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하게 내민 민도준의 손 위로 환한 불빛이 떨어졌다.그제야 고창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가 고은지의 손을 건네려는 찰나, 민도준은 갑자기 손을 뒤집어 고은지의 어깨를 툭툭 쳤다.“그렇다면 우리 민씨 가문에서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앞으로 고은지 씨가 민씨 가문 여섯째인 걸로 하죠.”그의 말이 끝나자 주위 사람들은 의아한 듯 서로를 쳐다봤다.‘여섯째? 이거 약혼 아니었나?’‘왜 갑자기 여섯째 아가씨가 됐지?’고창호 역시 멍한 표정을 지었고 아래에서 지켜보던 민상철 역시 표정이 어두웠다.그 자리에서 유독 민도준만이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다들 뭐합니까? 얼른 박수 쳐야죠.”민도준의 말이 끝나자 느지막하게 사람들의 박수가 터졌다.그렇게 어영부영 일이 확정되자 고창호는 더 이상 미소를 유지할 수 없었다.“자네 이게 무슨 뜻인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두 사람의 약혼식에 참석한 거네. 이런 농담은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드는가?”고창호뿐만 아니라 고씨 집안사람들의 얼굴도 하나같이 잿빛이 되어있었다.민도준의 이러한 행동은 그들을 놀림거리로 생각한다는 거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이렇게 다가가는 고씨 가문 전체가 경성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 있었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들의 눈빛을 무시한 채 씩 웃었다.“장난이라고 했잖습니까? 장난은 세게 칠수록 재밌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르신, 이런 농담도 못 받아들이시는 거 아니죠?”고창호는 아무리 간사하고 교활하다 할지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체면이 깎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리가 없다.이에 그는 싸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맞는 말이긴 하나 우리 은지는 고씨 가문의 손녀네. 우리 은지한테는 고진태라는 아비가 있고 이 할아비도 있으니 민씨 가문에서 거두어들일 필요는 없어 보이네만.”“너무 쉽게 거절하지 마세요.”민도준은 긴 다리를 뻗어 그들을 가로막으며 양심 없는 미소를 지었다.“고씨 가문은 이제 곧 망할 텐데, 제가 고은지 씨
물론 민상철은 발 한번 굴러도 경성 전체를 움직이게 할 정도로 큰 힘을 갖고 있는다지만 민도준이 무서움 점은 그가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다는 거다.마치 지금 그가 고창호의 아들을 이토록 괴롭히고 사람들 앞에 끌고 오는 미친 짓을 벌일 수 있듯이 말이다.때문에 하객들은 그가 자기한테도 그런 미친짓을 벌일 거라는 두려움에 그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이에 만족했는지 민도준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래야죠.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관중이 없어지면 재미없죠.”민도준의 악랄한 행동에 민상철은 끝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민도준! 너 지금 무슨 짓이냐?”“보면 모르겠어요? 고씨 집안사람들 목숨 거두어들이는 거잖아요.”섬뜩한 웃음과 내용에 고씨 집안사람들은 등골이 싸늘해졌다.“아, 아니지. 죽기 전에 빚진 거 빨리 갚는 게 어때요? 지금껏 죽은 사람들의 성과를 도둑질해 돈을 벌어들였으면, 이제 뱉어낼 때도 됐죠.”“헛소리 그만해!”고선재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버럭 소리쳤다.“내 아버지를 저렇게 만든 거로도 모자라 우리 집안을 모욕하다니! 당신이 민 사장이면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아?”민도준은 고개를 살짝 움직이면서 위험한 분위기를 뿜어냈다.이윽고 손을 들면서 앞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고창호가 갑자기 손자 앞에 막아섰다.그는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지만 끝내 냉정함을 되찾더니 입을 열었다.“우리 선재가 아직 어려서 그러니 대인배인 자네가 용서해 주게나.”고창호가 굴복하자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진작에 이랬으면 좋았잖아요.”“민 사장, 자네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두 가문은 이미 오랜 벗으로 지내온 사이잖나. 할 말이 있으면 사적으로 천천히 얘기하자고.”“어르신은 천천히 말하고 싶겠지만 저한테는 그럴 시간이 없어서요. 더욱이 당신 아들도 이미 인정했어요. 몇 년 전에 우리 그 단명한 부모님의 기술을 도둑질했다고. 아, 그리고 두 분을 꼬드겨 해외 실험실로 가게 한 것도 당신 아들이에요.”자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고창호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모든 걸 되돌릴 수 없었다.때문에 그는 민도준 쪽 사람들이 올라와 “모시고” 갈 때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잔뜩 그늘진 얼굴로 떠나가는 고씨 가문 사람들은 올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그들이 떠나가자 연회장의 마지막 생기마저 사라졌다. 분명 많은 사람이 자리했지만 주위는 고요하기만 했다.고은지는 이 모든 상황을 냉담하게 바라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어찌 보면 그녀는 고씨 가문에 은혜를 입은 거나 마찬가지다.그녀를 이렇게 교육해 재벌가의 세상에 끌어와 준 것도 어찌 보면…….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민도준이 눈길을 보내오자 그녀는 눈치껏 드레스를 들고 무대를 떠났다.그래도 그녀는 그나마 앞날이 창창하니 다른 기회는 많았다.그 시각,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민상철은 민시영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무대 위로 올라갔다.“고씨 가문이 이런 일을 벌인 건 벌을 받아 마땅하오. 하지만 우리 도준이가 약혼을 빌미로 모두를 헛걸음하게 한 건 잘못된 일이니 사과드리겠네. 그러니 다들 너무 탓하지 말게나.”이런 말은 물론 겉치레일 뿐이지만 그가 말하지 않아도 누구도 민도준을 탓할 사람은 없다.이윽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어르신, 너무 내외하시네요.”“그러게요. 어르신 못 뵌 지도 오래됐는데 이참에 어르신 보러 모두 모였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죠.”분위기가 겨우 누그러들자 민상철은 민도준더러 헛걸음 한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게끔 눈치를 줬다.하지만 민도준은 미안한 기색은커녕 오히려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이왕 다들 모이셨고 또 우리 할아버지가 저 결혼하는 거 보고 싶어 하시니…….”말하면서 그의 눈빛은 홀 구석을 향했다. 그리고 그제야 구석에 움츠린 채 서 있던 여자가 사라졌다는 걸 확인한 그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몇 년 더 사시면 언젠간 볼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친 순간 그의 손에 잡혀있던 마이
