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문을 닫은 뒤에도 여전히 케빈의 말을 생각했다. ‘케빈 씨 말은 내가 뭘 하려는지, 어디를 가려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그 순간 민시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케빈은 자유로울 자격이 없다던 말. ‘보아하니 시영 언니뿐만 아니라 케빈 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네.’ 어느새 조용한 방은 차가운 에어컨 바람으로 가득 찼고, 하윤은 책상 앞에 앉아 집중해서 자료를 펼쳐 보고 있었다. 하지만 보다 보니 눈앞에 자꾸만 익숙한 남자가 아른거렸다. ‘케빈 씨가 갑자기 나타난 게 혹시 도준 씨랑 관련 있나?’ ‘내가 혼자 길을 떠나는 게 걱정돼서 도준 씨가 일부러 케빈 씨를 보낸 건가?’ 이런 가능성만 생각하면 하윤은 코끝이 시큰거렸다. ‘나를 버리기로 했어도 여전히 내 안전을 위해 모든 걸 준비해 뒀나 보네.’ 먼 거리 때문에 사랑과 증오가 사라지고 그 대신 그리움만 남은 모양이다. 이제 떨어져 있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보고싶은 걸 보면. ‘도준 씨는 뭘 하고 있을까? 설마 벌써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이 시각 하윤의 가슴에 쌓인 감정은 미친듯이 부풀어 올라 출구가 필요했고, 잘 프린트 된 글자는 아무리 애써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채 생각조차 방해했다. 결국 하윤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도준과 주고받은 문자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고심 끝에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가 다시 지우는 바람에 그렇게 많던 글자가 고작 몇 글자로 요약됐다. 그 문자를 보내자 불편한 감정이 어느 정도 사그라 들어 하윤은 다시 자료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윽고 리스트를 한 페이지씩 확인하면서 기억에 따라 이름을 추가했다. 그리고 그 시각, 하윤의 마음을 담은 문자메시지는 도준에게 도착했다. [저 해원에 도착했어요. 여기 날씨가 너무 더워서 손목 상처가 간지러워요. 그런데 흉터 질까 봐 긁지도 못해 지금 기분이 안 좋아요.] 문자만 봐도 하윤의 투덜거리는 말투와 잔뜩 찌푸린 표정을 듣고 볼 수 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 투정 부리며 애교 부리
권하윤은 선물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더니 남자에게 쑥 밀었다. “종서 선배 고마워요. 저녁에도 수고 좀 해 줘요.” 김종서는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유, 뭘 이런 걸 다. 내가 후배한테서 선물을 어떻게 받아?” 김종서는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어느새 W사 시계를 손목에 차보기까지 하며 소시민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김종서가 이런 사람이 아니라면 하윤은 아마 김종서에게 이런 일을 부탁하러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다. 김종서도 예전에는 이성호의 학생이었는데, 돈을 너무 밝히는 탓에 음악을 조금 배우는가 싶더니 몇 달도 견지하지 않고 장사한다며 도망쳐 버렸다. 하지만 그나마 머리가 좋아 문화예술에 관한 사업을 하다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중간에서 이익을 잘 챙 부를 축적했고, 동창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다 보니 김종서를 찾아오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다. 물론 이건 하윤의 계획 중 첫 번째 단계일 뿐이지만. “시윤아, 너 그동안 어디서 지냈어? 왜 2년 동안 소식이 없었어?” 김종서는 전복 죽을 홀짝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어중간한 때라 그런지 하윤은 입맛이 없어 물만 마셨다. “저 계속 경성에 있었어요.” “경성 좋지. 나도 이제 시간 되면 가보려고 하는데. 그곳에 유명한 재벌이 엄청 많다며? 우리 여기 공씨 가문처럼. 성이 뭐였더라? 민 씨였나?” 성만 들었지만 하윤의 가슴은 순간 뜨거워졌다. 하윤과 도준의 일은 경성 명문가에서 떠들썩했지만 일반 사람들의 귀에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더욱이 두 사람은 공개적인 결혼식도 올린 적이 없으니 해원에 있는 평민은 더더욱 두 사람을 연상시킬 리 없다. 하윤은 답답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가방을 쥐고 일어섰다. “저 오후에 일이 좀 있어서 우리 저녁에 만나요.” 김종서는 테이블 위에 놓인 비싼 요리들을 훑어보더니 지갑을 찾는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건 내가 계산할 게. 카드가…….” 하지만 김종서의 꿍꿍이를 바로 파악한 하윤은 싱긋 미소 지으며 막아
