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 문은 잠겨 있었다. 권하윤이 예전에 갖고 싶다고 했던 디자인의 문을 보자 민도준은 다시 짜증을 가라앉혔다. “가서 열쇠 가져와요.” 아주머니는 도준의 매서운 눈매에 놀라 약 2초간 멈칫하더니 그제야 중얼거렸다. “열쇠…….” “참, 열쇠가 있었죠. 제가 바로 가져 올게요.” 아주머니는 다급히 열쇠를 찾으러 갔지만 조급한 마음이 들자 열쇠는 좀처럼 보이지 않아 식은땀마저 나기 시작했다. “분명 여기 뒀었는데. 왜 없어졌지?” 그 시각 욕실 문 밖에 서 있던 도준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 아예 발로 문을 걷어찼다. 문이 열리자 하윤은 어제 넘어진 척 연기하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어데와 다른 건 팔 전체가 욕실 물에 잠겨 있는 데다 손목에서 나오는 피가 점점 퍼져 욕조를 붉게 물들였다. …… “띠띠…….” 귀청 찢어지는 듯한 차 경적 소리가 아침의 구름을 가로질렀고 햇님이 그 사이를 비집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 시각 조수석에 움츠리고 있는 하윤의 얼굴을 확인하는 도준의 표정은 무섭기 그지없었다. 그 길로 도착한 곳은 민씨 가문 개인 병원이었다. 일찌감치 소식을 들은 의사와 간호사가 이미 문 앞에 마중 나와 있었다. 이윽고 하윤은 빠른 속도로 침대에 눕혀진 채 병원 안으로 실려 들어갔다. 의료진들의 발걸음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게, 시간을 지체했다가 등 뒤에서 따라오는 저승사자 같은 남자에게 끝장이라도 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윤이 응급실로 들어가자마자 도준은 담배를 꺼내려 하다가 이 곳이 병원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이내 포기했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 점점 커져가는 조급함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특히 몸에 묻어 있는 혈흔을 본 순간 그런 조급함은 더해졌다. 아까 봤던 장면을 떠올리자 목덜미의 핏줄이 마치 살을 뚫고 나오기라도 하듯 부풀어 올랐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도준이 지금껏 피를 본 적은 수없이 많다. 남자, 여자, 노인, 어린이 할 것없이, 심지어는 자기 것도 남의 것도, 가족 것도 본
‘도준 씨인가?’ 권하윤은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병실 바닥에 복도의 불빛이 흘러 들더니 남자가 그 빛을 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분명 볼 수 없었지만 하윤은 지금 들어온 사람이 바로 민도준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때문에 계속 온 몸의 힘을 빼고 자는 척했다. 우선 도준의 태도를 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으니까. ‘도준 씨가 이번 일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을 거야. 하지만 만약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됐어. 자는 척 그만해.” 갑자기 가까워진 목소리에 하윤은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눈을 떴다. 도준은 어느새 침대 옆까지 다가와 두 팔로 침대를 짚은 채 하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획이 틀어지자 하윤은 약 2초간 멍하니 있다가 끝내 막 잠에서 깨어난 척 연기했다. “저, 지금 어디 있죠?” 도준은 하윤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하윤이 겁을 먹자 그제야 두 글자를 내뱉었다. “병원.” 도준은 의자에 앉으면서 병실 안 분을 켜자 눈부신 불빛에 하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불빛에 적응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물을 따르고 있는 도준의 모습이 보였다. 맑은 액체를 유리 잔에 가득 담은 도준은 그것을 하윤에게 건넸다. “물 마셔.” 하윤은 도준의 마음을 알 수 없어 손을 뻗으려 했지만 도준은 그녀의 손을 피하며 마치 직접 먹여주려는 것처럼 행동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 대체 뭐 하려는 거?’ 하윤은 도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도준은 움직이지 않는 하윤을 보더니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는 물을 먹였다. “입 벌려.” 확실히 목이 마른 터라 하윤은 물 한 컵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물을 삼키는 소리는 조용한 공간에서 유난히 뚜렷하게 들렸다. 컵을 다시 테이블 위에 돌려놓은 뒤에야 도준은 자리에 다시 앉아 다리를 꼬고는 무서운 눈빛으로 하윤을 바라봤다. 마치 속을 꿰뚫어볼 것만 같은 날카로운 눈빛에 하윤은 저도 모르게 이불 속의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래.” 