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권하윤은 전에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목숨을 부지하려는 생각에 거짓을 말한지라 말하고 난 뒤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었다.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뱉어내는 거였다. 오직 자기 마음을 꽉 채운 눈앞의 사람을 위해.하지만 진심을 담은 절절한 사랑 고백에도 민도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둠이 깃든 눈동자는 진심을 알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권하윤의 정수리에서부터 점점 아래로 흘러내리며 긴장감에 파르르 떨리는 권하윤의 눈을 바라봤다.이윽고 권하윤의 뒤통수를 감싸고 있던 손을 앞으로 확 당기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날 사랑해서 죽으려 했다고?”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 사고 회로가 멈춘 권하윤은 닭 모이 쫓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민도준의 눈에 유쾌함이 더해지더니 몸을 아래로 살짝 숙였다.그러다 권하윤이 무의식적으로 눈을 깜은 순간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내가 그렇게 좋아?”사람의 마음을 살살 건드리는 듯한 숨결에 권하윤의 귀는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하지만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지키려는 듯 권하윤은 고개를 피하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뭐, 그럭저럭 괜찮긴 해요.”“괜찮긴 하다고? 그렇다면 내가 더 노력해야겠는데?”순간 발이 바닥에서 붕 뜨더니 순간 익숙하고도 위험한 자세로 바뀌었다.이에 권하윤은 놀란 듯 민도준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이러지 마요. 밖에 사람 있어요.”“이쯤 되면 다들 사람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로 취해 있을 거야. 하윤 씨가 누군지 아무도 신경 안 써.”민도준은 주위의 환경을 신경 쓰지 않은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권하윤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민도준의 동작에 놀라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하지만 이 상황에 자기가 거절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저 소리 안 낼 자신 없어요.”권하윤은 민도준의 팔을 끌어안은 채 살살 흔들며 애교를 부리더니 이윽고 손가락으로 민도준의 팔뚝에 선을 그리며 말
신선한 공기와 남자의 장난스러운 눈빛이 함께 덮쳐오자 권하윤의 상기된 얼굴을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그건 도준 씨가 억지로 한 거잖아요.”“내가 억지로 했다고?”손가락으로 권하윤의 볼을 톡 치며 민도준이 입을 열었다.“빠르다 늦다 하면서 찡찡거린 게 누군데? 내가 변속기라도 되는 줄 알아? 응?”“그만 말해요!”권하윤은 손을 뻗어 헛소리를 내뱉는 민도준의 입을 막아버렸다.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에 전해지자 권하윤은 마치 뭐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손을 뒤로 뺐다. 하지만 움직이려는 순간 손목이 꽉 잡혀버리고 말았다.잇따라 가벼운 입맞춤이 손바닥에 떨어지는 바람에 권하윤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감전이라도 된 듯 손을 뒤로 뺐다.“뭐 하는 거예요?”“손이 차가워 보여서 녹여주고 있었지.”확실히 민도준 덕분에 차갑던 손이 어느새 후끈거렸다.돌아가는 길에 권하윤은 잠이 솔솔 몰려왔지만 민도준이 너무 갑자기 너무 너그럽게 변한 게 조마조마=해서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그러다가 세 번째로 민도준을 훔쳐봤을 때, 권하윤의 “범행”은 완전히 발각되고 말았다.“또 무슨 꿍꿍이야?”“아니에요…….”권하윤은 뭔가 찔리기라도 하는 듯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이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더 이상 관계치 않고 권하윤이 혼자 삽질을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그런데 그때 권하윤이 결국 참지 못했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도준 씨, 왜 저한테 화 안 내세요?”민도준은 핸들을 돌리며 느긋하게 물었다.“왜 화를 내야 하는데?”“오늘 제가 몰래 나와서 공태준과 만났잖아요…….”“하윤 씨가 내 심기 건드린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이제 화내는 것도 귀찮아.”민도준은 분명 귀찮은 듯 말했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권하윤의 가슴에는 따뜻한 물결이 일렁였다. 민도준이 용서를 하는 눈치니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러면 은우를 데려오면 안 돼요? 은우가 지금 다쳐서 걱정…….”뒤의 말은 민도준이 보내온 날카로운 눈빛 때문에 자
