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가 있을 때는 그나마 시끌벅적하던 방 안이 김종서가 떠나니 일순 조용해졌다. 특히 종서가 말했던 부자가 도착했다고 하니 모두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문 밖으로 향했다. “그 부자라는 사람이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콘서트홀을 짓는다는 거지? 우리를 속이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 “설마. 여기 1인당 50만 원씩 하는 곳이야. 부자인 게 틀림없어.” 오나영은 그 말에 다시 한번 쿠션 뚜껑을 열어 거울을 보며 얼굴 상태를 확인하기 바빴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창 토론하던 그때, 은회색 양복 차림의 남자가 웬 여자를 데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던 사람들은 하윤의 얼굴을 보자 모두 얼어붙었다. 하지만 하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다 왔네요.” 이윽고 하윤은 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WM 해운 회사 대표, 던이에요.” 분위기는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특히 이성호를 고발했던 오나영과 채영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윤은 두 사람의 표정을 눈에 넣고는 던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때 하윤과 조금 친하게 지내던 선배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윤아,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네요. 제 남친이 콘서트홀을 지어준다고 하지 않았으면 아마 여기에 다시 오지 않았을 거예요.” 하윤은 애교 섞인 눈빛으로 던을 바라보며 눈치를 보냈다. 그제야 던은 이를 악문 채로 어렵사리 몇 글자 내뱉었다. “자기가 좋으면 됐지 뭐.” 하윤은 입을 막은 채 웃으며 던의 말에 맞장구쳤다. “제가 언제 기분 나빠 한 적 있었나요?” 그때 웬 선배가 하윤의 손에 있는 루비 반지를 보며 감탄했다. “이렇게 큰 루비는 처음 보는데.” “네? 이거요?” 하윤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툭툭 털었다. “전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무거워 죽겠어요.” 오나영을 포함한 몇 명은 하윤을 보는 순간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는데 이렇게 남한테 빌붙어서 고상한 척하는 하윤을 보
권하윤은 오나영이 자기의 기를 꺾기 위해 아버지를 언급하자 더 분발했다. “우리 아빠가 왜요? 우리 아빠는 음악가예요.” 오나영은 그 말에 우습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음악가? 학생과 불륜을 저지르는 게 무슨 음악가라고…….” “나영!”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채영이 갑자기 큰 소리로 오나영을 제지했다. “그만해!” 그제야 오나영도 실언했다는 걸 인지했는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채영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바라보자 어색한 듯 웃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다 선후배 사이인데 지난 일은 뭐 하러 꺼내? 기쁜 날 기쁜 얘기만 하자.” 이윽고 채영은 오나영에게 눈치를 보냈다. “나영아, 나랑 화장 실 좀 같이 가자.” 그때 하윤의 눈빛을 받은 김종서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친절하게 두 사람을 안내했다. “우리 룸에도 화장실 있어. 저기 안에.” 잠시 뒤, 채영은 화장실 문을 닫자마자 낮은 소리로 따져 물었다. “너 뭐 하자는 거야? 우리가 위증을 했다는 걸 시윤이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오나영은 눈을 희번뜩였다. “걔가 그걸 어떻게 안다고 그래? 내가 볼 땐 돈 많은 남자 좀 꿰찼다고 성이 뭔지도 잊은 것 같던데.” 채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바깥 쪽을 살폈다. “쟤가 우리를 찾아온 게 자랑하러 온 것만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아니면 엄석규 쌤 한테 물어볼까?” 오나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또다시 화장을 고쳤다. “엄석규 쌤도 그냥 말 전하는 사람이잖아. 물어 봤자 뭐 건질 거 있어?” 립스틱을 바르던 오나영은 여전히 긴장한 채영을 보며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겁이 그렇게 많아서 어디에 쓰겠어? 그거 벌써 몇 년 전 일이야. 그게 그렇게 쉽게 들킬 리가 없잖아.” “말이 쉽지. 넌 취직이 필요 없으니 명성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잖아.” 그 말에 오나영은 불만 가득한 말투로 맞받아 쳤다. “명성을 그렇게 중요시하면 애초에 돈은 왜 받았어?” “그건…….” 말문이 막힌 치영은 끝내 말을 잇지
