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민도준의 야릇한 농담을 못 견디고 몸을 바르작거렸다. “이러지 마요. 우리 지금 밖이에요.” 하지만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하윤이 버둥대면 댈수록 도준의 몸에 붙어 몸을 비벼대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기분은 좋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은 터라 도준은 하윤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밖인 걸 알면서 이렇게 비벼대?” 하윤도 무언가가 느껴졌기에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우리 나가요.” “정말?” 도준은 말하면서 눈빛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이에 하윤은 어색한 듯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혹시 왜 이렇게 급하게 출국하려고 해요?” 물론 전에 해외로 갈 거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는 것에 하윤은 순간 의심이 들었다. 도준이 자기와 던이 만난 걸 안 건 아닌가 하고.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하윤과 던은 전에 알고 있던 사이도 아닐 뿐만 아니라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갑자기 정해진 약속이었으니까. 도준이 아무리 예민하다고 해도 벌어지지 않은 일을 미리 점치는 건 불가능 하다. ‘그 가능성을 배제하고 생각하면 아침에 벌어진 일 밖에 없는데.’ ‘내가 아이를 가지는 걸 꺼려하는 걸 보고 얌전히 지낼 리 없다고 판단했나? 그래서 내 가족을 데려와 손아귀에 잡고 있으려는 건가?’ 하윤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그때, 도준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물었다. “그러는 하윤 씨야 말로 이렇게 해외로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뭐야? 가족을 빨리 데려오고 싶지 않아? 설마…….” 길게 늘어진 끝 음에 하윤의 가슴은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나랑 단둘이 있고 싶어 가족도 싫어진 거야?” 하윤은 그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도준 씨가 회사 일로 바쁜데 해외까지 나가면 힘들까 봐 그래요.” 도준이 하윤의 얼굴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자기야. 자기가 있는데 내가 힘들 리 있겠어?” 사랑이 가득 담긴 듯한 달콤한 말투였지만 하윤은 오히려
그 뒤 권하윤은 한참 동안 방 안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순간 욕실로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얼마 뒤, 욕실에서 시작한 비명소리가 문을 뚫고 거실까지 전해졌다. 그 시각 소파에서 전화를 받고 있던 민도준은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에 약 2초간 멈칫하다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 지금 바빠서 시간 날때 전화해.” 그 말에 전화 건너편 사람은 이내 불만을 토로했다. “집에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뭐가 그렇게 바빠?” 도준은 침실 쪽을 힐끗 바라봤다. “네가 몰라서 그래. 집에서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밖에서 보다 할 게 많아.” “쳇.” 전화 건너편에서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강원 별장 무료로 제공했는데 식사 대접도 안 해주고 전화로 대화하는 것마저 이렇게 귀찮아 한다고?” 도준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천천히 침실로 향했다. “너랑 대화하는 게 뭐가 좋은데? 참, 너 요즘 백씨 가문을 홀랑 벗겨 먹어버렸더라? 이참에…….” “뚜뚜뚜.” 도준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전화는 그대로 끊어져 버렸다. 아마 전화를 끊지 않으면 도준에게 모든 걸 뺏겨 버릴까 봐 급한 마음에 줄행랑 친 듯하다. 그 시각 욕실. 하윤은 한참 동안 기다렸는데도 도준이 들어오지 않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상황이지?’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아니면 일부러 못 들은 척 하나?’ ‘남자는 결혼하면 귀머거리가 된다는데 설마 이렇게 빨리 귀가 먹었나?’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침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하윤은 눈을 반짝거리더니 또 다시 신음을 내며 도준을 자기가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도준은 하윤의 바람대로 바닥에 널브러진 트렁크를 지나 욕실로 들어섰다. 그랬더니 회색의 타일 위에 벌러덩 앉아 손으로 욕조를 잡은 채 잔뜩 불쌍한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하윤을 보고 말았다. 도준은 자기 발 옆에 있는 화장품 뚜껑을 힐끗거리고는 이내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이윽고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을 보는
