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깨어났는지 모를 민도준을 보자 권하윤은 코끝이 찡해났다. 민도준의 팔은 권하윤보다 빨리 그녀를 품에 감아 안았다.곧이어 흐느낌 소리가 민도준의 팔 사이에서 흘러나왔다.“도준 씨, 아직도 많이 아파요?”하지만 권하윤은 민도준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흐느끼는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피까지 토했는데 당연히 아프겠죠.”이 순간만큼 권하윤은 머리를 굴리며 교활하게 굴던 모습을 던져버리고 진심으로 구슬프게 울었다.그 때문에 잠에서 깬 민도준은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 우습기도 해서 손을 뻗어 권하윤을 자기 품속에 끌어들였다.“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울어?”속눈썹은 촉촉하게 젖어 파르르 떨릴 때마다 눈물을 뚝뚝 떨구는 권하윤의 모습은 가엾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흐느끼다 못해 뭉개진 발음으로 애써 한 마디를 토해냈다.“이제 저 미워진 거죠?”민도준은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눈물을 닦아내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응.”그 소리에 권하윤은 더 구슬피 울면서 민도준을 끌어안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흑흑, 저도 제가 미워요.”“됐어. 그만 뚝 그쳐.”민도준은 인내심 있게 말하며 권하윤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그때 권하윤이 고개를 들더니 불쌍한 얼굴로 물었다.“그러면 저 여기서 자도 돼요?”눈물범벅이 된 얼굴은 서러움에 잔뜩 부풀어 올라 거절하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하지만 그 몇 초간 멈칫하는 동안 권하윤은 어느새 이불 안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었다.이윽고 가장 안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눕더니 손가락으로 가운데에 선을 그으며 자기 구역을 만들었다.“저 요만큼만 차지할게요. 절대 도준 씨 잠 방해 안 할게요.”민도준은 더 이상 권하윤과 말다툼하기 귀찮았는지 얼른 자리에 누웠다.공기 속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점차 맑아지는 하늘 때문에 커튼 사이로 스며든 빛이 마침 민도준 얼굴에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권하윤은 조용히 민도준의 얼굴 윤곽을 눈에 새겼다.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다 보니 권하윤은 불안한 듯 몸을 움직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할아버지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제수씨가 인사를 드리는데 왜 욕을 하고 그러세요? 노망나신 것도 아니고.”“민도준! 너…… 콜록콜록…….”“할아버지, 괜찮으세요?”민시영은 몸을 반쯤 웅크리고 앉아 민상철의 등을 두드렸다.한편, 권하윤이 멀뚱멀뚱 서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을 때, 민도준이 손을 흔들었다.“이리 와.”권하윤이 움직이기도 전에 민상철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왔다.이런 상황에서 민도준의 곁에 다가가는 게 좋지 않은 선택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권하윤은 민도준의 말을 거역하고 싶지 않았기에 무거운 눈을 딱 감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러자 민도준은 사람들 앞이라는 걸 개의치 않는 듯 권하윤을 품속으로 끌어들였다.“우리 소리에 깬 거야?”권하윤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어젯밤 늦게 잠들었으면서 더 자지 않고 뭐 하러 벌써 깨났어?”다들 성인이었기에 이 이상야릇한 한마디에 담긴 뜻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적이 없는 권하윤은 억울한 나머지 당장이라도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아니나 다를까, 그 말 한마디에 민상철의 눈빛은 한층 어두워졌다. 심지어 옆에 있던 민용재마저 뭔가를 알아내려는 듯한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왔다.순간 권하윤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두려워서라기보다는 민도준의 안위가 걱정되어서였다. 민용재가 민도준을 보러 다급히 찾아온 건 절대 민도준을 관심해서가 아닐 테니까.‘설마, 도준 씨가 며칠 만에 회복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확인하러 온 건가?’그제야 권하윤은 민도준이 사람들 앞에서 이상야릇한 말을 한 게 자기를 놀리려는 목적뿐만 아니라 민용재에게 연막탄 작전을 펼치려는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생각을 정리하고 난 권하윤은 고개를 숙인 채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도준 씨도 어젯밤 늦게 잤으면서 오늘 빨리 깨났잖아요.”그 한마디에 겨우 숨을 돌린 민상철은 또다시 기침하기 시작했다.