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아…… 너 내가…… 내가…… 밉지…….” 민상철의 시선은 민도준을 향했다. 죽음에 임박하자 그는 도준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아들 민용현과 똑같은 도준의 두 눈을 본 순간 그런 생각은 더해졌다. 비슷한 눈매였지만 그 속에 담긴 건 완전히 달랐다. 민용재는 온화하고 선량했지만 도준은 오래된 핏자국처럼 검고도 잔인했다. 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평생 경성 바닥을 휩쓸며 살아온 할아버지가 점점 생기를 잃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봤다. 결국 민상철은 죽을 때까지 그토록 원했던 용서를 받지 못했다. 바이탈 기계에서 ‘삐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민상철의 눈은 여전히 도준을 향한 채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그제야 도준은 입꼬리를 움직이더니 앞으로 다가가 민상철의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제가 해외에 있다가 본가로 돌아왔을 때 저한테 뭐라고 했던지 기억하세요? 이미 다 지났으니 이젠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고 하셨어요. 노망나셨나? 어떻게 본인이 했던 말도 기억 못하세요?” “저승에 가서 우리 부모님을 보시거든 안부 좀 전해줘요. 앞으로 다시 환생한다면 대로 환생하라고. 다시 이번 생으로 환생했다가 뼈도 못 추리지 마시고.” 이윽고 도준은 비웃는 듯한 눈빛으로 민상철을 바라봤다.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바이탈 기계의 소리가 멈추면서 불안정하게 움직이던 곡선이 긴 직선으로 변했다. “삐-” 도준은 손을 들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민상철의 눈을 감겨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마침 눈시울이 붉게 물든 하윤과 마주치고는 피식 웃었다. “왜 울고 그래?” 하윤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스스로도 자기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방금 전의 장면이 마치 도준을 감싸고 있던 어둠에 자그마한 구멍을 뚫어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속으로 도준의 과거를 조금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하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제 민도준이 민씨 가문을 이끌게 됐으니 민씨 가문의 이미지를 위해서든 제국그룹의 이미지를 위해서든 민씨 집안 사람들은 도준의 잘못을 일부러 찾아내는 짓은 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권하윤은 도준의 얼굴을 힐끗 바라봤다. ‘민상철이 아무리 그래도 할어비지인데 슬프지 않나?’ 물어보고 싶어 안달 난 하윤의 표정과 동정의 눈빛은 무시할래야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도준은 하윤을 힐끗 흘겨보더니 물었다. “왜? 날 도화하기라도 하려고?” “도준 씨…… 혹시 어디 불편한 곳 없어요?” “불편한 곳? 있긴 하지.” 그 말에 하윤이 얼른 위로의 말을 준비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둥 하는 말로 말이다. 하지만 도준은 오히려 의외의 말을 늘여 놓았다. “그런데 이따가 돌아가서 기분 좋은 짓 하면 괜찮아질 것 같아.” “…….” 하윤은 도준이 말한 곳이 별장이라고 생각했지만 도준은 별장이 아닌 민씨 저택으로 차를 돌렸다. 하긴, 민상철이 돌아갔으니 손자인 도준이 해야 할 일이 당연히 많을 테니까. 다시 민씨 저택에 도착하니 하윤은 왠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도준이 하윤을 차에서 끌고 내렸을 때 두 사람은 마침 순찰하는 경비원을 마주쳤다. 지금껏 숨는 것에 습관이 되어 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움츠리려 했지만 곧바로 도준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제야 지금은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경비원은 도준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도준 도련님.” “음.” 하지만 하윤을 보는 순간 입을 몇 번이고 벌렸다 닫았다 하다가 끝내 마땅한 호칭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때 도준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 보이나? 아니면 말을 못하나?” “어, 그게, 저기…….” 때마침 똘똘한 메이드 하나가 이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둘째 작은 사모님.” 순간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주차장에서 울려 퍼졌다. 