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린 권하윤은 뻣뻣한 목을 삐걱거리며 돌렸다.하지만 마음속에 품은 실낱같은 희망이 민도준을 보는 순간 모두 재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도, 도준 씨…….”민도준의 시선이 자기의 손에 떨어진 걸 발견하는 순간 권하윤은 감전이라도 된 듯 손을 뒤로 뺐다.“도준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민도준은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잔뜩 얼어붙은 권하윤의 얼굴을 한참 동안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내가 안 오고 배겨? 아. 두 사람이 절절한 사랑을 나누는 걸 내가 방해라도 했나?”“아니에요!”권하윤은 목소리를 내리깔며 조심스럽게 강조했다.“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민도준이 눈으로 안쪽을 가리키자 권하윤은 얼른 눈치껏 안쪽으로 몸을 옮기며 자리를 내줬다. 될 수만 있다면 벽 안을 뚫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이토록 어색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그때, 구경하러 왔던 최수인이 공태준에게 말을 걸었다.“공 가주, 저한테도 자리 좀 내줄 수 있을까요?”“…….”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침묵이었다.하지만 어찌어찌해서 다시 자리 배분이 끝나자 주위의 온도는 눈에 띌 정도로 내려갔다. 이런 분위기는 괴상하다는 단어로밖에 형용할 수 없었다.민도준은 여전히 제왕의 분위기를 풍기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공태준을 바라봤고 권하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적당한 변명거리를 생각하느라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유독 최수인만 주위의 분위기를 신경 쓰지 않는 듯 잔뜩 흥분한 얼굴로 종업원을 불러댔다.“이봐요, 예쁜 아가씨, 저기 제 테이블에 있는 술 좀 이리로 가져다줄 수 있어요?”“고마워요. 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이토록 경박한 행동에 공태준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끝내 침묵을 깨트렸다.“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 천천히 얘기들 나누세요.”“공 가주.”민도준은 공태준을 불러세웠다.그 부름에 길을 내주던 최수인이 다시 앉는 바람에 공태준은 다시 안쪽에 갇혀버렸다.민도준은 소파 등에 기댄 채 고개를 뒤로 젖
민도준의 태도에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자 권하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술잔을 받쳐 든 채 입을 열었다.“공 가주님, 가실 때 조심하세요.”공태준운 민도준의 손길 때문에 빨갛게 달아오른 권하윤의 얼굴을 보며 한참 동안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전에 공씨 저택에서 지낸 적 있는 권하윤은 공태준이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공태준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하지만 술잔을 오랫동안 들고 있어 파르르 떨리는 권하윤의 손을 보자 끝내 말없이 술잔을 받아 들었다.공태준은 술을 바로 마시지 않고 권하윤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마셨으면 좋겠어요?”그 말에 가뜩이나 굳어 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상상력을 자극하는 한마디에 권하윤은 민도준의 표정을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했다.그제야 공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이윽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술잔을 옅은 색을 띤 입술에 갖다 대더니 목울대를 꿀렁이며 액체를 모두 입안으로 삼켜버렸다. 억지로 먹는 술이었지만 공태준의 자태는 여전히 고고하고 품위를 잃지 않았다.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마셔버린 빈 잔을 공태준은 탕하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심지어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도 공태준의 얼굴이 창백해진 걸 보아낼 수 있었다.“하.”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민도준은 상이라도 주듯 권하윤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내가 말했지? 하윤 씨의 말에 힘이 있다고.”민도준은 억지로 버티고 있는 공태준을 힐끗 바라보더니 말을 보충했다.“공 가주도 잔을 비웠는데 하윤 씨가 안 마시면 실례 아닌가? 얼른 한잔해.”권하윤은 오늘 일을 쉽게 넘어가리라 생각한 적이 없었기에 이을 악물며 술잔을 입에 댔다. 하지만 때마침 독한 술 때문에 반쯤 잠긴 목소리가 맞은 편에서 울려 퍼졌다.“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대신 마실게요.”민도준은 볼을 살짝 짓씹으면서 흥미로운 듯 공태준을 바라봤다.“오, 공 가주가 이토록 여자를 아끼는 사람인 줄은 몰랐
