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연은 밖으로 나가기 전 권하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민승현에게 어렵게 차려진 기회를 권하윤이 망칠까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하지만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기는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권하윤의 행동에 그녀는 일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발만 동동 굴렀다.그러던 그때.“크흠.”경고가 섞인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민상철의 어두운 눈과 마주치자 강수연은 더 이상 꾸물거리지 못하고 목을 한껏 움츠린 채 도망치듯 사라졌다.분명 사람 하나 줄었을 뿐인데 공기는 일순 희박해졌다.민상철은 역시나 오랫동안 비즈니스계를 주름잡던 인물이라 그런지 아무리 연세가 있다해도 카리스마가 줄지 않았다. 더욱이 이 순간 권하윤에게 겁을 주려는 생각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언의 압박만 가했다.그렇게 침묵이 지속되는 동안 권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물론 압박감 때문은 아니었다. 민도준과 오랫동안 지내다 보니 이런 압박감쯤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다.그것보다는 민상철이 갑자기 그녀와 민승현의 결혼을 밀어붙이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다.권씨 가문이 진 뒤로 그녀는 일반 가정집 여식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권씨 가문에 아직 남은 돈이 있다고는 하지만 민씨 가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아니다.‘설마…… 민도준 씨 때문인가?’하지만 생각해 보니 또 그런 건 아니었다. 민상철이 팔에 염주를 차고 있는다고 마음이 부처님 같은 건 아니기에 그녀와 민도준 사이의 관계를 알았다면 당장 그녀를 처리하면 그만이지 민승현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으니까.‘민씨 가문 정도면 나를 처리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텐데.’그렇게 한참 동안 생각하던 그때, 민상철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내가 왜 너랑 승현이 결혼을 밀어붙이는지 알겠느냐?”권하윤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말씀해 주십시오.”“흥, 역시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어 무서울 거 없다 이건가?”그 말에 권하윤의 심장은 철렁 가라앉았다. 솔직히 민상철이 일부로 떠보는 건지 아니면 이미 확답을 얻은 건지 긴가민가했다.하지만 그녀가
민상철의 낯빛은 순간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뜻이냐? 설마 거절하겠다는 뜻이냐?”권하윤은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거절이라니요. 할아버님께서 저한테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제가 거절하면 너무한 거죠. 권씨 가문이 이렇게 됐는데도 저를 받아주고 잘먹고 잘 살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하니 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게 있다면…….”권하윤이 말끝을 흐렸지만 민상철은 당연히 이해했다. 그녀가 민도준이 방해를 할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을.한편, 권하윤은 말하면서 민상철의 눈치를 살폈다.솔직히 그녀가 이 한마디를 내뱉은 건 엄청난 모험이다. 만약 민상철이 그녀가 귀찮다고 생각해 뒤탈을 없애려고 한다면 그녀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하지만 그녀는 도박을 하는 거다. 물론 뭔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민상철이 아직은 자기 목숨을 함부로 하지 않을 거라고.침묵이 이어질수록 권하윤의 심장도 따라서 쪼그라들었다.그녀를 바라보는 민상철의 눈빛은 마치 붉게 물든 칼날 같아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녹이 쓸어 사용할 수 없어 보이지만 찬찬히 보면 그 붉은 자국이 모두 핏자국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권하윤은 심지어 민상철이 이미 자기를 죽이려고 결정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민상철의 덤덤한 말투가 귀에 들려왔다.“그렇다면 어찌해야 한다는 거냐? 네 뜻을 말해보거라.”그 말에 권하윤은 겨우 낮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 모든 게 저 때문에 일어났으니 제가 떠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하.”민상철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떠나려는 거니? 아니면 시간을 벌려는 거니?”권하윤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물론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녀가 어렵사리 민도준이라는 뒷배가 생겼으니 그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민상철의 그런 의심을 한두 마디로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때문에 권하윤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다.이에 그녀는 눈