민도준은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동의했다. 모든 게 자기 뜻대로 되자 권하윤은 실감이 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목적을 달성하자 바로 나긋나긋해진 말투에 병실 안 분위기는 조금 풀어졌다. 도준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말을 이었다. “계속해 봐. 또 뭘 원해? 한꺼번에 말해.” ‘말하라고?’ ‘해원으로 가고 싶다는 걸 말해도 되나?’ ‘그럼 던 씨와 했던 약속은 말해야 하나?’ 하윤이 고민에 잠겨 있을 때 도준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 다시 찾아왔을 때 이렇게 쉽게 동의하지 않을 거야.” 그 말에 하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 끝내 말을 꺼냈다. “저 해원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사건을 조사해보고 싶어요. 적어도 억울함은 풀어주고 싶어요.” 남자의 눈은 순간 어두워졌다. “내가 사람을 찾아 조사하는 거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꼭 혼자 가야겠어?” “네, 꼭 가야 돼요.” 하윤이 알고 있는 아버지에 관한 일은 거의 대부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은 거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멋대로 추측하게 되고 자기가 ㅏㄹ고 있는 게 아무리 많더라도 진실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다. 더욱이 민도준이든 공태준이든 두 사람의 목적성이 너무 강해 하윤은 그 누구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이번 기회에 직접 알아보고 싶었다. 그 답이 어떻든 하윤은 진실을 찾고 싶었으니까. 도준은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금속 라이터 뚜껑을 튕겼다. “그 다음은?” 하윤은 순간 멈칫했다. “그 다음이라니요?” “답을 찾아내면 그 뒤에 뭘 하려고?” ‘만약 아버지의 죽음이 도준 씨와 관련이 있다면 어떻게 하지?’ 이 질문은 너무 잔인해 그런 가능성을 조금만 생각해도 무너질 수 있다. 하윤은 이 일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매번 이런 생각만 떠오르면 하윤은 일이 이 지경까지는 아닐 거라고 자기 암시를 했었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를 꽁꽁 싸맨 채
솔직하게 말한 뒤 권하윤은 민도준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윤은 도준이 자기와 던이 만난 걸 알았으니 자기의 계획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속여서 의심을 사기 보다는 솔직히 말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윤의 말을 들은 도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걸 인지하는 순간 하윤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도준이 자기를 가둬 두지 않아도 여전히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기에 하윤은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저 일부러 속이려던 게 아니에요. 제가 공태준과 만나는 걸 도준 씨가 싫어하니까 던 씨한테 도움을 청한 것뿐이에요.” 도준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그렇게 선택했다? 음, 확실히 전보다는 나아졌네. 전에는 도망칠 생각만 하더니 이제는 내 마음도 생각해줄 줄 알고. 이건 뭐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나?” 하윤은 도준의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참지 못하고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도준 씨가 제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는데 제가 도망칠 수나 있겠어요?” 약한 모습을 드러낸 채 동정을 유발하던 하윤의 눈에는 원망도 섞여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새장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새 같았다. 그저 새장 안에 갇혀 있기 싫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전에 이 새장이 자기를 위해 얼마나 많은 비바람을 막아줬는지 잊은 그런 새 말이다. 하윤도 말을 내뱉고 난 뒤 자기의 말이 도준을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버리겠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자기가 마치 범인처럼 갇혀 감시를 당한다는 생각만 하면 평정심을 되찾기 어려웠다. 도준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짓누르는 하윤을 보더니 정서를 알 수 없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억울해? 나를 이젠 견딜 수 없어서 자살로 피하려 한 거야?” 하윤은 울컥했는지 ‘네’라고 대답하고는 도준을 노려봤다. “도준 씨랑 있는 매일이 숨막혀요. 죽은 거랑 별반
