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불쌍한 눈빛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죄송해요. 제가 도준 씨한테 잘못했다는 거 알아요.”민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권하윤이 또 뭘 하려는지 조용히 지켜봤다.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권하윤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래서 결심했어요. 도준 씨를 잘 돌보면서 보상해 줄게요. 오늘부터 시작하면 되겠네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권하윤은 쪼르르 달려가서 이불을 침대 시트를 갈고 이불을 펴더니 활기찬 목소리로 민도준을 불렀다.심지어 옷소매를 쓱 걷어 올린 채 작은 손으로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도준 씨, 이불 폈으니까 이제 눕기만 하면 돼요.”민도준은 혀로 볼을 꾹 밀면서 흥미로운 눈빛을 드러냈다.‘하, 이런 같잖은 핑계까지 생각해 내다니, 참 뻔뻔하네.’하지만 권하윤은 결코 겉으로 보여준 것처럼 침착하지 않았다. 작은 손으로 이불을 꽉 움켜쥔 채 애써 티를 내고 있지 않을 뿐.죄책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기만 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차라리 뻔뻔하게 옆에 딱 붙어 도준 씨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마음이 더 편해.’생각은 쉬웠지만 행동에 옮기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특히 민도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강박적인 눈빛으로 지켜보기만 하니 긴장감은 배가 됐다.민도준이 거절하거나 그대로 자기를 밖으로 던져버릴까 봐.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민도준을 잡아끌면서 권하윤은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도준 씨, 피곤하죠? 얼른 자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몸에 좋아요.”심지어 팔을 흔들면서 은근슬쩍 애교를 부리더니 손가락으로 민도준의 손바닥을 살살 긁어댔다.민도준은 권하윤에게 잡힌 손을 들어 올리며 자기를 칭칭 감고 있는 권하윤의 손까지 함께 잡아당겼다.“나 돌봐주겠다고?”권하윤은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의 진정성을 표현하려고 애썼다.“좋아. 그렇다면 남아.”웬일인지 민도준은 쉽게 동의했다.이에 권하윤은 눈을 반짝이더니 민도준이 말을 다시 무르기라
언제 깨어났는지 모를 민도준을 보자 권하윤은 코끝이 찡해났다. 민도준의 팔은 권하윤보다 빨리 그녀를 품에 감아 안았다.곧이어 흐느낌 소리가 민도준의 팔 사이에서 흘러나왔다.“도준 씨, 아직도 많이 아파요?”하지만 권하윤은 민도준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흐느끼는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피까지 토했는데 당연히 아프겠죠.”이 순간만큼 권하윤은 머리를 굴리며 교활하게 굴던 모습을 던져버리고 진심으로 구슬프게 울었다.그 때문에 잠에서 깬 민도준은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 우습기도 해서 손을 뻗어 권하윤을 자기 품속에 끌어들였다.“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울어?”속눈썹은 촉촉하게 젖어 파르르 떨릴 때마다 눈물을 뚝뚝 떨구는 권하윤의 모습은 가엾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흐느끼다 못해 뭉개진 발음으로 애써 한 마디를 토해냈다.“이제 저 미워진 거죠?”민도준은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눈물을 닦아내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응.”그 소리에 권하윤은 더 구슬피 울면서 민도준을 끌어안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흑흑, 저도 제가 미워요.”“됐어. 그만 뚝 그쳐.”민도준은 인내심 있게 말하며 권하윤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그때 권하윤이 고개를 들더니 불쌍한 얼굴로 물었다.“그러면 저 여기서 자도 돼요?”눈물범벅이 된 얼굴은 서러움에 잔뜩 부풀어 올라 거절하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하지만 그 몇 초간 멈칫하는 동안 권하윤은 어느새 이불 안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었다.이윽고 가장 안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눕더니 손가락으로 가운데에 선을 그으며 자기 구역을 만들었다.“저 요만큼만 차지할게요. 절대 도준 씨 잠 방해 안 할게요.”민도준은 더 이상 권하윤과 말다툼하기 귀찮았는지 얼른 자리에 누웠다.공기 속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점차 맑아지는 하늘 때문에 커튼 사이로 스며든 빛이 마침 민도준 얼굴에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권하윤은 조용히 민도준의 얼굴 윤곽을 눈에 새겼다.