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안에는 송 대표와 송민우, 그리고 전에 권하윤에게 명함을 건넸던 여 부사장과 세일즈 매니저도 함께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하윤을 보자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서연을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특히 서연이 중요한 직책을 가진 직원이 아니라는 걸 듣는 순간 표정은 묘해졌다. 하윤은 당연히 그들의 무얼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모르는 척 연기했다. 그리고 그제야 하윤은 자기가 이 자리에 올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저도 모르게 여기까지 와버린 데다 이미 식사가 시작되어 하윤은 더더욱 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때문에 마치 억지로 무대 위로 끌려와 즉흥 연기를 펼치는 행인처럼 어색한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하윤의 자리는 당연히 도준의 옆에 배정되었다. 그리고 서연은 권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조심스럽게 도준의 반대편 옆자리로 다가갔다. “저 여기 앉으면 되나요?” 도준은 서연을 빤히 바라볼 뿐 제지하지 않았다. 주인공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송 대표도 당연히 뭐라 할 수 없어 자기 자리에 앉았다. 두 회사의 협력을 위해 송씨 가문은 충분한 성의를 보였다. 송씨 가문은 유명한 재벌가에 속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송 대표도 자수성가로 회사를 일으킨 사람이기에 회사가 다른 회사처럼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송 대표는 기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매번 기술 혁신을 할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다면 창고에 있는 기계들은 그저 고철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도. 솔직히 오늘 이 자리에서 송 대표는 도준의 옆에 앉으려고 했지만 서연 때문에 떨어져 앉게 되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류를 회전식 테이블에 올려 놓고 빙 돌려 도준에게 건넸다. “민 사장님, 이건 저희가 작성한 계약서입니다. 한번 확인하세요. 문제가 있다면 저희가 수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서류가 도준한테 가기도 전에 서연이 중간에 가로채버
송 대표는 얼른 품에서 펜을 꺼내더니 또 서연이 가로채기라도 할가 봐 빙글 돌아 직접 민도준에게 건네주었다. “펜 여기 있습니다.” 도준은 펜을 받아 들자마자 서류에‘슥슥’ 사인했다. 그 모습을 본 송 대표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 하지만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서류를 받아 들고는 감사 인사를 했다. “이시윤 씨, 민 사장님, 감사합니다.” 하윤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멍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제지하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아니…… 왜 보지도 않고 사인해요?”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러니까 열심히 보라고 했잖아. 본인이 안 봤으면서 내 탓처럼 말하네?” 하윤은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괜히 화를 내서 성깔을 부린 걸 후회하는 동시에 도준이 밑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이 해프닝 덕에 송 대표는 하윤을 신처럼 떠받들며 보살처럼 생겼다는 둥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는 둥 칭찬을 늘어놓았다. 게다가 하윤의 관상까지 분석하며 복이 가득하고 장수할 팔자라는 칭찬까지 해댔다. 심지어 송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조차 하윤을 마스코트인 것처럼 받들며 서연은 아예 병풍 취급을 해버렸다. 이게 달갑지 않았는지 서연은 이내 눈알을 굴리더니 테이블 위에서 찻주전자를 들어 제멋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민 사장님, 오래 말씀하셔서 목 마르실 텐데 물 차 좀 드세요.” 심지어 차를 따르기 전에 일부러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가는 팔을 드러내더니 몸을 한껏 숙인 채로 도준에게 차를 건네며 눈빛을 보냈다. 도준은 서연이 따라준 차를 받아 들더니 손가락으로 찻잔을 빙 돌리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 “차 따르는 거 좋아하나 봐?” 서연은 도준의 눈빛에 얼굴을 붉히더니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자리에 앉을 필요도 없겠네.” 도준은 웨이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 의자 빼고 손에 들고 있는 쟁반과 걸레 이 여자한테 넘겨요.” 서연의 얼굴은 일순 새하얗게 질렸다. “민
