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몽사몽하던 권하윤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홱 돌리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민도준을 바라봤다.“저한테 원하는 게 아까 그게 아니었어요?”하윤은 부끄러운 나머지 너무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도준이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었다.그때 도준이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오? 그렇게 생각한 거였어? 난 또 갑자기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하윤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일부러 그런 거죠!”도준은 웃으며 하윤을 끌어당겼다.“본인이 뜻을 오해했으면서 왜 나를 탓해?”몸이 말만 잘 들었어도 하윤은 눈앞의 남자를 한바탕 때리고 싶었다.그러니까 이건 뭐 상대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하윤이 제멋에 이것저것 개고생을 했다는 뜻이다.하윤은 화가 난 듯 도준의 손을 뿌리치고는 홱 돌아누워 분을 삭였다.화가 잔뜩 난 하윤의 뒷모습을 보자 도준은 순간 기분이 좋아져 하윤을 달래듯 그녀의 어깨를 잡고 몸을 자기 쪽으로 돌려놓았다.“화났어?”하윤은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더니 아예 침대에서 내려 밖으로 나갔다.평소라면 하윤도 이 정도로 화나지는 않았지만 벌써 또 하루가 흘렀다는 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 억제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민시영의 전화에 가뜩이나 마음이 동해 의지할 무언가를 잡고 싶어 안달 나 있었다.그게 나쁘던 좋던 그저 지금처럼 이렇게 하루하루를 허망하게 보내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하윤은 거실 통유리 창 앞에 앉아 밖을 내다봤다.산속은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은데 이 한 가지만 좋지 않다. 저녁만 되면 너무 컴컴해서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게.그 어둠 덕에 창문 유리에 비친 남자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도준은 문에 기댄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불빛은 어둠 속의 유일한 불빛이었다.그러다 그 불빛이 다시 꺼질 때쯤 남자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더니 너른 가슴이 하윤의 등을 와락 껴안았다.“진짜 삐졌어?”하윤은 몇 번 버둥댔지만 소용이 없자 발을 들어 도준을 밟아버렸다
품에 안긴 여자가 눈에 띌 정도로 무기력해지자 민도준은 권하윤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하윤의 머리는 이미 아까 심술을 부린 것 때문에 헝클어졌고 눈 끝에는 여전히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가련하기 그지없었다.짙고 검은 눈동자는 그렇게 한참 동안 하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그러다 잠시 뒤 도준은 손가락을 들어 하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작은 물방울이 지문을 따라 퍼지면서 손바닥에서 사라졌다.“앞으로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줄 테니까 울지 마.”갑작스러운 약속에 하윤은 순간 슬픔을 잊고 멍하니 도준을 바라봤다. 솔직히 조금 믿기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정말이에요?”“응.”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하윤 씨 말 들을게. 가족도 여기로 모셔 와서 잘 보살펴 주고. 가둬두지도 않고 어디 가고 싶다면 다 가게 해줄게. 어때?”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여느 때보다도 부드러웠지만 하윤은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도준이 갑자기 이렇게 말하자 마치 통장에 거금이 꽂힌 것처럼 기쁨보다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도준이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이 이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그, 그러면 저 가족 데리러 가면 안 돼요?”“안 돼.”뼈마디가 선명한 도준의 손이 하윤의 얼굴을 쓰다듬자 하윤은 순간 소름이 끼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제 가족이 경성에 오면…….”“경성에 오지 않을 거야.”힘 있는 손이 하윤의 어깨를 꾹 눌렀다.“가족의 안전을 걱정하는 거잖아. 그러니 안전할 수 있도록 내가 보호해 줄게. 이건 약속해. 하지만 서로 만나는 건 안 돼. 그것만 빼면 다른 요구는 뭐든 만족시켜 줄게.”하윤은 그제야 도준의 말에 반응했다.“그러니까 지금 저더러 가족과 연을 끊으라는 뜻이에요?”도준은 칭찬하는 듯 하윤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똑똑하네.”“왜요?”하윤을 끌어안은 도준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자기야. 나도 자기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나를…… 생각해서?’도준의 어깨 너머로
