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은 조급하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하윤의 퇴로를 막아버렸다.하윤이 걱정하는 것과, 스스로를 희생하더라도 지키려 했던 것, 그리고 자기를 떠날 수 없다는 것까지 고려해서.마지막 하나를 떠올릴 때 도준은 저도 모르게 유쾌해졌다.하지만 하윤은 남자의 뜨거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이걸 방금 생각해 낸 건가?’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건 즉흥적으로 생각했다기보다는 마치 하윤을 점점 덫으로 끌어들인 것 같았다.그래서 하윤이 자신만만해서 도준의 마음을 움직이겠다고 했을 때 느긋하게 기다려 줬던 거다.하윤의 마음이 무너지고 희망이 부서졌을 때 이 선택지를 앞에 내밀려고. 그런 상황에서 이건 확실히 가장 좋은 선택지인 것처럼 보일 테니까.하윤의 마음은 순간 어수선해졌다.온몸이 칼날이 세워진 산과 불바다를 가로지른 긴 줄 위에 놓인 것 같았다. 그것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 속에 놓인 줄 위에.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을 때 갑자기 두 발이 바닥 위에서 둥 뜨더니 하윤의 생각을 끊어버렸다.“아!”하윤은 무의식적으로 도준의 목을 끌어안은 채 다시 침대 위에 놓였다.도준은 마치 인형을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하윤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그걸 보는 내내 하윤의 마음은 복잡했다.“도준 씨…….”“피곤할 텐데 어서 자. 내일 다시 생각해.”도준은 눕는 대신 침대 옆에 걸터앉더니 커다란 손으로 하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깨질것 같이 아픈 하윤의 머리를 문질러댔다.실내는 어두컴컴했다.침대 머리맡에 있는 유일한 불빛마저 도준의 너른 등에 가려져 하윤을 그림자 속에 가두었다.이마에서 느껴지는 손길과 어두운 불빛 속에서 하윤은 점점 눈꺼풀이 내려왔다.분명 아직 생각할 게 그렇게나 많은데.아직 결정해야 할 게 그렇게나 많은데.이 순간 남자의 부드러운 손길에 모든 게 부서졌다.떠들썩한 도심과 떨어진 별장은 결국 사람의 전신을 미혹하고 말았다.하지만 아쉽게도 그 상대는 도준이 아닌 하윤이었다.하윤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
권하윤은 여전히 뒤를 쫓아가려고 했다.“안 돼요. 저 계약서를 저대로…….”하지만 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도준이 그녀를 어깨에 들러 메더니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말 좀 들어.”“내려 줘요! 미쳤어요?”“…….”두 사람의 투덕거리는 소리가 밖에 있는 변호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이게 소문으로만 듣던 그 민도준이 맞나?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그 시각, 위층.하윤은 침대로 다시 던져지고는 화가 난 듯 도준의 어깨를 주먹으로 마구 내리쳤다.“미쳤어요?”도준은 오히려 재밌다는 듯 침대 옆에서 하윤의 어깨를 잡고 허리를 숙여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자기야.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내가 밑천까지 긁어내서 줬는데 이렇게 욕하는 게 어디 있어?”그 말에 하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다른 사람이라면 아마 무릎을 꿇고 고마움을 표하며 아부하는 말이라도 했을 텐데 이런 태도를 하윤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확실히 도리에 어긋났다.그제야 조용해진 하윤을 보자 도준은 손가락으로 하윤의 볼을 톡 튕겼다.“왜 말이 없어졌어? 이제야 자기가 얼마나 양심이 없었는지 알았어?”하윤은 여전히 도준의 행동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도준한테서 받은 입장이라 말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그건…….”도준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한층 한층 족쇄에 묶여 점점 꼼짝하지 못하는 하윤을 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그러더니 칭찬이라도 하듯 하윤의 머리를 살살 문질렀다.“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하윤은 눈을 들어 도준을 바라봤다. 사람을 매혹하는 매력적인 두 눈은 막연함이 묻어 있었고 입은 꾹 다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동림 부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하윤은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다.그 커다란 살코기를 차지하겠다고 늑대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모습도 봤었다.그런데 그런 피비린내 나는 경쟁 끝에 그 살코기가 오히려 늑대들이 아닌 새끼 여우한테 차려진 듯한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게다가 하필이면 옆에 있는 이 사자가 여우 몸집만도 더 큰 고