김종서가 있을 때는 그나마 시끌벅적하던 방 안이 김종서가 떠나니 일순 조용해졌다. 특히 종서가 말했던 부자가 도착했다고 하니 모두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문 밖으로 향했다. “그 부자라는 사람이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콘서트홀을 짓는다는 거지? 우리를 속이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 “설마. 여기 1인당 50만 원씩 하는 곳이야. 부자인 게 틀림없어.” 오나영은 그 말에 다시 한번 쿠션 뚜껑을 열어 거울을 보며 얼굴 상태를 확인하기 바빴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창 토론하던 그때, 은회색 양복 차림의 남자가 웬 여자를 데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던 사람들은 하윤의 얼굴을 보자 모두 얼어붙었다. 하지만 하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다 왔네요.” 이윽고 하윤은 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WM 해운 회사 대표, 던이에요.” 분위기는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특히 이성호를 고발했던 오나영과 채영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윤은 두 사람의 표정을 눈에 넣고는 던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때 하윤과 조금 친하게 지내던 선배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윤아,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네요. 제 남친이 콘서트홀을 지어준다고 하지 않았으면 아마 여기에 다시 오지 않았을 거예요.” 하윤은 애교 섞인 눈빛으로 던을 바라보며 눈치를 보냈다. 그제야 던은 이를 악문 채로 어렵사리 몇 글자 내뱉었다. “자기가 좋으면 됐지 뭐.” 하윤은 입을 막은 채 웃으며 던의 말에 맞장구쳤다. “제가 언제 기분 나빠 한 적 있었나요?” 그때 웬 선배가 하윤의 손에 있는 루비 반지를 보며 감탄했다. “이렇게 큰 루비는 처음 보는데.” “네? 이거요?” 하윤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툭툭 털었다. “전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무거워 죽겠어요.” 오나영을 포함한 몇 명은 하윤을 보는 순간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는데 이렇게 남한테 빌붙어서 고상한 척하는 하윤을 보
권하윤은 오나영이 자기의 기를 꺾기 위해 아버지를 언급하자 더 분발했다. “우리 아빠가 왜요? 우리 아빠는 음악가예요.” 오나영은 그 말에 우습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음악가? 학생과 불륜을 저지르는 게 무슨 음악가라고…….” “나영!”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채영이 갑자기 큰 소리로 오나영을 제지했다. “그만해!” 그제야 오나영도 실언했다는 걸 인지했는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채영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바라보자 어색한 듯 웃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다 선후배 사이인데 지난 일은 뭐 하러 꺼내? 기쁜 날 기쁜 얘기만 하자.” 이윽고 채영은 오나영에게 눈치를 보냈다. “나영아, 나랑 화장 실 좀 같이 가자.” 그때 하윤의 눈빛을 받은 김종서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친절하게 두 사람을 안내했다. “우리 룸에도 화장실 있어. 저기 안에.” 잠시 뒤, 채영은 화장실 문을 닫자마자 낮은 소리로 따져 물었다. “너 뭐 하자는 거야? 우리가 위증을 했다는 걸 시윤이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오나영은 눈을 희번뜩였다. “걔가 그걸 어떻게 안다고 그래? 내가 볼 땐 돈 많은 남자 좀 꿰찼다고 성이 뭔지도 잊은 것 같던데.” 채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바깥 쪽을 살폈다. “쟤가 우리를 찾아온 게 자랑하러 온 것만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아니면 엄석규 쌤 한테 물어볼까?” 오나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또다시 화장을 고쳤다. “엄석규 쌤도 그냥 말 전하는 사람이잖아. 물어 봤자 뭐 건질 거 있어?” 립스틱을 바르던 오나영은 여전히 긴장한 채영을 보며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겁이 그렇게 많아서 어디에 쓰겠어? 그거 벌써 몇 년 전 일이야. 그게 그렇게 쉽게 들킬 리가 없잖아.” “말이 쉽지. 넌 취직이 필요 없으니 명성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잖아.” 그 말에 오나영은 불만 가득한 말투로 맞받아 쳤다. “명성을 그렇게 중요시하면 애초에 돈은 왜 받았어?” “그건…….” 말문이 막힌 치영은 끝내 말을 잇지
