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전날 밤, 민씨 가문 룰대로 혼자 제국 호텔 스위트 룸에서 보내게 된 권하윤은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설쳤다.몽롱한 정신으로 겨우겨우 잠들려고 할 때 벌써 날이 밝아왔다.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도착했을 때, 권하윤은 마치 솜 위에서 걸어 다니는 듯 현실감이 없었고 아침부터 가슴은 가꾸만 불안감에 콩닥거렸다.하지만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려는 찰나,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이내 선생님을 막아섰다.“이걸로 해주세요.하트 모양 목걸이를 권하윤의 목에 걸어주면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싱긋 웃었다.“이 목걸이가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나 봐요?”“약혼자가 선물해 준 거예요.”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권하윤이 대답했다.“아하, 어쩐지 예쁘네요.”“네.”거울 속의 권하윤은 손으로 펜던트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신부 화장을 곱게 한 덕에 창백하던 낯색은 어느 정도 가렸지만 얼굴에는 결혼하는 신부다운 기쁨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권하윤은 심지어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그저 영혼 없는 도자기 인형처럼 낯빛이 어두운 민승현의 팔짱을 끼고 문 앞에서 가식적인 미소로 하객들을 맞이한 기억밖에. 싱글벙글하며 보내오는 하객들의 축복에도 표정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하객이 거의 도착하여 홀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느 때처럼 장난기 섞인 목소리였다.“승현아, 축하해.”곧 죽기 직전 아드레날린이라도 몸에 주입한 것처럼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두근거렸다.날아갔던 영혼도 어느새 다시 주인의 몸을 찾은 듯했고 흐릿해진 눈빛이 점점 또렷해지며 느릿느릿 다가오는 민도준을 바라봤다.민도준은 심플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정장조차 입지 않았다.하지만 뭘 걸쳤든 나타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소란스럽던 주위도 어느새 조용해졌고, 이따금 서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조심하는 모양새였다.오직 민승현만 건들거리는 민도준을 보는 순간 눈에서 불을 내뿜었다.어
어쨌든 민승현도 민씨 가문의 일원이기에 그의 결혼식에 민씨 가문 식구가 모두 모였다.식장부터 응접실까지 레드카펫이 길게 깔려 있었고 응접실 맨 상석에는 민상철, 그리고 잇따라 촌수대로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권하윤은 먼저 집안의 가장 큰 어르신인 민상철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차를 받들고 공손하게 권했다.“할아버님, 차 드세요.”민상철은 고분고분한 권하윤을 흘깃 스쳐보더니 고개를 돌려 민도준을 바라봤다.삐딱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마치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한 자세는 권하윤의 결혼식을 별로 마음 쓰지 않는 듯했다.판을 망칠 의도가 없어 보이는 민도준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민상철은 염주를 빙빙 돌리다가 차를 받았다.“너도 이제는 우리 민씨 집안의 며느리가 됐구나. 너의 모든 언행과 행실이 우리 민씨 가문 체면에 영향 준다는 걸 잊지 말고 본분을 지키고 격식을 차리거라. 알겠느냐?”“할아버님의 가르침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신 말씀은 꼭 마음에 새기겠습니다.”권하윤은 여전히 쟁반을 공손하게 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윽고 민상철이 차를 마신 뒤 빈 잔을 위에 올려놓자 옆에 있던 매니저가 빈 찻잔을 가져갔다.그렇게 잇따라 두 번째 쟁반을 들어 올렸다.눈 깜짝할 사이에 첫째 숙부네 가족이 술을 집어 갔다.식구들이 하나둘씩 술잔을 비우는 동안 권하윤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는 본인만이 알고 있었다.심지어 빈 잔을 받아들 때 손이 떨리는 바람에 잔끼리 부딪혀 “쨍” 하는 소리가 났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할 여력도 없이 세 번째 쟁반이 권하윤의 앞으로 쑥 내밀어졌다.아까와 달리 이번에 쟁반 위에는 오직 술잔 하나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잔의 주인은 바로 민도준이었다.숨을 크게 들이쉬고 난 뒤, 권하윤은 공손히 쟁반을 받아 들었다.술잔에 담긴 맑은 액제가 한층 한층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권하윤의 심장도 따라서 요동쳤다.매캐하고 씁쓸한 알코올 향이 있어선 안 될 냄새를 그새 덮어
