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의 말에 민도준의 눈에 드리웠던 미소가 점점 흩어졌다. “응?” 도준이 부인하지 않자 하윤은 자기가 제대로 짚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윤도 바보는 아니기에 민상철의 말이 그저 도준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걸 용서하라는 간단한 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에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닌가고 따진 것도 그저 도준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하윤은 도준이 자기한테 뭔가를 속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숨기고 있는 게 도준이 하윤의 가족을 싫어하고 하윤더러 가족과 관계를 끊으라고 한 이유라는 것도. 예전의 하윤은 용기가 나지 않아 깊이 파고들지 않았었다. 이게 또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기만 하면 되돌릴 수 없을까 봐, 잇따라 눈 앞의 찾아온 평온함도 깨져버릴까 봐 하윤은 무서웠으니까. 하지만 지금 하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도준이 인정하는 걸 듣는 거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데 함께 힘을 합쳐 이겨내지 못할 곤란이 어디 있다고.’ 그 생각에 하윤은 도준의 손을 잡으며 상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을 했다. “제가 모르는 걸 알려주면 안 돼요?” 도준은 나른한 자세로 침대에 기대어 있었지만 살짝 올린 눈매는 여전히 사람에게 압박을 준다. 특히 천천히 일어서다가 곧게 서서 내려다볼 때면 하윤은 자기의 기세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진짜로 원해?” 짤막한 한 마디에 담긴 뜻에 하윤은 손발이 저렸다. 하지만 약 2초간 침묵하는가 싶더니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준의 목소리에서 기분을 쉽게 알 수 없었다. “진실을 안 뒤 무너질까 봐 두렵지 않아?” ‘무너질까 봐 두렵다고?’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기에 내가 무너진다고 확신하는 거지?’ 그 순간 하윤은 불안함이 생겨났다. 마치 다음 순간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처럼. 하지만 도준을 믿고 있었기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도준 씨가 있는데 뭐가 무서울 게 있겠어요? 무슨 일이 있든 도준 씨가 저 혼자 두지 않을 거잖아요.”
희망이 생겨서 인지 하윤은 꿀 잠을 잤다. 심지어 다음날 아침 그녀를 깨운 건 메이드였다. “둘째 작은 사모님, 묘원으로 가실 시간이에요.” 하윤은 어렵사리 눈을 뜨고 나서야 옆 자리가 이미 텅텅 비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도준 씨는요?” “도준 도련님은 준비할 게 많으셔서 시영 아가씨와 나가셨어요. 지금 밖에 지훈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하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 혼자 버린 게 아니구나.’ “알았어요. 얼른 내려간다고 전해줘요.” 오늘의 자리는 비교적 정숙한 자리이기에 하윤은 메이드가 골라준 옷들 중에서 긴팔의 검은 원피스를 골랐고 가슴에는 흰색 브로치를 달았으며 머리는 뒤로 높게 얹었다. 아래층에 내려와 보니 역시나 민지훈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하윤을 본 지훈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둘째 형수.” 하윤의 얼굴에 걸려 있던 사교적인 미소가 그 순간 굳어버렸다. 메이드가 둘째 작은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건 부끄럽지만 어느정도 적응할 수는 있는데 가족이 호칭을 바꿔 부르자 너무 어색했다. 그건 호칭만 바뀐 게 아니니까. 어찌 됐든 지훈은 전에 넷째 아주버님이었고 하윤을 제수씨라고 불렀는데 갑자기 둘째 형수라고 바뀌니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적응 안 됐으니 부르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저 어색하게 대답했다. “어,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요.” 지훈은 아무렇지 않는 듯 대답하고는 이내 물었다. “이제 출발해도 되죠? 둘째 형수.” ‘춟발하는 건 좋은데, 그 둘째 형수 소리 잠깐 안 하면 안 돼요?’ 하윤은 속으로 소리질렀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예의 바른 미소를 유지했다. “가요.” 그렇게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지훈은 매너 있게 하윤에게 문까지 열어주었다. “고마…….” “둘째 형수, 조심해요.” 하윤은 그 호칭에 끝내 참지 못했다. “그렇게 부를 필요 없어요. 이름 불러요.” “어떻게 그래요? 장유