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어진 던도 곧바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나영 씨, 저는 모르는 사람과 술 안 마셔요. 잔 부딛히는 것도 싫어요.” 오나영은 던이 농담한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테이블에 슬쩍 기대며 눈을 깜빡거렸다. “왜요?” 하지만 그때, 오나영의 엉덩이가 당장이라도 접시에 닿으려고 하자 던은 벌떡 일어섰다. “그쪽 몸에 무슨 병균이 있는지 모르잖아요. 예를 들면 헬리코박터균, 대장균, B형 간염 같은 그런 병균 말입니다. 게다가 오나영 씨 현재 위생 습관으로 비추어 보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오나영이 던에게 몸을 기대려고 할 때 룸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두 사람에게 향한 데다, 던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기에 둘의 대화를 똑똑히 들어버렸다. 심지어 일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그런 모욕을 당하고 나니 오나영은 떠날 때까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심지어 차 문도 쾅 하고 닫아버리며 화를 표출했다. 하지만 화가 쉽게 풀리지 않았는지 얼른 핸드폰을 꺼내 게시물 하나를 올렸다. [우리 자기님들, 오늘 밤 9시에 생방송에서 만나. 여러분과 대화하고 싶어.] ‘감히 날 건드려? 내가 오늘 너 아주 제대로 박살 내 줄게.’ …… 그 시각 오나영이 복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걸 알 리 없는 하윤은 주림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수소문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하윤의 시선을 피하며 주림과는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고만 대답했다. 그런 상대의 표정에서 자기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판단한 하윤은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머리를 돌렸다. “주림 선배도 같이 불러서 함께 모일까 했는데, 이렇게 신비로울 줄은 몰랐네요. 그렇다면 다음 기회에 모일 수밖에 없겠네요.” 하윤의 표정이 여느 때와 다름이 없자 상대도 이내 긴장을 풀고 따라 웃었다. “그래. 앞으로 우리도 네 덕 좀 봐야 할 것 같은데.” “별말씀을요.” 헤어질 때가 다가오자 하윤의 인사치레 미소도
권하윤은 던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우울하던 마음이 기적처럼 사라졌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하윤은 샤워를 하고 난 뒤에 책상에 엎드려 리스트를 다시 펼쳐 보더니 오나영과 채영의 사진에 붙어 있던 보라색 테이프를 떼어냈다. 두 사람은 매수당한 입장이니 진짜 범인일 리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이내 진은영의 이름이 있는 페이지를 펼쳐 이름 위에 물음표를 그렸다. 하윤은 그제야 이 리스트가 얼마나 편리한 지 알 것 같았다. 만약 이 리스트가 아니었다면 모든 단서들이 머리 속에서 뒤엉켜 갈피를 잡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이러고 보니 던도 어느 정도는 좋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윤이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하윤은 두근 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얼른 핸드폰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아니라 생방송 알림이었다. 하윤이 낮에 오나영을 파헤치기 위해 오나영의 모든 계정을 팔로우 했기에 이렇게 생방송 알림이 뜬 거다. 오나영은 그때의 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 데다 분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현재 200만 정도 되는 팬을 보유하고 있다. 심지어 생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스크린 댓글 창에 수많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비친 오나영은 무척 다정했으며 웃는 얼굴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 아직도 안 자는 자기님들이 있었네? 나 오늘 기분 나쁜 일을 겪어서 옛날 일이 떠올랐어.” 오나영이 생방송에서 그때의 일을 언급한 게 이번 한번뿐이 아니다. 그 주제로 돈맛을 보고 난 뒤, 오나영은 거의 매번 방송을 켤 때마다 이성호에 관한 일을 얘기하여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 그건 이번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들 내가 몇 년 전에 얼마나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었는지 알고 있을 거야. 사실 나는 막 대학에 입학해 이성호 교수님 제자가 되었을 때만 해도 내가 아주 운이 좋다고 생각했어. 그게 내 악몽의 시작일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이성호 교수님은 나를 자기 연습실에 불러 손을 내 어깨에 올려놓고 만