한편 눈썹을 치켜올린 민도준의 눈꼬리에서 미소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민도준은 여전히 나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안 된다고요? 제가 언제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허락받고 하는 거 봤어요?”민상철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지만 민도준은 여전히 광기를 숨기지 않았다.시선이 마주친 곳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고 일촉즉발 할 것만 같은 암류가 감돌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민상철은 끝내 시선을 거두었다.“너희들은 먼저 나가 있거라.”이건 민도준과 단독으로 얘기하겠다는 뜻이었다.문이 닫히자 권하윤의 마음은 더한층 불안해졌다.현재 민씨 가문 형제들의 권력다툼이 한창인 데다 민용재가 기회를 엿보며 민도준을 무너트리려고 하고 있는데 이럴 때 민상철과 척지는 건 너무나도 바보 같은 선택이다.권하윤이 한참 동안 마음졸이고 있을 그때, 갑자기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꺼내서 확인해 보니 성은우가 보내온 문자였다.일전에 뭔가 처리할 일이 있다면서 떠났으니 며칠간 소식이 없는 것도 정상이었다.하지만 이번에 성은우는 한번 만나자는 문자를 보내왔다.성은우는 좀처럼 먼저 찾아오는 적이 드물기에 권하윤은 뭔 일이 벌어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오후에 만나자고 바로 답장했다.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호주머니 안에 다시 넣은 그때, 권하윤은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눈빛을 느꼈다.고개를 돌아보니 민용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었다.별다른 표정이 없었지만 살갗을 뚫고 뼛속까지 파고들려는 듯한 눈초리에 권하윤은 불쾌감이 들었다.그때 권하윤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챘는지 민시영이 얼른 위로했다.“걱정하지 마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한창 말하고 있는 그때, 방안에서 민성철의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영아.”민시영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 사람의 대화는 이미 끝난 듯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민상철의 얼굴은 한 마디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는 밖으로 내지르지 못한 담담함 같은 거였다.심지어 권하윤을 보는 순간 민상철은 마치 파리라도
민도준은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어디 끝까지 참아 봐.”하지만 역시나 권하윤은 다음 순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민도준이 일어나 밖으로 향하는 걸 보자 “절대 말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긴 거다.“어디 가요?”민도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권하윤은 그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주인한테 버림받은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권하윤에게 단단히 붙잡힌 민도준은 손을 빼려고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하지만 어쩌겠는가? 권하윤의 눈에 민도준은 지금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기에 절대로 혼자 내보낼 리 없었다.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며 권하윤이 단 하루 만에 저지른 일을 열거했다.“내 잠을 방해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데 갑자기 뛰쳐나오고, 나한테 엉겨 붙어 일도 못하게 하는 게 하윤 씨가 말한 돌봄인가 봐? 응?”그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 권하윤은 끝내 손을 풀었다.“그건, 처음이라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죠.”민도준은 피식 웃었다.“그렇다면 경험 키워서 다시 와. 안 그랬다가 내 일을 망칠까 봐 두렵네.”“…….”눈앞에서 문이 닫히자 미움을 받은 권하윤은 한참 동안 풀이 죽어 있었다. 하지만 얼른 교훈을 섭취해 오늘은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그러다가 “간병인”이라는 신분마저 잃게 되면 안 되니까.때문에 권하윤은 이불을 안아 베란다에 펼쳐 놓고 햇볕 쬠을 했다. 물론 그다음은 없었지만 말이다…….솔직히 방은 매일 청소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에 권하윤이 할 일이 별로 없는 건 사실이었다.의식주에서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자 권하윤은 끝내 선물이라도 주기로 결심했다.그렇게 내린 결정이 바로 예쁜 잠옷을 사주는 거였다.쇼핑몰에서 한참을 구경하다가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자 권하윤은 쇼핑백을 들고 성은우와 약속한 공원으로 향했다.평일 오후라 그런지 공원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아 권하윤은 그늘 아래 벤치에서 성은우를 기다렸다.오후의 햇살이 나무에