하윤은 도준 때문에 온몸이 나른해졌다.낮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스치며 귀 안을 파고들어 가 끝끝내 심장까지 마비시켰다.하윤의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도준은 그녀의 몸에 힘이 빠지자 나지막하게 웃었다.“보아하니 아직 힘이 남아 있나 본데?”하윤은 자기의 모든 게 상대한테 통제당하는 느낌이 싫어 일부러 삐진 듯 말했다.“누가 그래요? 저 힘들어요. 이제 잘래요.”“그래, 내가 잘못했어.”도준은 하윤의 말에는 뭐든 동의한다는 듯한 말투로 낮게 속삭이며 하윤의 허리에 두른 손은 옷감을 사이 두고 마구 문질러댔다.“그러면 좀만 더 힘들어도 괜찮지?”등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지만 하윤은 여전히 숨을 참으며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안 괜찮거든요!”“그럼 쉬고 있어, 내가 할 테니까.”하윤은 도준의 뻔뻔함에 화가 치밀어 눈앞이 아찔했다.분명 모든 걸 들어줄 것처럼 말하고는 있었지만 또 할 건 뭐든 하는 도준 때문에 하윤은 화가 나 그의 어깨를 꽉 물었다.하지만 도준은 하윤을 말리는 대신 오히려 그녀의 머리를 문질렀다.“착하지? 나 이미 충분히 흥분했으니까 그만 건드려.”복수를 하려던 하윤은 힘이 빠져 입을 떼더니 욕설을 퍼부었다.“변태.”“맞아, 나 변태야.”하윤은 순간 주먹으로 솜을 내리친 것처럼 허무했다.“할 말 다 했지? 그러면 난 내 할 거 한다?”“잠깐…….”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준의 핸드폰이 울렸다.이렇게 늦은 시간 아마 누구도 도준의 심기를 건드릴 배짱이 없을 텐데 그걸 감안하고 걸어온 걸 보니 급한 일인 듯싶었다.때문에 하윤은 얼른 도준을 밀었다.“전화 왔어요.”도준은 흥이 올라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상관할 거 없어.”“급한…… 일이면…… 어떡해요…….”하윤은 어렵사리 한 마디를 내뱉었다.“지금도 급해.”맴 처음에 도준을 설득하려고 생각했던 하윤은 그의 말에 할 말을 잃고 할 수 없이 어깨를 끌어안았다.하지만 벨 소리는 끝질기게 한번 또 한 번 울려댔다.확실히 중요한 일인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차는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하지만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권하윤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났는지 발걸음을 멈췄다.“저기, 전 들어가지 않을게요.”이미 차에서 내린 민도준은 안에서 움츠리고 있는 하윤을 바라보더니 역시나 그녀를 데리고 나타나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입을 열었다.“그럼 여기서 기다려.”“네.”하윤은 닭 모이 쫓듯 고개를 끄덕이며 도준이 떠나는 걸 바라봤다.하지만 도준은 몇 걸음 걸어가다가 뭔가를 느낀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창문 유리창을 반쯤 내리고 두 손으로 창가를 잡은 채로 걱정되는 듯 자기를 바라보는 하윤을 발견하고 말았다.이에 도준은 다시 방향을 꺾어 돌아갔다.“내려.”하윤은 도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생각하기도 전에 도준에게 끌려 차에서 내렸다.이윽고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 물었다.“제가 가면 도준 씨한테 안 좋은 영향이 있는 거 아니에요?”“하윤 씨가 안 가면 오히려 더 안 좋을걸.”하윤은 도준의 말에 귀가 빨개지더니 살짝 뒤로 물러났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하지만 한 걸음을 물러나자마자 도준에게 다시 잡혀 끌려갔다.“농담 아니야. 이따가 상황이 안 좋아지면 하윤 씨를 챙길 시간도 없을 테니까 내 곁에 꼭 붙어있어.”하윤도 오늘 밤 평화롭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윤이 만약 밖에 있다가 다른 사람한테 잡히기라도 하면 도준에게 더 안좋기에 차라리 이렇게 따라가는 게 나았다.이 시각 개인 병원 맨 꼭대기층은 불이 밝게 켜져 있었고 긴 복도에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었다.병실 안에 누워 있는 민상철의 주름 진 얼굴을 호흡 마스크가 꾹 누르고 있었다.나이가 든 민상철의 얼굴에 난 주름 하나하나에 지금껏 겪어온 노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민상철은 마치 늙어서 생을 마감하는 여느 노인처럼 침대에 누워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민씨 집안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 사람들은 소리 없이 눈가를 닦는가
