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그 사람도 같은 회사 사람인가?’ 권하윤은 재빨리 집으로 올라가 옷방에서 그날 들었던 가방을 찾아냈다. 다행히 아무렇게나 넣어 두었던 명함은 그대로 안에 있었다. 그리고 확인해 보니 역시나 똑같은 위치에 WM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위에는 Don이라는 영어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하윤은 비슷해 보이는 두 명함을 양손에 쥐고 번갈아 바라봤다. 분명 비슷했지만 조금은 달랐다. 모두 심플한 디자인이었지만 Don의 명함은 마리의 것보다 조금 특수한 재질로 되어 있었다.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아 보니 심지어 특수한 향기까지 나는 듯했다. ‘마리 씨가 WM의 사장이라고 했는데 설마 Don이라는 남자가 마리 씨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나?’ 전에 남자가 하윤에게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는 말을 했을 때 하윤은 그저 터무니없다고만 생각했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남을 도와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 건가 하고. 심지어 그 남자의 정신이 문제가 있거나 여자를 꼬시기 위한 수법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하윤이 너무 자뻑하는 게 아니라 그 남자의 행동이 확실히 이상해서다. 하윤은 간단하다 못해 이름과 전화 번호만 있는 명함과 마리가 남긴 직책이 있는 명함을 번갈아 바라봤다. 직책도 없이 이름만 있다는 건 직책을 말하지 않고도 남자의 이름만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하윤은 얼른 핸드폰으로 WM이라는 운송 회사사를 검색했다. 나타나는 정보는 많았지만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어 읽는데 어려움은 있었다. 때문에 하윤은 뒤에 Don이라는 이름을 덧붙여 검색했다. 다음 순간 화명 속에는 그 날 만났던 남자의 사진이 나타났다. 살짝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에 청회색 눈동자, 빈틈없는 스타일까지. 아무렇게나 클릭해 보니 남자에 관한 정보가 한 페이지를 꽉 메울 정도로 나왔다. [Don: 한국 이름 던, 34살, WM의 대표 이사!] 하윤은 자기의 눈이 믿기지 않아 사진 여러 장을 더 확인한 뒤에야 그날 자기가
하윤은 마리가 방금 전에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어색하게 물었다. “혹시 제가 던 씨 스케줄 방해했나요?” “네, 덕분에 비행기 티켓 값 낭비했네요. 시간도 낭비했고요. 그런데 전에 상황을 몰랐으니 용서할게요.” “네…… 고마워요.” 만나지도 못했는데 빚을 지게 되었다는 생각에 하윤은 전화를 끊자마자 피곤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어찌 됐든 만나고 나서 계획을 세우는 게 맞았다.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건 듣기에는 그저 뭔가 공짜로 뚝 떨어진 것 같지만 가끔 이런 공자에 가장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있으니까. ‘목적을 알지 못한 상황에 덥석 호의를 받았다가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하윤은 로건에게 데리러 오라고 하지 않고 택시를 잡았다. 그렇게 차에서 내렸을 때 하윤은 약속 장소에 관한 문자를 받았다. 던이 약속을 잡은 장소는 양식 레스토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던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앞에 물 한 잔만 놓고 있던 남자는 하윤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하윤의 의자를 끌어내 주었다. “앉으세요.” 분명 젠틀한 행동이었지만 하윤은 왠지 모르게 불편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게, 던은 여성을 배려한다기보다는 그저 자기 앞에 놓인 임무를 완성하는 듯한 느낌을 줬으니까. 심지어 하윤의 동작이 조금 느린 것을 보더니 빨리 앉으라는 듯 눈빛으로 재촉했다. 하지만 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약 상대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상대의 행동에 의심을 품었을 테지만 상대가 너무 대단한 인물이라 오히려 자기한테서 잘못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만남에 남자의 신분을 안 터라 하윤의 행동은 지난 번보다는 더 공손했다. “던 씨.” 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시윤 씨.” 짤막한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하윤은 던이 먼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 원인을 설명하기를 기다렸고 던은 반대로 하윤이 어떤 소원을 말할지 기다렸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만 흐르자 하윤은 끝내 먼저 말을