전에 다섯째 작은 사모님으로 불릴 때는 아무런 감각도 없던 하윤이었는데, 숫자 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민도준의 동작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음 순간 바로 아무렇지 않은 듯 뜨거운 입술을 권하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왜인 것 같아?” 하윤은 목을 움츠리며 애써 도준의 손을 내리 눌렀다. “저도 모르니까 묻는 거잖아요.” 이윽고 버둥대며 몸을 돌렸다. “왠지 할아버지 말씀에 숨은 뜻이 있는 것 같아서요.” 도준은 눈을 내리깐 채 눈살을 찌푸리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여인을 바라봤지만 어느새 눈동자가 한층 더 어두워져 있었다. “응?” 약간 올라간 끝 음이 조용한 공기 속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하윤은 여전히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민상철이 그렇게 많은 말을 한 건 그저 듣기에는 도준과 잘 지내라는 말인 것 같지만 상세히 생각해보면 자기 더러 뭔가를 포기하라는 뜻이라고 생각됐다. 하윤은 도준과 지금껏 함께 오면서 이제는 더 이상 누구도 누구에게 빚을 지지 않는 사이가 됐다. 아니, 자세히 따져보면 하윤이 도준한테 빚진 게 더 많았다. 그걸 민상철도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설마……. 하윤이 생각하고 있을 때 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윤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마치 벽에 걸린 그림과 하나가 된 것처럼. 벽에 걸려있는 사자는 분명 조용했지만 사람에게 공포감을 안겨준다. 왜냐하면 언제 그 사자가 언제 달려들어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 뜯을지 모르니까. 현재 도준의 눈빛이 그러하다. 그런 시선이 느껴지자 하윤은 의아한 듯 조심스럽게 도준을 쳐다봤다. “도준 씨…….” 도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하윤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 “왜?” “설마 도준 씨 바람 피는 건 아니죠?” 공기 속에 몇 초 간의 침묵이 흐르더니 도준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라고?” “그렇지 않고 서야 할아버지께서 저더러 너무 많은 걸 따지지 말라고 하셨을리가 없잖아요. 재벌가 사모님이 되면 인내심을 알아야 한다는 걸 저한테 알려주려는 게 틀림없어요.” 하윤은 얼른
몇년 전만 하더라도 복 끝 방의 불은 항상 켜져 있었다. 매일 밤 집에 돌아오면 부부가 책상에 엎드려 무언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도준은 갑자기 뭔가 생각나기라도 한 듯 눈에 미소가 번졌다. 그토록 예의를 중시하는 부부가 자기 같은 아들을 교육해야 했던 걸 생각하면 참 고생이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늦게 그것도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돌아오다니, 너를 어쩌면 좋아?” 금테 안경을 쓴 중년이 곧바로 아내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어, 아마 아버지가 쟤를 데리고 접대하러 갔었던 것 같아.” “접대는 무슨, 그저 술 마시러 간 거겠지.” 비난을 받은 젊은 남자가 외투를 어깨에 걸치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직 소년의 분위기를 벗어 던지지 못한 남자는 방탕한 표정으로 문에 기대고선 채 헛소리를 늘여 놓았다. “엄마, 학술을 한다는 분이 실사구시의 태도를 취해야지 증거도 없이 그렇게 결론을 내면 어떻게 해요? 이거 비판 받아야 해요. 이런 빈틈 많은 학술 사상으로 어떻게 좋은 연구를 할 수 있겠어요?” 진명주와 같은 학자가 말로 도준을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애먼 남편을 닥달할 수밖에 없었다. “민용현! 당신 아들 좀 어떻게 해 봐!” “됐어, 됐어. 도준이도 농담한 거야.” 민용현은 아내를 위로하며 도준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그제야 도준은 ‘쳇’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참 복에 겨운 줄 모른다니까. 온갖 더러운 짓거리를 하는 부잣집 도련님들에 비하면 난 미덕과 품행을 갖춘 착한 청년이라고요.’ 도준은 혼자 생각하며 무심한 듯 사과했다. “엄마도 참, 농담한 것 가지고 뭐 하러 화를 내고 그래요? 오늘 할아버지와 함께 접대하러 간 거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술을 마시면 안 돼서 제가 대신 몇 잔 마신 거고. 어른을 공경한다고 칭찬은 못해줄 망정 어쩜 용부터 하세요?” “정말이지?” 진명주는 도준에게 여러번 속은 탓에 쉽게