도준은 조급하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하윤의 퇴로를 막아버렸다.하윤이 걱정하는 것과, 스스로를 희생하더라도 지키려 했던 것, 그리고 자기를 떠날 수 없다는 것까지 고려해서.마지막 하나를 떠올릴 때 도준은 저도 모르게 유쾌해졌다.하지만 하윤은 남자의 뜨거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이걸 방금 생각해 낸 건가?’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건 즉흥적으로 생각했다기보다는 마치 하윤을 점점 덫으로 끌어들인 것 같았다.그래서 하윤이 자신만만해서 도준의 마음을 움직이겠다고 했을 때 느긋하게 기다려 줬던 거다.하윤의 마음이 무너지고 희망이 부서졌을 때 이 선택지를 앞에 내밀려고. 그런 상황에서 이건 확실히 가장 좋은 선택지인 것처럼 보일 테니까.하윤의 마음은 순간 어수선해졌다.온몸이 칼날이 세워진 산과 불바다를 가로지른 긴 줄 위에 놓인 것 같았다. 그것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 속에 놓인 줄 위에.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을 때 갑자기 두 발이 바닥 위에서 둥 뜨더니 하윤의 생각을 끊어버렸다.“아!”하윤은 무의식적으로 도준의 목을 끌어안은 채 다시 침대 위에 놓였다.도준은 마치 인형을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하윤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그걸 보는 내내 하윤의 마음은 복잡했다.“도준 씨…….”“피곤할 텐데 어서 자. 내일 다시 생각해.”도준은 눕는 대신 침대 옆에 걸터앉더니 커다란 손으로 하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깨질것 같이 아픈 하윤의 머리를 문질러댔다.실내는 어두컴컴했다.침대 머리맡에 있는 유일한 불빛마저 도준의 너른 등에 가려져 하윤을 그림자 속에 가두었다.이마에서 느껴지는 손길과 어두운 불빛 속에서 하윤은 점점 눈꺼풀이 내려왔다.분명 아직 생각할 게 그렇게나 많은데.아직 결정해야 할 게 그렇게나 많은데.이 순간 남자의 부드러운 손길에 모든 게 부서졌다.떠들썩한 도심과 떨어진 별장은 결국 사람의 전신을 미혹하고 말았다.하지만 아쉽게도 그 상대는 도준이 아닌 하윤이었다.하윤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
권하윤은 여전히 뒤를 쫓아가려고 했다.“안 돼요. 저 계약서를 저대로…….”하지만 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도준이 그녀를 어깨에 들러 메더니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말 좀 들어.”“내려 줘요! 미쳤어요?”“…….”두 사람의 투덕거리는 소리가 밖에 있는 변호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이게 소문으로만 듣던 그 민도준이 맞나?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그 시각, 위층.하윤은 침대로 다시 던져지고는 화가 난 듯 도준의 어깨를 주먹으로 마구 내리쳤다.“미쳤어요?”도준은 오히려 재밌다는 듯 침대 옆에서 하윤의 어깨를 잡고 허리를 숙여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자기야.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내가 밑천까지 긁어내서 줬는데 이렇게 욕하는 게 어디 있어?”그 말에 하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다른 사람이라면 아마 무릎을 꿇고 고마움을 표하며 아부하는 말이라도 했을 텐데 이런 태도를 하윤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확실히 도리에 어긋났다.그제야 조용해진 하윤을 보자 도준은 손가락으로 하윤의 볼을 톡 튕겼다.“왜 말이 없어졌어? 이제야 자기가 얼마나 양심이 없었는지 알았어?”하윤은 여전히 도준의 행동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도준한테서 받은 입장이라 말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그건…….”도준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한층 한층 족쇄에 묶여 점점 꼼짝하지 못하는 하윤을 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그러더니 칭찬이라도 하듯 하윤의 머리를 살살 문질렀다.“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하윤은 눈을 들어 도준을 바라봤다. 사람을 매혹하는 매력적인 두 눈은 막연함이 묻어 있었고 입은 꾹 다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동림 부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하윤은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다.그 커다란 살코기를 차지하겠다고 늑대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모습도 봤었다.그런데 그런 피비린내 나는 경쟁 끝에 그 살코기가 오히려 늑대들이 아닌 새끼 여우한테 차려진 듯한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게다가 하필이면 옆에 있는 이 사자가 여우 몸집만도 더 큰 고
