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은 도준 때문에 온몸이 나른해졌다.낮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스치며 귀 안을 파고들어 가 끝끝내 심장까지 마비시켰다.하윤의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도준은 그녀의 몸에 힘이 빠지자 나지막하게 웃었다.“보아하니 아직 힘이 남아 있나 본데?”하윤은 자기의 모든 게 상대한테 통제당하는 느낌이 싫어 일부러 삐진 듯 말했다.“누가 그래요? 저 힘들어요. 이제 잘래요.”“그래, 내가 잘못했어.”도준은 하윤의 말에는 뭐든 동의한다는 듯한 말투로 낮게 속삭이며 하윤의 허리에 두른 손은 옷감을 사이 두고 마구 문질러댔다.“그러면 좀만 더 힘들어도 괜찮지?”등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지만 하윤은 여전히 숨을 참으며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안 괜찮거든요!”“그럼 쉬고 있어, 내가 할 테니까.”하윤은 도준의 뻔뻔함에 화가 치밀어 눈앞이 아찔했다.분명 모든 걸 들어줄 것처럼 말하고는 있었지만 또 할 건 뭐든 하는 도준 때문에 하윤은 화가 나 그의 어깨를 꽉 물었다.하지만 도준은 하윤을 말리는 대신 오히려 그녀의 머리를 문질렀다.“착하지? 나 이미 충분히 흥분했으니까 그만 건드려.”복수를 하려던 하윤은 힘이 빠져 입을 떼더니 욕설을 퍼부었다.“변태.”“맞아, 나 변태야.”하윤은 순간 주먹으로 솜을 내리친 것처럼 허무했다.“할 말 다 했지? 그러면 난 내 할 거 한다?”“잠깐…….”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준의 핸드폰이 울렸다.이렇게 늦은 시간 아마 누구도 도준의 심기를 건드릴 배짱이 없을 텐데 그걸 감안하고 걸어온 걸 보니 급한 일인 듯싶었다.때문에 하윤은 얼른 도준을 밀었다.“전화 왔어요.”도준은 흥이 올라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상관할 거 없어.”“급한…… 일이면…… 어떡해요…….”하윤은 어렵사리 한 마디를 내뱉었다.“지금도 급해.”맴 처음에 도준을 설득하려고 생각했던 하윤은 그의 말에 할 말을 잃고 할 수 없이 어깨를 끌어안았다.하지만 벨 소리는 끝질기게 한번 또 한 번 울려댔다.확실히 중요한 일인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차는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하지만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권하윤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났는지 발걸음을 멈췄다.“저기, 전 들어가지 않을게요.”이미 차에서 내린 민도준은 안에서 움츠리고 있는 하윤을 바라보더니 역시나 그녀를 데리고 나타나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입을 열었다.“그럼 여기서 기다려.”“네.”하윤은 닭 모이 쫓듯 고개를 끄덕이며 도준이 떠나는 걸 바라봤다.하지만 도준은 몇 걸음 걸어가다가 뭔가를 느낀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창문 유리창을 반쯤 내리고 두 손으로 창가를 잡은 채로 걱정되는 듯 자기를 바라보는 하윤을 발견하고 말았다.이에 도준은 다시 방향을 꺾어 돌아갔다.“내려.”하윤은 도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생각하기도 전에 도준에게 끌려 차에서 내렸다.이윽고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 물었다.“제가 가면 도준 씨한테 안 좋은 영향이 있는 거 아니에요?”“하윤 씨가 안 가면 오히려 더 안 좋을걸.”하윤은 도준의 말에 귀가 빨개지더니 살짝 뒤로 물러났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하지만 한 걸음을 물러나자마자 도준에게 다시 잡혀 끌려갔다.“농담 아니야. 이따가 상황이 안 좋아지면 하윤 씨를 챙길 시간도 없을 테니까 내 곁에 꼭 붙어있어.”하윤도 오늘 밤 평화롭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윤이 만약 밖에 있다가 다른 사람한테 잡히기라도 하면 도준에게 더 안좋기에 차라리 이렇게 따라가는 게 나았다.이 시각 개인 병원 맨 꼭대기층은 불이 밝게 켜져 있었고 긴 복도에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었다.병실 안에 누워 있는 민상철의 주름 진 얼굴을 호흡 마스크가 꾹 누르고 있었다.나이가 든 민상철의 얼굴에 난 주름 하나하나에 지금껏 겪어온 노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민상철은 마치 늙어서 생을 마감하는 여느 노인처럼 침대에 누워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민씨 집안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 사람들은 소리 없이 눈가를 닦는가