“도준 씨, 앞으로 제가 항상 곁에 있어 줄게요. 어때요?” 권하윤은 고개를 든 채 자기 감정을 남김 없이 내비쳤다. 이에 민도준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응?” 그러다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윤을 바라봤다. “그렇다면서 예전에 도망치려고 했어?” 도준이 어떤 말을 할지 기대하던 하윤은 순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러다가 순간 무드가 없는 도준의 행동에 화가 나 턱을 도준의 가슴에 내리치며 투덜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저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받쳐 들며 하윤의 수단이 안 통한다는 듯 가차없이 말했다. “이것도 진심이라고? 진심이 안 느껴지는데?” “누가 그래요? 저 정말 진심으로 한 말이거든요.” “그렇다면 진짜 진심을 말하는 건 어때?” 하윤을 끌어안은 손이 하윤의 목덜미를 쓸며 불안한 듯 뛰는 맥박을 눌러대더니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야지. 죽을 때까지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나지 않고 죽더라도 땅에 묻히지 않고 내 곁에서 매일 밤낮을 함께 있겠다고.” 하윤은 도준의 으슥한 말투에 등골이 오싹해 작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무섭게 왜 그래요? 게다가 제가 죽었는데 시체는 뭐 하러 끼고 있겠다는 거예요? 벌레 꼬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나 몰라.” 도준은 하윤의 다양한 표정을 바라보며 찬성하는 듯 말했다. “하긴 그러네. 그러니까 자기야, 열심히 살아야 해.” 방금까지 따뜻하던 분위기가 순간 으슥하게 변했다. 하지만 하윤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웃으며 도준에게 다가갔다. “도준 씨 설마 제가 죽을까 봐 두려워요?” 이윽고 하윤은 두 눈을 반짝이며 으쓱한 듯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 죽는 거 제일 무서워하거든요. 그러니 꼭 이 목숨 잘 지켜내서 도준 씨 곁에 오래 남아 있을 거예요.” 도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손으로 하윤의 목덜미를 살살 문지르기만 했다. 도준은 예전에 생각했던 적이 있다. 모든 게 밝혀지고 나면 어떤 심정일지. 아마
권하윤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트집을 잡으며 자기 체면을 살리려던 것뿐이었으니. 반성하는 듯하던 도준도 사실은 순수한 목적이 아니었는지 하윤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숨결을 내뱉으며 하윤의 욕망을 건드렸다. “이제 좀 진지해지는 게 어때요?” 하윤은 도준의 입맞춤을 피했다. “설마 지금…… 그러지 마요.” 물론 민상철이 하윤의 할아버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어르신인데 최소한의 존중은 해줘야 하니까. 도준도 사실은 하윤을 건드릴 생각이 없었는데 양갓집 규수처럼 구는 하윤의 모습에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왜? 설마 영감탱이를 위해 3년간 애도라도 하려고?” ‘엥? 3년?’ ‘그건 좀 너무 긴 거 아닌가?’ 하윤의 충격을 받은 표정을 보자 도준은 악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뭐 3년간 참아보지 뭐.” 도준의 얼굴에서 장난기를 읽어낸 하윤은 이내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요. 그러면 절대 저 건드리지 마요.” 말을 마친 하윤이 자리를 떠나려 할 때, 도준이 곧바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됐어. 그만하고 자자. 오후에 장례도 해야 하잖아.” 커튼이 햇빛을 가려 방은 다시 어둠 속에 잠겼다. 그렇게 침대에 한참을 누워 있던 하윤은 슬금슬금 도준의 곁으로 다가갔다. “도준 씨.” “응.” “그때 아저씨랑 아주머니가 정말…… 구하려다가 돌아가신 거예요?” 하윤은 공은채라는 이름을 일부러 얼버무렸다. 하윤도 민시영한테서 사실 들은 적이 있다. 부모님이 폭동으로 돌아가신 해, 도준은 고작 19이었는데 그 어린 나이에도 민씨 가문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그때 도준이 부모님과 함께 해외로 나갔던 건 첫째네 식구, 즉 민용재가 손을 쓰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준이 간과한 건 민용재가 도준의 부모님을 죽이기 위해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미친 짓을 벌였다는 거다.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도준은 혼자의 힘으로 총 하나만 가지고 가족을 데리고 도망쳣다. 만약 그때 도준의 부모님이 폭동에서 미처 도망가지 못한
