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을 안고 있던 도준은 끝내 발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하윤은 몸이 굳더니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역시나 차 옆에 도착한 거였다. 그제야 하윤은 도준의 옷깃을 잡으며 고개를 들어 도준을 바라봤다. “말 좀 해 봐요. 네?” 도준은 손을 들어 운전석 쪽 문을 열고 하윤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왜 운전석이지? 설마 떠나려는 건가?’ 도준이 몸을 일으켜 세울 때 하윤은 도준의 팔을 꼭 붙잡았다. “도준 씨는 안 타요?” 어둠 속에서 하윤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연약한 모습으로 도준을 바라봤다. 마치 도준을 떠나면 그대로 말라 비틀어버릴 것처럼. 도준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참 눈빛만 보면 깜빡 속아 넘어가겠어.’ 하지만 하필이면 그런 눈이 도준을 보며 화를 냈고 도준을 보며 함께 있는 매 순간이 숨막혀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아마 하윤 본인도 그 말을 할 때 본인의 눈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를 거다. ‘죽음으로 협박하며 떠나려 하는 여자가 날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하겠어?’ 이런 사랑을 믿는 건 세상 천지에 바보밖에 없을 거다. 도준은 하윤의 손을 잡더니 자기 팔에서 떼어냈다. 손바닥에 느껴지던 온기가 사라지던 찰나, 차가운 차키가 하윤의 손에 쥐여졌다. 하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 바래다주면 안 돼요?” 도준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하윤을 빤히 바라보더니 손으로 하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혼자 가.” “…….” ‘싫어. 혼자 가기 싫어.’ 혼자 걷는 길이 얼마나 외롭고 어려운지 하윤은 알고 있기에 혼자가 되는 게 누구보다 싫었다. 도준을 불러 세워 남아달라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입을 여는 순간 흐느낌만 흘러나왔다. 그렇게 도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하윤은 끝내 운전대에 엎드려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지만 속에 텅 빈 것 같았다. 이미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애석하게도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은 좀처럼
권하윤은 주위의 모든 걸 빙 둘러보며 낯선 얼굴들 가운데서 익숙한 그림자를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건 모두 헛수고였다. 끝내 포기한 듯 눈을 감은 하윤은 낮게 중얼거렸다. “가요.” 케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윤의 뒤를 따라 보안 검사 입구로 향하다가 갑자기 뭔가 발견한 듯 고개를 홱 돌려 한 곳을 뚫어지게응시했다. 그 곳은 인파로 북적거려 사람들이 모였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케빈은 결국 캐리어를 쥔 손에 힘을 꽉 주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하윤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케빈이 떠나간 뒤, 인파 속에는 두 남녀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여자는 세상을 깔보는 듯한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가서 배웅해주지 않아?” “하. 그러는 넌 왜 숨어서 보기만 하는데?” 여자의 눈은 순간 반짝였다. “봐도 결국은 헤어져야 할 텐데,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아.” 그 말에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멀리에 있는 실루엣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 비행기가 상공에 날아오르자 하윤은 창문을 통해 점점 멀어지는 경성을 내려다봤다. 점점 멀어져가는 산천의 모습과 함께 그곳에서 만들었던 추억도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남은 건 그저 가슴에서 점점 퍼져가는 고통뿐이었다. 그로부터 약 2시간 뒤, 하윤은 해원에 도착했다. 그곳의 기온은 경성보다 많이 높은 탓에 비행기를 나서자마자 긴 소매가 살에 달라붙은 것처럼 눅눅하고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다행히 하윤은 사람들 속에서 [이시윤]이라는 카드를 들고 있는 사람 한 명을 발견했다. 그나마 전에 던과 연락한 덕분이었다. 물론 던이 해원에 대해 익숙하지 않다며 직접 마중하러 나오지는 않고 기사에게 그 임무를 내팽개쳤지만. 차에 오른 순간 하윤은 그나마 기사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는 길에 하윤은 줄곧 창밖을 내다봤다. 해원을 떠난 뒤 다시 돌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껏 해원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높은 건물이 우