축제 분위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친척들 모두 민도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눈치였지만 그간 습관이 되었는지 티를 내지는 않았다.하지만 민상철의 얼굴이 유독 어둡게 가라앉았다.“민도준, 이렇게 좋은 날 분위기를 망치지 말거라.”“분위기를 망친다고요?”민도준이 느릿느릿 의자에서 일어나자 강압적인 분위기가 주위에 감돌았다.그는 겁에 질렸지만 애써 침착한 척하는 권하윤을 빤히 내려다보면서 입꼬리 한쪽을 씩 올리며 비아냥거렸다.“우리 제수씨가 내 침대에서 신음 소리를 낼 때는 분위기가 꽤 좋았었는데.”충격적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식장 전체가 조용해졌다.사람들은 저마다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민도준이 이런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말한 것에 놀란 눈치였고, 모르는 사람들은 황당한 사실 자체에 놀란 눈치였다.특히 강수연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몇 초 사이 얼굴색이 몇 번이고 변했다.맨 처음은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가 그다음은 황당하고 놀라 하더니 나중에는 수치스러운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그러다가 끝내 파리라도 삼킨 듯 잿빛으로 변했다.며느리가 아들의 사촌 형과 바람이 난 것도 모자라 모든 친척 앞에서 그 사실이 밝혀졌으니, 체면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던 강수연에게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이런 추잡한 일이 벌어졌으니 앞으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닌담.“너…… 너희들…….”강수연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두 사람을 가리키더니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다섯째 숙모?”“수연아?”어느새 아수라장이 된 방안에서 민도준은 민상철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더 상세하게 예기해 드릴까요?”민상철은 잔뜩 어두워진 얼굴을 한 채 가슴을 부여잡으며 비틀비틀 일어섰다.그때 민시영이 얼른 다가가 민상철을 부축했다.“할아버지, 조심하세요.”민시영은 얼른 민도준을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오빠, 아무리 농담을 좋아해도 정도껏 해야지, 이러다 할아버지의 심장에 무리라도 생기면 어
민도준의 손에 쥐여 있는 새하얀 알약을 보는 순간 권하윤의 흐려졌던 초점이 다시 맞춰지면서 믿기지 않는 듯 민도준을 바라봤다.‘이 약, 내가 아까 잔 안에 넣지 않았나?’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잘 숨긴 줄 아나 봐? 감히 내 앞에서 이런 같잖은 수법을 사용하다니. 그것도 두 번씩이나.”혼란 속에서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진, 진작에 알고 있었어요?”민도준은 대답 대신 반문했다.“이렇게 좋은 물건은 어디서 났대? 공태준이 준 거야?”“…….”권하윤은 여전히 민도준이 진작에 발견했다는 충격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자기의 침묵이 묵인으로 작용하였다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순간, 커다란 손이 가는 목을 꽉 움켜쥐었다.살기가 가득한 눈빛과 무자비한 손끝, 팔뚝 위로 튀어 오른 핏줄과 쇠를 긁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는 원망과 한이 서려 있었다.“늑대 새끼를 키웠어도 이 정도 키웠으면 주인을 알아보겠어.”“…….”권하윤은 대답할 수 없었다. 심지어 발버둥 치지도 않았다.그저 절망에 빠진 사람처럼 축 늘어진 채 점점 보랏빛으로 물든 얼굴을 한 채 죽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목이 부러질 듯 으득 수리가 나는 찰나, 민도준은 권하윤을 힘껏 밀쳐버렸다.중심을 잃고 넘어진 권하윤의 손은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파편 위로 짚었고 거의 한순간 피가 손바닥을 타고 바닥을 적셨다.극심한 통증이 권하윤의 정신을 겨우 현실로 끌어당겼다. 이윽고 바닥을 짚고 일어서더니 고개를 든 채 민도준을 바라봤다.그때 마침 눈이 마주친 민도준이 질문을 툭 던졌다.“이유는?”“도준 씨가 은우를 죽였잖아요.”권하윤은 갈라 터진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죽인 것도 모자라 시체까지 훼손했잖아요.”여자의 말에 약 2초간 멈칫하던 민도준은 무릎을 짚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그래서 나를 죽여 복수하려 했다? 나한테 발각도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생각은 해봤고?”일이 이 지경이