“손주며느리가 할아버지 보러 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민도준이 기분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누가 저런 걸 며느리로 인정한다는 거야? 우리 승현이는 절대 저런 뻔뻔한 것과 결혼할 리…….”‘탕’ 하는 소리와 함께 물 하나가 강수연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하지만 너무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라 강수연은 비명만 질러대며 피하지 못한 탓에 물병이 턱에 맞혔다.그 순간 강렬한 고통이 전해져 강수연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야! 너 지금 뭐 하는 거니?”도준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미안해요. 그렇게 오래 떠들어 대서 목이 마를까 봐 물을 전해준다는 게 맞쳐 버렸네요.”그러더니 턱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마셔요. 고마워할 건 없어요.”“너!”강수연은 화가 치밀어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병실에 있는 다른 사람을 향해 말했다.“민도준처럼 비인륜적이고 잔인한 인간한테 가문과 회사가 넘어가면 모든 게 망가질 수 있어요!”강수연의 말은 억지로 만들어 낸 평화를 깨트렸다.민상철이 갑자기 중태에 빠져 아직 후계자 건에 대해 논의된 건 아무것도 없다.물론 그룹 내부에서는 이미 격렬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민살철의 말 한마디면 누군가는 싸움에 끼어들 필요도 없이 손쉽게 후계자 자리와 지분을 차지할 수 있다.때문에 민상철이 깨어날 수 있느냐 마느냐가 민씨 가문의 운명을 좌우지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민지운이 대립한 두 사람을 스쳐보더니 허허 웃으며 끼어들었다.“다섯째 숙모, 그런 말은 아직 너무 일러요. 할아버지가 깨어나시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하지만 강수연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아버님께서 예전부터 재혁이를 마음에 들어 했잖니. 이제 다리도 나았으니 후계자는 당연히 재혁이가 해야 하지 않겠어?”하윤은 민재혁을 슬쩍 흘겨봤다. 그랬더니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민재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기는 빼앗지 않는다는 태도를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강수연은 이미 첫째네와 손을 잡은 게
민상철은 일어나 앉고 싶었지만 몸이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안간힘을 썼지만 겨우 침대 머리맡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숨을 헐떡이며 병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빙 둘러보자 사람들은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애써 민상철을 관심하는 듯한 표정을 연기해냈다. 하지만 사람들이 더 관심하는 건 민상철의 건강이 아니라 누가 민상철의 자리를 차지하고 민씨 가문과 회사를 이끌지였다. 물론 가족들의 속내를 꿰뚫어봤지만 민상철은 실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도 예전에 그렇게 자기 아버지를 바라봤었으니까. 그때 민상철은 권력을 자기 손에 넣겠다는 생각뿐이어서 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어떤 눈빛을 했었는지 얼마나 피곤했을지 보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임종 직전, 민상철의 아버지는 민상철에게 반드시 자격을 갖춘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그걸 해냈다. 하지만 이 순간, 아버지가 그때 그런 말을 하던 심경을 문득 깨달았고 아버지의 못다 한 말을 깨달았다. 좋은 후계자가 되는 외에 민상철은 아무것도 잘해내지 못했다. 좋은 아들이 되지 못했고, 좋은 아버지, 좋은 할아버지도 되지 못했다……. 혼탁한 시선이 가면을 쓴 가식적인 사람들의 얼굴을 쭉 훑더니 유일하게 슬픈 척조차 하지 않는 남자에게 떨어졌다. 민도준은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민상철을 살필 뿐. 살짝 올라간 입 꼬리 때문에 인간성이라고 보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피도 눈물도 없어 보였다. 민상철이 계속 민도준을 바라보자 지팡이를 짚고 있던 민재혁이 슬쩍 막아섰다. “할아버지, 몸은 좀 어때요?” 민상철은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앞으로 민씨 회사 일을 너희들이 대신해줘야 겠구나.”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기는 이내 조용해졌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감추며 민상철을 위로하기 바빴다. “아버지,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아버지도 곧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래요, 할아버지.” 민시