권하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케빈 씨는…….” 민시영은 덤덤하게 웃었다. “윤이 씨 무슨 뜻으로 그런 말 하는지 알겠는데 저 이래 봬도 재벌가 아가씨예요. 제 짝이 경호원일 리는 없어요.” 하윤은 일순 침묵했다. 시영이 너무 깨어 있었으니까. 깨어 있다 못해 심지어는 매정하기까지 했다. 이에 하윤은 잠깐의 침묵을 깨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 상대가 송민우 씨인가요?” “적어도 지금은요. 저 다른 사람이 저를 어떻게 보든 상관 안 해요. 하지만 남편이 있다면 유언비어 정도는 막을 수 있잖아요.” 시영은 하윤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저희가 잉꼬부부처럼 행동하면 사람들은 아마 제가 매력 있는 사람이라고 할 걸요. 그런 일을 겪었으면서 이렇게 잘난 사람을 남편으로 맞이했다고.” 하윤도 따라 웃었지만 걱정하는 마음은 덜어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송 대표님은 두 사람 사귀는 거 알아요?” “알죠. 송 대표님의 가방끈이 짧다고 하지만 어리석은 분은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가 빨리 결혼하여 손주를 안겨주길 바라거든요.” 시영은 한참 동안 말하다가 하윤을 바라보며 간곡히 부탁했다. “윤이 씨, 혹시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시영은 화장실 밖을 한번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저랑 송민우 씨가 사귀게 되면 케빈은 앞으로 제 곁에 두기가 불편해져요. 저도 과거와 엮인 사람을 새로운 삶에 데려오고 싶지 않고요. 그래서 그러는데, 윤이 씨가 케빈을 받아줄 수 있나요?” “네?” 하윤은 순간 멍해졌다. “제가요? 그건 안 되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케빈 씨는 사람인데 어떻게 주고받을 수 있나요? 게다가 시영 언니가 데리고 있기 싫다면 자르면 그래도 본인 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케빈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어요!” 갑자기 높아진 톤에 하윤은 깜짝 놀랐다. “시영 언니, 왜 그래요?” 시영은 그제야 자기가 흥분했다는 걸 인지하고 다시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이윽고 이내 화제를 전환했다. “
이미 예상은 했지만 도준의 축객령에 하윤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손을 들어 차 문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마치 천근이나 되는 쇳덩이를 손에 매단 것처럼 손이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눈앞이 희미해졌다. 예전에는 이렇게 말한 적도, 더욱이 내쫓은 적도 없었는데. 심지어는 하윤이 삐져서 가려고 하면 도준은 이내 하윤을 붙잡아 두고 장난치면서 달래곤 했다. 예전에 했던 행동과 비교해 보니 지금의 냉대는 사람을 더 아프게 했다. 도준이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그에게 등만 보이던 여자가 꿈쩍도 하지 않고 떨고만 있자 도준은 결국 담배를 눌러 껐다. “왜? 이제는 버티고 안 가는 거야?” 눈시울과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하윤은 끝내 눈물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 비행기 티켓 끊었어요. 내일 해원으로 떠나요.” “아하, 축하해.” 도준은 하윤이 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이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말을 보탰다. “조사를 끝내면 다시 돌아 올게요.” 한참이 지났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한 하윤은 눈물을 닦고 다시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 “내일 저 배웅하러 올 거죠?” “배웅?” 도준은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어이없어 했다. “내 곁에서 도망치려고 자살로 위협까지 하는 사람을 내가 무가 아쉽다고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면서까지 배웅해야 하지?” “그런 거 아니에요.” 하윤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날 제가 했던 말은 홧김에…….” “그만해.” 도준은 다시 세상 만사 귀찮다는 듯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맞든 아니든 듣고 싶지 않아. 스스로 내릴래? 아니면 내가 밖으로 던져줄까?” 하윤 스스로도 눈치가 있으면 지금 당장 차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야 본인의 체면도 살 거고. 하지만 그날 자기가 내 뱉었던 그 말, 도준과 있는 매일이 숨막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던 말만 생각하면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일만 제외하