민도준의 말을 들어보니 권하윤이 방금 공태준한테 부탁을 하는 모습을 본 게 틀림없었다.그렇다는 건 권하윤이 성은우 때문에 자기한테 부탁할 거라는 걸 공태준도 알고 일부러 여기로 불러냈다는 뜻이다.더욱이 성은우가 민도준에게는 자기보다 더 한 자극제가 될 거라는 걸 공태준도 알고 있었다는 의미고.‘참 머리 굴리느라 애썼네. 나한테 USB를 넘겨줘서 도준 씨와의 관계를 이간질하고, 식사를 빌미로 나를 불러내 내가 성은우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도준 씨한테 각인시켜 주고.’오늘의 일은 거짓 명제나 다름없었다. 이 모든 게 성은우를 위해서라고 설명하든 아니면 설명하지 않고 공태준과 밀회를 가진 게 사실이라고 인정하든 권하윤에게 열리는 길은 지옥길 뿐일 테니.답을 깨달은 권하윤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났다.공태준은 사람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조종하고 약점을 너무나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그런 사람에게 감시를 받는 다고 생각하니 악몽을 꾸는 것만 같았다.권하윤이 침묵하는 동안 살짝 말아 올렸던 민도준의 입꼬리는 점차 싸늘한 호를 그렸다.그러한 변화는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최수인마저 똑똑히 보아냈다.방금 전, 권하윤이 다른 남자 때문에 민도준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둘째 치고 권하윤이 그걸 부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잠시 머리를 굴리던 최수인은 자기한테 피가 튀기기라도 할까 봐 얼른 입을 열었다.“저, 우리 이웃집 고양이가 오늘 마침 새끼를 낳는 날이라서 내가 도와주러 가야 해. 둘이 천천히 마셔. 나는 먼저 가볼게!”최수인마저 사라지자 마지막 한 스푼의 활기마저 사라져 버렸다.“도준 씨…….”권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도준은 술병을 들어 자기 잔을 채줬다.곧이어 민도준이 술을 담은 잔을 입가에 갖다 대는 모습을 보자 권하윤은 얼른 막아섰다.“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는데 술 마시면 안 돼요.”민도준은 자기 손목을 곡 잡고 있는 작은 손을 보면서 피식 웃더니 잔을 내려놓았다.“난 안 마셔도 돼. 그러면 하윤 씨가 나한
이 말을 권하윤은 전에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목숨을 부지하려는 생각에 거짓을 말한지라 말하고 난 뒤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었다.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뱉어내는 거였다. 오직 자기 마음을 꽉 채운 눈앞의 사람을 위해.하지만 진심을 담은 절절한 사랑 고백에도 민도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둠이 깃든 눈동자는 진심을 알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권하윤의 정수리에서부터 점점 아래로 흘러내리며 긴장감에 파르르 떨리는 권하윤의 눈을 바라봤다.이윽고 권하윤의 뒤통수를 감싸고 있던 손을 앞으로 확 당기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날 사랑해서 죽으려 했다고?”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 사고 회로가 멈춘 권하윤은 닭 모이 쫓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민도준의 눈에 유쾌함이 더해지더니 몸을 아래로 살짝 숙였다.그러다 권하윤이 무의식적으로 눈을 깜은 순간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내가 그렇게 좋아?”사람의 마음을 살살 건드리는 듯한 숨결에 권하윤의 귀는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하지만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지키려는 듯 권하윤은 고개를 피하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뭐, 그럭저럭 괜찮긴 해요.”“괜찮긴 하다고? 그렇다면 내가 더 노력해야겠는데?”순간 발이 바닥에서 붕 뜨더니 순간 익숙하고도 위험한 자세로 바뀌었다.이에 권하윤은 놀란 듯 민도준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이러지 마요. 밖에 사람 있어요.”“이쯤 되면 다들 사람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로 취해 있을 거야. 하윤 씨가 누군지 아무도 신경 안 써.”민도준은 주위의 환경을 신경 쓰지 않은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권하윤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민도준의 동작에 놀라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하지만 이 상황에 자기가 거절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저 소리 안 낼 자신 없어요.”권하윤은 민도준의 팔을 끌어안은 채 살살 흔들며 애교를 부리더니 이윽고 손가락으로 민도준의 팔뚝에 선을 그리며 말
