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던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우울하던 마음이 기적처럼 사라졌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하윤은 샤워를 하고 난 뒤에 책상에 엎드려 리스트를 다시 펼쳐 보더니 오나영과 채영의 사진에 붙어 있던 보라색 테이프를 떼어냈다. 두 사람은 매수당한 입장이니 진짜 범인일 리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이내 진은영의 이름이 있는 페이지를 펼쳐 이름 위에 물음표를 그렸다. 하윤은 그제야 이 리스트가 얼마나 편리한 지 알 것 같았다. 만약 이 리스트가 아니었다면 모든 단서들이 머리 속에서 뒤엉켜 갈피를 잡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이러고 보니 던도 어느 정도는 좋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윤이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하윤은 두근 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얼른 핸드폰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아니라 생방송 알림이었다. 하윤이 낮에 오나영을 파헤치기 위해 오나영의 모든 계정을 팔로우 했기에 이렇게 생방송 알림이 뜬 거다. 오나영은 그때의 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 데다 분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현재 200만 정도 되는 팬을 보유하고 있다. 심지어 생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스크린 댓글 창에 수많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비친 오나영은 무척 다정했으며 웃는 얼굴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 아직도 안 자는 자기님들이 있었네? 나 오늘 기분 나쁜 일을 겪어서 옛날 일이 떠올랐어.” 오나영이 생방송에서 그때의 일을 언급한 게 이번 한번뿐이 아니다. 그 주제로 돈맛을 보고 난 뒤, 오나영은 거의 매번 방송을 켤 때마다 이성호에 관한 일을 얘기하여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 그건 이번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들 내가 몇 년 전에 얼마나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었는지 알고 있을 거야. 사실 나는 막 대학에 입학해 이성호 교수님 제자가 되었을 때만 해도 내가 아주 운이 좋다고 생각했어. 그게 내 악몽의 시작일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이성호 교수님은 나를 자기 연습실에 불러 손을 내 어깨에 올려놓고 만
“내 후배이자 이성호의 딸이 해원에 돌아왔거든. 그런데 아직도 그때 그 일로 나를 탓하고 있더라고. 자기 아버지는 음악가였는데 내가 자기 아버지를 망치고 자기 가정을 망쳤다면서.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속상하더라. 내가 진짜 틀린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오나영이 미안한 표정을 짓자 네티즌은 순간 폭발했다. [본인 아버지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몰라서 그런대요?] [그 아비에 그 딸이라더니 역시 딸도 짐승만도 못하네.] [혹시 누가 그 여자 연락처 알아요? 가서 욕해 놓고 싶네.] 스크린을 도배한 하윤을 욕하는 댓글에 오나영의 화는 금세 누그러들어 능청스레 팬들을 말리기까지 했다. “아니야. 절대 그러지 마. 걔 남자 친구가 나이는 좀 있어도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고 들었어. 우리 자기님들이 나 대신 나섰다가 피해라도 입으면 어쩌려고.” [나이가 많다고? 이거 스폰인가 보네.] [이젠 아주 스폰까지? 부녀가 쌍으로 참 구역질 나네.] [걱정하지 마요. 우리가 아주 본대를 보여 줄게요.] …… 스크린을 꽉 채운 욕설과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단어를 본 순간, 핸드폰을 들고 있던 하윤의 뼈마디는 하얗게 질렸다. 사실 몇 년 전 오나영이 채영의 논문을 훔쳐 먼저 발표해 채영은 논문 표절 의혹을 받아 교환 학생 신청에 실격 처리를 받게 되었다. 그때 사실을 알고 분노한 이성호는 그 일을 학교측에 보고했다. 하지만 대부분 학교가 그렇듯 문제가 일어나면 소란 없이 처리하려 하다 보니 그 일은 조용히 묻고 가자는 결론이 나버렸다. 공개적으로 처벌하지 않으면 채영만 억울하게 손해보기에 이성호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채영을 데리고 교장실까지 찾아다니며 채영을 위해 정의구현에 힘썼고, 그 결과 채영은 그렇게 원하던 교환학생 자격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뒤 채영은 오나영과 함께 이성호를 고발했고 전에 있었던 일까지 모두 부인했다. 이성호가 오나영을 일부러 음해한 거라고, 오나영은 자기 논문을 표절하지 않았다면서. 그런데 이 순간, 스크린