권하윤은 공태준과 척지면 안 된다는 걸 속으로는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공태준을 마주할 때마다 아버지가 얼마나 비참하게 돌아가셨는지 자신과 가족들이 공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비굴하게 연명했는지 자꾸만 떠오르니까.새로운 신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공태준은 또다시 권하윤을 찾아내고 말았다. 심지어 좋아한다는 명분으로 새로운 삶마저 망가트리면서 말이다.하지만 공태준의 이런 태도가 저를 괴롭힐 때보다도 더 치 떨리도록 싫기만 하다.권하윤의 이러한 반응은 공태준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겉보기에는 분노가 가득했지만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권하윤은 민도준이 자기 신분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 하나뿐이다.바로 권하윤이 민도준을 좋아해서,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공태준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끝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말했잖아요, 당신은 이제 권하윤이라고. 해원으로 돌아가도 하윤 씨는 여전히 권하윤이에요.”이 말을 공태준은 일전에도 한 번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권하윤은 민도준이 사고를 당했다는 슬픔에 빠져 제대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하지만 이 순간 다시 해원으로 돌아가도 여전히 변함없다는 한마디를 듣자 권하윤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설마, 내가 새로운 신분으로 당신이랑 해원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거야?”“하윤 씨가 원한다면 신분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요.”공태준이 무엇을 원하는지 인지하자 순간 한기가 발밑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이런 꿍꿍이를 가지고 있던 거였어?’분노와 충격에 권하윤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아 다른 신분으로 살게 했으면서 다시 공씨 가문으로 데려가려고 한다고?’“절대 그럴 일은 없어!”권하윤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증오가 담겨 있었다.“내가 당신을 따라 해원으로 돌아가길 원한다고? 내가 죽거든 그렇게 해.”권하윤이 당연히 쉽게 동의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잔뜩 흥분한 권하윤의
공태준은 권하윤의 선택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USB의 가장자리가 피부에 움푹 파여 들어가면서 손바닥의 뼈를 꾹 눌러내는 순간 권하윤의 마음은 극도로 답답했다. 분명 공태준이 자기와 민도준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숨을 크게 들이쉰 권하윤은 다시 눈을 들어 공태준을 바라봤다. 그 차가운 눈빛은 공태준에 대한 혐오감이 짙게 배어 있었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화는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은우는 어때? 얼마나 다쳤는데?”“괜찮아요. 은우한테는 큰 부상도 아닐 테니까.”공태준은 낮은 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하지만 혼자 아프면 적적할 테니 친구가 병문안이라도 하면 더 빨리 낫겠죠.”권하윤의 입가에는 냉소가 번졌다.“지금 은우를 내세워 내가 당신이 친 함정에 자발적으로 빠지라는 건가?”“오해한 모양이네요. 내 말은 내가 이제 곧 해원으로 돌아가니 하윤 씨 대신 병문안 하겠다는 뜻이었어요.”이 소식에 권하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공태준이 해원으로 돌아간다고? 전에 한 짓이 있어서 당연히 나를 빼돌리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공태준이 갑자기 한 발짝 물러나자 권하윤은 오히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언제 가?”“내일 점심 11시.”‘시간까지 정해진 걸 보니 진짜인가 보네.’권하윤이 공태준을 위아래로 훑어 보고 있을 때 공태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늘 저녁 같이 식사 할 수 있나요?”그러더니 권하윤이 거절하기 전 한 마디를 더 보충했다.“은우가 오늘 마침 수술이 끝났을 거예요. 걱정되면 통화할 수 있게 해줄게요.”“수술? 무슨 수술? 대체 어떻게 다쳤는데?”“임무를 마치고 철수하는 과정에 안전 로프에 문제가 생겨 5층에서 떨어졌어요.”‘5층에서…….’‘떨어졌다고?’공태준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권하윤의 걱정은 배가 되었다.‘안돼, 은우가 괜찮다고 하는 거 직접 들어야겠어.’하지만 성은우의 전화기는