권하윤은 끝까지 예의를 지키지 못했다. “던 씨, 사람들은 보통 전화를 하면 목적부터 말해요. 지금처럼 빙빙 에둘러 말하지 않고.” 던은 하윤의 어조에서 불쾌함을 눈치채고는 헛기침을 해댔다. “그게 사실은 제가 시윤 씨 남편분과 대화를 나눠 봤거든요. 그래서 상황을 알고 싶어서요. 만약 해원으로 가는 계획에 변화가 있다면 저도 스케줄 변화가 필요해요…….” ‘대화를 해봤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하윤은 순간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대체 언제…… 뭐라고 말한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만난 것부터 다음주 월요일에 해원에서 합류하기로 한 것까지 모두 사실대로 말했으니까.” 하윤은 던의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 났다. 심지어 뒤로 갈 수록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따라서 자기가 도준 앞에서 어떻게 연기를 했었는지 떠오르자 하윤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아니, 이건 쪽팔린 것도 쪽팔린 거지만 도준을 오해했다는 사실에 당황해 났다. 하윤은 도준이 자기와 던이 만난 걸 알게 된 게 당연히 지금껏 자기를 감시해와서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어제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르자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이시윤 씨, 괜찮아요?” “괜찮냐고요? 제가 괜찮아 보여요?” 화를 풀 곳이 없자 하윤은 갈팡질팡했다. “왜 그걸 도준 씨한테 말한 거예요? 어쩜…….” 하윤이 던을 비난하려고 단어를 생각하고 있을 때 던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 사장은 이시윤 씨 남편이잖아요. 그런데 남편한테 미리 말하지 않고 그 아내를 데리고 떠나면 그건 도피 아닌가요?” “…….” “만약 남편이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는 게 걱정된다면 그것도 걱정할 거 없어요. 시윤 씨를 만나기 전에 이미 남편분한테 연락을 드렸으니까.” 던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마치 망치처럼 하윤을 세게 내리쳤다.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윤은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고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마저 천근 만근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하윤은 애써 호흡을 가다듬고 진정
연속 사흘 동안 권하윤은 민도준을 보지 못했다. 손목에 그은 상처가 깊지 않아 이제는 점점 아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심장 질환으로 복합적인 문제가 생길까 봐 의사는 매일 하윤을 검사하곤 한다. 그렇게 일요일이 다가오자 하윤은 끝내 참지 못했다. 하루 뒤면 월요일, 바로 던과 약속을 잡은 날이니까. 며칠 동안 하윤은 마치 유배당한 사람처럼 매일 의사, 간호사를 만나는 외에 가끔 디저트 배달을 하러 온 로건을 만나는 게 다였다. 하윤은 도준에게 전화하려 했지만 매번 전화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보낸 문자 메시지도 모두 그래도 묻히고 말았다. 이에 하윤은 도준과 이미 헤어진 사이인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아니야. 도준 씨는 그냥 나를 떠나지 못하게 병원에 가둬 둔 것뿐이야.’ 하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간호사 한 분이 병실로 들어왔다. “퇴원 수속 끝났습니다. 차 준비해 드릴까요?” …… 차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하윤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로건이 고개를 돌리며 물어 왔다. “사모님, 집으로 모실까요?” 하윤은 약 몇 초간 머뭇거리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기 전에 하윤은 도준이 안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하윤은 점점 허전해졌다. 집에는 심지어 아주머니도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공간에 적막이 흘렀다. 하윤은 주위를 맴돌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나 이제 자유인가?’ ‘이제 떠나도 되나?’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 모든 게 너무 갑자기 끝나 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작별도 없이 심지어는……. 오해했다는 사과의 말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래, 이 원인일 거야. 그래서 이렇게 슬픈 걸 거야.’ 하윤은 생각을 정리하고는 다시 도준의 번호를 눌르고는 길게 이어지는 대기 소리를 들었다. …… “웅…… 웅…….” 테이블 위에서 울리는 진
