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영은 한눈에 상황을 캐치하고는 여자의 손에서 차를 받아 들었다. “전에 탕비실을 책임지던 수영 씨는 어디 갔죠?” “수영 씨는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저는 새로 온 직원…… 서연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소개한 뒤 서연은 도준을 힐끗 살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반응도 해주지 않는 도준을 보자 서연은 실망한 듯 손에 든 차와 디저트를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서연이 나간 뒤 시영은 도준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오빠가 회사에 더 있다간 아주 회사 직원 뽑는 기준이 미인 대회가 되겠어. 어제는 정연 씨가 새로 왔다더니 오늘은 또 서연 씨가 새로 오고. 사숙은 대체 어디서 저렇게 예쁘장한 애들을 구하는지 몰라.” 도준은 담배를 한 모금 들이켜더니 느릿하게 대답했다. “네 사무실 쪽도 만만치 않던데. 남자 비서만 4명 추가됐더라.” 그 말에 시영은 고개를 저었다. “난 오빠처럼 하고 싶은 대로 못하잖아. 숙부님이 그렇게 열성을 다해 사람을 밀어주는데 거절할 수 있어야지. 하나만 고르라고 했는데 다 괜찮아 보여서 다 받았어.” 도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시영을 바라봤다. “즐길 줄 아네.” 스파이를 심었을 때 만약 한 명만 심는다면 당연히 시영만 감시할 텐데 여럿이 함께 있으면 시영뿐만 아니라 서로를 감시해야 한다. 사람이 많으면 한사람한테 떨어지는 게 적을뿐더러 모두 자기의 위치를 지켜내기 위해 서로를 경계하는 건 당연하다. 더욱이 4명의 비서가 할 일이 없을까 봐 시영은 일부러 밖에 나갈 때 매번 다른 비서를 데리고 나가기에 사람들마다 처하는 상황이 달라 보고할 때 소식도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방법을 오랫동안 사용할 수는 없기에 시영은 도준을 바라봤다. “대외 무역팀 물갈이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지훈한테 맡기는 건 어떨 것 같아?” “그건 나중에.” 시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계를 확인했다. “나 저녁에 송씨 집안 사람들과 식사 약속 있는데 오빠도 얼굴 좀 비춰.” “송씨 집안
권하윤은 회사로 오기 전 민도준을 만날지 말지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다. 도준을 다시 보면 떠나기 싫을까 봐, 이 모든 걸 끝내기 싫을까 봐. 하지만 도준은 벌써부터 하윤이 없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도준은 절대 다른 여자가 자기에게 접근해 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특히 차에 앉게 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 했을 텐데. ‘이렇게 받아들였다는 건 이제 도준 씨의 마음 속에 네가 없다는 뜻일지도.’ ‘하긴, 남자들이란 원래 새것을 좋아하고 낡은 건 싫어하니까. 나만 바보처럼 오해한 것 때문에 속상해한 거였네.’ 하윤은 넋이 나가 몸을 숨기는 것조차 잊은 바람에 가냘픈 실루엣이 그대로 시영의 시선에 드러나고 말았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시영은 백미러에 비친 하윤을 보자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오빠, 저 사람 형수 아니야?” 뒷좌석에 앉은 서연은 형수라는 두 글자에 놀라 시영의 시선을 따라 뒤돌아봤다. 이윽고 하윤을 보자마자 도준이 자기를 내쫓을까 봐 다시 도준에게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의외로 차를 세우려는 의도가 없어 보이는 도준을 보자 서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보아하니 민 사장님과 사모님의 관계가 소문처럼 좋은 건 아닌가 보네.’ 시영은 도준이 하윤을 무시하는 걸 보자 두 사람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채고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윤이 씨 몸도 안 좋은데 저러다 길에서 쓰러져 다른 사람이 주어 가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이 시각 백미러에 비친 하윤의 실루엣은 작다 못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작은 실루엣은 점점 점으로 변해 시선속에서 멀어졌다. 마침 퇴근 시간이라 주위에는 차 경적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길가에서 하윤은 마치 넋이라도 잃어버린 것처럼 멍하니 걸어갔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와서 이런 장면을 봐야 하는지 스스로 화가 나고 서러웠다. ‘요즘 나 피해 다니는 걸 보면 답이 안 나오나?’ ‘아니다. 우리 사이에 걸림돌이 너무 많아. 차라리 더 이상 얽히지 않