전화 반대편.민도준은 손에 쥔 방망이를 흔들거리며 벽에 걸린 채 입이 막혀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고진태를 힐끗 바라봤다.이윽고 고개를 살짝 움직이더니 방망이를 들어 그대로 상대를 내리쳤다.“젠장, 시끄러워 죽겠네.”“읍-”벌써 지하실에 이틀째 감금된 채 뜬눈으로 이틀을 꼬박 지새운 고진태는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민도준의 심기를 거스를까 겁나 옆에 있는 고은지만 내내 노려보았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만 있다면 고은지는 아마 그의 눈빛에 수백 번도 죽었을지 모른다.이윽고 입을 막고 있던 물건을 빼내는 순간, 그는 곧바로 욕설을 퍼부어 댔다.“고은지! 너 이년! 은혜도 모르고, 역시 어미가 천것이라서 딸도 그 모양이네!”욕설을 퍼붓고 난 뒤, 그는 민도준에게 눈길을 돌렸지만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태도가 이내 누그러들었다.“민 사장, 나 정말 알고 있는 거 다 말했어. 제발 나 좀 풀어줘…….”그 말에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풀어달라고? 그래.”고진태는 희망이라도 얻은 것마냥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그가 기뻐하기도 전에 민도준의 말소리가 천천히 귓가에 들려왔다.“상체부터 풀어줄까요? 아니면 하체부터 풀어줄까요?”장난 같지 않은 그의 말에 고진태의 얼굴은 이내 잿빛이 되었다.“민…… 민 사장…… 잘못했어. 그때는 내가 뭐에 홀렸나 봐…….”그의 애원에 민도준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거 참 잘됐네요. 귀신에 홀린 사람 손봐주는 건 제 전문이거든요. 아저씨가 선택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으니 제가 대신 선택할게요.”이윽고 몽둥이로 고진태의 갈비뼈를 꾹꾹 눌러댔다. 당장이라도 가슴에 구멍을 낼 것만 같은 힘에 고진태는 이내 비명을 내질렀다.“귀신한테 홀렸다니 심장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네요. 이 중간부터 가르는 게 좋겠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아니, 아니! 내가 고르겠네. 내가…….”고진태는 너무 놀란 나머지 벌써 눈물범벅이 되어버렸다.“상체는 놔줘, 상체만은!
민도준은 고은지에게 반응할 기회도 주지 않고 손으로 그녀의 팔을 낚아채더니 창가에 밀쳐버렸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고은지는 눈앞이 컴컴해져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깜빡거렸다.그러던 그때, 민도준이 아래층을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저기 분수 보이지? 저기 가서 씻어.”컴컴하던 눈이 다시 광명을 찾기 바쁘게 들려오는 충격적인 말에 고은지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네, 알겠어요. 바로 가볼게요.”하지만 그녀가 움직이자마자 민도준은 그녀를 다시 잡아끌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뭐 하러 걸어 내려가? 다이빙하면 더 빠르겠는데.”“민도준 씨, 저…….”고은지는 애써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댔다. 하지만 그러던 중 그의 시선이 자기한테 있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민도준은 아래층을 바라보며 눈썹을 약간 치켜올렸다. 그 시선 끝에는 웬 여자가 서 있었다. 다만 거리가 멀어 상대가 누구인지 똑똑히 확인할 수 없었다.고층 건물의 그림자 아래에 선 작은 인영은 앞으로 걸었다 뒤로 물러났다 하면서 뭔가 갈등하는 모습이었다.‘만약 이 순간 사람이 떨어진다면 아마 깜짝 놀라겠지?’“하.”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명령했다.“꺼져.”그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 몰랐지만 고은지는 겨우 목숨을 건진 것마냥 다급하게 방문을 나섰다.그 시각, 아래층.건물 밖에서 한참 동안 서성이던 권하윤은 이남기가 성은우를 고향에 묻어주고 싶다던 말이 생각나 끝내 블랙썬의 대문에 들어섰다.하지만 건물에 들어서기 바쁘게 마주친 고은지의 온몸을 적신 시뻘건 피를 보는 순간 그녀는 속으로 경악했다.고은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곧바로 다른 생각에 의해 대체 됐다.“권하윤 씨.”“고은지 씨.”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나눈 뒤, 고은지는 떠나버렸다.하지만 권하윤의 눈살을 이내 찡그러졌다. 그녀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찾아온 건 민도준이 없는 틈에 성은우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그런데 고은지가