하윤은 도준 때문에 온몸이 나른해졌다.낮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스치며 귀 안을 파고들어 가 끝끝내 심장까지 마비시켰다.하윤의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도준은 그녀의 몸에 힘이 빠지자 나지막하게 웃었다.“보아하니 아직 힘이 남아 있나 본데?”하윤은 자기의 모든 게 상대한테 통제당하는 느낌이 싫어 일부러 삐진 듯 말했다.“누가 그래요? 저 힘들어요. 이제 잘래요.”“그래, 내가 잘못했어.”도준은 하윤의 말에는 뭐든 동의한다는 듯한 말투로 낮게 속삭이며 하윤의 허리에 두른 손은 옷감을 사이 두고 마구 문질러댔다.“그러면 좀만 더 힘들어도 괜찮지?”등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지만 하윤은 여전히 숨을 참으며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안 괜찮거든요!”“그럼 쉬고 있어, 내가 할 테니까.”하윤은 도준의 뻔뻔함에 화가 치밀어 눈앞이 아찔했다.분명 모든 걸 들어줄 것처럼 말하고는 있었지만 또 할 건 뭐든 하는 도준 때문에 하윤은 화가 나 그의 어깨를 꽉 물었다.하지만 도준은 하윤을 말리는 대신 오히려 그녀의 머리를 문질렀다.“착하지? 나 이미 충분히 흥분했으니까 그만 건드려.”복수를 하려던 하윤은 힘이 빠져 입을 떼더니 욕설을 퍼부었다.“변태.”“맞아, 나 변태야.”하윤은 순간 주먹으로 솜을 내리친 것처럼 허무했다.“할 말 다 했지? 그러면 난 내 할 거 한다?”“잠깐…….”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준의 핸드폰이 울렸다.이렇게 늦은 시간 아마 누구도 도준의 심기를 건드릴 배짱이 없을 텐데 그걸 감안하고 걸어온 걸 보니 급한 일인 듯싶었다.때문에 하윤은 얼른 도준을 밀었다.“전화 왔어요.”도준은 흥이 올라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상관할 거 없어.”“급한…… 일이면…… 어떡해요…….”하윤은 어렵사리 한 마디를 내뱉었다.“지금도 급해.”맴 처음에 도준을 설득하려고 생각했던 하윤은 그의 말에 할 말을 잃고 할 수 없이 어깨를 끌어안았다.하지만 벨 소리는 끝질기게 한번 또 한 번 울려댔다.확실히 중요한 일인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차는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하지만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권하윤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났는지 발걸음을 멈췄다.“저기, 전 들어가지 않을게요.”이미 차에서 내린 민도준은 안에서 움츠리고 있는 하윤을 바라보더니 역시나 그녀를 데리고 나타나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입을 열었다.“그럼 여기서 기다려.”“네.”하윤은 닭 모이 쫓듯 고개를 끄덕이며 도준이 떠나는 걸 바라봤다.하지만 도준은 몇 걸음 걸어가다가 뭔가를 느낀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창문 유리창을 반쯤 내리고 두 손으로 창가를 잡은 채로 걱정되는 듯 자기를 바라보는 하윤을 발견하고 말았다.이에 도준은 다시 방향을 꺾어 돌아갔다.“내려.”하윤은 도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생각하기도 전에 도준에게 끌려 차에서 내렸다.이윽고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 물었다.“제가 가면 도준 씨한테 안 좋은 영향이 있는 거 아니에요?”“하윤 씨가 안 가면 오히려 더 안 좋을걸.”하윤은 도준의 말에 귀가 빨개지더니 살짝 뒤로 물러났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하지만 한 걸음을 물러나자마자 도준에게 다시 잡혀 끌려갔다.“농담 아니야. 이따가 상황이 안 좋아지면 하윤 씨를 챙길 시간도 없을 테니까 내 곁에 꼭 붙어있어.”하윤도 오늘 밤 평화롭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윤이 만약 밖에 있다가 다른 사람한테 잡히기라도 하면 도준에게 더 안좋기에 차라리 이렇게 따라가는 게 나았다.이 시각 개인 병원 맨 꼭대기층은 불이 밝게 켜져 있었고 긴 복도에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었다.병실 안에 누워 있는 민상철의 주름 진 얼굴을 호흡 마스크가 꾹 누르고 있었다.나이가 든 민상철의 얼굴에 난 주름 하나하나에 지금껏 겪어온 노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민상철은 마치 늙어서 생을 마감하는 여느 노인처럼 침대에 누워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민씨 집안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 사람들은 소리 없이 눈가를 닦는가