“윤이 씨, 괜찮아요?” 민시영의 목소리를 듣자 권하윤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공허한 마음과 함께 코끝이 시큰거릴 뿐. “저 괜찮아요.” 시영은 하윤의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번 일은 제가 처리할 테니까. 이제 그런 소리 듣지 않아도 돼요.” 하윤은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공황에서 벗어나려 했다. “괜찮아요, 시영 언니는 상관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시영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래요, 그럼 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시영이 잠깐 멈칫하는 사이 하윤은 순간 뭔가를 느꼈는지 꺼졌던 희망이 다시 불타올랐다. 그걸 모르는 시영은 전화 건너편에서 하윤이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고 있을까 봐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인터넷 댓글은 너무 신경 쓸 거 없어요. 그 사람들이 싫어하는 악한 사람인데 윤이 씨는 아니잖아요.” “네, 알겠어요.” “다른 일 없으면 이만…….” “시영 언니.” 전화를 끊으려던 시영이 멈칫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그 순간 하윤이 핸드폰을 꽉 쥐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처럼. “도준 씨랑 혹시 같이 있어요?” “…….”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한밤중에 전류를 타고 방 안에 흘러 들었다. 이에 시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몇 초 뒤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오빠가 저랑 같이 있겠어요? 도준 오빠는 아마 자고 있겠죠.” 물론 시영의 말이 맞는 말이었지만 하윤은 믿을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하윤은 마치 도준이 전화 건너편에서 자기를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시영 언니가 아니라고 하니, 아마 도준 씨가 나랑 말 걸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도준이 듣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하윤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늦었는데 걱정시켜서…….” 환한 거실 안, 시영은 난감한
민씨 저택. 민시영은 소리 없이 하품을 하며 얼어붙은 것처럼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한번 훑어보더니 이내 시계를 힐끗 스쳐봤다. 벌써 4시. 민재혁네 식구가 요즘 얌전해서 그나마 편히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솔직히 방금 새벽 3시 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려 안채로 부를 때, 시영은 할아버지가 다시 살아 돌아온 줄 알고 섬뜩했었다. 그런데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오늘 잠 자기는 글러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끝내 참지 못한 시영은 슬금슬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나선 시영은 계단 앞에서 저도 모르게 습관 적으로 손을 들었다. 이건 야맹인 시영의 습관이다. 하지만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걸 문뜩 인지한 순간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걸렸다. ‘내가 진짜 잠을 못 자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네. 내 손으로 직접 해원으로 보냈으면서 부축해 주길 바라다니.’ 홀로 난원에 돌아간 시영은 창가에 서서 고요한 저택을 살폈다. 그 순간 어두운 창에 희미한 그림자가 비쳤다. 한편, 해원에 있는 케빈도 창가에 서서 네온사인으로 물든 강을 구경하고 있었다. 밤이 저물자 흥도 점점 식어갔다. …… 다음날. 하윤이 깨어났을 때 핸드폰 베터리가 나가 전원이 꺼져 있었다. 그건 하윤의 핸드폰도 마찬가지였다. 하윤은 얼른 핸드폰을 충전하고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 그러고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할 때 그 핸드폰을 케빈에게 돌려주었다. “죄송해요, 어제 케빈 씨 핸드폰을 제가 가져가 버려서.” 케빈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에 하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하기 시작하더니 한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오늘 누구 좀 만나야 할 것 같아요.” 하윤은 진은영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몇 년 전 오나영과 채영 모두 하윤의 아버지가 자기한테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고발했지만 진은영은 그저 증인 신분으로 증언했다. 때문에 계획을 실행하기 전 하윤은 진은영이 오나영과 채영과 함께 돈을 받