권하윤은 의외라는 생각을 했지만 고분고분 병상 옆으로 다가갔다. “할아버님.” 죽음이 다가와서인지 민상철이 하윤을 보는 눈빛은 예전처럼 분노와 살의가 가득한 대신 오히려 많이 평화로웠다. “도준이가 너에게 동림 부지를 줬다던데?” 목숨을 걸고 차지한 곳을 이렇게 쉽게 웬 여자에게 줬다는 건 누가 봐도 민도준이 사랑에 빠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민상철은 도준의 마음을 다시 되돌리고 싶어도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하윤은 민상철의 말에 잠깐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그 뜻을 알아차렸다. 하긴, 이렇게 큰일을 민상철의 눈을 피해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이 순간 이 예기를 꺼내는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 도준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도준은 손으로 라이터를 돌리다가 팔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건들건들한 태도로 말했다. “제 물건을 주고 싶은 사람한테 주겠다는데 뭐가 잘못됐어요? 게다가 마누라 하나 들이려면 이정도 혼수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당연한 듯한 도준의 말투에 하윤은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민상철의 반응은 하윤의 생각과는 달랐다. 당연히 그 소리를 듣자마자 버럭 화를 내거나 몇 마디 욕설을 퍼부으며 자기를 속셈이 많은 여자라고 꾸짖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민상철은 그저 도준을 힐끗 바라봤다. “도준아, 잠깐 나가 있어. 둘이 잠깐 할 얘기가 있으니.” 하지만 도준은 껄렁한 자세로 앉은 채 움직이지도 않았다. “외로운 남녀가 한 공간에 있는 건 안 아무래도 안 좋을 것 같은데.” “너…….” “농담이에요. 살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으면서 뭐 하러 그렇게 화를 내세요? 저는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세요.” 민상철의 눈은 뭔가 한층 가려진 것처럼 흐릿하고 생기가 없었다. 거친 숨소리는 점차 심해져 도준과 싸울 여력도 없어 보였다. 이에 민상철은 헛기침을 하고는 하윤을 바라봤다. “내가 미우냐?” 하윤은 민상철이 이런 물음을 물을 거라고 생각지 못한 터라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민상철이 민도준을 아주 연약하게 묘사하자 권하윤은 왠지 웃음이 났다. 하지만 이토록 진지한 태도로 말하는데 뭐라 반박할 수 없어 고개를 돌리다 마침 도준의 눈빛 마주쳤다. 도준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돌린 모습은 마치 그녀에게 ‘왜? 도망갈 거야?’라고 따져 묻는 것 같았다. 순간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 나며 하윤은 대답했다. “네, 약속할게요.” 하윤의 대답을 듣자 민상철은 그제야 긴장을 푼 것처럼 눈빛이 다시 흐릿해졌다. “그래…… 그래…….” 이 시각 민상철의 숨소리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낡은 엔진처럼 매 순간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하윤은 순간 겁을 먹었다. “할아버님, 괜찮으세요?” “얼마 전까지…… 할아버지라고 불렀으면서…… 호칭은 그대로 불러.” 민상철의 말은 사이사이 끊겨서 들렸지만 하윤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건 나를 인정한는 건가?’ 하윤은 믿기지 않았다. “지금 말씀하신 상대가 도준 씨 맞죠? 설마 저를 또 민승현 짝으로 보시는 건 아니죠?” 민상철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웃음은 예전과 달리 약간 농담기도 섞여 있었다. “너도…… 참…… 내가 너를 승현이와 엮어주면 도준이가…… 미치지 않고 배겨?” 하윤은 자기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아 약간 머쓱했지만 집안 어르신의 인정을 받았다는 게 내심 기뻤다. “할아버지.” “그래.” 민상철은 마지막 힘을 다해 도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이미 초점을 잃은 눈으로 도준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아래사람의 실수에 눈감아줄 줄도 알아야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준의 눈동자는 약간 흔들렸다. 민상철이 이 말을 처음 했을 때는 도준이 그룹 경영에 처음 참여했을 때다. 그때 도준은 그룹에 들어가자마자 억압을 받았었다. 그를 그토록 억압한 사람은 다름 아닌 민씨 가문의 어르신, 심지어 원로급 인물인 민상철의 형제 민병철이었다. 민병철은 도준의 거만함을 싫어해 일부러 온갖 시비를 걸고 제약