신선한 공기와 남자의 장난스러운 눈빛이 함께 덮쳐오자 권하윤의 상기된 얼굴을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그건 도준 씨가 억지로 한 거잖아요.”“내가 억지로 했다고?”손가락으로 권하윤의 볼을 톡 치며 민도준이 입을 열었다.“빠르다 늦다 하면서 찡찡거린 게 누군데? 내가 변속기라도 되는 줄 알아? 응?”“그만 말해요!”권하윤은 손을 뻗어 헛소리를 내뱉는 민도준의 입을 막아버렸다.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에 전해지자 권하윤은 마치 뭐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손을 뒤로 뺐다. 하지만 움직이려는 순간 손목이 꽉 잡혀버리고 말았다.잇따라 가벼운 입맞춤이 손바닥에 떨어지는 바람에 권하윤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감전이라도 된 듯 손을 뒤로 뺐다.“뭐 하는 거예요?”“손이 차가워 보여서 녹여주고 있었지.”확실히 민도준 덕분에 차갑던 손이 어느새 후끈거렸다.돌아가는 길에 권하윤은 잠이 솔솔 몰려왔지만 민도준이 너무 갑자기 너무 너그럽게 변한 게 조마조마=해서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그러다가 세 번째로 민도준을 훔쳐봤을 때, 권하윤의 “범행”은 완전히 발각되고 말았다.“또 무슨 꿍꿍이야?”“아니에요…….”권하윤은 뭔가 찔리기라도 하는 듯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이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더 이상 관계치 않고 권하윤이 혼자 삽질을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그런데 그때 권하윤이 결국 참지 못했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도준 씨, 왜 저한테 화 안 내세요?”민도준은 핸들을 돌리며 느긋하게 물었다.“왜 화를 내야 하는데?”“오늘 제가 몰래 나와서 공태준과 만났잖아요…….”“하윤 씨가 내 심기 건드린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이제 화내는 것도 귀찮아.”민도준은 분명 귀찮은 듯 말했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권하윤의 가슴에는 따뜻한 물결이 일렁였다. 민도준이 용서를 하는 눈치니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러면 은우를 데려오면 안 돼요? 은우가 지금 다쳐서 걱정…….”뒤의 말은 민도준이 보내온 날카로운 눈빛 때문에 자
두 다리를 겨우 침대 위에 올려놓았을 그때, 긴 손가락이 권하윤의 이마를 쭉 밀었다.“뭐야?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거야?”민도준의 비웃음 섞인 눈빛에 권하윤의 가슴은 불안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그게 무슨 말…… 아…….”목이 조이더니 권하윤은 한순간 민도준 앞으로 끌려갔다.“아주 대단해. 나를 살살 달랜 뒤 그 개자식을 위해 사정해 보려고? 많이 발전했네.”권하윤은 순간 멈칫했다. 민도준이 자기를 이렇게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아니에요. 저 정말…….”“정말 나를 좋아한다고?”살짝 올라간 끝 음에는 비아냥거림이 배어있었지만 정작 말하는 민도준의 표정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이게 양치기 소년의 말로인가?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해서 이젠 도준 씨가 더 이상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아.’이런 자각이 들자 권하윤은 풀이 죽어 눈을 내리깔았다.“도준 씨가 싫다면 못 들은 거로 하세요. 그럼 방해하지 않을 테니 편히 휴식…….”마지막 한 마디를 채 끝맺지 못했는데 민도준이 갑자기 권하윤의 먹을 조이며 음침한 목소리를 냈다.“왜? 내가 안 도와주니까 이젠 잘 보일 필요도 없다 이거야?”말을 할 수 없게 되자 권하윤은 그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민도준의 눈에는 그저 속내를 감추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권하윤의 목을 조르고 있는 손에 핏줄이 불룩 튀어나왔다. 그 한줄기 한줄기가 모두 답답한 가슴에서부터 나온 조울함이었다.독기를 품은 목소리는 모래를 삼킨 듯 귀에 거슬렸다.“자, 어디 말해 봐. 나한테 이렇게 다시 들러붙는 게 진짜 후회해서인지? 아니면 그 개자식을 위해서인지?”목을 조였던 힘이 조금 풀렸지만 여전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권하윤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거짓말 아니에요. 진심이에요.”“아하, 진심이다?”민도준의 입꼬리는 의미심장한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그러면 성은우 그 자식이 죽든 살든 앞으로 상관하지 말라고 하면 할 수 있겠어?”다급하게 오해를 풀려고 애를 쓰던 얼굴이 순간 굳