베일을 덮으니 눈앞이 흐릿했다.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결혼 행진곡이 귓가에 들려왔지만 권하윤은 여전히 영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부축받으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권하윤에게 있어 눈앞에 펼쳐진 이 길은 새 삶으로 직행하는 길이 아닌 지옥으로 향하는 황천길이나 마찬가지였다.길 끝 편에서 서 있는 민승현마저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의 모습이 아니었다. 불안한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시계를 들여다보는 모습은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초조해 보였다.그리고 마침 권하윤이 다이아몬드가 박힌 하이힐을 내딛는 찰나 “펑”하는 굉음이 울리더니 발아래가 세게 진동했다.“삐-”요란하게 울리는 호텔의 화재 경보음 때문에 하객들은 당황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디에서 난 소리야?”“무슨 일이래?”민상철도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인가?”그때, 호텔 직원이 다급히 달려와 상황을 전했다.“죄송합니다, 손님 여러분. 지하 주차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는데 경위를 알아보는 중이니 다들 안전지대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민씨 가문의 초대를 받은 집안은 당연히 그 신분도 귀하기에 위험이 있다는 소리에 모두 피신하기 바빴다.그때, 인파에 밀려 나가던 권하윤은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잠깐. 도준 씨가 방금 떠났는데? 설마 지하 주차장에 있는 건 아니겠지?’갑자기 드는 생각에 권하윤은 얼른 직원 하나를 붙잡아 캐물었다.“주차장 쪽에 사람이 있던가요?”“죄송합니다. 불길이 너무 세서 저희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무책임한 대답에 곧바로 캐물으려 할 때, 민시영이 권하윤의 등을 두드렸다.“하윤 씨, 왜 그래요?”“시영 언니.”권하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민시영을 붙잡았다.“민 사장님이, 민 사장님이…….”민시영은 그제야 눈치챘는지 얼른 민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 샘으로 연결되니 삐 소리 이후…….”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안내음에 권
공태준은 눈을 내리깐 채 멍하니 앉아 있는 권하윤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끝내 돌아서며 문을 닫았다.문틈 새로 흘러들던 빛이 사라지는 순간, 권하윤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도 끝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 뒤로 연속 이틀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권하윤 때문에 메이드는 할 수 없이 공태준에게 상황을 보고드렸다.“가주님, 권하윤 씨가 아직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고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큰일 날 것 같습니다.”“그래요, 알겠어요.”이틀 만에 두 번째로 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방에 발을 들이는 거였다.공태준은 메이드의 손에서 몇 시간 동안 끓인 죽을 받아 창백한 권하윤의 얼굴을 바라봤다.그리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뭐라도 먹어요.”“왜 날 죽이지 않지?”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그런지 목소리는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었다.심지어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주먹만 한 얼굴은 여윌 대로 여위어 이목구비가 더 또렷해 보였으며 평소와 다른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공태준은 권하윤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각 권하윤의 모습에 반쯤 넋이 나갔으니까.2년 만에 본 여인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많이 변한 것도 같았다.예전의 이시윤도 온갖 시련을 겪었지만 언제나 맑은 눈을 한 채 현실에 굴복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의 권하윤은 얼굴에 생기가 없고 영혼을 잃은 텅 빈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그저 한만 남아있었다.도자기 같은 예쁜 손은 죽을 침대맡 테이블에 올려놓았다.“나는 하윤 씨 죽일 생각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어요.”죽의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여전히 공태준한테서 나는 짙은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위화감은 더 강해졌다.권하윤은 공태준이 어머니와 오빠가 있는 곳을 캐물을까 봐 여전히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하지만 공태준은 이미 눈치챈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더니 미리 준비된 접이식 상을 펴서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평소 하지 않던 일을 하는 탓에 모든 행동이 어색하기만 했다.공