민도준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분위기상으로 봤을 때 비즈니스계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도준의 지위가 이르면 이런 사람들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할 거다. ‘어쩐지 다른 사람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했네.’ 티브이에서만 보던 얼굴이 눈앞에 보이자 하윤은 상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에 얼른 지훈과 함께 숨어버렸다. 하지만 하윤의 수상쩍은 움직임은 마침 도준의 레이더에 걸려버렸다. 그걸 본 도준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갔다. ‘어쩜 저 버릇은 고치질 못하는지.’ “이리 와.” 도준이 손을 들고 하윤을 불렀다. 그 말에 하윤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지만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오직 속으로만 자기가 아닐 거라고 속으로 기도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민지훈이 친절하게 귀띔해줬다. “둘째 형수, 도준 형이 불러요.” 고개를 돌려 보니 도준과 대화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하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돼. 쪽팔리게 굴면 안 돼.’ 하윤은 애써 허리를 곧게 펴고 걸어갔지만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것처럼 긴장감이 고조에 치달아 같은발과 같은 손이 나간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때 마침 도준과 대화를 하고 있던 수려한 중년 남자가 대화가 거의 끝났는지 서먹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 분은 누구죠?” 분명 공격적이지 않았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는 마치 짙은 안개처럼 코와 입에 흘러 들어 숨이 막혀왔다. 그렇게 거의 질식할 때쯤 도준이 고개를 돌려 하윤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안사람이에요.” 이윽고 도준은 하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르신들께 인사해야지.” 의원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마주 보며 같은 공간의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하윤은 얼굴이 굳어 마음대로 움직이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애써 예의 바른 미소를 지어냈다. “안녕하세요.” “자네 할아버지가 예전에 자네가 가장 걱정되는 손자라고 하던데 이제 사업도 잘되고 가정도 꾸렸으니 안심하겠어.” “우리는 오후에 회의가
두 사람의 행동은 곧바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중 선두에 있던 중년 남성이 권하윤을 힐끗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분은…….” 하윤이 자기 소개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서 누군가 중년 남성한테 귓속말로 귀띔해줬다. 그러자 남자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이시윤 씨였군요. 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데 역시나 미인이십니다. 민 사장님과 정말 잘 어울립니다…….” 이윽고 장장 3분이나 되는 아부가 이어졌고 중년 남성은 하윤을 세상에 둘도 없는 여자로 떠받들었다. 분명 어색하고 딱딱하기 그지없는 칭찬이었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맞장구를 쳐대는 바람에 진짜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처음으로 이런 신기한 경험을 한 하윤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남의 아부를 듣기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머리를 짜내며 온갖 미사여구를 생각해내는 우스운 모습을 보고 싶어한 다는 것을. 그게 바로 지위의 차이이고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 느끼는 우월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곳으로 오르고 싶어하고 높은 곳을 바라보는 거고. ‘높은 곳에서 보는 풍경이 이리 매혹적일 줄이야.’ 도준은 좀처럼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기에 사람들한테 하윤은 아주 좋은 돌파구가 되었다. 아부를 하며 칭찬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자 하윤은 어색한 듯 웃으며 고개를 돌려 도준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도준도 그 신호를 받았는지 곧바로 하윤의 미모를 칭찬해대는 전자제품 기업 대표의 말을 끊어버렸다. “송 대표님, 더 하셨다간 제 여자를 탐낸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아부를 해대던 송 대표는 순간 얼어붙더니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어색하게 말했다. “민 사장님은 어쩜 유머감각도 뛰어나시네요.” 하지만 도준은 이미 송 대표한테서 시선을 거둔 채 손가락으로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 “여기 재미없으니까 시영이 아니면 지훈이한테 가서 놀아.” “…….” 재미없다는 평가를 받은 각 기
