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만 하더라도 복 끝 방의 불은 항상 켜져 있었다. 매일 밤 집에 돌아오면 부부가 책상에 엎드려 무언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도준은 갑자기 뭔가 생각나기라도 한 듯 눈에 미소가 번졌다. 그토록 예의를 중시하는 부부가 자기 같은 아들을 교육해야 했던 걸 생각하면 참 고생이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늦게 그것도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돌아오다니, 너를 어쩌면 좋아?” 금테 안경을 쓴 중년이 곧바로 아내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어, 아마 아버지가 쟤를 데리고 접대하러 갔었던 것 같아.” “접대는 무슨, 그저 술 마시러 간 거겠지.” 비난을 받은 젊은 남자가 외투를 어깨에 걸치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직 소년의 분위기를 벗어 던지지 못한 남자는 방탕한 표정으로 문에 기대고선 채 헛소리를 늘여 놓았다. “엄마, 학술을 한다는 분이 실사구시의 태도를 취해야지 증거도 없이 그렇게 결론을 내면 어떻게 해요? 이거 비판 받아야 해요. 이런 빈틈 많은 학술 사상으로 어떻게 좋은 연구를 할 수 있겠어요?” 진명주와 같은 학자가 말로 도준을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애먼 남편을 닥달할 수밖에 없었다. “민용현! 당신 아들 좀 어떻게 해 봐!” “됐어, 됐어. 도준이도 농담한 거야.” 민용현은 아내를 위로하며 도준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그제야 도준은 ‘쳇’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참 복에 겨운 줄 모른다니까. 온갖 더러운 짓거리를 하는 부잣집 도련님들에 비하면 난 미덕과 품행을 갖춘 착한 청년이라고요.’ 도준은 혼자 생각하며 무심한 듯 사과했다. “엄마도 참, 농담한 것 가지고 뭐 하러 화를 내고 그래요? 오늘 할아버지와 함께 접대하러 간 거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술을 마시면 안 돼서 제가 대신 몇 잔 마신 거고. 어른을 공경한다고 칭찬은 못해줄 망정 어쩜 용부터 하세요?” “정말이지?” 진명주는 도준에게 여러번 속은 탓에 쉽게
“도준 씨, 앞으로 제가 항상 곁에 있어 줄게요. 어때요?” 권하윤은 고개를 든 채 자기 감정을 남김 없이 내비쳤다. 이에 민도준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응?” 그러다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윤을 바라봤다. “그렇다면서 예전에 도망치려고 했어?” 도준이 어떤 말을 할지 기대하던 하윤은 순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러다가 순간 무드가 없는 도준의 행동에 화가 나 턱을 도준의 가슴에 내리치며 투덜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저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받쳐 들며 하윤의 수단이 안 통한다는 듯 가차없이 말했다. “이것도 진심이라고? 진심이 안 느껴지는데?” “누가 그래요? 저 정말 진심으로 한 말이거든요.” “그렇다면 진짜 진심을 말하는 건 어때?” 하윤을 끌어안은 손이 하윤의 목덜미를 쓸며 불안한 듯 뛰는 맥박을 눌러대더니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야지. 죽을 때까지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나지 않고 죽더라도 땅에 묻히지 않고 내 곁에서 매일 밤낮을 함께 있겠다고.” 하윤은 도준의 으슥한 말투에 등골이 오싹해 작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무섭게 왜 그래요? 게다가 제가 죽었는데 시체는 뭐 하러 끼고 있겠다는 거예요? 벌레 꼬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나 몰라.” 도준은 하윤의 다양한 표정을 바라보며 찬성하는 듯 말했다. “하긴 그러네. 그러니까 자기야, 열심히 살아야 해.” 방금까지 따뜻하던 분위기가 순간 으슥하게 변했다. 하지만 하윤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웃으며 도준에게 다가갔다. “도준 씨 설마 제가 죽을까 봐 두려워요?” 이윽고 하윤은 두 눈을 반짝이며 으쓱한 듯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 죽는 거 제일 무서워하거든요. 그러니 꼭 이 목숨 잘 지켜내서 도준 씨 곁에 오래 남아 있을 거예요.” 도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손으로 하윤의 목덜미를 살살 문지르기만 했다. 도준은 예전에 생각했던 적이 있다. 모든 게 밝혀지고 나면 어떤 심정일지. 아마