두 다리를 겨우 침대 위에 올려놓았을 그때, 긴 손가락이 권하윤의 이마를 쭉 밀었다.“뭐야?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거야?”민도준의 비웃음 섞인 눈빛에 권하윤의 가슴은 불안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그게 무슨 말…… 아…….”목이 조이더니 권하윤은 한순간 민도준 앞으로 끌려갔다.“아주 대단해. 나를 살살 달랜 뒤 그 개자식을 위해 사정해 보려고? 많이 발전했네.”권하윤은 순간 멈칫했다. 민도준이 자기를 이렇게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아니에요. 저 정말…….”“정말 나를 좋아한다고?”살짝 올라간 끝 음에는 비아냥거림이 배어있었지만 정작 말하는 민도준의 표정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이게 양치기 소년의 말로인가?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해서 이젠 도준 씨가 더 이상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아.’이런 자각이 들자 권하윤은 풀이 죽어 눈을 내리깔았다.“도준 씨가 싫다면 못 들은 거로 하세요. 그럼 방해하지 않을 테니 편히 휴식…….”마지막 한 마디를 채 끝맺지 못했는데 민도준이 갑자기 권하윤의 먹을 조이며 음침한 목소리를 냈다.“왜? 내가 안 도와주니까 이젠 잘 보일 필요도 없다 이거야?”말을 할 수 없게 되자 권하윤은 그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민도준의 눈에는 그저 속내를 감추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권하윤의 목을 조르고 있는 손에 핏줄이 불룩 튀어나왔다. 그 한줄기 한줄기가 모두 답답한 가슴에서부터 나온 조울함이었다.독기를 품은 목소리는 모래를 삼킨 듯 귀에 거슬렸다.“자, 어디 말해 봐. 나한테 이렇게 다시 들러붙는 게 진짜 후회해서인지? 아니면 그 개자식을 위해서인지?”목을 조였던 힘이 조금 풀렸지만 여전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권하윤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거짓말 아니에요. 진심이에요.”“아하, 진심이다?”민도준의 입꼬리는 의미심장한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그러면 성은우 그 자식이 죽든 살든 앞으로 상관하지 말라고 하면 할 수 있겠어?”다급하게 오해를 풀려고 애를 쓰던 얼굴이 순간 굳
권하윤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촉촉한 눈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그 눈빛 때문이었을까? 민도준의 입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왜 그런 표정인데? 내가 불쌍해주기라도 했으면 하는 거야?”“아니에요…….”목구멍으로 흘러나오는 가냘픈 목소리에는 콧소리가 조금 섞여 있었다.“제가 잘못했으니 도준 씨가 화내는 것도 당연해요.”민도준의 눈은 순간 어두워졌다.“아-”이윽고 외마디 비명이 들리더니 권하윤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침대에서 내팽채쳐졌다.바닥의 카펫 덕에 고통을 덜했지만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 피어올랐다.고개를 들고 민도준을 빤히 바라봤지만 권하윤은 민도준이 뭘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눈을 내리깐 채 보내오는 시선이 마치 공기를 내리누르는 것처럼 무겁다는 것만 느껴질 뿐.그 눈빛을 받으며 한참을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민도준이 몸을 살짝 앞으로 젖히며 허리를 숙인 채 권하윤을 바라봤다.“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 첫째, 오늘부터 성은우가 죽든 살든 상관하지 마. 그러면 예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을게. 둘째, 여기서 당장 꺼지고 다시는 내 앞에서 알짱대지 마. 선택해 봐.”두 가지 선택지는 마치 두 사람처럼 권하윤을 양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만약 민도준을 선택한다면 권하윤이 공태준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이번에는 그저 안전 로프에 문제가 생겨났지만 다음에는? 다음에는 또 어떤 문제가 생겨나면 어떡하지?’‘하지만 만약 성은우를 선택하면 민도준을 포기해야 하는데…….’아무리 생각해도 선택할 수 없자 권하윤은 자기 손을 민도준의 무릎에 살폿이 올려놨다.“화내지 마요. 저랑 은우는 정말 그저 단순한 친구예요.”그 말에도 민도준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오롯이 저를 바라보는 권하윤을 빤히 쳐다봤다.순간 권하윤은 가슴이 착잡해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선택일까 생각하고 있을 때, 손 아래에 닿던 감각이 사라지더니 민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린 채 담배를 입에 물