민상철의 눈은 점점 초점이 흐려지더니 병상에서 마치 무엇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명주야.” “둘째…… 용현아…….” “…….” “아버지!” 시간 뚫고 나온듯한 부름 소리가 민상철 생전에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을 불러왔다. 민용현이 늠름한 모습을 한 채 밖에서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아버지, 저 칩 연구에 성공했어요. 새로운 과학 기술 시대가 곧 도래할 거예요.” 아들의 말에 민상철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냐?” 민상철의 몇몇 아들 중 유독 민용현만 부잣집 도련님 같은 오만함도 가업에 대한 욕심도 없이 오로지 과학 연구에만 매진했다. 하지만 민상철은 그걸 항상 자랑으로 여겼다. 그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과학 기술이야 말로 정말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프로젝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토록 선진적인 기술을 민씨 가문에서 가장 먼저 연구해냈으니 이건 앞으로 민씨 가문의 미래가 창창한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프로젝트 정식으로 가동하면 국내의 기술팀에 연락해 어떻게 하면 개발 사용 범위를 확대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요.” “뭐? 너 미쳤어? 네가 그 기술을 남에게 공유하면 모든 사람이 그 기술을 장악할 수 있게 되잖니!” 민용현은 민상철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이에요? 과학기술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지 않으면 그 자리에 정체될 수밖에 없어요. 칩기술을 장악한 사람이 많을수록 과학기술은 발전한다고요.” 그 말에 민상철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제야 민용재는 과학 연구에 너무 오래 취해 속세를 벗어난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민상철은 아들에게 도리를 설명하려고 애써봤다. “용현아, 넌 민씨 집안 사람이야. 그러니 가문을 위해 생각할 수는 없겠니? 칩기술을 공유했다가 다른 사람이 우리보다 더 잘 응용하면 어떡하려고 그러니?” “그러면 더 좋은 거 아닌가요?” 민용현은 사뭇 진자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버지, 이건 과학
“도준아…… 너 내가…… 내가…… 밉지…….” 민상철의 시선은 민도준을 향했다. 죽음에 임박하자 그는 도준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아들 민용현과 똑같은 도준의 두 눈을 본 순간 그런 생각은 더해졌다. 비슷한 눈매였지만 그 속에 담긴 건 완전히 달랐다. 민용재는 온화하고 선량했지만 도준은 오래된 핏자국처럼 검고도 잔인했다. 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평생 경성 바닥을 휩쓸며 살아온 할아버지가 점점 생기를 잃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봤다. 결국 민상철은 죽을 때까지 그토록 원했던 용서를 받지 못했다. 바이탈 기계에서 ‘삐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민상철의 눈은 여전히 도준을 향한 채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그제야 도준은 입꼬리를 움직이더니 앞으로 다가가 민상철의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제가 해외에 있다가 본가로 돌아왔을 때 저한테 뭐라고 했던지 기억하세요? 이미 다 지났으니 이젠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고 하셨어요. 노망나셨나? 어떻게 본인이 했던 말도 기억 못하세요?” “저승에 가서 우리 부모님을 보시거든 안부 좀 전해줘요. 앞으로 다시 환생한다면 대로 환생하라고. 다시 이번 생으로 환생했다가 뼈도 못 추리지 마시고.” 이윽고 도준은 비웃는 듯한 눈빛으로 민상철을 바라봤다.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바이탈 기계의 소리가 멈추면서 불안정하게 움직이던 곡선이 긴 직선으로 변했다. “삐-” 도준은 손을 들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민상철의 눈을 감겨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마침 눈시울이 붉게 물든 하윤과 마주치고는 피식 웃었다. “왜 울고 그래?” 하윤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스스로도 자기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방금 전의 장면이 마치 도준을 감싸고 있던 어둠에 자그마한 구멍을 뚫어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속으로 도준의 과거를 조금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하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