“손주며느리가 할아버지 보러 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민도준이 기분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누가 저런 걸 며느리로 인정한다는 거야? 우리 승현이는 절대 저런 뻔뻔한 것과 결혼할 리…….”‘탕’ 하는 소리와 함께 물 하나가 강수연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하지만 너무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라 강수연은 비명만 질러대며 피하지 못한 탓에 물병이 턱에 맞혔다.그 순간 강렬한 고통이 전해져 강수연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야! 너 지금 뭐 하는 거니?”도준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미안해요. 그렇게 오래 떠들어 대서 목이 마를까 봐 물을 전해준다는 게 맞쳐 버렸네요.”그러더니 턱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마셔요. 고마워할 건 없어요.”“너!”강수연은 화가 치밀어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병실에 있는 다른 사람을 향해 말했다.“민도준처럼 비인륜적이고 잔인한 인간한테 가문과 회사가 넘어가면 모든 게 망가질 수 있어요!”강수연의 말은 억지로 만들어 낸 평화를 깨트렸다.민상철이 갑자기 중태에 빠져 아직 후계자 건에 대해 논의된 건 아무것도 없다.물론 그룹 내부에서는 이미 격렬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민살철의 말 한마디면 누군가는 싸움에 끼어들 필요도 없이 손쉽게 후계자 자리와 지분을 차지할 수 있다.때문에 민상철이 깨어날 수 있느냐 마느냐가 민씨 가문의 운명을 좌우지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민지운이 대립한 두 사람을 스쳐보더니 허허 웃으며 끼어들었다.“다섯째 숙모, 그런 말은 아직 너무 일러요. 할아버지가 깨어나시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하지만 강수연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아버님께서 예전부터 재혁이를 마음에 들어 했잖니. 이제 다리도 나았으니 후계자는 당연히 재혁이가 해야 하지 않겠어?”하윤은 민재혁을 슬쩍 흘겨봤다. 그랬더니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민재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기는 빼앗지 않는다는 태도를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강수연은 이미 첫째네와 손을 잡은 게
민상철은 일어나 앉고 싶었지만 몸이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안간힘을 썼지만 겨우 침대 머리맡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숨을 헐떡이며 병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빙 둘러보자 사람들은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애써 민상철을 관심하는 듯한 표정을 연기해냈다. 하지만 사람들이 더 관심하는 건 민상철의 건강이 아니라 누가 민상철의 자리를 차지하고 민씨 가문과 회사를 이끌지였다. 물론 가족들의 속내를 꿰뚫어봤지만 민상철은 실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도 예전에 그렇게 자기 아버지를 바라봤었으니까. 그때 민상철은 권력을 자기 손에 넣겠다는 생각뿐이어서 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어떤 눈빛을 했었는지 얼마나 피곤했을지 보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임종 직전, 민상철의 아버지는 민상철에게 반드시 자격을 갖춘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그걸 해냈다. 하지만 이 순간, 아버지가 그때 그런 말을 하던 심경을 문득 깨달았고 아버지의 못다 한 말을 깨달았다. 좋은 후계자가 되는 외에 민상철은 아무것도 잘해내지 못했다. 좋은 아들이 되지 못했고, 좋은 아버지, 좋은 할아버지도 되지 못했다……. 혼탁한 시선이 가면을 쓴 가식적인 사람들의 얼굴을 쭉 훑더니 유일하게 슬픈 척조차 하지 않는 남자에게 떨어졌다. 민도준은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민상철을 살필 뿐. 살짝 올라간 입 꼬리 때문에 인간성이라고 보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피도 눈물도 없어 보였다. 민상철이 계속 민도준을 바라보자 지팡이를 짚고 있던 민재혁이 슬쩍 막아섰다. “할아버지, 몸은 좀 어때요?” 민상철은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앞으로 민씨 회사 일을 너희들이 대신해줘야 겠구나.”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기는 이내 조용해졌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감추며 민상철을 위로하기 바빴다. “아버지,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아버지도 곧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래요, 할아버지.” 민시