권하윤의 말에 어느 정도 태도가 누그러졌던 진은영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시윤아, 나 원래 네 아빠와 너는 다르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만약 네 아버지를 위해 변명이라도 하려고 찾아온 거라면 미안한데 그만 나가 줄래?” “저 변명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아빠 정말 억울하게 당한 거라고요. 오나영과 채영이 돈을 받고 아빠를 모함했어요.”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선배도 아빠 밑에서 오랫동안 배웠잖아요. 그런데도 제 아빠 인성을 못 믿어요?” “내가 애초에 교수님을 너무 믿었던 게 문제야. 그래서 그걸 직접 목격했을 때 더 구역질 났던 거고!” 진은영의 표정은 분노 때문에 일그러졌다. “교수님 밑에서 배웠던 게 수치스러울 만큼!” 상대가 아버지를 폄훼하자 더 이상 냉정을 취할 수 없었던 하윤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제가 볼 때는 아빠가 선배 같은 제자를 둔 게 치욕이에요!” “뭐라고?” 진은영이 버럭 소리 지르자 하윤은 곧바로 어제 찍어 두었던 영상을 재생해 진은영에게 던져 주었다. “직접 봐요.” 진은영은 의아해하며 핸드폰을 건내 받았다. 그렇게 보게 된 영상 속에는 오나영과 채영이 화장실 거울 앞에서 대화하는 모습이 들어 있었다.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대화의 첫 마디를 듣는 순간 진은영은 할 말을 잃었다. “너 뭐 하자는 거야? 우리가 위증을 했다는 걸 시윤이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진은영은 마치 머리라도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 충격에 빠트린 건 그 뒤에 이어진 둘의 대화였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에 진은영은 영상이 끝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하윤이 진은영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입을 열었다. “이래도 제 아버지가 두 사람을 추행하는 걸 선배 눈으로 직접 봤다고 할 수 있어요?” 진은영은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 순간 진은영의 얼굴에는 미안함, 분노 그리고 비통함이 섞여 있었다. 심지어 혼이라도 나간 것처럼 말도 더듬었다.
생각을 정리한 권하윤은 깊은 숨을 들이켰다. “은영 선배, 우리 아빠가 돌아가셨다지만 저는 아빠가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걸 볼 수 없어요. 선배가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진은영을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진은영의 눈에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가득했다. “네가 그런 말 하지 않아도 교수님 결백을 증명하고 싶었어. 교수님은…….” 한창 말하던 진은영의 눈시울은 이내 붉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어리석었어. 내가 교수님을 오해하다니, 교수님은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 진은영은 하윤의 손을 꼭 잡았다. “차라리 나 때려. 욕해도 돼.” 하윤은 텅 빈 눈으로 진은영을 바라봤다. ‘지금 때린다고 뭐가 달라지나? 아빠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아버지가 그런 누명까지 쓰면서 뛰어내린 건 공은채를 위한 거잖아.’ 그 순간 눈 앞에 어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렸고 귓가에 확신을 가진 채 말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난 네 아빠 믿어.” 눈을 감은 순간 눈물이 하윤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진은영의 집을 떠날 때, 하윤의 다리는 마치 철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겁기 그지없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앉아 휴식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호텔로 돌아간 하윤은 던을 찾아갔다. 하지만 던의 방문을 한참 동안 노크해도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던이 없으니 하윤은 자기 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공간에서 하윤은 점점 생각에 잠겼다. ‘아빠는 왜 공은채랑 껴안고 있었던 거지?’ 그 순간 오나영이 식사 자리에서 비아냥거리듯 말했던 한 마디가 떠올랐다. “학생과 불륜을 저지르는 게 무슨 음악가라고…….” ‘그 말은 단지 나를 찍어 누리기 위해 했던 걸까? 아니면 뭘 알고 하는 얘기였을까?’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했다. 심지어 거대한 소용돌이가 하윤을 삼켜버리는 것만 같았다. …… 오후에 방으로 돌아온 던은 하윤의 안색을 보고는 예의껏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고 커피를