맨 처음에는 권희연이 잠시 밖으로 산책하러 간 줄 알았지만 텅 빈 권희연의 방을 보는 순간 로건은 뭔가 잘못됐음을 인지했다. 그 시각, 로건의 커다란 뒤태는 여느 때보다 작아보였다.때마침 침대 머리맡에 놓인 쪽지와 그 위에 놓인 열쇠 꾸러미가 눈에 들어와 권하윤은 이내 그것을 집어 들었다.[로건 씨, 저한테 살 수 있는 용기를 줘서 고마워요. 로건 씨는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이기에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요, 잘 있어요.]쪽지를 본 순간부터 한참 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로건의 모습에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로건 씨, 괜찮아요?”그제야 로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하윤 씨, 희연 씨가 한 말 무슨 뜻이에요? 저를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도 했으면서 왜 떠난대요?”“어…….”맑지만 영혼이 없는 것만 같은 로건의 눈을 보자 권하윤은 차마 직설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아마도 희연 언니는 로건 씨가 자기보다 더 좋은 사람을 찾길 바라나 봐요.”“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요. 희연 씨가 제일 좋은데.”로건의 진심 어린 중얼거림에 권하윤은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이윽고 핑계를 대고 화장실로 들어와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권희연이 대체 어떤 생각인지 물어야 했다. 만약 권희연 본인이 로건과 함께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대신 로건한테 분명히 말해줘야 했으니까.하지만 권희연의 전화는 꺼져있었다.‘뭐지? 희연 언니한테 무슨 일 생긴 건가?’눈살을 팍 구긴 권하윤은 끝내 화장실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을 열기 바쁘게 로건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민 사장님, 어떡해요? 희연 씨가 없어졌어요!”“하, 없어졌으면 가서 찾으면 될 거 아니야. 찾고 나서 뇌과에서 머리도 좀 검사하면 좋고.”“아, 그렇지!”로건은 앞 문장만 듣고는 감탄하더니 또다시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어디 가서 찾아요?”그러다가 갑자기 권하윤이 나온 걸 발견하고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하윤 씨는 아세요?”
로건은 원래도 좁은 공간을 꽉 메웠다. 하지만 덩치에 맞지 않게 권희연을 보는 순간 마치 어린애라도 되는 듯 잔뜩 긴장했다.“희연 씨, 저…… 제가 혹시 자는 데 방해했나요?”“희연 씨는 잠 못 자면 입맛 없어 했었는데, 제가 아침에 따뜻한 콩물 사다 줄게요!”때아닌 말을 중얼거리는 로건의 모습에 권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눈시울이 붉어진 권희연이 살짝 흐느끼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저 이제 로건 씨 집에서 살지도 않는데 사 올 필요 없어요.”“네? 그러면 뭘 드시고 싶어요?”로건은 권희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화제가 점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자 권하윤이 이내 끼어들었다.“언니, 로건 씨는 언니한테 왜 집에서 나갔는지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아, 맞아요!”그제야 로건은 잠에서 번쩍 깬 것처럼 커다란 손으로 바지를 쓱쓱 문지르며 권희연을 바라봤다.“제가 뭐 잘못했나요? 그러면 알려주세요. 제가 꼭 고칠게요!”“아니에요. 로건 씨는 잘못한 거 없어요.”권희연은 눈을 내리깔며 눈동자에 드리운 슬픔을 애써 감췄다.“로건 씨가 너무 좋아서 더 좋은 여자를 만났으면 해서 그랬어요. 저 같은 여자는 그저 로건 씨를 역겹게 할 뿐이에요.”“역겹다니요?” 제가 언제 역겹다고 했는데요? 제가 왜 역겨워하겠어요?”로건은 어리둥절했다.“저 위로할 필요 없어요.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제 방에서 같이 자지 않고 저랑 닿기만 하면 피하는데요?”권희연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저 다 이해해요. 저한테 그런 과거가 있으니…….”“아니! 아니에요!”오해를 받은 로건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이를 악물며 해명했다.“제…… 제가 희연 씨랑 같이 있으면 자꾸만 더러운 상상을 하는 걸 참을 수 없어서 그랬어요!”“희연 씨가 처음 우리 집에 들어온 날 밤부터 제가 자꾸만 이상한 꿈을 꿔서, 그게 희연 씨한테 모욕일 것 같아서, 참지 못하고 실수할까 봐 그런 거예요!”권희연을 설득하려고 따라왔던 권하윤은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한