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어진 던도 곧바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나영 씨, 저는 모르는 사람과 술 안 마셔요. 잔 부딛히는 것도 싫어요.” 오나영은 던이 농담한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테이블에 슬쩍 기대며 눈을 깜빡거렸다. “왜요?” 하지만 그때, 오나영의 엉덩이가 당장이라도 접시에 닿으려고 하자 던은 벌떡 일어섰다. “그쪽 몸에 무슨 병균이 있는지 모르잖아요. 예를 들면 헬리코박터균, 대장균, B형 간염 같은 그런 병균 말입니다. 게다가 오나영 씨 현재 위생 습관으로 비추어 보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오나영이 던에게 몸을 기대려고 할 때 룸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두 사람에게 향한 데다, 던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기에 둘의 대화를 똑똑히 들어버렸다. 심지어 일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그런 모욕을 당하고 나니 오나영은 떠날 때까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심지어 차 문도 쾅 하고 닫아버리며 화를 표출했다. 하지만 화가 쉽게 풀리지 않았는지 얼른 핸드폰을 꺼내 게시물 하나를 올렸다. [우리 자기님들, 오늘 밤 9시에 생방송에서 만나. 여러분과 대화하고 싶어.] ‘감히 날 건드려? 내가 오늘 너 아주 제대로 박살 내 줄게.’ …… 그 시각 오나영이 복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걸 알 리 없는 하윤은 주림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수소문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하윤의 시선을 피하며 주림과는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고만 대답했다. 그런 상대의 표정에서 자기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판단한 하윤은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머리를 돌렸다. “주림 선배도 같이 불러서 함께 모일까 했는데, 이렇게 신비로울 줄은 몰랐네요. 그렇다면 다음 기회에 모일 수밖에 없겠네요.” 하윤의 표정이 여느 때와 다름이 없자 상대도 이내 긴장을 풀고 따라 웃었다. “그래. 앞으로 우리도 네 덕 좀 봐야 할 것 같은데.” “별말씀을요.” 헤어질 때가 다가오자 하윤의 인사치레 미소도
권하윤은 던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우울하던 마음이 기적처럼 사라졌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하윤은 샤워를 하고 난 뒤에 책상에 엎드려 리스트를 다시 펼쳐 보더니 오나영과 채영의 사진에 붙어 있던 보라색 테이프를 떼어냈다. 두 사람은 매수당한 입장이니 진짜 범인일 리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이내 진은영의 이름이 있는 페이지를 펼쳐 이름 위에 물음표를 그렸다. 하윤은 그제야 이 리스트가 얼마나 편리한 지 알 것 같았다. 만약 이 리스트가 아니었다면 모든 단서들이 머리 속에서 뒤엉켜 갈피를 잡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이러고 보니 던도 어느 정도는 좋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윤이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하윤은 두근 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얼른 핸드폰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아니라 생방송 알림이었다. 하윤이 낮에 오나영을 파헤치기 위해 오나영의 모든 계정을 팔로우 했기에 이렇게 생방송 알림이 뜬 거다. 오나영은 그때의 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 데다 분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현재 200만 정도 되는 팬을 보유하고 있다. 심지어 생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스크린 댓글 창에 수많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비친 오나영은 무척 다정했으며 웃는 얼굴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 아직도 안 자는 자기님들이 있었네? 나 오늘 기분 나쁜 일을 겪어서 옛날 일이 떠올랐어.” 오나영이 생방송에서 그때의 일을 언급한 게 이번 한번뿐이 아니다. 그 주제로 돈맛을 보고 난 뒤, 오나영은 거의 매번 방송을 켤 때마다 이성호에 관한 일을 얘기하여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 그건 이번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들 내가 몇 년 전에 얼마나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었는지 알고 있을 거야. 사실 나는 막 대학에 입학해 이성호 교수님 제자가 되었을 때만 해도 내가 아주 운이 좋다고 생각했어. 그게 내 악몽의 시작일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이성호 교수님은 나를 자기 연습실에 불러 손을 내 어깨에 올려놓고 만
