었어. 로건 씨는 평생 나를 아프게 할 리 없다는 걸 아니까.” …… 희연의 집을 떠날 때는 벌써 오후 1시였다. 하윤은 뒷좌석에 멍하니 앉아 ‘곧 코너를 도니 몸이 조심하세요’, ‘앞에 방지 턱이 있으니 손잡이 꼭 잡으세요’라고 중얼거리는 로건의 말을 들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떠나기 전 희연이 해줬던 진심 어린 조언을 되새겼다. “하윤아, 사실 어떤 일은 오해 때문에 놓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있는 매듭 때문에 쉽게 놓지 못하는 거야.” “그때 나도 로건 씨가 나를 싫어한다고 오해하고 집을 나갔었잖아. 그거 사실 오해 같지만 따지고 보면 나 스스로 지난 일을 놓지 못한 것 때문이야.” “네가 요즘 우울해하는 걸 보니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 너도 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고 네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해.” ‘마음의 소리?’ 차에서 내린 뒤 하윤은 곧바로 올라가지 않고 동네를 천천히 산책하며 희연이 했던 말과 자기의 현재 상황을 생각해 봤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윤과 희연의 상황은 달랐다. 가족이 없었다면 하윤은 자신을 놓을 수 있지만 가족이 있는 그녀는 혼자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딸이고, 동생이고 언니다……. “웅.” 때마침 가방 안에서
‘설마 그 사람도 같은 회사 사람인가?’ 권하윤은 재빨리 집으로 올라가 옷방에서 그날 들었던 가방을 찾아냈다. 다행히 아무렇게나 넣어 두었던 명함은 그대로 안에 있었다. 그리고 확인해 보니 역시나 똑같은 위치에 WM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위에는 Don이라는 영어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하윤은 비슷해 보이는 두 명함을 양손에 쥐고 번갈아 바라봤다. 분명 비슷했지만 조금은 달랐다. 모두 심플한 디자인이었지만 Don의 명함은 마리의 것보다 조금 특수한 재질로 되어 있었다.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아 보니 심지어 특수한 향기까지 나는 듯했다. ‘마리 씨가 WM의 사장이라고 했는데 설마 Don이라는 남자가 마리 씨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나?’ 전에 남자가 하윤에게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는 말을 했을 때 하윤은 그저 터무니없다고만 생각했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남을 도와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 건가 하고. 심지어 그 남자의 정신이 문제가 있거나 여자를 꼬시기 위한 수법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하윤이 너무 자뻑하는 게 아니라 그 남자의 행동이 확실히 이상해서다. 하윤은 간단하다 못해 이름과 전화 번호만 있는 명함과 마리가 남긴 직책이 있는 명함을 번갈아 바라봤다. 직책도 없이 이름만 있다는 건 직책을 말하지 않고도 남자의 이름만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하윤은 얼른 핸드폰으로 WM이라는 운송 회사사를 검색했다. 나타나는 정보는 많았지만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어 읽는데 어려움은 있었다. 때문에 하윤은 뒤에 Don이라는 이름을 덧붙여 검색했다. 다음 순간 화명 속에는 그 날 만났던 남자의 사진이 나타났다. 살짝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에 청회색 눈동자, 빈틈없는 스타일까지. 아무렇게나 클릭해 보니 남자에 관한 정보가 한 페이지를 꽉 메울 정도로 나왔다. [Don: 한국 이름 던, 34살, WM의 대표 이사!] 하윤은 자기의 눈이 믿기지 않아 사진 여러 장을 더 확인한 뒤에야 그날 자기가
하윤은 마리가 방금 전에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어색하게 물었다. “혹시 제가 던 씨 스케줄 방해했나요?” “네, 덕분에 비행기 티켓 값 낭비했네요. 시간도 낭비했고요. 그런데 전에 상황을 몰랐으니 용서할게요.” “네…… 고마워요.” 만나지도 못했는데 빚을 지게 되었다는 생각에 하윤은 전화를 끊자마자 피곤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어찌 됐든 만나고 나서 계획을 세우는 게 맞았다.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건 듣기에는 그저 뭔가 공짜로 뚝 떨어진 것 같지만 가끔 이런 공자에 가장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있으니까. ‘목적을 알지 못한 상황에 덥석 호의를 받았다가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하윤은 로건에게 데리러 오라고 하지 않고 택시를 잡았다. 그렇게 차에서 내렸을 때 하윤은 약속 장소에 관한 문자를 받았다. 던이 약속을 잡은 장소는 양식 레스토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던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앞에 물 한 잔만 놓고 있던 남자는 하윤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하윤의 의자를 끌어내 주었다. “앉으세요.” 분명 젠틀한 행동이었지만 하윤은 왠지 모르게 불편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게, 던은 여성을 배려한다기보다는 그저 자기 앞에 놓인 임무를 완성하는 듯한 느낌을 줬으니까. 심지어 하윤의 동작이 조금 느린 것을 보더니 빨리 앉으라는 듯 눈빛으로 재촉했다. 하지만 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약 상대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상대의 행동에 의심을 품었을 테지만 상대가 너무 대단한 인물이라 오히려 자기한테서 잘못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만남에 남자의 신분을 안 터라 하윤의 행동은 지난 번보다는 더 공손했다. “던 씨.” 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시윤 씨.” 짤막한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하윤은 던이 먼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 원인을 설명하기를 기다렸고 던은 반대로 하윤이 어떤 소원을 말할지 기다렸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만 흐르자 하윤은 끝내 먼저 말을
WM은 중유럽에서 가장 큰 해운 회사다. 던은 그 회사의 대표이고. 때문에 권하윤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해칠 필요가 없다. 생각을 정리하자 하윤은 고민도 없이 자기의 소원을 말했다. “제가 해원으로 가 아버지의 사고를 조사할 수 있게 도와줘요.” 하윤의 말을 들은 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뭔 소원이 그렇게 복잡해요? 조금 심플한 소원은 없어요? 예를 들면 1억 달러를 갖고 싶다거나 금광을 갖고 싶다거나.” 하윤은 결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알았어요. 이게 그쪽 소원이라면. 하지만 해원에 가는 것과 아버지가 돌아간 이유를 조사하는 건 두 가지 소원인데 하나만 선택해요.” 하윤은 하나하나 따지는 던의 태도에 순간 화가 났다. “해원으로 가는 걸 도와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저더러 도와달라고 하는 건 남편 몰래 도와달라는 뜻 아닌가요? 저 민 사장과 사업 파트너인데 이 일 때문에 상황이 틀어지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던은 하윤 때문에 자기 한 몸 불사지르는 짓까지는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윤은 깊은 숨을 들이켰다. “그렇다면 해원은 제가 갈 테니 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걸 도와줘요. 이건 괜찮죠.” “도와드릴 수는 있지만 결과는 장담할 수 없어요.” 하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자 던은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했다. “우선 저는 한국에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제가 일을 맡기는 사람들이 그쪽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요. 하지만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건 무조건 도와 드릴게요. 이건 걱정하지 말아요. 게다가 그쪽이 만족할 때까지 서비스는 계속될 거니까요.” ‘만족할 때까지 계속된다고?’ ‘그렇다면 몇 년 동안 조사하겠다는 뜻인가?’ 하윤은 순간 던의 말이 믿을 게 못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던이 의자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만약 제가 그쪽이라면 이렇게 허망하게 기회를 날릴 수 있는 소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