권하윤은 의외라는 생각을 했지만 고분고분 병상 옆으로 다가갔다. “할아버님.” 죽음이 다가와서인지 민상철이 하윤을 보는 눈빛은 예전처럼 분노와 살의가 가득한 대신 오히려 많이 평화로웠다. “도준이가 너에게 동림 부지를 줬다던데?” 목숨을 걸고 차지한 곳을 이렇게 쉽게 웬 여자에게 줬다는 건 누가 봐도 민도준이 사랑에 빠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민상철은 도준의 마음을 다시 되돌리고 싶어도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하윤은 민상철의 말에 잠깐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그 뜻을 알아차렸다. 하긴, 이렇게 큰일을 민상철의 눈을 피해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이 순간 이 예기를 꺼내는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 도준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도준은 손으로 라이터를 돌리다가 팔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건들건들한 태도로 말했다. “제 물건을 주고 싶은 사람한테 주겠다는데 뭐가 잘못됐어요? 게다가 마누라 하나 들이려면 이정도 혼수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당연한 듯한 도준의 말투에 하윤은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민상철의 반응은 하윤의 생각과는 달랐다. 당연히 그 소리를 듣자마자 버럭 화를 내거나 몇 마디 욕설을 퍼부으며 자기를 속셈이 많은 여자라고 꾸짖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민상철은 그저 도준을 힐끗 바라봤다. “도준아, 잠깐 나가 있어. 둘이 잠깐 할 얘기가 있으니.” 하지만 도준은 껄렁한 자세로 앉은 채 움직이지도 않았다. “외로운 남녀가 한 공간에 있는 건 안 아무래도 안 좋을 것 같은데.” “너…….” “농담이에요. 살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으면서 뭐 하러 그렇게 화를 내세요? 저는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세요.” 민상철의 눈은 뭔가 한층 가려진 것처럼 흐릿하고 생기가 없었다. 거친 숨소리는 점차 심해져 도준과 싸울 여력도 없어 보였다. 이에 민상철은 헛기침을 하고는 하윤을 바라봤다. “내가 미우냐?” 하윤은 민상철이 이런 물음을 물을 거라고 생각지 못한 터라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민상철이 민도준을 아주 연약하게 묘사하자 권하윤은 왠지 웃음이 났다. 하지만 이토록 진지한 태도로 말하는데 뭐라 반박할 수 없어 고개를 돌리다 마침 도준의 눈빛 마주쳤다. 도준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돌린 모습은 마치 그녀에게 ‘왜? 도망갈 거야?’라고 따져 묻는 것 같았다. 순간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 나며 하윤은 대답했다. “네, 약속할게요.” 하윤의 대답을 듣자 민상철은 그제야 긴장을 푼 것처럼 눈빛이 다시 흐릿해졌다. “그래…… 그래…….” 이 시각 민상철의 숨소리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낡은 엔진처럼 매 순간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하윤은 순간 겁을 먹었다. “할아버님, 괜찮으세요?” “얼마 전까지…… 할아버지라고 불렀으면서…… 호칭은 그대로 불러.” 민상철의 말은 사이사이 끊겨서 들렸지만 하윤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건 나를 인정한는 건가?’ 하윤은 믿기지 않았다. “지금 말씀하신 상대가 도준 씨 맞죠? 설마 저를 또 민승현 짝으로 보시는 건 아니죠?” 민상철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웃음은 예전과 달리 약간 농담기도 섞여 있었다. “너도…… 참…… 내가 너를 승현이와 엮어주면 도준이가…… 미치지 않고 배겨?” 하윤은 자기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아 약간 머쓱했지만 집안 어르신의 인정을 받았다는 게 내심 기뻤다. “할아버지.” “그래.” 민상철은 마지막 힘을 다해 도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이미 초점을 잃은 눈으로 도준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아래사람의 실수에 눈감아줄 줄도 알아야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준의 눈동자는 약간 흔들렸다. 민상철이 이 말을 처음 했을 때는 도준이 그룹 경영에 처음 참여했을 때다. 그때 도준은 그룹에 들어가자마자 억압을 받았었다. 그를 그토록 억압한 사람은 다름 아닌 민씨 가문의 어르신, 심지어 원로급 인물인 민상철의 형제 민병철이었다. 민병철은 도준의 거만함을 싫어해 일부러 온갖 시비를 걸고 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