컴퓨터 화면 오른쪽 하단의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갔지만 마우스를 쥔 손은 여전히 화면에 뜬 USB 아이콘을 누르지 못한 채 원을 그렸다. 그러다가 끝내 용기를 낸 듯 누르려던 찰나, 맞은편에서 일부러 한껏 내리 깐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쁜이, 혼자 왔어? 오빠랑 같이 놀래?”고개를 들어 보니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한 듯한 남자가 테이블을 짚은 채 비스듬히 서서 한동안 다듬지 않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아니요.”딱 자르는 거절에 당연히 나가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남자는 오히려 넉살 좋게 권하윤의 옆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권하윤 쪽으로 쑥 내밀었다.“예쁜이, 뭐해?”버터 칠을 한층 한 듯한 말투에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아 권하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어, 예쁜이, 어디 가?”남자의 방해에 권하윤은 USB를 확인하려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어졌다.‘역시 이런 건 사적인 공간에서 봐야겠네.’밖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한 탓에 어느새 공태준과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권하윤은 택시를 잡아 공태준이 말한 바로 향했다.당연히 밀폐된 룸으로 예약이 되어 있는 줄 알았지만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권하윤의 생각과 달리 모두 부스로 되어 있었다.물론 매 테이블마다 펜스로 가려지기는 했지만 가까이만 걸어가면 안에 누가 앉아 있는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권하윤은 잔뜩 경계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왜 이런 곳으로 예약했어?”공태준은 테이블에 놓인 도수 낮은 칵테일 한잔을 권하윤 앞으로 밀며 입을 열었다.“하윤 씨가 나 경계하는 거 알아요.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아 할 것 같아서 더 편하게 있으라고 그랬어요.”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공태준의 모든 행동이 의심스럽다고 느껴졌기에 그가 건넨 칵테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물론 희미한 불빛 덕에 조금은 안전감이 생겼지만 이곳에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은우랑 통화하게 해준다고 했잖아. 지금 하게 해 줘.”“알겠어요. 그런데 은우의 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 먹으면서 기다려요
“어때? 괜찮은 거야?”권하윤은 핸드폰을 귀에 꼭 붙인 채 잔뜩 긴장한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한편, 권하윤이 자기가 의식을 잃은 모습을 봤을 거라는 걸 꿈에도 모르는 성은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여상스러운 목소리를 냈다.“괜찮아, 그냥 조금 다친 것뿐이야.”하지만 권하윤은 그게 모두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자기가 걱정할까 봐 지금쯤 눈살을 찌푸린 채 고통을 참는 성은우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그런 성은우의 모습을 상상하니 권하윤은 목이 점차 메어왔고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수많은 말은 그저 한 마디로 종합되어 튀어나왔다.“미안해.”권하윤이 성은우에게 사과한 걸 합치면 벌써 수천번 쯤은 될 거다. 물론 그게 성은우에게 아무런 도움도 위로도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권하윤은 그 말을 되뇔 수밖에 없었다.그건 성은우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미안하기 때문에 내뱉는 말이었다.“윤아, 네 탓 아니라니까.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너도 피해자잖아. 그 누구의 운명도 짊어질 필요 없어. 네 삶을 살아.”성은우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권하윤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상황이 슬프기보다는 성은우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였다.권하윤은 성은우가 자기를 미워하고 탓할지언정 이토록 아무 말 없이 계속 뒤에서 희생하는 걸 원치 않았다.“미안해. 다 내 탓이야. 미안해…….”수없이 반복하는 한마디와 울음 섞인 목소리는 허리를 굽힌 채 엿듣고 있는 남자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갔다.권하윤의 목소리에 깃든 감정을 읽어낸 최수인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거 너무 자극적인 거 아니야?’소유욕이 하늘을 찌르는 민도준이 자기의 여자가 다른 남자와 밀회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상황을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씁!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네.’하지만 이렇게 재밌는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윽고 최수인은 잔뜩 흥분한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도준! 내가 방금 누구를 봤는지 알아? 너 아마 생각도 못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