민도준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권하윤은 화가 나 더 이상 연기를 계속하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렇다면 왜 계속 거기 서있어요? 나가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바로 자기를 외면하는 하윤을 보자 도준은 발끝으로 그녀의 ‘다친’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됐어. 그만하고 일어나.” 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욕조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마치 끝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그때 도준은 얇은 옷차림의 하윤을 보더니 혀를 입안에서 굴리고는 이내 허리를 숙였다. “상관하지 말아요.” 하윤은 튕기기라도 하려는 듯 버둥댔지만 도준은 하윤을 안아 침대 위에 눕히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쿡 찔렀다. “참 가지가지 하네.” 하지만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하윤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투덜거렸다. “몰라요. 저 다리가 부러졌으니 내일 아무 데도 못 가요.” 도준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걱정할 거 없어. 다리가 아니라 온 몸의 뼈가 부러져도 사람을 시켜 비행기에 옮겨 놓을 테니까.” ‘뭐? 이건 너무 한 거 아닌가?’ 하윤은 눈을 부릅뜬 채 불만을 표했지만 도준이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꾹 눌렀다. “쓸데없는 짓인 거 알면 이제 더 이상 이런 짓 하지 마. 어찌 됐든 손해 보는 건 하윤 씨니까.” “…….”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도준의 모습에 하윤은 더 이상 우겨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첫 번째 계획은 실패했으니 두 번째를 사용해야겠네.’ 저녁. 하윤이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도준은 한창 창가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하윤은 잠깐 고민하다가 목욕 타월을 옆에 두고는 살금살금 도준의 뒤로 다가갔다. “WM에서 데이터 보내주면 소혜한테 바로 넘기고 일주일 내로 모형을 만들라고 해.” 도준이 한창 통화를 하고 있을 때 하윤의 손이 도준의 등에 닿더니 그의 등근육을 따라 살살 문질러 댔다. 그 순간 남자의 숨결은 거칠어졌다. 하지만 이내 하윤의 손을 잡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문지르기 시작
말을 하는 동시에 남자의 손은 권하윤 목덜미 뒤에 묶여 있는 끝을 움켜쥐었다. 순간 목이 조여오자 하윤은 목숨줄이 잡힌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민도준은 곧바로 잡아당기는 대신 느긋하게 잡아당겼다. 심지어 끈이 천천히 풀리면서 목덜미를 스치는 감각에 하윤의 마음은 조여왔다. 어느 순간 완전히 벗겨질지 모른다는 긴장감에 하윤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다. “저 도준 씨랑 대화하고 싶어요.” “말해.” 끝 음을 살짝 늘어트리는 도준의 목소리에는 알지 못할 암류가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야하게 입은 걸 보니 대화를 원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어 안달 난 것 같은데?” 가슴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앞을 가렸지만 도준의 손에 턱이 잡히고 말았다. 이윽고 남자의 깨무는 듯한 거친 입맞춤이 이어져 하윤은 피하려 했지만 도준은 그녀에게 그럴 기회도 주지 않고 목덜미를 꽉 잡은 채 입맞춤을 더 진하게 이어 나갔다. 휘몰아치는 압박에 하윤은 점점 뒤로 물러 나가가 침대에 걸려 뒤로 넘어졌다. 갑자기 무중력감이 느껴지더니 몸이 그대로 침대에 파묻혔다. 하윤은 애써 일어서면서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저 정말 할 말이 있어요.” 하지만 어깨가 침대에서 떨어지기 바쁘게 도준의 손이 하윤을 내리 눌렀고 마치 먹이를 음미하는 사자처럼 하윤을 빤히 내려다봤다. 이윽고 뜨거운 숨결이 하윤의 얼굴에 느껴졌다. “무슨 할 말?” “저…… 아, 잠깐만요…….” 말을 미처 꺼내기도 전에 하윤은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남자는 재밌는 듯 일부러 못된 장난을 쳤다. “끙끙대지만 말고 제대로 말해.” 다들 확실한 이익을 볼 희망이 없으면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데 하윤은 오히려 밑천도 건지지 못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오히려 농락을 당한 것에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는지 하윤은 버럭 화를 냈다. “제 말 먼저 들어 봐요! 안 그러면 못해요!” 촉촉한 눈으로 노려보면서 씩씩거리는 모습은 도