어둠 속에서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한참을 흐느끼던 권하윤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자 하윤은 그제야 눈치 챈 듯 고개를 들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준의 얼굴은 어둠과 어우러져 있었지만 하윤의 눈에는 밝게만 느껴졌다. 이에 하윤은 도준의 손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저 다리 아파요. 손목도 아프고요.” 너무 급하게 달린 탓에 하윤은 아직도 숨이 차 있었고 얼굴에 붙어있던 머리카락이 고개를 젖히는 동작에 따라 뒤로 흘러 넘어갔다.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어깨 라인을 따라 뒤로 흘러내렸다가 도준의 손에 감기는 동안, 하윤은 불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좀 일으켜 주면 안 돼요?” 하윤은 일부러 다리의 상처를 드러냈다. 새하얀 다리 위에 뻘건 피가 흐르자 더욱 선명하고 자극적이었지만 도준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하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뭐 하려는 거야?” 하윤은 흠칫했다. “저는…….” “죽네 사네 하면서 떠나려고 할 때는 언제고 내가 가라고 하니 이제는 대꾸 좀 해달라고? 사람 갖고 노니깐 재밌어?” 낮게 깔린 목소리가 밤바람을 따라 하윤의 귀에 냉기만 남기고 갔다. ‘그랬지. 떠나겠다고 한 건 분명 나였는데 놓아주겠다고 하니까 이제 와서 당황해하는 나도 웃겨. 나 참 이기적인 사람인가 봐.’ 하윤은 가족한테 미안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고 동시에 도준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가운데서 평형을 유지하며 가장 좋은 선택을 하려고만 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도준을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도준이 붙잡을 때는 떠나려 했다가 놓아주려 하니 이제야 매달리는 꼴이라니. ‘내가 이렇게 계속 우유부단하게 행동했는데 도준 씨 성격에 어떻게 지금까지 참아온 거지?’ 겨우 냉정을 되찾은 하윤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가벼운 한 마디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진심이 담기지도 않은 사과로 모든 걸 없는 일로 만들려 하다니 참 꿈도 야무지네.’ 도준은 진심도 아니면서 후회하는 척하는 하윤의 태도에 이제는 이골이 났기에
하윤을 안고 있던 도준은 끝내 발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하윤은 몸이 굳더니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역시나 차 옆에 도착한 거였다. 그제야 하윤은 도준의 옷깃을 잡으며 고개를 들어 도준을 바라봤다. “말 좀 해 봐요. 네?” 도준은 손을 들어 운전석 쪽 문을 열고 하윤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왜 운전석이지? 설마 떠나려는 건가?’ 도준이 몸을 일으켜 세울 때 하윤은 도준의 팔을 꼭 붙잡았다. “도준 씨는 안 타요?” 어둠 속에서 하윤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연약한 모습으로 도준을 바라봤다. 마치 도준을 떠나면 그대로 말라 비틀어버릴 것처럼. 도준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참 눈빛만 보면 깜빡 속아 넘어가겠어.’ 하지만 하필이면 그런 눈이 도준을 보며 화를 냈고 도준을 보며 함께 있는 매 순간이 숨막혀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아마 하윤 본인도 그 말을 할 때 본인의 눈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를 거다. ‘죽음으로 협박하며 떠나려 하는 여자가 날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하겠어?’ 이런 사랑을 믿는 건 세상 천지에 바보밖에 없을 거다. 도준은 하윤의 손을 잡더니 자기 팔에서 떼어냈다. 손바닥에 느껴지던 온기가 사라지던 찰나, 차가운 차키가 하윤의 손에 쥐여졌다. 하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 바래다주면 안 돼요?” 도준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하윤을 빤히 바라보더니 손으로 하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혼자 가.” “…….” ‘싫어. 혼자 가기 싫어.’ 혼자 걷는 길이 얼마나 외롭고 어려운지 하윤은 알고 있기에 혼자가 되는 게 누구보다 싫었다. 도준을 불러 세워 남아달라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입을 여는 순간 흐느낌만 흘러나왔다. 그렇게 도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하윤은 끝내 운전대에 엎드려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지만 속에 텅 빈 것 같았다. 이미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애석하게도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은 좀처럼