권하윤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트집을 잡으며 자기 체면을 살리려던 것뿐이었으니. 반성하는 듯하던 도준도 사실은 순수한 목적이 아니었는지 하윤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숨결을 내뱉으며 하윤의 욕망을 건드렸다. “이제 좀 진지해지는 게 어때요?” 하윤은 도준의 입맞춤을 피했다. “설마 지금…… 그러지 마요.” 물론 민상철이 하윤의 할아버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어르신인데 최소한의 존중은 해줘야 하니까. 도준도 사실은 하윤을 건드릴 생각이 없었는데 양갓집 규수처럼 구는 하윤의 모습에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왜? 설마 영감탱이를 위해 3년간 애도라도 하려고?” ‘엥? 3년?’ ‘그건 좀 너무 긴 거 아닌가?’ 하윤의 충격을 받은 표정을 보자 도준은 악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뭐 3년간 참아보지 뭐.” 도준의 얼굴에서 장난기를 읽어낸 하윤은 이내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요. 그러면 절대 저 건드리지 마요.” 말을 마친 하윤이 자리를 떠나려 할 때, 도준이 곧바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됐어. 그만하고 자자. 오후에 장례도 해야 하잖아.” 커튼이 햇빛을 가려 방은 다시 어둠 속에 잠겼다. 그렇게 침대에 한참을 누워 있던 하윤은 슬금슬금 도준의 곁으로 다가갔다. “도준 씨.” “응.” “그때 아저씨랑 아주머니가 정말…… 구하려다가 돌아가신 거예요?” 하윤은 공은채라는 이름을 일부러 얼버무렸다. 하윤도 민시영한테서 사실 들은 적이 있다. 부모님이 폭동으로 돌아가신 해, 도준은 고작 19이었는데 그 어린 나이에도 민씨 가문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그때 도준이 부모님과 함께 해외로 나갔던 건 첫째네 식구, 즉 민용재가 손을 쓰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준이 간과한 건 민용재가 도준의 부모님을 죽이기 위해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미친 짓을 벌였다는 거다.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도준은 혼자의 힘으로 총 하나만 가지고 가족을 데리고 도망쳣다. 만약 그때 도준의 부모님이 폭동에서 미처 도망가지 못한
권하윤의 꿍꿍이는 당연히 민도준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도준은 얼른 손을 뻗어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의 일을 알고 싶어?” “네.” 하윤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싸한 이유를 댔다. “오후에 묘원에 갈 때 어머님 아버님도 뵙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처음 시부모님을 뵙는 건데 두 분 취향 정도는 알아야 하잖아요.” 도준은 하윤이 그럴싸한 말을 연달아 내뱉는 것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 취향을 알아갈 시간에 내 취향이나 알아보는 건 어때? 내가 상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데.” 하윤은 기분이 괜찮아 보이는 도준을 보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대답을 회피하는 거 설마 아직도 옛사랑이 그리워 저랑 같이 공유하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죠? 흥, 말 안 할 거면 말라지. 저도 안 들어요.” 하윤은 몸을 홱 돌리며 이불 속으로 들어가더니 베개를 잡고 도준한테서 떨어졌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 잔뜩 실망한 모습을 하고서. ‘며칠 동안 가만뒀더니 또 기어오르네, 감히 나한테까지 성깔을 부리고 말이야.’ 그 시각, 도준을 등진 하윤은 이미 신심을 잃어 눈을 가늘게 뜨고 자기 등 뒤를 슬쩍 훔쳐보며 도준이 자기를 달래주길 기다렸다. ‘응? 왜 아무런 기척도 없지? 설마 자나?’ ‘설마!’ 하윤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어깨에 무게가 더해졌다. “안 들을 거야?” ‘앗싸!’ 분명 속으로는 기뻤지만 하윤은 여전히 입을 삐죽 내민 채로 고개를 돌렸다. “뭐, 그렇게 얘기해주고 싶다면 들어는 줄게요.” 그렇게 말한 하윤은 2초도 지나지 않아 재촉해댔다. “얼른 말해요.” “그렇게 재잘대는데 내가 어떻게 말해?” 그제야 하윤은 입에 지퍼를 잠그는 동작을 하며 입을 다물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걸 보고 나서야 도준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나도 부모님과 함께 해외로 갔었거든. 그런데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놈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어.”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 도준의 얼굴에는 날