권하윤은 한참 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 그제야 얼마 전 민시영더러 할아버님이 왜 자기와 민승현의 결혼을 서두르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고작 며칠 전 일이었지만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현재 머릿속에 온통 민도준의 사고에 대한 생각뿐이어서 다른 건 들어올 틈이 없었다.당장이라도 진실을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 또 다른 문제가 놓여 있었다.권하윤은 끝내 핸드폰을 내려놓고 공태준을 바라봤다.“공태준, 당신이 이남기 씨더러 나 찾아오게 한 거지? 내가 경성에 있었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지?”“그래요.”공태준의 말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하윤 씨가 내가 알기를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타나지 않았어요.”답을 듣자 권하윤은 그저 당황하기만 했다.“왜?”애초 해원에 있을 때, 공씨 가문이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권하윤의 가족은 해원 전체에 버림을 받다시피 했다.지금도 오빠가 위독할 때 그 어느 병원도 오빠를 받아주지 않던 기억이 또렷하다.그때, 심지어 동네의 작은 진료소마저도 주사 한번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매일 밤낮을 공씨 집안 문 앞에 꿇어앉아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오빠의 병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진실이 어떻든 속죄하겠다고도 했고 오빠가 병을 치료받지도 못한 채로 죽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어 자발적으로 공씨 집안에 하인으로 들어갔었다.하지만 가족들은 살길을 찾지 못했고 수많은 죄명을 뒤집어쓴 채 원래의 집에서마저 쫓겨났다.병원비, 생활비, 집세 이 모든 것들이 부담이 되어 가족들을 짓눌렀다.솔직히 이씨 집안은 재벌가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먹고 살 걱정 없이 편하게 지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무너진 집을 위해 권하윤은 몇 번이고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였다.그제야 권하윤은 기개건 자부든 모두 그럴만한 뱃심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공씨 저택 집사가 돈 한 뭉치를 바닥에 뿌리며 주워 가라고 할 때 권하윤은 자존심이 상하다는 생각보다는 가족의 집세와 생활비 오빠의 병원비 생각뿐이었고, 겨울에
민씨 저택.민도준이 사고를 당하자 민씨 집안도 따라서 흔들렸다.민상철은 민도준의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심장병으로 쓰러졌지만 응급처치를 한 뒤 곧바로 퇴원했다.이 틈에 회사에 눈독 들이는 식구들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아무리 힘을 내보려 해도 어느 정도 한계는 있었다.이틀 동안 서로 기회를 탐하는 형제들은 새로운 기회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상황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그 시각, 본채 밖 정원에서 민시영은 핸드폰 액정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하윤 씨? 며칠 동안 왜 아무 소식도 없었던 거예요? 지금 어디 있어요?”“일이 조금 있어서요. 민 사장님이 정말…….”이미 여러 번 확인했지만 권하윤은 참지 못하고 또다시 물어봤다.하지만 전화 건너편에서 민시영의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맞아요.”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권하윤은 연신 애써 눌러 참으며 되물었다.“누가 그랬는지 범인은 잡았어요?”“조사 중이긴 하지만 집안이 워낙 어수선해서 쉽지 않아요.”민도준이 살아 있을 때는 그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지만 이미 죽은 마당에 사람들은 당연히 겁날 게 없었다. 더욱이 민도준에게 속해 있던 자산도 적지 않았기에 모두 자기한테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느라 누가 민도준을 죽였는지는 완전히 관심 밖이었다.“…….”한참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권하윤은 결혼식 날 벌어졌던 일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그러던 그때, 민시영의 떠보는 듯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하윤 씨, 혹시 공 가주랑 아는 사이에요?”잠깐의 침묵 끝에 권하윤은 입을 열었다.“인연이 조금 있어요.”“아, 그렇구나…….”민시영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결혼식 이튿날부터 하윤 씨가 사라져서 걱정했어요. 혹시 시간 나면 요즘 잠깐 볼 수 있을까요?”의미심장한 말에서 권하윤은 민시영이 뭔가 말하고 싶어 한다는 걸 이내 알아차렸다.게다가 그 일이 민도준과 관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