권하윤은 케빈의 배려와 보호를 받으며 속으로 케빈과 로건의 다른 점을 비교했다. 로건은 이런 세심한 보호가 필요 없는 민도준의 곁에서 오래 지내서 그런지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 쓰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케빈은 반대로 늘 주위를 경계하며 그 누구도 하윤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물론 과묵하지만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에도 문이 닫히지 않도록 막고 있다가, 하윤이 안으로 들어가면 그 뒤를 따라 들어가는 데서 그가 세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윤은 처음으로 이렇게 배려 깊은 경호를 받아 보니 왠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이 던의 방에 들어갔을 때, 던은 커피 한 잔을 들고 느긋하게 창가 옆 의자에 앉아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라 그런지 눈가에 잔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과하지는 않고 오히려 그 나이대에 있어야 할 분위기가 더해졌다. 심지어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방에 이렇게 앉아 있으니 유난히 조화로웠다. 던의 이목구비는 뚜렷하지만 라인이 매끄러워 전통적인 중유럽 사람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높은 콧날에 흠잡을 곳 없는 얼굴은 아시아인이 봐도 감탄할만한 미모였다. 하윤이 던의 생김새를 관찰하며 던이 혼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던이 마침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 놓았다. “눈빛이 참 무례하네요.” “어…… 죄송해요?” “뭐, 용서해 줄게요.” “…….” 아직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하윤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던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에 결국은 그의 맞은편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하윤은 깊은 숨을 들이켜며 말을 꺼냈다. “저…….” “제가 조사해 봤는데, 윤이 씨 아버지 이성호 교수님의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투신자살이더군요. 게다가 많은 학생들이 성추행 혐의로 이성호 교수님을 고발했고…….” 하윤은 훅 들어오는 던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저는 그게 사실이라고 믿지 않아요.” 그때, 던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시
권하윤은 던의 말이 황당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던이 아까 말했듯, 지금 하윤이 믿든 말든 사실은 바뀌지 않기에 결국은 꾹 눌러 참았야 했다. “그러면 두 번째는요?” “두 번째는 그 학생들이에요.” 던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 서류 안에는 그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하윤은 서류를 받아 들더니 그 위에 있는 서로 다른 색깔의 스티커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이건 뭐죠?” “그 사람들이 일에 엮인 정도에 따라 분류했어요. 초록색은 의심되는 부분이 전혀 없는 자들, 노란색은 신원이 의심스러운 사람들, 빨간색은 외력의 영향을 받아 이번 사건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 던이 말하는 사이 하윤은 서류를 한 페이지씩 뒤로 넘기다가 마지막 몇 페이지를 펼쳤을 때 물었다. “그럼 보라색은요?” “범인.”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윤의 손가락은 흠칫 떨리더니 고개를 들어 던을 다시 바라봤다. “제가 처음에 추측해 본 데 의하면 진짜 범인은 이 사람들 중에 있어요. 뭐, 윤이 씨가 볼 때 범인인 것 같은 사람한테 보라색 테이프 붙여도 돼요.” 보라색 테이프가 붙어 있는 사람은 도합 8명이었는데 공씨 집안사람만 5명을 차지했다. 게다가 나머지 3명 가운데 도준을 제외하고 나머지 2명도 하윤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하윤의 아버지를 제일 먼저 고발했던 오나영. 다른 한 사람은 하윤 아버지의 오랜 친구 엄석규. 하윤의 기억에 두 사람은 모두 하윤의 아버지 일로 엄청난 돈을 번 사람들이다. 오나영은 다른 학생의 학술 논문을 표절해 상대 학생이 교환 학생을 신청하는 데 실패하게 했었다. 그 일로 이성호가 오나영을 학교에서 제명했는데, 오나영은 오히려 자기가 나쁜 짓을 당하고 고발하자 이성호가 복수하려고 자기를 제명했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 인터뷰로 오나영은 스타덤에 올라 인플루언서가 되었다. 엄석규는 그보다도 더 심했다. 하윤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람이 자기가 목격