시연의 말은 이미 꺼진 불에 다시 기름을 부었다. 마치 도준을 걱정하는 듯한 시연의 말에 하윤은 머리가 찌근거렸다. 심지어 시영마저도 할 말을 잃고 백미러로 도준을 보며 자기도 최선을 다했다는 듯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서연은 하윤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보충했다. “아니면 저 내릴게요. 민 사장님, 저 데려다 주지 않아도 돼요. 너무 번거롭잖아요.” 남의 속을 잘 헤아리는 듯한 한 마디에 하윤은 그야말로 생트집을 잡는 막무가내인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하윤은 여기로 오기 전 도준에게 오해한 일에 대해 사과하려고 했지만 등 두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더욱이 도준이 요즘 매일 이런 다정한 여자와 함께 보냈을 것을 생각하자 여기까지 찾아온 게 후회됐다. 도준은 핸들을 꺾으면서 옆을 힐끗 거리더니 화가 나 있는 하윤의 모습을 눈에 넣었다. 이윽고 무심한 듯 입을 열었다. “번거롭기는 해. 아니면 같이 식사하러 가는 건 어때?” 약 2초간 침묵이 흐르더니 서연의 얼굴은 이내 붉게 물들었다. 아직은 탕비실에서 잡일을 돕는 그녀로서 도준과 시영 같은 회사 중요 인사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건 꿈만 같은 일이었기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저 절대 폐 끼치지 않겠습니다.” 서연의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지만 하윤은 답답하다 못해 당장 차에서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하윤이 차에서 내리는 건 오히려 안 될 말이었다. 어쨌든 하윤은 여주인인 셈인데 그녀가 가면 다른 사람이 오히려 얕볼 수 있어 꾹 눌러 참았다. 사실 전에도 도준 곁에 여자들은 끊이질 않았다.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신분에 사람을 홀리는 잘생긴 외모덕에 분명 뜨거운 불인 줄 알지만 불나방들이 덤벼들곤 했었다. 하지만 전에는 이처럼 답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윤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도 그럴 게…… 전에 도준은 한 번도 다른 여자가 자기한테 접근할 수 있게
룸 안에는 송 대표와 송민우, 그리고 전에 권하윤에게 명함을 건넸던 여 부사장과 세일즈 매니저도 함께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하윤을 보자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서연을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특히 서연이 중요한 직책을 가진 직원이 아니라는 걸 듣는 순간 표정은 묘해졌다. 하윤은 당연히 그들의 무얼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모르는 척 연기했다. 그리고 그제야 하윤은 자기가 이 자리에 올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저도 모르게 여기까지 와버린 데다 이미 식사가 시작되어 하윤은 더더욱 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때문에 마치 억지로 무대 위로 끌려와 즉흥 연기를 펼치는 행인처럼 어색한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하윤의 자리는 당연히 도준의 옆에 배정되었다. 그리고 서연은 권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조심스럽게 도준의 반대편 옆자리로 다가갔다. “저 여기 앉으면 되나요?” 도준은 서연을 빤히 바라볼 뿐 제지하지 않았다. 주인공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송 대표도 당연히 뭐라 할 수 없어 자기 자리에 앉았다. 두 회사의 협력을 위해 송씨 가문은 충분한 성의를 보였다. 송씨 가문은 유명한 재벌가에 속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송 대표도 자수성가로 회사를 일으킨 사람이기에 회사가 다른 회사처럼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송 대표는 기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매번 기술 혁신을 할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다면 창고에 있는 기계들은 그저 고철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도. 솔직히 오늘 이 자리에서 송 대표는 도준의 옆에 앉으려고 했지만 서연 때문에 떨어져 앉게 되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류를 회전식 테이블에 올려 놓고 빙 돌려 도준에게 건넸다. “민 사장님, 이건 저희가 작성한 계약서입니다. 한번 확인하세요. 문제가 있다면 저희가 수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서류가 도준한테 가기도 전에 서연이 중간에 가로채버