WM은 중유럽에서 가장 큰 해운 회사다. 던은 그 회사의 대표이고. 때문에 권하윤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해칠 필요가 없다. 생각을 정리하자 하윤은 고민도 없이 자기의 소원을 말했다. “제가 해원으로 가 아버지의 사고를 조사할 수 있게 도와줘요.” 하윤의 말을 들은 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뭔 소원이 그렇게 복잡해요? 조금 심플한 소원은 없어요? 예를 들면 1억 달러를 갖고 싶다거나 금광을 갖고 싶다거나.” 하윤은 결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알았어요. 이게 그쪽 소원이라면. 하지만 해원에 가는 것과 아버지가 돌아간 이유를 조사하는 건 두 가지 소원인데 하나만 선택해요.” 하윤은 하나하나 따지는 던의 태도에 순간 화가 났다. “해원으로 가는 걸 도와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저더러 도와달라고 하는 건 남편 몰래 도와달라는 뜻 아닌가요? 저 민 사장과 사업 파트너인데 이 일 때문에 상황이 틀어지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던은 하윤 때문에 자기 한 몸 불사지르는 짓까지는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윤은 깊은 숨을 들이켰다. “그렇다면 해원은 제가 갈 테니 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걸 도와줘요. 이건 괜찮죠.” “도와드릴 수는 있지만 결과는 장담할 수 없어요.” 하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자 던은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했다. “우선 저는 한국에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제가 일을 맡기는 사람들이 그쪽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요. 하지만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건 무조건 도와 드릴게요. 이건 걱정하지 말아요. 게다가 그쪽이 만족할 때까지 서비스는 계속될 거니까요.” ‘만족할 때까지 계속된다고?’ ‘그렇다면 몇 년 동안 조사하겠다는 뜻인가?’ 하윤은 순간 던의 말이 믿을 게 못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던이 의자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만약 제가 그쪽이라면 이렇게 허망하게 기회를 날릴 수 있는 소원은
권하윤은 던이 이렇게까지 물러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데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없었기에 중도에 번복하더라도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던은 하윤이 흔쾌히 승낙하는 걸 보자 약간 의외라는 듯 반응했다. “제가 알기론 시윤 씨 남편은 경성을 쥐락펴락하는 인물인데 혹시 들킬까 봐 겁나지 않아요?” 민도준을 떠올리자 하윤은 가슴이 욱씬거려 미소마저 옅어졌다. “이건 제 일이에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면 얘기가 된 걸로 알고 있을게요. 다음 주에 봐요.” 돌아가는 길에 하윤은 차창에 기대 한참 동안 멍 때렸다. 비록 방금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다시 도준한테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겁이 났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빌어도 보고 설득도 해 봤지만 도준은 그녀를 놓아주려 하지 않으니까.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의심과 광기가 점점 커지고 있는데 이렇게 가다간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하윤은 고개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뿌리쳤다. ‘아니야. 지금은 어떻게 경성을 떠나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해…….’ “웅.” 한창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가방에서 진동 소리가 들리자 하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액정에 뜬 발신자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도준이었다. 도준이 이런 시간에 전화 왔다는 건 하윤이 집에 없는 걸 알아챈 게 틀림없다. ‘내가 던 씨랑 만난 건 절대 들키면 안 돼.’ 하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앞에 있는 쇼핑몰을 가리키며 기사를 재촉했다. “저 앞에 세워주세요.” 이윽고 차에서 내린 뒤 가장 빠른 속도로 쇼핑몰의 남성 옷 매장으로 향했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직원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고객님, 무엇을 찾으세요?” “셔츠요. 제가 직접 둘러 볼게요.” 직원이 떠나자 하윤은 도준에게 다시