비아냥거리는 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숨 쉬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하윤의 정신이 딴데 팔려 있을 때 도준이 그녀의 머리를 꾹 누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원하는 거 다 들어줄 텐데. 그러니까 내 심기 건드리지 마. 알았지?” 하윤이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도준은 만족한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선 자.” 하지만 말을 마치고 욕실로 향하려 할 때,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싫어요.” 도준은 고개를 돌리더니 위험한 눈빛으로 하윤을 바라봤다. “뭐라고?” 하윤은 고개를 들어 도준을 직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토해냈다. “싫다고요. 저 도준 씨랑 해외 나가고 싶지 않아요. 도준 씨가 제 가족 만나는 것도 싫고 저 대신 결정을 내리는 것도 싫어요!” 그동안 켜켜이 쌓여 있던 감정이 한순간 폭발했는지 하윤은 더 이상 자기의 억양도 전혀 조절하지 못한 채 울부짖듯 소리쳤다. 도준은 분노로 붉어진 하윤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하윤의 반응은 부끄러워할 때 얼굴을 붉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심지어 도준을 보는 눈에 원한이 가득했다.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어? 한꺼번에 말해.” 하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는 도준을 빤히 바라봤다. 도준의 그 모습은 마치 하윤이 무얼 하든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는 듯했다. 마치 높은 곳에서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도준의 태도에 하윤은 더욱 화가 나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도준에게 달려들었다. “뭐든 손안에 장악하고 있다는 것처럼 제가 애쓰며 몸부리는 모습 보지 마요. 제가 아버지의 죽음을 놓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진실도 알려주지 않고 제가 직접 조사할 수 있게 놓아주지도 않고.” “제가 매일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도준 씨에 대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보니 재밌어요? 아니면 제가 우습나요? 저 지금 미칠 것 같아요. 도준 씨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다고요!” 하윤은 울고 싶지 않았지만 애석하게도 눈물은 하윤의 의지를 무시한 채 자
말이 떨어지자마자 민도준의 얼굴에 드리웠던 마지막 온정마저 사라졌다. “여기 있고 싶은 거야? 아니면 여기 있으면 도망치기 쉬워서 그러는 거야?” 하윤은 이를 악물며 끝까지 잡아뗐다. “무슨 근거로 제가 도망친다고 하는데요? 저를 사랑한다면서 왜 믿어주지 않는 거예요?” “믿어 달라고?” 도쥰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도준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억지를 부리는 하윤을 빤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 순간 도준의 눈에는 더 이상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 분위기는 마치 비가 내리기 전처럼 위험했다. 이윽고 도준은 하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신뢰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봐. 던과 만난 건 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 그러면서 셔츠를 산 척 나한테 사이즈를 물어봐? 내가 그렇게 쉽게 속을 것 같았어? 신뢰를 운운할 때는 언제고 하윤 씨는 왜 그 모양인데?” 도준이 말하는 동안 하윤의 낯빛은 계속 변했다. 하윤은 도준이 자기의 행적을 그 정도로 꿰뚫고 있는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에 화가 나고 부끄러워 하윤은 버럭 소리쳤다. “설마 저한테 미행 붙였어요? 저에 대한 존중이 있기는 해요? 그렇게 하는 게 저를 죄수 취급하는 거랑 뭐가 달라요?” “내가 하윤 씨를 죄수 취급하면 하윤 씨가 그런 잔꾀를 부릴 기회가 있었을 것 같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하윤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억지를 부렸다. “저는 어디도 안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하지만 도준은 하윤의 협박에 영향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피식 웃더니 혀로 볼을 꾹 밀었다. “정말 내가 혼자 가도 되겠어? 그 곳에 누가 있는지 잊은 거야?” ‘그 곳…….’ ‘그 곳에는 우리 가족이 있는데. 도준 씨가 억지로 우리 가족을 데려오면…….’ 자기의 목숨줄이 도준의 손에 잡혀 있다는 걸 인지한 순간 하윤은 분하고 억울했다. ‘왜 나한테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 건데?’ 게다가