“내 후배이자 이성호의 딸이 해원에 돌아왔거든. 그런데 아직도 그때 그 일로 나를 탓하고 있더라고. 자기 아버지는 음악가였는데 내가 자기 아버지를 망치고 자기 가정을 망쳤다면서.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속상하더라. 내가 진짜 틀린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오나영이 미안한 표정을 짓자 네티즌은 순간 폭발했다. [본인 아버지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몰라서 그런대요?] [그 아비에 그 딸이라더니 역시 딸도 짐승만도 못하네.] [혹시 누가 그 여자 연락처 알아요? 가서 욕해 놓고 싶네.] 스크린을 도배한 하윤을 욕하는 댓글에 오나영의 화는 금세 누그러들어 능청스레 팬들을 말리기까지 했다. “아니야. 절대 그러지 마. 걔 남자 친구가 나이는 좀 있어도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고 들었어. 우리 자기님들이 나 대신 나섰다가 피해라도 입으면 어쩌려고.” [나이가 많다고? 이거 스폰인가 보네.] [이젠 아주 스폰까지? 부녀가 쌍으로 참 구역질 나네.] [걱정하지 마요. 우리가 아주 본대를 보여 줄게요.] …… 스크린을 꽉 채운 욕설과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단어를 본 순간, 핸드폰을 들고 있던 하윤의 뼈마디는 하얗게 질렸다. 사실 몇 년 전 오나영이 채영의 논문을 훔쳐 먼저 발표해 채영은 논문 표절 의혹을 받아 교환 학생 신청에 실격 처리를 받게 되었다. 그때 사실을 알고 분노한 이성호는 그 일을 학교측에 보고했다. 하지만 대부분 학교가 그렇듯 문제가 일어나면 소란 없이 처리하려 하다 보니 그 일은 조용히 묻고 가자는 결론이 나버렸다. 공개적으로 처벌하지 않으면 채영만 억울하게 손해보기에 이성호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채영을 데리고 교장실까지 찾아다니며 채영을 위해 정의구현에 힘썼고, 그 결과 채영은 그렇게 원하던 교환학생 자격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뒤 채영은 오나영과 함께 이성호를 고발했고 전에 있었던 일까지 모두 부인했다. 이성호가 오나영을 일부러 음해한 거라고, 오나영은 자기 논문을 표절하지 않았다면서. 그런데 이 순간, 스크린
“윤이 씨, 괜찮아요?” 민시영의 목소리를 듣자 권하윤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공허한 마음과 함께 코끝이 시큰거릴 뿐. “저 괜찮아요.” 시영은 하윤의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번 일은 제가 처리할 테니까. 이제 그런 소리 듣지 않아도 돼요.” 하윤은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공황에서 벗어나려 했다. “괜찮아요, 시영 언니는 상관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시영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래요, 그럼 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시영이 잠깐 멈칫하는 사이 하윤은 순간 뭔가를 느꼈는지 꺼졌던 희망이 다시 불타올랐다. 그걸 모르는 시영은 전화 건너편에서 하윤이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고 있을까 봐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인터넷 댓글은 너무 신경 쓸 거 없어요. 그 사람들이 싫어하는 악한 사람인데 윤이 씨는 아니잖아요.” “네, 알겠어요.” “다른 일 없으면 이만…….” “시영 언니.” 전화를 끊으려던 시영이 멈칫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그 순간 하윤이 핸드폰을 꽉 쥐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처럼. “도준 씨랑 혹시 같이 있어요?” “…….”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한밤중에 전류를 타고 방 안에 흘러 들었다. 이에 시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몇 초 뒤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오빠가 저랑 같이 있겠어요? 도준 오빠는 아마 자고 있겠죠.” 물론 시영의 말이 맞는 말이었지만 하윤은 믿을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하윤은 마치 도준이 전화 건너편에서 자기를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시영 언니가 아니라고 하니, 아마 도준 씨가 나랑 말 걸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도준이 듣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하윤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늦었는데 걱정시켜서…….” 환한 거실 안, 시영은 난감한