권하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민도준이 답을 맞히기 시작했다.“민승현은 아닐 테고, 성은우는 이미 죽었으니 기회가 없을 테고. 나는, 하, 목숨 걸고 도망치지 못해 안달이니 더욱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남은 건…….”민도준의 길게 늘어뜨린 끝 음에 권하윤의 심장 박동은 마구 흐트러졌다.이윽고 민도준이 따져 물을 거라고 생각하던 찰나, 피식하는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한민혁?”당연히 공태준의 이름을 들을 거라고 생각한 권하윤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이미 머릿속에 생각한 말들도 모두 소용없어지자 저도 모르게 억지 미소를 지어냈다.“무슨 그런 농담을…….”“하긴.”그녀의 얼굴에 대고 있던 민도준의 손가락은 그녀의 볼을 한 번 슥 문질렀다. 이윽고 장난기 섞인 남자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흘러들었다.“제수씨처럼 까탈스러운 여자를 한민혁이 감당할 리가 없지. 적어도 신분 높고 여자 아낄 줄 아는 사람이 돼야지. 안 그래?”끝 음을 살짝 올린 그의 한마디가 내뱉어지는 순간 아슬하게 걸려있던 담뱃재가 툭하고 떨어졌다.쇄골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도에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러뜨렸다.그 순간 선명하던 그녀의 쇄골은 하층 더 움푹 파였다. 하지만 부드럽고 연약하기만 하던 그녀는 오히려 어느때 보다도 강인하게 허리를 곧게 폈다.이윽고 이를 꽉 악문 채 신음소리를 참으며 눈을 내리깔았다.“신분 높은 사람은 바라지 않습니다. 전 그저 평범하고 무탈하게 지내고 싶거든요.”그녀의 긴 속눈썹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와 검푸른 다크써클 한데 어우러져 색을 분별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런 그녀를 한참 바라보던 민도준이 끝내 입을 열었다.“요구가 의외로 낮네?”“제가 어찌 감히 요구를 내걸겠습니까?”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내뱉은 한마디를 끝으로 주위는 일순 조용해졌다.무거운 공기 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덩어리져 권하윤을 눌러댔다.고개를 들지 않고도 자기를 찍어 누르는 듯한 남자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체념한 듯 민도준의 괴롭힘을 기
“어.”한민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하려던 말을 삼키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은 왠지 뭔가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한민혁 씨…….”이윽고 그는 자기의 이름에 몸을 흠칫 떨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저기, 하윤 씨, 먼저 먹고 있어요. 저 급한 일 때문에 잠깐 나가야 할 것 같아요.”권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녀의 물기 어린 두 눈에 한민혁은 몸을 흠칫 떨었다. 이윽고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헐레벌떡 달려 나오더니 놀란 가슴을 내리 쓸었다.‘휴, 권하윤 씨 정말 무섭네. 하마터면 설득당할 뻔했잖아.’하지만 이런 일은 민도준의 의견을 물어야 했다.-민씨 저택.다리를 꼰 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서류를 흘겨보는 민도준의 태도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민상철의 표정은 어두워졌다.“너 때문에 과학기술단지가 지금 텅 비어있어. 이대로 칩 기술을 들이지 않는다면 문 닫을지도 모른다고!”“그래서요?”“그래서라고 물었어? 어쩜 그리 뻔뻔할 수가 있지?”느긋하게 하품하며 묻는 민도준의 말에 민상철은 버럭 화를 냈다.“비즈니스가 네가 하는 그 짓거리와 같은 줄 아느냐? 때리고 죽이고 하면 끝인 줄 알아? 비즈니스계의 전쟁은 그런 무력으로 하는 게 아니다. 강하게만 나간다면 누가 너를 위해 일하겠니?”“할아버지의 훌륭한 아들이 있잖아요.”민도준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튕기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그의 태도에 민상철의 낯빛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네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 일주일 내로 여전히 이 꼴이면 과학기술단지는 네 큰 숙부한테 맡길 거다.”민도준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서류를 테이블 위에 툭 던져버렸다.그것으로 일 얘기가 끝나자 장 집사가 차를 내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도준 도련님, 차 드세요.”차가 입안으로 감겨 들어간 순간 약 2초간 머금다가 삼킨 민도준은 이내 입꼬리를 씩 올렸다.‘어쩐지 영감탱이가 우리 제수씨의 결혼을 서두르신다 했네.