권하윤은 문을 닫은 뒤에도 여전히 케빈의 말을 생각했다. ‘케빈 씨 말은 내가 뭘 하려는지, 어디를 가려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그 순간 민시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케빈은 자유로울 자격이 없다던 말. ‘보아하니 시영 언니뿐만 아니라 케빈 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네.’ 어느새 조용한 방은 차가운 에어컨 바람으로 가득 찼고, 하윤은 책상 앞에 앉아 집중해서 자료를 펼쳐 보고 있었다. 하지만 보다 보니 눈앞에 자꾸만 익숙한 남자가 아른거렸다. ‘케빈 씨가 갑자기 나타난 게 혹시 도준 씨랑 관련 있나?’ ‘내가 혼자 길을 떠나는 게 걱정돼서 도준 씨가 일부러 케빈 씨를 보낸 건가?’ 이런 가능성만 생각하면 하윤은 코끝이 시큰거렸다. ‘나를 버리기로 했어도 여전히 내 안전을 위해 모든 걸 준비해 뒀나 보네.’ 먼 거리 때문에 사랑과 증오가 사라지고 그 대신 그리움만 남은 모양이다. 이제 떨어져 있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보고싶은 걸 보면. ‘도준 씨는 뭘 하고 있을까? 설마 벌써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이 시각 하윤의 가슴에 쌓인 감정은 미친듯이 부풀어 올라 출구가 필요했고, 잘 프린트 된 글자는 아무리 애써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채 생각조차 방해했다. 결국 하윤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도준과 주고받은 문자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고심 끝에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가 다시 지우는 바람에 그렇게 많던 글자가 고작 몇 글자로 요약됐다. 그 문자를 보내자 불편한 감정이 어느 정도 사그라 들어 하윤은 다시 자료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윽고 리스트를 한 페이지씩 확인하면서 기억에 따라 이름을 추가했다. 그리고 그 시각, 하윤의 마음을 담은 문자메시지는 도준에게 도착했다. [저 해원에 도착했어요. 여기 날씨가 너무 더워서 손목 상처가 간지러워요. 그런데 흉터 질까 봐 긁지도 못해 지금 기분이 안 좋아요.] 문자만 봐도 하윤의 투덜거리는 말투와 잔뜩 찌푸린 표정을 듣고 볼 수 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 투정 부리며 애교 부리
권하윤은 선물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더니 남자에게 쑥 밀었다. “종서 선배 고마워요. 저녁에도 수고 좀 해 줘요.” 김종서는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유, 뭘 이런 걸 다. 내가 후배한테서 선물을 어떻게 받아?” 김종서는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어느새 W사 시계를 손목에 차보기까지 하며 소시민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김종서가 이런 사람이 아니라면 하윤은 아마 김종서에게 이런 일을 부탁하러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다. 김종서도 예전에는 이성호의 학생이었는데, 돈을 너무 밝히는 탓에 음악을 조금 배우는가 싶더니 몇 달도 견지하지 않고 장사한다며 도망쳐 버렸다. 하지만 그나마 머리가 좋아 문화예술에 관한 사업을 하다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중간에서 이익을 잘 챙 부를 축적했고, 동창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다 보니 김종서를 찾아오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다. 물론 이건 하윤의 계획 중 첫 번째 단계일 뿐이지만. “시윤아, 너 그동안 어디서 지냈어? 왜 2년 동안 소식이 없었어?” 김종서는 전복 죽을 홀짝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어중간한 때라 그런지 하윤은 입맛이 없어 물만 마셨다. “저 계속 경성에 있었어요.” “경성 좋지. 나도 이제 시간 되면 가보려고 하는데. 그곳에 유명한 재벌이 엄청 많다며? 우리 여기 공씨 가문처럼. 성이 뭐였더라? 민 씨였나?” 성만 들었지만 하윤의 가슴은 순간 뜨거워졌다. 하윤과 도준의 일은 경성 명문가에서 떠들썩했지만 일반 사람들의 귀에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더욱이 두 사람은 공개적인 결혼식도 올린 적이 없으니 해원에 있는 평민은 더더욱 두 사람을 연상시킬 리 없다. 하윤은 답답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가방을 쥐고 일어섰다. “저 오후에 일이 좀 있어서 우리 저녁에 만나요.” 김종서는 테이블 위에 놓인 비싼 요리들을 훑어보더니 지갑을 찾는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건 내가 계산할 게. 카드가…….” 하지만 김종서의 꿍꿍이를 바로 파악한 하윤은 싱긋 미소 지으며 막아