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다 보니 권하윤은 불안한 듯 몸을 움직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할아버지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제수씨가 인사를 드리는데 왜 욕을 하고 그러세요? 노망나신 것도 아니고.”“민도준! 너…… 콜록콜록…….”“할아버지, 괜찮으세요?”민시영은 몸을 반쯤 웅크리고 앉아 민상철의 등을 두드렸다.한편, 권하윤이 멀뚱멀뚱 서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을 때, 민도준이 손을 흔들었다.“이리 와.”권하윤이 움직이기도 전에 민상철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왔다.이런 상황에서 민도준의 곁에 다가가는 게 좋지 않은 선택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권하윤은 민도준의 말을 거역하고 싶지 않았기에 무거운 눈을 딱 감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러자 민도준은 사람들 앞이라는 걸 개의치 않는 듯 권하윤을 품속으로 끌어들였다.“우리 소리에 깬 거야?”권하윤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어젯밤 늦게 잠들었으면서 더 자지 않고 뭐 하러 벌써 깨났어?”다들 성인이었기에 이 이상야릇한 한마디에 담긴 뜻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적이 없는 권하윤은 억울한 나머지 당장이라도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아니나 다를까, 그 말 한마디에 민상철의 눈빛은 한층 어두워졌다. 심지어 옆에 있던 민용재마저 뭔가를 알아내려는 듯한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왔다.순간 권하윤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두려워서라기보다는 민도준의 안위가 걱정되어서였다. 민용재가 민도준을 보러 다급히 찾아온 건 절대 민도준을 관심해서가 아닐 테니까.‘설마, 도준 씨가 며칠 만에 회복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확인하러 온 건가?’그제야 권하윤은 민도준이 사람들 앞에서 이상야릇한 말을 한 게 자기를 놀리려는 목적뿐만 아니라 민용재에게 연막탄 작전을 펼치려는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생각을 정리하고 난 권하윤은 고개를 숙인 채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도준 씨도 어젯밤 늦게 잤으면서 오늘 빨리 깨났잖아요.”그 한마디에 겨우 숨을 돌린 민상철은 또다시 기침하기 시작했다.한편 눈썹을 치켜올린 민도준의 눈꼬리에서 미소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민도준은 여전히 나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안 된다고요? 제가 언제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허락받고 하는 거 봤어요?”민상철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지만 민도준은 여전히 광기를 숨기지 않았다.시선이 마주친 곳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고 일촉즉발 할 것만 같은 암류가 감돌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민상철은 끝내 시선을 거두었다.“너희들은 먼저 나가 있거라.”이건 민도준과 단독으로 얘기하겠다는 뜻이었다.문이 닫히자 권하윤의 마음은 더한층 불안해졌다.현재 민씨 가문 형제들의 권력다툼이 한창인 데다 민용재가 기회를 엿보며 민도준을 무너트리려고 하고 있는데 이럴 때 민상철과 척지는 건 너무나도 바보 같은 선택이다.권하윤이 한참 동안 마음졸이고 있을 그때, 갑자기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꺼내서 확인해 보니 성은우가 보내온 문자였다.일전에 뭔가 처리할 일이 있다면서 떠났으니 며칠간 소식이 없는 것도 정상이었다.하지만 이번에 성은우는 한번 만나자는 문자를 보내왔다.성은우는 좀처럼 먼저 찾아오는 적이 드물기에 권하윤은 뭔 일이 벌어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오후에 만나자고 바로 답장했다.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호주머니 안에 다시 넣은 그때, 권하윤은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눈빛을 느꼈다.고개를 돌아보니 민용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었다.별다른 표정이 없었지만 살갗을 뚫고 뼛속까지 파고들려는 듯한 눈초리에 권하윤은 불쾌감이 들었다.그때 권하윤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챘는지 민시영이 얼른 위로했다.“걱정하지 마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한창 말하고 있는 그때, 방안에서 민성철의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영아.”민시영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 사람의 대화는 이미 끝난 듯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민상철의 얼굴은 한 마디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는 밖으로 내지르지 못한 담담함 같은 거였다.심지어 권하윤을 보는 순간 민상철은 마치 파리라도