조각품을 닦고 있던 민용재는 일순 동작을 멈추더니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말 하나는 참 잘한다니까.”“그런가요?”이제 더 이상 욕심도 뭣도 없는 권하윤은 더 이상 겉치레적인 예의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다.그 말에 민용재는 눈빛만 살짝 어두워질 뿐 전혀 영향받지 않은 눈치였다.“보는 눈은 있어. 민도준이 민승현보다야 확실히 낫긴 하지. 그런데 말이야…….”말끝을 길게 늘어트리며 권하윤을 바라보는 눈빛에 싸늘한 빛이 서렸다.“뭐든 자기 손에 꼭 쥐고 있어야 진짜 가치가 있는 거지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쨍그랑”순간 비취 조각품이 바닥에 떨어졌다.“손에 쥐지 못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나 마찬가지야.”권하윤은 산산조각 난 비취 조각품을 아쉬운 듯 바라봤다.‘쯧, 참 물건 아낄 줄 모르네.’하지만 민용재의 말이 조금 의외였다. 민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자기와 민도준의 관계를 안 좋게만 생각할 줄 알았는데 말을 들어보니 오히려 자기를 응원하는 듯했으니까.이에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죠?”“민도준이 하윤 씨를 진짜로 좋아하든 아니면 하윤 씨를 이용해 집안사람들 신경을 긁든 간에 민씨 가문 다섯째 작은 사모님 신분으로 민도준한테 붙어 있으려 한다면 우리 영감이 제일 먼저 반대할 거야. 물론 때를 기다릴 수는 있지만, 그 사이 민도준이 하윤 씨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면 어떡하려고?”권하윤은 민용재의 암시를 순간 알아들었다.“그러니까 지금 큰 숙부님께서 제가 민도준 씨와 결혼하는 걸 도와주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면 우선 감사드립니다.”하지만 이토록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민용재의 얼굴을 순간 어두워졌다.“젊은 사림이 왜 모르나? 인정은 오고 가는 거란 걸.”“큰 숙부님의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저는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는지라 도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민용재는 권하윤의 거절에 조금도 놀라지 않은 듯 냉소했다.“내일이면 그 마음이 바뀔 거야.”“그렇다면 내일 다시 얘기합시다.”권하윤의
다들 오롯이 민상철과 민도준의 빈자리를 번갈아 주시할 뿐 상다리가 부러질 듯 차려진 진수성찬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그렇게 침묵만 흐르던 그때, 민재혁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도준이도 저택에 있다면서 왜 또 늦는대요?”그 뒤에 이어지는 말을 권하윤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그저 민도준도 여기에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려 무의식적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할 뿐.그러다 이내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순간 저도 우스웠는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이제 내 목소리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인데, 내가 무슨 옷을 입든 상관이나 하겠어?’혼자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문밖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다.민도준이 온 건 아닌가 해서 고개를 홱 돌린 순간, 권하윤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들어온 사람은 민도준이 아니라 민승현이었다.민승현은 두 메이드의 부축을 받으며 어렵사리 거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승현아, 오늘 막 퇴원했으면서 왜 왔어?”강수연은 걱정됐는지 곧바로 아들에게 달려갔다.이이에 자리에 앉은 민승현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권하윤을 보더니 싸늘한 눈빛을 번뜩이더니 점잖게 입을 열었다.“저 괜찮아요.”상석에 앉아 있던 민상철의 눈빛도 자연스레 민승현에게 쏠렸다.“승현아, 몸 아직 낫지 않았는데 뭐 하러 나오고 그래?”“도준 형이 큰 사고를 당하고도 살아 돌아왔다고 하는데 동생이 되어서 축하하러 와야죠.”모래가 섞인 것처럼 잠겨 있는 목소리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만약 예전 같았으면 민승현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권하윤과 민도준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게 밝혀진 뒤라 그런지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흥미를 자극했다.심지어 민상철마저 놀란 듯한 눈빛으로 민승현을 바라봤다.예전의 민승현은 그저 모든 정서를 얼굴에 드러내는 가볍고도 무능력한 재벌 집 도련님이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진중해진 모습이었다.“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니 기특하네.”민상철은 만족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다가 주위를 빙 둘러보더니 사람이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