권하윤은 갑자기 뭔가 생각나는 듯 물었다. “혹시 그때 갔던 곳이 혹시 소에리드 극장이에요?” “응.” 민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어쩐지.’ 하윤은 어느 해 아버지가 식사 자리에서 자기의 학생 하나가 소예리드에서 공연하다가 사고가 났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북쪽 지역은 너무 혼란스럽고 위험하다고 학생들을 그쪽으로 보내지 않았다고 했었다. 하윤은 도준의 부모님이 공은채를 구해준 건 그저 우연한 만남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었는데 공연이라는 말에 모든 게 퍼즐이 맞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걸 보면 운명이 이미 우리를 꼭 묶어 둔 모양이네.’ 하지만 그때의 하윤은 그저 아무 걱정도 없는 소녀라서 이 모든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두 분은 공은채의 연주회를 듣고 이미 어느정도 알았기에 폭동에서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네.’ 도준의 이어진 말은 하윤의 추측이 맞다는 걸 증명했다. 도준의 부모님이 그날 공연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하윤은 왠지 마음이 쓰라렸다. ‘먼 이국 타향에서 참 낭만적이었네.’ 하지만 이 일은 도준의 부모님과 관련된 일이기에 이런 상황에 질투하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라 판단됐는지 하윤은 그저 눈을 깜빡이며 듣고 있는다는 걸 표현했다. “연주회에 간 다음은요?” “그리고 곧바로 연주홀이 폭발했어.” 비명, 총성,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뒤덮어 지옥이 따로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한차례의 목적 있는 암살이었지만 인간성은 시험을 쉽게 견뎌낼 수 없었기에 일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날 폭동은 뉴스에 한 달 내내 걸릴 만큼 참혹했다. 하윤은 그때의 상황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도준의 팔을 꼭 잡았다. 공은채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두 분을 암살하려고 왔던 놈들이 다시 왔다는 걸 듣는 순간 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의 입을 막았다. “됐어요.” 도준은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여 하윤의 작은 손을 입에서 떼어
권하윤의 말에 민도준의 눈에 드리웠던 미소가 점점 흩어졌다. “응?” 도준이 부인하지 않자 하윤은 자기가 제대로 짚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윤도 바보는 아니기에 민상철의 말이 그저 도준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걸 용서하라는 간단한 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에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닌가고 따진 것도 그저 도준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하윤은 도준이 자기한테 뭔가를 속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숨기고 있는 게 도준이 하윤의 가족을 싫어하고 하윤더러 가족과 관계를 끊으라고 한 이유라는 것도. 예전의 하윤은 용기가 나지 않아 깊이 파고들지 않았었다. 이게 또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기만 하면 되돌릴 수 없을까 봐, 잇따라 눈 앞의 찾아온 평온함도 깨져버릴까 봐 하윤은 무서웠으니까. 하지만 지금 하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도준이 인정하는 걸 듣는 거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데 함께 힘을 합쳐 이겨내지 못할 곤란이 어디 있다고.’ 그 생각에 하윤은 도준의 손을 잡으며 상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을 했다. “제가 모르는 걸 알려주면 안 돼요?” 도준은 나른한 자세로 침대에 기대어 있었지만 살짝 올린 눈매는 여전히 사람에게 압박을 준다. 특히 천천히 일어서다가 곧게 서서 내려다볼 때면 하윤은 자기의 기세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진짜로 원해?” 짤막한 한 마디에 담긴 뜻에 하윤은 손발이 저렸다. 하지만 약 2초간 침묵하는가 싶더니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준의 목소리에서 기분을 쉽게 알 수 없었다. “진실을 안 뒤 무너질까 봐 두렵지 않아?” ‘무너질까 봐 두렵다고?’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기에 내가 무너진다고 확신하는 거지?’ 그 순간 하윤은 불안함이 생겨났다. 마치 다음 순간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처럼. 하지만 도준을 믿고 있었기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도준 씨가 있는데 뭐가 무서울 게 있겠어요? 무슨 일이 있든 도준 씨가 저 혼자 두지 않을 거잖아요.”