권하윤은 순간 귀에서 이명이 들려오는 듯했고 당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비행기요? 어디 가요?” 민도준은 그런 하윤을 소파에서 일으켜 세우더니 손가락으로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문질러 댔다. “해외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했잖아. 기억력이 왜 이렇게 나빠?” “…….” 도준이 그런 말을 했던 건 맞지만 하윤은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해외에 답사하러 간다면 적어도 며칠은 걸릴 텐데. 게다가 도준 씨가 우리 가족을 데려온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되면 언제 다시 귀국할지가 의문이었다. 던과의 약속을 다음주 월요일로 잡았는데 닷새 사이에 돌아오는 건 거의 불가능했고 해원으로 갈 기회를 잃게 된다. 여기까지 생각한 하윤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내일 떠나는 건 너무 급한 거 아니에요? 저 아직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며칠 뒤에 가는 게 어때요?” “걱정할 거 없어. 오늘 아직 지나지 않았으니까 준비할 시간 많아.” 도준은 하윤에게 더 이상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그녀를 탈의실로 데려갔다. 탈의실의 불빛 아래, 남자의 구릿빛 피부가 셔츠 안에 점점 감추어지자 강렬한 분위기가 덜어지는가 싶었지만 피부가 보일 듯 말 듯 옷 사이로 비집고 나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때 도준이 고개를 돌리며 하윤을 바라봤다. “괜찮아?” 하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멋져요.” 이 가에의 탈의실 공간은 작지 않았지만 도준의 압도적인 피지컬 때문에 비좁아 보였다. 게다가 옷을 갈아입은 뒤에도 도준은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하윤에게 골라준 원피스를 들어 올렸다. “내가 골라준 거 입어 봐.” 도준의 손이 자기의 넥라인에 닿자 하윤은 깜짝 놀랐다. “제가 직접 입을게요.” 그 말에 도준은 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오히려 고분고분 옆에 앉았다. “그래. 직접 해.” 그 뒤로 도준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매혹적인 눈은 여전히 하윤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공격하려고 준비하는 표범처럼 공격적인 눈
권하윤은 민도준의 야릇한 농담을 못 견디고 몸을 바르작거렸다. “이러지 마요. 우리 지금 밖이에요.” 하지만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하윤이 버둥대면 댈수록 도준의 몸에 붙어 몸을 비벼대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기분은 좋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은 터라 도준은 하윤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밖인 걸 알면서 이렇게 비벼대?” 하윤도 무언가가 느껴졌기에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우리 나가요.” “정말?” 도준은 말하면서 눈빛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이에 하윤은 어색한 듯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혹시 왜 이렇게 급하게 출국하려고 해요?” 물론 전에 해외로 갈 거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는 것에 하윤은 순간 의심이 들었다. 도준이 자기와 던이 만난 걸 안 건 아닌가 하고.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하윤과 던은 전에 알고 있던 사이도 아닐 뿐만 아니라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갑자기 정해진 약속이었으니까. 도준이 아무리 예민하다고 해도 벌어지지 않은 일을 미리 점치는 건 불가능 하다. ‘그 가능성을 배제하고 생각하면 아침에 벌어진 일 밖에 없는데.’ ‘내가 아이를 가지는 걸 꺼려하는 걸 보고 얌전히 지낼 리 없다고 판단했나? 그래서 내 가족을 데려와 손아귀에 잡고 있으려는 건가?’ 하윤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그때, 도준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물었다. “그러는 하윤 씨야 말로 이렇게 해외로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뭐야? 가족을 빨리 데려오고 싶지 않아? 설마…….” 길게 늘어진 끝 음에 하윤의 가슴은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나랑 단둘이 있고 싶어 가족도 싫어진 거야?” 하윤은 그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도준 씨가 회사 일로 바쁜데 해외까지 나가면 힘들까 봐 그래요.” 도준이 하윤의 얼굴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자기야. 자기가 있는데 내가 힘들 리 있겠어?” 사랑이 가득 담긴 듯한 달콤한 말투였지만 하윤은 오히려