민도준은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어디 끝까지 참아 봐.”하지만 역시나 권하윤은 다음 순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민도준이 일어나 밖으로 향하는 걸 보자 “절대 말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긴 거다.“어디 가요?”민도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권하윤은 그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주인한테 버림받은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권하윤에게 단단히 붙잡힌 민도준은 손을 빼려고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하지만 어쩌겠는가? 권하윤의 눈에 민도준은 지금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기에 절대로 혼자 내보낼 리 없었다.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며 권하윤이 단 하루 만에 저지른 일을 열거했다.“내 잠을 방해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데 갑자기 뛰쳐나오고, 나한테 엉겨 붙어 일도 못하게 하는 게 하윤 씨가 말한 돌봄인가 봐? 응?”그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 권하윤은 끝내 손을 풀었다.“그건, 처음이라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죠.”민도준은 피식 웃었다.“그렇다면 경험 키워서 다시 와. 안 그랬다가 내 일을 망칠까 봐 두렵네.”“…….”눈앞에서 문이 닫히자 미움을 받은 권하윤은 한참 동안 풀이 죽어 있었다. 하지만 얼른 교훈을 섭취해 오늘은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그러다가 “간병인”이라는 신분마저 잃게 되면 안 되니까.때문에 권하윤은 이불을 안아 베란다에 펼쳐 놓고 햇볕 쬠을 했다. 물론 그다음은 없었지만 말이다…….솔직히 방은 매일 청소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에 권하윤이 할 일이 별로 없는 건 사실이었다.의식주에서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자 권하윤은 끝내 선물이라도 주기로 결심했다.그렇게 내린 결정이 바로 예쁜 잠옷을 사주는 거였다.쇼핑몰에서 한참을 구경하다가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자 권하윤은 쇼핑백을 들고 성은우와 약속한 공원으로 향했다.평일 오후라 그런지 공원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아 권하윤은 그늘 아래 벤치에서 성은우를 기다렸다.오후의 햇살이 나무에
권하윤은 공태준과 척지면 안 된다는 걸 속으로는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공태준을 마주할 때마다 아버지가 얼마나 비참하게 돌아가셨는지 자신과 가족들이 공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비굴하게 연명했는지 자꾸만 떠오르니까.새로운 신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공태준은 또다시 권하윤을 찾아내고 말았다. 심지어 좋아한다는 명분으로 새로운 삶마저 망가트리면서 말이다.하지만 공태준의 이런 태도가 저를 괴롭힐 때보다도 더 치 떨리도록 싫기만 하다.권하윤의 이러한 반응은 공태준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겉보기에는 분노가 가득했지만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권하윤은 민도준이 자기 신분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 하나뿐이다.바로 권하윤이 민도준을 좋아해서,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공태준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끝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말했잖아요, 당신은 이제 권하윤이라고. 해원으로 돌아가도 하윤 씨는 여전히 권하윤이에요.”이 말을 공태준은 일전에도 한 번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권하윤은 민도준이 사고를 당했다는 슬픔에 빠져 제대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하지만 이 순간 다시 해원으로 돌아가도 여전히 변함없다는 한마디를 듣자 권하윤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설마, 내가 새로운 신분으로 당신이랑 해원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거야?”“하윤 씨가 원한다면 신분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요.”공태준이 무엇을 원하는지 인지하자 순간 한기가 발밑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이런 꿍꿍이를 가지고 있던 거였어?’분노와 충격에 권하윤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아 다른 신분으로 살게 했으면서 다시 공씨 가문으로 데려가려고 한다고?’“절대 그럴 일은 없어!”권하윤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증오가 담겨 있었다.“내가 당신을 따라 해원으로 돌아가길 원한다고? 내가 죽거든 그렇게 해.”권하윤이 당연히 쉽게 동의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잔뜩 흥분한 권하윤의