송 대표는 얼른 품에서 펜을 꺼내더니 또 서연이 가로채기라도 할가 봐 빙글 돌아 직접 민도준에게 건네주었다. “펜 여기 있습니다.” 도준은 펜을 받아 들자마자 서류에‘슥슥’ 사인했다. 그 모습을 본 송 대표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 하지만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서류를 받아 들고는 감사 인사를 했다. “이시윤 씨, 민 사장님, 감사합니다.” 하윤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멍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제지하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아니…… 왜 보지도 않고 사인해요?”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러니까 열심히 보라고 했잖아. 본인이 안 봤으면서 내 탓처럼 말하네?” 하윤은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괜히 화를 내서 성깔을 부린 걸 후회하는 동시에 도준이 밑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이 해프닝 덕에 송 대표는 하윤을 신처럼 떠받들며 보살처럼 생겼다는 둥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는 둥 칭찬을 늘어놓았다. 게다가 하윤의 관상까지 분석하며 복이 가득하고 장수할 팔자라는 칭찬까지 해댔다. 심지어 송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조차 하윤을 마스코트인 것처럼 받들며 서연은 아예 병풍 취급을 해버렸다. 이게 달갑지 않았는지 서연은 이내 눈알을 굴리더니 테이블 위에서 찻주전자를 들어 제멋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민 사장님, 오래 말씀하셔서 목 마르실 텐데 물 차 좀 드세요.” 심지어 차를 따르기 전에 일부러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가는 팔을 드러내더니 몸을 한껏 숙인 채로 도준에게 차를 건네며 눈빛을 보냈다. 도준은 서연이 따라준 차를 받아 들더니 손가락으로 찻잔을 빙 돌리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 “차 따르는 거 좋아하나 봐?” 서연은 도준의 눈빛에 얼굴을 붉히더니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자리에 앉을 필요도 없겠네.” 도준은 웨이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 의자 빼고 손에 들고 있는 쟁반과 걸레 이 여자한테 넘겨요.” 서연의 얼굴은 일순 새하얗게 질렸다. “민
권하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케빈 씨는…….” 민시영은 덤덤하게 웃었다. “윤이 씨 무슨 뜻으로 그런 말 하는지 알겠는데 저 이래 봬도 재벌가 아가씨예요. 제 짝이 경호원일 리는 없어요.” 하윤은 일순 침묵했다. 시영이 너무 깨어 있었으니까. 깨어 있다 못해 심지어는 매정하기까지 했다. 이에 하윤은 잠깐의 침묵을 깨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 상대가 송민우 씨인가요?” “적어도 지금은요. 저 다른 사람이 저를 어떻게 보든 상관 안 해요. 하지만 남편이 있다면 유언비어 정도는 막을 수 있잖아요.” 시영은 하윤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저희가 잉꼬부부처럼 행동하면 사람들은 아마 제가 매력 있는 사람이라고 할 걸요. 그런 일을 겪었으면서 이렇게 잘난 사람을 남편으로 맞이했다고.” 하윤도 따라 웃었지만 걱정하는 마음은 덜어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송 대표님은 두 사람 사귀는 거 알아요?” “알죠. 송 대표님의 가방끈이 짧다고 하지만 어리석은 분은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가 빨리 결혼하여 손주를 안겨주길 바라거든요.” 시영은 한참 동안 말하다가 하윤을 바라보며 간곡히 부탁했다. “윤이 씨, 혹시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시영은 화장실 밖을 한번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저랑 송민우 씨가 사귀게 되면 케빈은 앞으로 제 곁에 두기가 불편해져요. 저도 과거와 엮인 사람을 새로운 삶에 데려오고 싶지 않고요. 그래서 그러는데, 윤이 씨가 케빈을 받아줄 수 있나요?” “네?” 하윤은 순간 멍해졌다. “제가요? 그건 안 되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케빈 씨는 사람인데 어떻게 주고받을 수 있나요? 게다가 시영 언니가 데리고 있기 싫다면 자르면 그래도 본인 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케빈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어요!” 갑자기 높아진 톤에 하윤은 깜짝 놀랐다. “시영 언니, 왜 그래요?” 시영은 그제야 자기가 흥분했다는 걸 인지하고 다시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이윽고 이내 화제를 전환했다. “