권하윤은 귀부인들과 함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랬더니 역시나 민도준이 말했던 것처럼 거의 모든 대화 주제는 하윤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심지어 분위기가 썰렁해질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하윤이 뭘 말하기만 하면 귀부인들이 맞장구를 쳐줬으니. 이건 원래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고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하던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다소 재미가 없기 마련이다. 때문에 잠깐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여기 계셨네요.”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원혜정이었다. 원혜정을 마주할 때 귀부인들의 표정은 조금 미묘했다. 그도 그럴 게, 민용재가 그렇게 되고 난 뒤 첫째네 집안 사람들은 아예 맥이 끊긴 것처럼 주위에 있던 인맥이 모두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물론 민재혁의 다리가 회복됐다고는 하나 이제 민씨 가문도 도준의 손에 넘어간 상황이니 원혜정의 처지는 난처했다. 아까 하윤과 가장 얘기를 많이 하던 송 사모님은 하윤의 눈치를 힐끗 살피더니 원혜정의 말은 듣지 못한 것처럼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다른 귀부인들도 하나 둘씩 송 사모님을 따라하며 핸드폰을 보거나 서로 대화를 해댔다. 하지만 원혜정은 귀부인들의 무시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장례식도 이제 곧 시작이니 지금 가봐야 해요.” “시윤 씨, 우리도 얼른 가요.” 그때 누군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하지만 하윤은 원혜정과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미소를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먼저들 가보세요. 전 화장실 먼저 들렀다 가려고요.” 남편과 함께 이런 장소에 나오는 귀부인들은 모두 눈치 백단이기에 하윤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가 원혜정을 싫어한다는 걸 눈치채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 이따 봐요.” 하윤은 미소를 지은 채 귀부인들을 배웅했다. 원혜정도 떠나기 전 고개를 돌려 하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든 그 일만 떠올리면 권하윤은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 사람은 하윤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하윤을 가장 아껴주던 아버지니까. 하윤이 어릴 때부터 가장 존경하던 사람이니까. 민재혁은 눈시울이 붉어진 하윤을 보자 눈에서 계략이 번뜩였다. “그 집안에 딸 하나가 있는데 피치못할 사정으로 떨어져 지내 가족이 서로 만나지도 못한다던데…….” “그만!” 하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민재혁을 쏘아봤다. “무슨 뜻이에요? 도준 씨를 상대하지 못하겠으니 이젠 저를 공격하겠다는 건가요? 아무리 패했다고 해도 너무 구차하게 구는 거 아닌가?” 하윤의 말이 마침 민재혁의 아픈 곳을 찔렀는지 민재혁의 표정은 더욱 음침해졌다. 하윤은 일부러 이렇게 말한 거다. 민재혁한테 끌려 다니고 싶지 않아서 민재혁 스스로 참지 못하고 자기 목적을 토해내게 만들 심산이었다. 민재혁의 흔들리는 표정을 보자 하윤은 말을 보탰다. “도준 씨와의 대결에서 진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도준 씨는 처음부터 후계자의 자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 언제나 빛나는데 누구는 시궁창에서 모략이나 꾸미는 신세였으니.” “어릴 때부터 도준 씨를 많이 질투했었죠? 그런데 뭐 어쩌겠어요? 대결에서 졌으면서 불만을 품고 버둥대면 버둥댈 수록 비참한데. 지금이라도 도준 씨한테 무릎 꿇고 빌면 아마 도준 씨도 너무 심하게 하진 않을 거예요.” 민재혁의 표정은 여전히 냉정해 보였지만 한껏 쳐진 눈꼬리에서 지금 그의 속이 평온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는 이시윤 씨도 마찬가지 아닌가?” 민재혁은 한 걸음 한 걸음 하윤에게 다가갔다. 그 사이 나무 그늘이 그의 얼굴에서 계속 움직여댔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한테 아첨하고 빌붙는 꼴이라니 나한테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닐텐데?” “…….” 오늘의 날씨는 무척 개였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다. 멀리서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고 분명 장례식이지만 새로운 사람이 가문을 계승하게 되어서인지 오히려 경사