민시영은 한눈에 상황을 캐치하고는 여자의 손에서 차를 받아 들었다. “전에 탕비실을 책임지던 수영 씨는 어디 갔죠?” “수영 씨는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저는 새로 온 직원…… 서연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소개한 뒤 서연은 도준을 힐끗 살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반응도 해주지 않는 도준을 보자 서연은 실망한 듯 손에 든 차와 디저트를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서연이 나간 뒤 시영은 도준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오빠가 회사에 더 있다간 아주 회사 직원 뽑는 기준이 미인 대회가 되겠어. 어제는 정연 씨가 새로 왔다더니 오늘은 또 서연 씨가 새로 오고. 사숙은 대체 어디서 저렇게 예쁘장한 애들을 구하는지 몰라.” 도준은 담배를 한 모금 들이켜더니 느릿하게 대답했다. “네 사무실 쪽도 만만치 않던데. 남자 비서만 4명 추가됐더라.” 그 말에 시영은 고개를 저었다. “난 오빠처럼 하고 싶은 대로 못하잖아. 숙부님이 그렇게 열성을 다해 사람을 밀어주는데 거절할 수 있어야지. 하나만 고르라고 했는데 다 괜찮아 보여서 다 받았어.” 도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시영을 바라봤다. “즐길 줄 아네.” 스파이를 심었을 때 만약 한 명만 심는다면 당연히 시영만 감시할 텐데 여럿이 함께 있으면 시영뿐만 아니라 서로를 감시해야 한다. 사람이 많으면 한사람한테 떨어지는 게 적을뿐더러 모두 자기의 위치를 지켜내기 위해 서로를 경계하는 건 당연하다. 더욱이 4명의 비서가 할 일이 없을까 봐 시영은 일부러 밖에 나갈 때 매번 다른 비서를 데리고 나가기에 사람들마다 처하는 상황이 달라 보고할 때 소식도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방법을 오랫동안 사용할 수는 없기에 시영은 도준을 바라봤다. “대외 무역팀 물갈이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지훈한테 맡기는 건 어떨 것 같아?” “그건 나중에.” 시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계를 확인했다. “나 저녁에 송씨 집안 사람들과 식사 약속 있는데 오빠도 얼굴 좀 비춰.” “송씨 집안
권하윤은 회사로 오기 전 민도준을 만날지 말지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다. 도준을 다시 보면 떠나기 싫을까 봐, 이 모든 걸 끝내기 싫을까 봐. 하지만 도준은 벌써부터 하윤이 없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도준은 절대 다른 여자가 자기에게 접근해 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특히 차에 앉게 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 했을 텐데. ‘이렇게 받아들였다는 건 이제 도준 씨의 마음 속에 네가 없다는 뜻일지도.’ ‘하긴, 남자들이란 원래 새것을 좋아하고 낡은 건 싫어하니까. 나만 바보처럼 오해한 것 때문에 속상해한 거였네.’ 하윤은 넋이 나가 몸을 숨기는 것조차 잊은 바람에 가냘픈 실루엣이 그대로 시영의 시선에 드러나고 말았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시영은 백미러에 비친 하윤을 보자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오빠, 저 사람 형수 아니야?” 뒷좌석에 앉은 서연은 형수라는 두 글자에 놀라 시영의 시선을 따라 뒤돌아봤다. 이윽고 하윤을 보자마자 도준이 자기를 내쫓을까 봐 다시 도준에게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의외로 차를 세우려는 의도가 없어 보이는 도준을 보자 서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보아하니 민 사장님과 사모님의 관계가 소문처럼 좋은 건 아닌가 보네.’ 시영은 도준이 하윤을 무시하는 걸 보자 두 사람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채고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윤이 씨 몸도 안 좋은데 저러다 길에서 쓰러져 다른 사람이 주어 가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이 시각 백미러에 비친 하윤의 실루엣은 작다 못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작은 실루엣은 점점 점으로 변해 시선속에서 멀어졌다. 마침 퇴근 시간이라 주위에는 차 경적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길가에서 하윤은 마치 넋이라도 잃어버린 것처럼 멍하니 걸어갔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와서 이런 장면을 봐야 하는지 스스로 화가 나고 서러웠다. ‘요즘 나 피해 다니는 걸 보면 답이 안 나오나?’ ‘아니다. 우리 사이에 걸림돌이 너무 많아. 차라리 더 이상 얽히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