권하윤은 우는 소리를 내며 귀를 쫑긋 세우고 전화 건너편의 소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목이 쉬도록 울어 댔지만 건너편에서는 한마디 위로의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에 신호가 안 좋은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귀에서 떼어내 관찰하고 있을 때 전화 건너편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 울었어?”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하윤은 하마터면 핸드폰을 그대로 던져버릴 뻔했다. 하지만 그런 충동을 누른 채 의아한 듯 물었다. “저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전화 오면 지역이 뜨는 거 몰랐어?” 하윤은 순간 난처했다. 하지만 이내 의문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내가 전화한 걸 알면서도 전화 받았다는 건가?’ 그걸 인지한 순간 난처함은 기쁨으로 변했고 손가락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 변두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울려고 했는데 도준 씨 목소리를 들으니까 울기 싫어 졌어요.” “또 병이 도졌어?” 감정을 알 수 없는 목소리에 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 ‘설마 내가 또 속인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 저는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어젯밤…….” “뚜뚜뚜…….”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끊어진 전화에 하윤은 풀이 죽었다. 하지만 도준과 말이라도 했다는 생각을 하니 충전이라도 한 것처럼 힘이 솟아났다. 이에 하윤은 다시 침대에 엎드린 채 엄석규의 자료를 펼쳐봤다. 엄석규는 이성호와 마찬가지로 해원 음악 대학의 선생이다. 물론 이성호는 교수이고 엄석규는 부교수였지만. 그런데 지금 엄석규는 학교의 부총장으로 승진했다. 엄석규는 이성호처럼 평생 음악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관직에 더 집착했다. 보통 사람이 위로 올라가려면 필요한 요소는 적지 않다. 인맥, 스펙, 직함 그리고 배경 등등. 엄석규와 이성호는 대학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는데 집안은 그나마 풍족하게 사는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앞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엄석규가 위증을 하고 난 뒤 고작 몇 년 동안 부교수에서 바로 교수, 학과장, 부학장,
행사 당일. 하윤은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던의 서류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스폰서인 던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심지어 학장이 직접 두 명의 학과장과 영어 통역을 도와줄 영어 선생님을 데리고 마중 나왔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던에게 영어 선생님은 사실 필요 없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던은 매번 한국어 발음을 또박또박 하려고 애쓰다 보니 외국인이 한국어 듣기 평가 시험 문제를 읽는 것 같다는 착각을 주기는 했다. 학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런 던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해원 음악 대학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선 학교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점심은 학교 귀빈실에 준비해 뒀습니다. 그리고 행사는 오후 1시에 옆에 있는 콘서트홀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학장은 말하면서 영어 선생님을 바라봤고 영어 선생님이 통역을 하는 동안 던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경청했다. 하지만 영어 선생님이 어렵사리 통역을 마치자 그제서야 유창한 한국어로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 말에 학장과 영어 선생님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다가 본관에 도착하자 존재감을 숨기고 있던 하윤이 갑자기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고, 앞에서 걸어가던 던이 발걸음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이 건물은 조금 특이해 보이네요.” 학장과 학과장은 일제히 퇴색한 낡은 건물을 바라봤다. 이윽고 귀빈의 취향을 모르는 학장은 마지못해 맞장구 치며 대답했다. “네, 뭐 고풍스럽고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물이긴 하죠.” “그렇게 칭찬하니 들어가 보고 싶네요.” 던은 사람들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말을 마치자마자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 저기…….” 학장은 이내 던을 막으려 했지만 곧이어 반시간도 넘는 사무실 관광이 이어졌다. 교실부터 교사들의 사무실, 심지어는 도구실까지 던은 꼼꼼히 살폈다. 그렇게 총장실에 도착하자 학장은 너무 놀라 머리가 곤두섰다. “저기……, 총장실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