권하윤의 정신이 무너질 지경을 헤매고 있을 때, 마음 한 구석에서 웬 목소리가 그녀를 일깨워 줬다. ‘진정해야 해.’ ‘이미 오해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돼.’ 더욱이 민재혁은 원래부터 속셈을 알 수 없는 데다 지금은 몰락한 상태라서 민도준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화살을 하윤에게 겨눴을 수 있다. 일부러 이런 시점에 이런 말을 한 건 하윤과 도준 사이에 모순이 생기기를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늘 경성에서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 이런 때에 하윤이 화라도 내고 따지고 들면 도준은 그녀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 ‘그래. 민재혁이 말한 게 진짜가 아닐 수도 있잖아. 진짜라고 해도…….’ 하윤은 더 이상의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어 애써 침을 삼키며 목구멍을 막고 있는 이물감을 무시했다. 하지만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 아팠다. 심지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마저 쉬었다. “민재혁, 내가 당신 목적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당신이 말하는 건 하나도 안 믿으니까.” “그래요?” 민재혁은 애써 괜찮은 척 하는 하윤을 바라보며 또다시 충격적인 말을 했다. “혹시 도준이 매녕 겨울만 되면 해원에 한달 정도 간다는 얘기 들은 적 있어요? 그렇다면 가족이 그 일을 당했던 때가 언제인지는 잊지 않았겠죠?” 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이 서늘한 공기 속에서 하윤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또다시 하윤을 옥죄었다. 해원의 겨울은 눈이 적게 내린다. 하지만 하윤은 그날 공씨 저택 문 앞에 무릎 꿇고 빌던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 속, 차디찬 바닥에 무릎을 꿇었을 때 뼈속까지 전해지던 차가운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그때 하윤은 해원의 겨울도 이토록 춥구나 하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이윽고 진소혜의 노트북으로 몰래 본 USB의 내용이 눈앞에 떠올랐다. 도준이 누트북을 닫아 버리기 전에 하윤은 화면에서 언뜻 스쳐지나는 사람의 인영을 봤었다. 어두운 불빛, 흔들리는 화면, 그때 볼 때는
민도준의 짙은 눈동자가 권하윤의 몸을 한번 훑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화를 할 때가 아니라서 할 수 없이 손을 들ㄹ어 하윤의 머리를 눌렀다. “착하게 굴어.”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온기는 검은 머리카락 너머에 전해지지 못하고 그저 표면에 맴돌다가 사라졌다. 하윤은 검은 옷을 입은 도준이 사람들 앞에서 향을 손에 들고 제사를 지내는 걸 멀리서 바라봤다. 희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 방향이 마치 민씨 가문의 앞으로의 방향을 명시하는 것 같았다. 그 뒤는 하윤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영혼을 가식적인 웃음 뒤에 묶어 둔 채 사람들을 배웅했다. 도준은 역시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하윤이 아무리 곁에 있어도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은 막을 수 없었다. 한때 하유도 그 중 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피곤하기만 해 화장실에 가겠다는 핑계를 대며 인파를 벗어났다. “쏴-” 물줄기가 손을 훑고는 번쩍이는 세면대에 떨어지더니 이내 하수구로 흘러 들었다. 수도꼭지를 잠근 하윤은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영혼 없는 듯한 여인을 바라봤다. ‘울면 안 돼.’ ‘추태를 부려서는 안 돼.’ ‘도준 씨가 나중에 말해준다고 했잖아.’ ‘이제 몇 시간 밖에 안 남았으니 기다릴 수 있어.’ 하윤은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표정이 너무 어색해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뒤에야 화장실을 나섰다. 하지만 화장실을 나서자마자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장 집사님?” 장 집사는 몸을 돌려 하윤을 바라봤다. 민상철이 세상을 떠서인지 원래 정정하던 장 집사는 하루아침에 늙은 것 같아 보였다. 나무 껍질 같은 피부가 푹 꺼진 눈을 덮고 있어 더 그런 모양이다. 그는 하윤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시윤 씨, 혹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하윤은 장 집사가 사적으로 자기를 찾아온 것에 대해 의문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장 집사는 이 묘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적어도 하윤 보다는. 그는 곧바로 하윤을 데리고 그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