이미 예상은 했지만 도준의 축객령에 하윤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손을 들어 차 문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마치 천근이나 되는 쇳덩이를 손에 매단 것처럼 손이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눈앞이 희미해졌다. 예전에는 이렇게 말한 적도, 더욱이 내쫓은 적도 없었는데. 심지어는 하윤이 삐져서 가려고 하면 도준은 이내 하윤을 붙잡아 두고 장난치면서 달래곤 했다. 예전에 했던 행동과 비교해 보니 지금의 냉대는 사람을 더 아프게 했다. 도준이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그에게 등만 보이던 여자가 꿈쩍도 하지 않고 떨고만 있자 도준은 결국 담배를 눌러 껐다. “왜? 이제는 버티고 안 가는 거야?” 눈시울과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하윤은 끝내 눈물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 비행기 티켓 끊었어요. 내일 해원으로 떠나요.” “아하, 축하해.” 도준은 하윤이 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이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말을 보탰다. “조사를 끝내면 다시 돌아 올게요.” 한참이 지났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한 하윤은 눈물을 닦고 다시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 “내일 저 배웅하러 올 거죠?” “배웅?” 도준은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어이없어 했다. “내 곁에서 도망치려고 자살로 위협까지 하는 사람을 내가 무가 아쉽다고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면서까지 배웅해야 하지?” “그런 거 아니에요.” 하윤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날 제가 했던 말은 홧김에…….” “그만해.” 도준은 다시 세상 만사 귀찮다는 듯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맞든 아니든 듣고 싶지 않아. 스스로 내릴래? 아니면 내가 밖으로 던져줄까?” 하윤 스스로도 눈치가 있으면 지금 당장 차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야 본인의 체면도 살 거고. 하지만 그날 자기가 내 뱉었던 그 말, 도준과 있는 매일이 숨막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던 말만 생각하면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일만 제외하
어둠 속에서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한참을 흐느끼던 권하윤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자 하윤은 그제야 눈치 챈 듯 고개를 들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준의 얼굴은 어둠과 어우러져 있었지만 하윤의 눈에는 밝게만 느껴졌다. 이에 하윤은 도준의 손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저 다리 아파요. 손목도 아프고요.” 너무 급하게 달린 탓에 하윤은 아직도 숨이 차 있었고 얼굴에 붙어있던 머리카락이 고개를 젖히는 동작에 따라 뒤로 흘러 넘어갔다.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어깨 라인을 따라 뒤로 흘러내렸다가 도준의 손에 감기는 동안, 하윤은 불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좀 일으켜 주면 안 돼요?” 하윤은 일부러 다리의 상처를 드러냈다. 새하얀 다리 위에 뻘건 피가 흐르자 더욱 선명하고 자극적이었지만 도준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하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뭐 하려는 거야?” 하윤은 흠칫했다. “저는…….” “죽네 사네 하면서 떠나려고 할 때는 언제고 내가 가라고 하니 이제는 대꾸 좀 해달라고? 사람 갖고 노니깐 재밌어?” 낮게 깔린 목소리가 밤바람을 따라 하윤의 귀에 냉기만 남기고 갔다. ‘그랬지. 떠나겠다고 한 건 분명 나였는데 놓아주겠다고 하니까 이제 와서 당황해하는 나도 웃겨. 나 참 이기적인 사람인가 봐.’ 하윤은 가족한테 미안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고 동시에 도준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가운데서 평형을 유지하며 가장 좋은 선택을 하려고만 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도준을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도준이 붙잡을 때는 떠나려 했다가 놓아주려 하니 이제야 매달리는 꼴이라니. ‘내가 이렇게 계속 우유부단하게 행동했는데 도준 씨 성격에 어떻게 지금까지 참아온 거지?’ 겨우 냉정을 되찾은 하윤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가벼운 한 마디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진심이 담기지도 않은 사과로 모든 걸 없는 일로 만들려 하다니 참 꿈도 야무지네.’ 도준은 진심도 아니면서 후회하는 척하는 하윤의 태도에 이제는 이골이 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