“내 후배이자 이성호의 딸이 해원에 돌아왔거든. 그런데 아직도 그때 그 일로 나를 탓하고 있더라고. 자기 아버지는 음악가였는데 내가 자기 아버지를 망치고 자기 가정을 망쳤다면서.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속상하더라. 내가 진짜 틀린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오나영이 미안한 표정을 짓자 네티즌은 순간 폭발했다. [본인 아버지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몰라서 그런대요?] [그 아비에 그 딸이라더니 역시 딸도 짐승만도 못하네.] [혹시 누가 그 여자 연락처 알아요? 가서 욕해 놓고 싶네.] 스크린을 도배한 하윤을 욕하는 댓글에 오나영의 화는 금세 누그러들어 능청스레 팬들을 말리기까지 했다. “아니야. 절대 그러지 마. 걔 남자 친구가 나이는 좀 있어도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고 들었어. 우리 자기님들이 나 대신 나섰다가 피해라도 입으면 어쩌려고.” [나이가 많다고? 이거 스폰인가 보네.] [이젠 아주 스폰까지? 부녀가 쌍으로 참 구역질 나네.] [걱정하지 마요. 우리가 아주 본대를 보여 줄게요.] …… 스크린을 꽉 채운 욕설과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단어를 본 순간, 핸드폰을 들고 있던 하윤의 뼈마디는 하얗게 질렸다. 사실 몇 년 전 오나영이 채영의 논문을 훔쳐 먼저 발표해 채영은 논문 표절 의혹을 받아 교환 학생 신청에 실격 처리를 받게 되었다. 그때 사실을 알고 분노한 이성호는 그 일을 학교측에 보고했다. 하지만 대부분 학교가 그렇듯 문제가 일어나면 소란 없이 처리하려 하다 보니 그 일은 조용히 묻고 가자는 결론이 나버렸다. 공개적으로 처벌하지 않으면 채영만 억울하게 손해보기에 이성호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채영을 데리고 교장실까지 찾아다니며 채영을 위해 정의구현에 힘썼고, 그 결과 채영은 그렇게 원하던 교환학생 자격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뒤 채영은 오나영과 함께 이성호를 고발했고 전에 있었던 일까지 모두 부인했다. 이성호가 오나영을 일부러 음해한 거라고, 오나영은 자기 논문을 표절하지 않았다면서. 그런데 이 순간, 스크린
“윤이 씨, 괜찮아요?” 민시영의 목소리를 듣자 권하윤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공허한 마음과 함께 코끝이 시큰거릴 뿐. “저 괜찮아요.” 시영은 하윤의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번 일은 제가 처리할 테니까. 이제 그런 소리 듣지 않아도 돼요.” 하윤은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공황에서 벗어나려 했다. “괜찮아요, 시영 언니는 상관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시영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래요, 그럼 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시영이 잠깐 멈칫하는 사이 하윤은 순간 뭔가를 느꼈는지 꺼졌던 희망이 다시 불타올랐다. 그걸 모르는 시영은 전화 건너편에서 하윤이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고 있을까 봐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인터넷 댓글은 너무 신경 쓸 거 없어요. 그 사람들이 싫어하는 악한 사람인데 윤이 씨는 아니잖아요.” “네, 알겠어요.” “다른 일 없으면 이만…….” “시영 언니.” 전화를 끊으려던 시영이 멈칫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그 순간 하윤이 핸드폰을 꽉 쥐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처럼. “도준 씨랑 혹시 같이 있어요?” “…….”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한밤중에 전류를 타고 방 안에 흘러 들었다. 이에 시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몇 초 뒤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오빠가 저랑 같이 있겠어요? 도준 오빠는 아마 자고 있겠죠.” 물론 시영의 말이 맞는 말이었지만 하윤은 믿을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하윤은 마치 도준이 전화 건너편에서 자기를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시영 언니가 아니라고 하니, 아마 도준 씨가 나랑 말 걸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도준이 듣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하윤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늦었는데 걱정시켜서…….” 환한 거실 안, 시영은 난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