욕실 문은 잠겨 있었다. 권하윤이 예전에 갖고 싶다고 했던 디자인의 문을 보자 민도준은 다시 짜증을 가라앉혔다. “가서 열쇠 가져와요.” 아주머니는 도준의 매서운 눈매에 놀라 약 2초간 멈칫하더니 그제야 중얼거렸다. “열쇠…….” “참, 열쇠가 있었죠. 제가 바로 가져 올게요.” 아주머니는 다급히 열쇠를 찾으러 갔지만 조급한 마음이 들자 열쇠는 좀처럼 보이지 않아 식은땀마저 나기 시작했다. “분명 여기 뒀었는데. 왜 없어졌지?” 그 시각 욕실 문 밖에 서 있던 도준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 아예 발로 문을 걷어찼다. 문이 열리자 하윤은 어제 넘어진 척 연기하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어데와 다른 건 팔 전체가 욕실 물에 잠겨 있는 데다 손목에서 나오는 피가 점점 퍼져 욕조를 붉게 물들였다. …… “띠띠…….” 귀청 찢어지는 듯한 차 경적 소리가 아침의 구름을 가로질렀고 햇님이 그 사이를 비집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 시각 조수석에 움츠리고 있는 하윤의 얼굴을 확인하는 도준의 표정은 무섭기 그지없었다. 그 길로 도착한 곳은 민씨 가문 개인 병원이었다. 일찌감치 소식을 들은 의사와 간호사가 이미 문 앞에 마중 나와 있었다. 이윽고 하윤은 빠른 속도로 침대에 눕혀진 채 병원 안으로 실려 들어갔다. 의료진들의 발걸음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게, 시간을 지체했다가 등 뒤에서 따라오는 저승사자 같은 남자에게 끝장이라도 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윤이 응급실로 들어가자마자 도준은 담배를 꺼내려 하다가 이 곳이 병원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이내 포기했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 점점 커져가는 조급함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특히 몸에 묻어 있는 혈흔을 본 순간 그런 조급함은 더해졌다. 아까 봤던 장면을 떠올리자 목덜미의 핏줄이 마치 살을 뚫고 나오기라도 하듯 부풀어 올랐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도준이 지금껏 피를 본 적은 수없이 많다. 남자, 여자, 노인, 어린이 할 것없이, 심지어는 자기 것도 남의 것도, 가족 것도 본
‘도준 씨인가?’ 권하윤은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병실 바닥에 복도의 불빛이 흘러 들더니 남자가 그 빛을 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분명 볼 수 없었지만 하윤은 지금 들어온 사람이 바로 민도준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때문에 계속 온 몸의 힘을 빼고 자는 척했다. 우선 도준의 태도를 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으니까. ‘도준 씨가 이번 일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을 거야. 하지만 만약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됐어. 자는 척 그만해.” 갑자기 가까워진 목소리에 하윤은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눈을 떴다. 도준은 어느새 침대 옆까지 다가와 두 팔로 침대를 짚은 채 하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획이 틀어지자 하윤은 약 2초간 멍하니 있다가 끝내 막 잠에서 깨어난 척 연기했다. “저, 지금 어디 있죠?” 도준은 하윤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하윤이 겁을 먹자 그제야 두 글자를 내뱉었다. “병원.” 도준은 의자에 앉으면서 병실 안 분을 켜자 눈부신 불빛에 하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불빛에 적응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물을 따르고 있는 도준의 모습이 보였다. 맑은 액체를 유리 잔에 가득 담은 도준은 그것을 하윤에게 건넸다. “물 마셔.” 하윤은 도준의 마음을 알 수 없어 손을 뻗으려 했지만 도준은 그녀의 손을 피하며 마치 직접 먹여주려는 것처럼 행동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 대체 뭐 하려는 거?’ 하윤은 도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도준은 움직이지 않는 하윤을 보더니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는 물을 먹였다. “입 벌려.” 확실히 목이 마른 터라 하윤은 물 한 컵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물을 삼키는 소리는 조용한 공간에서 유난히 뚜렷하게 들렸다. 컵을 다시 테이블 위에 돌려놓은 뒤에야 도준은 자리에 다시 앉아 다리를 꼬고는 무서운 눈빛으로 하윤을 바라봤다. 마치 속을 꿰뚫어볼 것만 같은 날카로운 눈빛에 하윤은 저도 모르게 이불 속의 손을 꽉 그러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