권하윤의 꿍꿍이는 당연히 민도준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도준은 얼른 손을 뻗어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의 일을 알고 싶어?” “네.” 하윤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싸한 이유를 댔다. “오후에 묘원에 갈 때 어머님 아버님도 뵙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처음 시부모님을 뵙는 건데 두 분 취향 정도는 알아야 하잖아요.” 도준은 하윤이 그럴싸한 말을 연달아 내뱉는 것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 취향을 알아갈 시간에 내 취향이나 알아보는 건 어때? 내가 상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데.” 하윤은 기분이 괜찮아 보이는 도준을 보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대답을 회피하는 거 설마 아직도 옛사랑이 그리워 저랑 같이 공유하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죠? 흥, 말 안 할 거면 말라지. 저도 안 들어요.” 하윤은 몸을 홱 돌리며 이불 속으로 들어가더니 베개를 잡고 도준한테서 떨어졌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 잔뜩 실망한 모습을 하고서. ‘며칠 동안 가만뒀더니 또 기어오르네, 감히 나한테까지 성깔을 부리고 말이야.’ 그 시각, 도준을 등진 하윤은 이미 신심을 잃어 눈을 가늘게 뜨고 자기 등 뒤를 슬쩍 훔쳐보며 도준이 자기를 달래주길 기다렸다. ‘응? 왜 아무런 기척도 없지? 설마 자나?’ ‘설마!’ 하윤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어깨에 무게가 더해졌다. “안 들을 거야?” ‘앗싸!’ 분명 속으로는 기뻤지만 하윤은 여전히 입을 삐죽 내민 채로 고개를 돌렸다. “뭐, 그렇게 얘기해주고 싶다면 들어는 줄게요.” 그렇게 말한 하윤은 2초도 지나지 않아 재촉해댔다. “얼른 말해요.” “그렇게 재잘대는데 내가 어떻게 말해?” 그제야 하윤은 입에 지퍼를 잠그는 동작을 하며 입을 다물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걸 보고 나서야 도준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나도 부모님과 함께 해외로 갔었거든. 그런데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놈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어.”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 도준의 얼굴에는 날
권하윤은 갑자기 뭔가 생각나는 듯 물었다. “혹시 그때 갔던 곳이 혹시 소에리드 극장이에요?” “응.” 민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어쩐지.’ 하윤은 어느 해 아버지가 식사 자리에서 자기의 학생 하나가 소예리드에서 공연하다가 사고가 났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북쪽 지역은 너무 혼란스럽고 위험하다고 학생들을 그쪽으로 보내지 않았다고 했었다. 하윤은 도준의 부모님이 공은채를 구해준 건 그저 우연한 만남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었는데 공연이라는 말에 모든 게 퍼즐이 맞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걸 보면 운명이 이미 우리를 꼭 묶어 둔 모양이네.’ 하지만 그때의 하윤은 그저 아무 걱정도 없는 소녀라서 이 모든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두 분은 공은채의 연주회를 듣고 이미 어느정도 알았기에 폭동에서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네.’ 도준의 이어진 말은 하윤의 추측이 맞다는 걸 증명했다. 도준의 부모님이 그날 공연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하윤은 왠지 마음이 쓰라렸다. ‘먼 이국 타향에서 참 낭만적이었네.’ 하지만 이 일은 도준의 부모님과 관련된 일이기에 이런 상황에 질투하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라 판단됐는지 하윤은 그저 눈을 깜빡이며 듣고 있는다는 걸 표현했다. “연주회에 간 다음은요?” “그리고 곧바로 연주홀이 폭발했어.” 비명, 총성,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뒤덮어 지옥이 따로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한차례의 목적 있는 암살이었지만 인간성은 시험을 쉽게 견뎌낼 수 없었기에 일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날 폭동은 뉴스에 한 달 내내 걸릴 만큼 참혹했다. 하윤은 그때의 상황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도준의 팔을 꼭 잡았다. 공은채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두 분을 암살하려고 왔던 놈들이 다시 왔다는 걸 듣는 순간 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의 입을 막았다. “됐어요.” 도준은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여 하윤의 작은 손을 입에서 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