그 뒤 권하윤은 한참 동안 방 안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순간 욕실로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얼마 뒤, 욕실에서 시작한 비명소리가 문을 뚫고 거실까지 전해졌다. 그 시각 소파에서 전화를 받고 있던 민도준은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에 약 2초간 멈칫하다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 지금 바빠서 시간 날때 전화해.” 그 말에 전화 건너편 사람은 이내 불만을 토로했다. “집에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뭐가 그렇게 바빠?” 도준은 침실 쪽을 힐끗 바라봤다. “네가 몰라서 그래. 집에서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밖에서 보다 할 게 많아.” “쳇.” 전화 건너편에서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강원 별장 무료로 제공했는데 식사 대접도 안 해주고 전화로 대화하는 것마저 이렇게 귀찮아 한다고?” 도준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천천히 침실로 향했다. “너랑 대화하는 게 뭐가 좋은데? 참, 너 요즘 백씨 가문을 홀랑 벗겨 먹어버렸더라? 이참에…….” “뚜뚜뚜.” 도준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전화는 그대로 끊어져 버렸다. 아마 전화를 끊지 않으면 도준에게 모든 걸 뺏겨 버릴까 봐 급한 마음에 줄행랑 친 듯하다. 그 시각 욕실. 하윤은 한참 동안 기다렸는데도 도준이 들어오지 않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상황이지?’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아니면 일부러 못 들은 척 하나?’ ‘남자는 결혼하면 귀머거리가 된다는데 설마 이렇게 빨리 귀가 먹었나?’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침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하윤은 눈을 반짝거리더니 또 다시 신음을 내며 도준을 자기가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도준은 하윤의 바람대로 바닥에 널브러진 트렁크를 지나 욕실로 들어섰다. 그랬더니 회색의 타일 위에 벌러덩 앉아 손으로 욕조를 잡은 채 잔뜩 불쌍한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하윤을 보고 말았다. 도준은 자기 발 옆에 있는 화장품 뚜껑을 힐끗거리고는 이내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이윽고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을 보는
민도준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권하윤은 화가 나 더 이상 연기를 계속하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렇다면 왜 계속 거기 서있어요? 나가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바로 자기를 외면하는 하윤을 보자 도준은 발끝으로 그녀의 ‘다친’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됐어. 그만하고 일어나.” 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욕조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마치 끝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그때 도준은 얇은 옷차림의 하윤을 보더니 혀를 입안에서 굴리고는 이내 허리를 숙였다. “상관하지 말아요.” 하윤은 튕기기라도 하려는 듯 버둥댔지만 도준은 하윤을 안아 침대 위에 눕히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쿡 찔렀다. “참 가지가지 하네.” 하지만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하윤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투덜거렸다. “몰라요. 저 다리가 부러졌으니 내일 아무 데도 못 가요.” 도준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걱정할 거 없어. 다리가 아니라 온 몸의 뼈가 부러져도 사람을 시켜 비행기에 옮겨 놓을 테니까.” ‘뭐? 이건 너무 한 거 아닌가?’ 하윤은 눈을 부릅뜬 채 불만을 표했지만 도준이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꾹 눌렀다. “쓸데없는 짓인 거 알면 이제 더 이상 이런 짓 하지 마. 어찌 됐든 손해 보는 건 하윤 씨니까.” “…….”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도준의 모습에 하윤은 더 이상 우겨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첫 번째 계획은 실패했으니 두 번째를 사용해야겠네.’ 저녁. 하윤이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도준은 한창 창가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하윤은 잠깐 고민하다가 목욕 타월을 옆에 두고는 살금살금 도준의 뒤로 다가갔다. “WM에서 데이터 보내주면 소혜한테 바로 넘기고 일주일 내로 모형을 만들라고 해.” 도준이 한창 통화를 하고 있을 때 하윤의 손이 도준의 등에 닿더니 그의 등근육을 따라 살살 문질러 댔다. 그 순간 남자의 숨결은 거칠어졌다. 하지만 이내 하윤의 손을 잡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문지르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