민씨 저택. 민시영은 소리 없이 하품을 하며 얼어붙은 것처럼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한번 훑어보더니 이내 시계를 힐끗 스쳐봤다. 벌써 4시. 민재혁네 식구가 요즘 얌전해서 그나마 편히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솔직히 방금 새벽 3시 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려 안채로 부를 때, 시영은 할아버지가 다시 살아 돌아온 줄 알고 섬뜩했었다. 그런데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오늘 잠 자기는 글러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끝내 참지 못한 시영은 슬금슬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나선 시영은 계단 앞에서 저도 모르게 습관 적으로 손을 들었다. 이건 야맹인 시영의 습관이다. 하지만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걸 문뜩 인지한 순간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걸렸다. ‘내가 진짜 잠을 못 자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네. 내 손으로 직접 해원으로 보냈으면서 부축해 주길 바라다니.’ 홀로 난원에 돌아간 시영은 창가에 서서 고요한 저택을 살폈다. 그 순간 어두운 창에 희미한 그림자가 비쳤다. 한편, 해원에 있는 케빈도 창가에 서서 네온사인으로 물든 강을 구경하고 있었다. 밤이 저물자 흥도 점점 식어갔다. …… 다음날. 하윤이 깨어났을 때 핸드폰 베터리가 나가 전원이 꺼져 있었다. 그건 하윤의 핸드폰도 마찬가지였다. 하윤은 얼른 핸드폰을 충전하고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 그러고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할 때 그 핸드폰을 케빈에게 돌려주었다. “죄송해요, 어제 케빈 씨 핸드폰을 제가 가져가 버려서.” 케빈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에 하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하기 시작하더니 한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오늘 누구 좀 만나야 할 것 같아요.” 하윤은 진은영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몇 년 전 오나영과 채영 모두 하윤의 아버지가 자기한테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고발했지만 진은영은 그저 증인 신분으로 증언했다. 때문에 계획을 실행하기 전 하윤은 진은영이 오나영과 채영과 함께 돈을 받
권하윤의 말에 어느 정도 태도가 누그러졌던 진은영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시윤아, 나 원래 네 아빠와 너는 다르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만약 네 아버지를 위해 변명이라도 하려고 찾아온 거라면 미안한데 그만 나가 줄래?” “저 변명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아빠 정말 억울하게 당한 거라고요. 오나영과 채영이 돈을 받고 아빠를 모함했어요.”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선배도 아빠 밑에서 오랫동안 배웠잖아요. 그런데도 제 아빠 인성을 못 믿어요?” “내가 애초에 교수님을 너무 믿었던 게 문제야. 그래서 그걸 직접 목격했을 때 더 구역질 났던 거고!” 진은영의 표정은 분노 때문에 일그러졌다. “교수님 밑에서 배웠던 게 수치스러울 만큼!” 상대가 아버지를 폄훼하자 더 이상 냉정을 취할 수 없었던 하윤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제가 볼 때는 아빠가 선배 같은 제자를 둔 게 치욕이에요!” “뭐라고?” 진은영이 버럭 소리 지르자 하윤은 곧바로 어제 찍어 두었던 영상을 재생해 진은영에게 던져 주었다. “직접 봐요.” 진은영은 의아해하며 핸드폰을 건내 받았다. 그렇게 보게 된 영상 속에는 오나영과 채영이 화장실 거울 앞에서 대화하는 모습이 들어 있었다.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대화의 첫 마디를 듣는 순간 진은영은 할 말을 잃었다. “너 뭐 하자는 거야? 우리가 위증을 했다는 걸 시윤이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진은영은 마치 머리라도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 충격에 빠트린 건 그 뒤에 이어진 둘의 대화였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에 진은영은 영상이 끝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하윤이 진은영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입을 열었다. “이래도 제 아버지가 두 사람을 추행하는 걸 선배 눈으로 직접 봤다고 할 수 있어요?” 진은영은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 순간 진은영의 얼굴에는 미안함, 분노 그리고 비통함이 섞여 있었다. 심지어 혼이라도 나간 것처럼 말도 더듬었다.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