권하윤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촉촉한 눈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그 눈빛 때문이었을까? 민도준의 입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왜 그런 표정인데? 내가 불쌍해주기라도 했으면 하는 거야?”“아니에요…….”목구멍으로 흘러나오는 가냘픈 목소리에는 콧소리가 조금 섞여 있었다.“제가 잘못했으니 도준 씨가 화내는 것도 당연해요.”민도준의 눈은 순간 어두워졌다.“아-”이윽고 외마디 비명이 들리더니 권하윤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침대에서 내팽채쳐졌다.바닥의 카펫 덕에 고통을 덜했지만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 피어올랐다.고개를 들고 민도준을 빤히 바라봤지만 권하윤은 민도준이 뭘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눈을 내리깐 채 보내오는 시선이 마치 공기를 내리누르는 것처럼 무겁다는 것만 느껴질 뿐.그 눈빛을 받으며 한참을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민도준이 몸을 살짝 앞으로 젖히며 허리를 숙인 채 권하윤을 바라봤다.“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 첫째, 오늘부터 성은우가 죽든 살든 상관하지 마. 그러면 예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을게. 둘째, 여기서 당장 꺼지고 다시는 내 앞에서 알짱대지 마. 선택해 봐.”두 가지 선택지는 마치 두 사람처럼 권하윤을 양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만약 민도준을 선택한다면 권하윤이 공태준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이번에는 그저 안전 로프에 문제가 생겨났지만 다음에는? 다음에는 또 어떤 문제가 생겨나면 어떡하지?’‘하지만 만약 성은우를 선택하면 민도준을 포기해야 하는데…….’아무리 생각해도 선택할 수 없자 권하윤은 자기 손을 민도준의 무릎에 살폿이 올려놨다.“화내지 마요. 저랑 은우는 정말 그저 단순한 친구예요.”그 말에도 민도준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오롯이 저를 바라보는 권하윤을 빤히 쳐다봤다.순간 권하윤은 가슴이 착잡해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선택일까 생각하고 있을 때, 손 아래에 닿던 감각이 사라지더니 민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린 채 담배를 입에 물
맨 처음에는 권희연이 잠시 밖으로 산책하러 간 줄 알았지만 텅 빈 권희연의 방을 보는 순간 로건은 뭔가 잘못됐음을 인지했다. 그 시각, 로건의 커다란 뒤태는 여느 때보다 작아보였다.때마침 침대 머리맡에 놓인 쪽지와 그 위에 놓인 열쇠 꾸러미가 눈에 들어와 권하윤은 이내 그것을 집어 들었다.[로건 씨, 저한테 살 수 있는 용기를 줘서 고마워요. 로건 씨는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이기에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요, 잘 있어요.]쪽지를 본 순간부터 한참 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로건의 모습에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로건 씨, 괜찮아요?”그제야 로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하윤 씨, 희연 씨가 한 말 무슨 뜻이에요? 저를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도 했으면서 왜 떠난대요?”“어…….”맑지만 영혼이 없는 것만 같은 로건의 눈을 보자 권하윤은 차마 직설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아마도 희연 언니는 로건 씨가 자기보다 더 좋은 사람을 찾길 바라나 봐요.”“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요. 희연 씨가 제일 좋은데.”로건의 진심 어린 중얼거림에 권하윤은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이윽고 핑계를 대고 화장실로 들어와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권희연이 대체 어떤 생각인지 물어야 했다. 만약 권희연 본인이 로건과 함께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대신 로건한테 분명히 말해줘야 했으니까.하지만 권희연의 전화는 꺼져있었다.‘뭐지? 희연 언니한테 무슨 일 생긴 건가?’눈살을 팍 구긴 권하윤은 끝내 화장실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을 열기 바쁘게 로건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민 사장님, 어떡해요? 희연 씨가 없어졌어요!”“하, 없어졌으면 가서 찾으면 될 거 아니야. 찾고 나서 뇌과에서 머리도 좀 검사하면 좋고.”“아, 그렇지!”로건은 앞 문장만 듣고는 감탄하더니 또다시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어디 가서 찾아요?”그러다가 갑자기 권하윤이 나온 걸 발견하고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하윤 씨는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