“손주며느리가 할아버지 보러 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민도준이 기분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누가 저런 걸 며느리로 인정한다는 거야? 우리 승현이는 절대 저런 뻔뻔한 것과 결혼할 리…….”‘탕’ 하는 소리와 함께 물 하나가 강수연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하지만 너무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라 강수연은 비명만 질러대며 피하지 못한 탓에 물병이 턱에 맞혔다.그 순간 강렬한 고통이 전해져 강수연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야! 너 지금 뭐 하는 거니?”도준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미안해요. 그렇게 오래 떠들어 대서 목이 마를까 봐 물을 전해준다는 게 맞쳐 버렸네요.”그러더니 턱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마셔요. 고마워할 건 없어요.”“너!”강수연은 화가 치밀어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병실에 있는 다른 사람을 향해 말했다.“민도준처럼 비인륜적이고 잔인한 인간한테 가문과 회사가 넘어가면 모든 게 망가질 수 있어요!”강수연의 말은 억지로 만들어 낸 평화를 깨트렸다.민상철이 갑자기 중태에 빠져 아직 후계자 건에 대해 논의된 건 아무것도 없다.물론 그룹 내부에서는 이미 격렬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민살철의 말 한마디면 누군가는 싸움에 끼어들 필요도 없이 손쉽게 후계자 자리와 지분을 차지할 수 있다.때문에 민상철이 깨어날 수 있느냐 마느냐가 민씨 가문의 운명을 좌우지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민지운이 대립한 두 사람을 스쳐보더니 허허 웃으며 끼어들었다.“다섯째 숙모, 그런 말은 아직 너무 일러요. 할아버지가 깨어나시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하지만 강수연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아버님께서 예전부터 재혁이를 마음에 들어 했잖니. 이제 다리도 나았으니 후계자는 당연히 재혁이가 해야 하지 않겠어?”하윤은 민재혁을 슬쩍 흘겨봤다. 그랬더니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민재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기는 빼앗지 않는다는 태도를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강수연은 이미 첫째네와 손을 잡은 게
민상철은 일어나 앉고 싶었지만 몸이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안간힘을 썼지만 겨우 침대 머리맡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숨을 헐떡이며 병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빙 둘러보자 사람들은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애써 민상철을 관심하는 듯한 표정을 연기해냈다. 하지만 사람들이 더 관심하는 건 민상철의 건강이 아니라 누가 민상철의 자리를 차지하고 민씨 가문과 회사를 이끌지였다. 물론 가족들의 속내를 꿰뚫어봤지만 민상철은 실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도 예전에 그렇게 자기 아버지를 바라봤었으니까. 그때 민상철은 권력을 자기 손에 넣겠다는 생각뿐이어서 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어떤 눈빛을 했었는지 얼마나 피곤했을지 보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임종 직전, 민상철의 아버지는 민상철에게 반드시 자격을 갖춘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그걸 해냈다. 하지만 이 순간, 아버지가 그때 그런 말을 하던 심경을 문득 깨달았고 아버지의 못다 한 말을 깨달았다. 좋은 후계자가 되는 외에 민상철은 아무것도 잘해내지 못했다. 좋은 아들이 되지 못했고, 좋은 아버지, 좋은 할아버지도 되지 못했다……. 혼탁한 시선이 가면을 쓴 가식적인 사람들의 얼굴을 쭉 훑더니 유일하게 슬픈 척조차 하지 않는 남자에게 떨어졌다. 민도준은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민상철을 살필 뿐. 살짝 올라간 입 꼬리 때문에 인간성이라고 보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피도 눈물도 없어 보였다. 민상철이 계속 민도준을 바라보자 지팡이를 짚고 있던 민재혁이 슬쩍 막아섰다. “할아버지, 몸은 좀 어때요?” 민상철은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앞으로 민씨 회사 일을 너희들이 대신해줘야 겠구나.”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기는 이내 조용해졌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감추며 민상철을 위로하기 바빴다. “아버지,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아버지도 곧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래요, 할아버지.” 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