따뜻한 오후의 햇살은 사람을 노곤노곤하게 내리쬤지만 권하윤은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한민혁이 간 뒤로 그녀는 줄곧 그의 반응을 되새겼다.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그런 반응은 이상하기만 했다.‘은우가 이미 죽었는데, 시체가 있는 곳 알려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 난 그저 고향에 묻어주려는 것뿐인데, 누가 다시 살려낸다고 했나? 설마…….’갑자기 든 생각에 권하윤은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전류라도 흐르는 것처럼 등줄기로부터 손끝까지 저릿해 났다.‘설마, 은우가 안 죽었나? 그날 총소리만 들었을 뿐 은우 시체는 못 봤잖아. 설마 죽이지 않고 어디 가뒀나?’그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권하윤의 가슴은 뜨거운 물을 부어 넣은 것처럼 끓기 시작했다.이윽고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방 안을 계속 서성이며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그날의 모든 장면을 되새겼다.‘은우를 개밥으로 던져줬다는 것도 속인 거라면, 은우가 죽었다는 것도 속일 수 있잖아.’분명 이 모든 게 현실성 없는 신기루 같은 생각이라지만 그녀는 기쁨을 제어할 수 없었다.‘은우가 죽지 않았다면…… 만약 안 죽었다면…….’너무나도 깊이 몰두한 나머지 그녀는 문이 열리는 소리마저 듣지 못했다.때문에 민도준이 들어왔을 때 그의 앞에는 선 자리에서 뱅뱅 도는 권하윤이 보였다.“귀신이라도 들렸어?”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권하윤은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본 순간 모든 생각을 고이 접었다.“도준 씨.”이윽고 참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눈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민도준을 쫓았다. 마치 그의 머리를 꿰뚫어 성은우의 생사를 알아내기라도 하듯이.민도준은 자기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권하윤이 아예 자기를 빤히 쳐다보자 재밌는 듯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쿡쿡 찍었다.“왜? 안 본 새에 나 잊은 거야? 못 알아보겠어?”“아니거든요. 저는 그저…….”권하윤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더니 무의식적으로 그의 비위를 맞추는 듯 나긋한 한마디를 내뱉었다.“보고 싶어서요.”“하. 진짜
권하윤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하윤 씨가 인색하다지만 공태준은 아니던데? 하윤 씨랑 놀려고 집안 밑천까지 탈탈 털어낸 걸 보면.”“네? 집안 밑천이요?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요?”밑도 끝도 없는 한마디에 권하윤은 일순 멍해졌다.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그녀의 얼굴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그래, 오해했다고 쳐.”자비 없이 꽉 눌러대는 그의 손가락 아래의 피부는 점점 붉게 물들었다. 이윽고 뻘건 자국이 날 때쯤 권하윤은 끝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그녀가 고통을 호소하자 민도준은 그제야 자비를 베풀 듯 손을 놓더니 별로 먹지도 않은 만둣국을 보며 댐배를 꺼내 들었다.“왜 안 먹었어?”권하윤은 얼른 그의 손에 있는 라이터를 받아 그를 도와 불을 붙였다.“도준 씨가 오면 같이 먹으려고요.”고분고분한 한마디를 내뱉으면서 말이다.하지만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은 담배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자 민도준은 몸을 뒤로 젖히며 권하윤과 거리를 두더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또 무슨 꿍꿍이지?”권하윤의 손은 일순 멈칫했다.하지만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한민혁이 무조건 말할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한참을 머뭇대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저…… 요즘 은우가 자꾸 꿈에 나와요. 그래서 말인데, 이왕 죽었는데 고향에 묻게 할 수는 없나요?”그녀는 말하면서 민도준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그가 조금이나마 소식을 흘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모두 헛수고였다.민도준의 검은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었고, 흔들림 없는 표정에서마저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몇 초간의 침묵 끝에 그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망자가 꿈에 나타나 부탁한다고 하나?”권하윤은 당연히 그의 말속에 담긴 경고를 캐치했다. 이에 곧바로 눈을 피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토막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