공태준은 권하윤의 선택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USB의 가장자리가 피부에 움푹 파여 들어가면서 손바닥의 뼈를 꾹 눌러내는 순간 권하윤의 마음은 극도로 답답했다. 분명 공태준이 자기와 민도준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숨을 크게 들이쉰 권하윤은 다시 눈을 들어 공태준을 바라봤다. 그 차가운 눈빛은 공태준에 대한 혐오감이 짙게 배어 있었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화는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은우는 어때? 얼마나 다쳤는데?”“괜찮아요. 은우한테는 큰 부상도 아닐 테니까.”공태준은 낮은 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하지만 혼자 아프면 적적할 테니 친구가 병문안이라도 하면 더 빨리 낫겠죠.”권하윤의 입가에는 냉소가 번졌다.“지금 은우를 내세워 내가 당신이 친 함정에 자발적으로 빠지라는 건가?”“오해한 모양이네요. 내 말은 내가 이제 곧 해원으로 돌아가니 하윤 씨 대신 병문안 하겠다는 뜻이었어요.”이 소식에 권하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공태준이 해원으로 돌아간다고? 전에 한 짓이 있어서 당연히 나를 빼돌리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공태준이 갑자기 한 발짝 물러나자 권하윤은 오히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언제 가?”“내일 점심 11시.”‘시간까지 정해진 걸 보니 진짜인가 보네.’권하윤이 공태준을 위아래로 훑어 보고 있을 때 공태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늘 저녁 같이 식사 할 수 있나요?”그러더니 권하윤이 거절하기 전 한 마디를 더 보충했다.“은우가 오늘 마침 수술이 끝났을 거예요. 걱정되면 통화할 수 있게 해줄게요.”“수술? 무슨 수술? 대체 어떻게 다쳤는데?”“임무를 마치고 철수하는 과정에 안전 로프에 문제가 생겨 5층에서 떨어졌어요.”‘5층에서…….’‘떨어졌다고?’공태준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권하윤의 걱정은 배가 되었다.‘안돼, 은우가 괜찮다고 하는 거 직접 들어야겠어.’하지만 성은우의 전화기는
컴퓨터 화면 오른쪽 하단의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갔지만 마우스를 쥔 손은 여전히 화면에 뜬 USB 아이콘을 누르지 못한 채 원을 그렸다. 그러다가 끝내 용기를 낸 듯 누르려던 찰나, 맞은편에서 일부러 한껏 내리 깐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쁜이, 혼자 왔어? 오빠랑 같이 놀래?”고개를 들어 보니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한 듯한 남자가 테이블을 짚은 채 비스듬히 서서 한동안 다듬지 않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아니요.”딱 자르는 거절에 당연히 나가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남자는 오히려 넉살 좋게 권하윤의 옆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권하윤 쪽으로 쑥 내밀었다.“예쁜이, 뭐해?”버터 칠을 한층 한 듯한 말투에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아 권하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어, 예쁜이, 어디 가?”남자의 방해에 권하윤은 USB를 확인하려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어졌다.‘역시 이런 건 사적인 공간에서 봐야겠네.’밖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한 탓에 어느새 공태준과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권하윤은 택시를 잡아 공태준이 말한 바로 향했다.당연히 밀폐된 룸으로 예약이 되어 있는 줄 알았지만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권하윤의 생각과 달리 모두 부스로 되어 있었다.물론 매 테이블마다 펜스로 가려지기는 했지만 가까이만 걸어가면 안에 누가 앉아 있는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권하윤은 잔뜩 경계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왜 이런 곳으로 예약했어?”공태준은 테이블에 놓인 도수 낮은 칵테일 한잔을 권하윤 앞으로 밀며 입을 열었다.“하윤 씨가 나 경계하는 거 알아요.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아 할 것 같아서 더 편하게 있으라고 그랬어요.”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공태준의 모든 행동이 의심스럽다고 느껴졌기에 그가 건넨 칵테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물론 희미한 불빛 덕에 조금은 안전감이 생겼지만 이곳에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은우랑 통화하게 해준다고 했잖아. 지금 하게 해 줘.”“알겠어요. 그런데 은우의 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 먹으면서 기다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