김종서가 있을 때는 그나마 시끌벅적하던 방 안이 김종서가 떠나니 일순 조용해졌다. 특히 종서가 말했던 부자가 도착했다고 하니 모두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문 밖으로 향했다. “그 부자라는 사람이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콘서트홀을 짓는다는 거지? 우리를 속이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 “설마. 여기 1인당 50만 원씩 하는 곳이야. 부자인 게 틀림없어.” 오나영은 그 말에 다시 한번 쿠션 뚜껑을 열어 거울을 보며 얼굴 상태를 확인하기 바빴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창 토론하던 그때, 은회색 양복 차림의 남자가 웬 여자를 데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던 사람들은 하윤의 얼굴을 보자 모두 얼어붙었다. 하지만 하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다 왔네요.” 이윽고 하윤은 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WM 해운 회사 대표, 던이에요.” 분위기는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특히 이성호를 고발했던 오나영과 채영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윤은 두 사람의 표정을 눈에 넣고는 던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때 하윤과 조금 친하게 지내던 선배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윤아,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네요. 제 남친이 콘서트홀을 지어준다고 하지 않았으면 아마 여기에 다시 오지 않았을 거예요.” 하윤은 애교 섞인 눈빛으로 던을 바라보며 눈치를 보냈다. 그제야 던은 이를 악문 채로 어렵사리 몇 글자 내뱉었다. “자기가 좋으면 됐지 뭐.” 하윤은 입을 막은 채 웃으며 던의 말에 맞장구쳤다. “제가 언제 기분 나빠 한 적 있었나요?” 그때 웬 선배가 하윤의 손에 있는 루비 반지를 보며 감탄했다. “이렇게 큰 루비는 처음 보는데.” “네? 이거요?” 하윤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툭툭 털었다. “전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무거워 죽겠어요.” 오나영을 포함한 몇 명은 하윤을 보는 순간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는데 이렇게 남한테 빌붙어서 고상한 척하는 하윤을 보
권하윤은 오나영이 자기의 기를 꺾기 위해 아버지를 언급하자 더 분발했다. “우리 아빠가 왜요? 우리 아빠는 음악가예요.” 오나영은 그 말에 우습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음악가? 학생과 불륜을 저지르는 게 무슨 음악가라고…….” “나영!”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채영이 갑자기 큰 소리로 오나영을 제지했다. “그만해!” 그제야 오나영도 실언했다는 걸 인지했는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채영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바라보자 어색한 듯 웃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다 선후배 사이인데 지난 일은 뭐 하러 꺼내? 기쁜 날 기쁜 얘기만 하자.” 이윽고 채영은 오나영에게 눈치를 보냈다. “나영아, 나랑 화장 실 좀 같이 가자.” 그때 하윤의 눈빛을 받은 김종서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친절하게 두 사람을 안내했다. “우리 룸에도 화장실 있어. 저기 안에.” 잠시 뒤, 채영은 화장실 문을 닫자마자 낮은 소리로 따져 물었다. “너 뭐 하자는 거야? 우리가 위증을 했다는 걸 시윤이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오나영은 눈을 희번뜩였다. “걔가 그걸 어떻게 안다고 그래? 내가 볼 땐 돈 많은 남자 좀 꿰찼다고 성이 뭔지도 잊은 것 같던데.” 채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바깥 쪽을 살폈다. “쟤가 우리를 찾아온 게 자랑하러 온 것만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아니면 엄석규 쌤 한테 물어볼까?” 오나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또다시 화장을 고쳤다. “엄석규 쌤도 그냥 말 전하는 사람이잖아. 물어 봤자 뭐 건질 거 있어?” 립스틱을 바르던 오나영은 여전히 긴장한 채영을 보며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겁이 그렇게 많아서 어디에 쓰겠어? 그거 벌써 몇 년 전 일이야. 그게 그렇게 쉽게 들킬 리가 없잖아.” “말이 쉽지. 넌 취직이 필요 없으니 명성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잖아.” 그 말에 오나영은 불만 가득한 말투로 맞받아 쳤다. “명성을 그렇게 중요시하면 애초에 돈은 왜 받았어?” “그건…….” 말문이 막힌 치영은 끝내 말을 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