희망이 생겨서 인지 하윤은 꿀 잠을 잤다. 심지어 다음날 아침 그녀를 깨운 건 메이드였다. “둘째 작은 사모님, 묘원으로 가실 시간이에요.” 하윤은 어렵사리 눈을 뜨고 나서야 옆 자리가 이미 텅텅 비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도준 씨는요?” “도준 도련님은 준비할 게 많으셔서 시영 아가씨와 나가셨어요. 지금 밖에 지훈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하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 혼자 버린 게 아니구나.’ “알았어요. 얼른 내려간다고 전해줘요.” 오늘의 자리는 비교적 정숙한 자리이기에 하윤은 메이드가 골라준 옷들 중에서 긴팔의 검은 원피스를 골랐고 가슴에는 흰색 브로치를 달았으며 머리는 뒤로 높게 얹었다. 아래층에 내려와 보니 역시나 민지훈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하윤을 본 지훈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둘째 형수.” 하윤의 얼굴에 걸려 있던 사교적인 미소가 그 순간 굳어버렸다. 메이드가 둘째 작은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건 부끄럽지만 어느정도 적응할 수는 있는데 가족이 호칭을 바꿔 부르자 너무 어색했다. 그건 호칭만 바뀐 게 아니니까. 어찌 됐든 지훈은 전에 넷째 아주버님이었고 하윤을 제수씨라고 불렀는데 갑자기 둘째 형수라고 바뀌니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적응 안 됐으니 부르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저 어색하게 대답했다. “어,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요.” 지훈은 아무렇지 않는 듯 대답하고는 이내 물었다. “이제 출발해도 되죠? 둘째 형수.” ‘춟발하는 건 좋은데, 그 둘째 형수 소리 잠깐 안 하면 안 돼요?’ 하윤은 속으로 소리질렀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예의 바른 미소를 유지했다. “가요.” 그렇게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지훈은 매너 있게 하윤에게 문까지 열어주었다. “고마…….” “둘째 형수, 조심해요.” 하윤은 그 호칭에 끝내 참지 못했다. “그렇게 부를 필요 없어요. 이름 불러요.” “어떻게 그래요? 장유
민도준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분위기상으로 봤을 때 비즈니스계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도준의 지위가 이르면 이런 사람들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할 거다. ‘어쩐지 다른 사람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했네.’ 티브이에서만 보던 얼굴이 눈앞에 보이자 하윤은 상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에 얼른 지훈과 함께 숨어버렸다. 하지만 하윤의 수상쩍은 움직임은 마침 도준의 레이더에 걸려버렸다. 그걸 본 도준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갔다. ‘어쩜 저 버릇은 고치질 못하는지.’ “이리 와.” 도준이 손을 들고 하윤을 불렀다. 그 말에 하윤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지만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오직 속으로만 자기가 아닐 거라고 속으로 기도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민지훈이 친절하게 귀띔해줬다. “둘째 형수, 도준 형이 불러요.” 고개를 돌려 보니 도준과 대화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하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돼. 쪽팔리게 굴면 안 돼.’ 하윤은 애써 허리를 곧게 펴고 걸어갔지만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것처럼 긴장감이 고조에 치달아 같은발과 같은 손이 나간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때 마침 도준과 대화를 하고 있던 수려한 중년 남자가 대화가 거의 끝났는지 서먹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 분은 누구죠?” 분명 공격적이지 않았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는 마치 짙은 안개처럼 코와 입에 흘러 들어 숨이 막혀왔다. 그렇게 거의 질식할 때쯤 도준이 고개를 돌려 하윤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안사람이에요.” 이윽고 도준은 하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르신들께 인사해야지.” 의원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마주 보며 같은 공간의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하윤은 얼굴이 굳어 마음대로 움직이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애써 예의 바른 미소를 지어냈다. “안녕하세요.” “자네 할아버지가 예전에 자네가 가장 걱정되는 손자라고 하던데 이제 사업도 잘되고 가정도 꾸렸으니 안심하겠어.” “우리는 오후에 회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