권하윤은 주위의 모든 걸 빙 둘러보며 낯선 얼굴들 가운데서 익숙한 그림자를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건 모두 헛수고였다. 끝내 포기한 듯 눈을 감은 하윤은 낮게 중얼거렸다. “가요.” 케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윤의 뒤를 따라 보안 검사 입구로 향하다가 갑자기 뭔가 발견한 듯 고개를 홱 돌려 한 곳을 뚫어지게응시했다. 그 곳은 인파로 북적거려 사람들이 모였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케빈은 결국 캐리어를 쥔 손에 힘을 꽉 주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하윤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케빈이 떠나간 뒤, 인파 속에는 두 남녀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여자는 세상을 깔보는 듯한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가서 배웅해주지 않아?” “하. 그러는 넌 왜 숨어서 보기만 하는데?” 여자의 눈은 순간 반짝였다. “봐도 결국은 헤어져야 할 텐데,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아.” 그 말에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멀리에 있는 실루엣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 비행기가 상공에 날아오르자 하윤은 창문을 통해 점점 멀어지는 경성을 내려다봤다. 점점 멀어져가는 산천의 모습과 함께 그곳에서 만들었던 추억도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남은 건 그저 가슴에서 점점 퍼져가는 고통뿐이었다. 그로부터 약 2시간 뒤, 하윤은 해원에 도착했다. 그곳의 기온은 경성보다 많이 높은 탓에 비행기를 나서자마자 긴 소매가 살에 달라붙은 것처럼 눅눅하고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다행히 하윤은 사람들 속에서 [이시윤]이라는 카드를 들고 있는 사람 한 명을 발견했다. 그나마 전에 던과 연락한 덕분이었다. 물론 던이 해원에 대해 익숙하지 않다며 직접 마중하러 나오지는 않고 기사에게 그 임무를 내팽개쳤지만. 차에 오른 순간 하윤은 그나마 기사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는 길에 하윤은 줄곧 창밖을 내다봤다. 해원을 떠난 뒤 다시 돌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껏 해원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높은 건물이 우
권하윤은 케빈의 배려와 보호를 받으며 속으로 케빈과 로건의 다른 점을 비교했다. 로건은 이런 세심한 보호가 필요 없는 민도준의 곁에서 오래 지내서 그런지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 쓰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케빈은 반대로 늘 주위를 경계하며 그 누구도 하윤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물론 과묵하지만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에도 문이 닫히지 않도록 막고 있다가, 하윤이 안으로 들어가면 그 뒤를 따라 들어가는 데서 그가 세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윤은 처음으로 이렇게 배려 깊은 경호를 받아 보니 왠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이 던의 방에 들어갔을 때, 던은 커피 한 잔을 들고 느긋하게 창가 옆 의자에 앉아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라 그런지 눈가에 잔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과하지는 않고 오히려 그 나이대에 있어야 할 분위기가 더해졌다. 심지어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방에 이렇게 앉아 있으니 유난히 조화로웠다. 던의 이목구비는 뚜렷하지만 라인이 매끄러워 전통적인 중유럽 사람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높은 콧날에 흠잡을 곳 없는 얼굴은 아시아인이 봐도 감탄할만한 미모였다. 하윤이 던의 생김새를 관찰하며 던이 혼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던이 마침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 놓았다. “눈빛이 참 무례하네요.” “어…… 죄송해요?” “뭐, 용서해 줄게요.” “…….” 아직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하윤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던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에 결국은 그의 맞은편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하윤은 깊은 숨을 들이켜며 말을 꺼냈다. “저…….” “제가 조사해 봤는데, 윤이 씨 아버지 이성호 교수님의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투신자살이더군요. 게다가 많은 학생들이 성추행 혐의로 이성호 교수님을 고발했고…….” 하윤은 훅 들어오는 던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저는 그게 사실이라고 믿지 않아요.” 그때, 던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