방금 방 안에 불이 켜지지 않아 권하윤은 당연히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공태준을 위해 준비된 휴게실이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게다가 공태준이 홀에서 식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휴게실에서 쉬고 있다는 게 더욱 놀라웠다.“죄송합니다. 방을 잘못 들어온 것 같네요. 바로 나갈게요.”권하윤은 차마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그녀는 뻔뻔하게 대답했다.하지만 그녀가 나가려고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찰나,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들려왔다.“저 지금 약을 붙이고 있어서 움직이기 불편해서 그러는데 혹시 물 좀 가져다줄 수 있나요?”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살짝 돌려 확인하니 공태준이 확실히 소파에 누운 채 이마에 약봉지를 얹어 놓고 있어 두 눈이 가려진 상태였다.그제야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바로 나가고 싶었지만 너무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가 상대가 눈을 뜨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테이블에 놓인 물을 그에게 건넸다.“자요.”상대가 물병을 잡지 못하자 권하윤은 침착하게 그의 손바닥에 쥐여주기까지 했다.하지만 물병을 전하는 순간 차가운 손끝이 그녀의 손등을 스쳤다. 흠칫 놀라 손을 뒤로 뺄 때까지도 그 촉감은 여전히 그녀의 손등에 남아있었다.“죄송해요.”너무나 가까운 거리라서 한약 냄새가 권하윤의 코끝을 자극했다. 그건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냄새였다.하지만 그녀는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한 태도를 보였다.“괜찮습니다.”“고마워요.”“네.”대충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난 뒤 권하윤은 곧바로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하지만 방에서 시간을 허비한 탓에 어느덧 몇 분밖에 남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그녀의 손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 심지어 버튼을 여러 번 누른다고 속도가 빨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쉴 새 없이 버튼을 꾹꾹 눌러댔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이 속이 타들어갔다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옥상으로 향하는 몇 초는 지옥 같았다.권하윤은 점점
헬기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권하윤을 속박하고 있던 힘이 스르륵 풀렸다.그 순간 권하윤은 마치 온몸의 힘이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그제야 갈비뼈에서 전해지는 고통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방금 전 민도준이 그녀를 끌어안았을 때 너무 힘껏 발버둥 치면서 다친 듯싶었다.민도준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그녀를 어두운 눈빛으로 빤히 내려다봤다.송골송골 맺혔던 땀방울이 목울대를 타고 흘러내렸고 목덜미에 튀어 오른 시퍼런 핏줄이 아직 가시지 않은 조급함과 함께 펄떡펄떡 뛰면서 점점 온몸에 퍼졌다.이윽고 그는 무릎 한쪽을 꿇고 앉아 절망으로 가득한 권하윤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이젠 해명도 안한다 이건가?”권하윤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녀가 뭐라 말하건 이제 아무 소용도 없었다. 될 대로 되라는 듯한 그녀의 절망스러운 태도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고씨 가문에 신경이 쏠려 하윤 씨를 놓칠 뻔했네. 솔직히 하윤 씨가 내 눈꺼풀 아래에서 도망갈 배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이걸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운이 나쁘자고 해야 할지. 응?”마지막 한 글자를 내뱉는 순간 그나마 부드럽게 턱을 움켜쥐었던 손은 당장이라도 권하윤의 턱을 부스러트릴 것처럼 조여왔다.하지만 권하윤은 그저 눈살을 찌푸릴 뿐 버둥대지도 밀쳐내지도 않았다.그런 절망적인 표정은 오히려 더 거슬리기만 했다.“왜? 이젠 거짓말하기도 귀찮아? 그래, 좋아.”민도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했다.“권 여사를 데리러 간 애들도 마침 돌아올 때가 됐는데 두 사람 회포나 풀게 자리 마련해주지.”권미란의 이름을 듣는 순간 고요하기만 하던 권하윤의 눈동자는 끝내 조금 흔들렸다.바닥에 앉아 있던 그녀는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민도준을 바라봤다.그리고 그때, 민도준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하
민도준은 된다, 안된다 말도 없이 울며 애원하는 권하윤을 빤히 바라봤다.예전의 그녀는 언제나 겉으로 얌전한 모습을 하면서 속으로는 쉽게 길들지 않는 오만함을 숨기고 있어 기회만 있으면 본모습을 드러냈다가 모질게 마음먹고 혼내주려고 하면 또 불쌍한 척 연기하며 가식적인 모습으로 그의 동정을 사곤 했다.하지만 성은우 그놈이 나타난 뒤로 그녀는 완전히 변했다. 온몸의 가시를 바짝 세운 채 그를 경계했고 스스로 자신의 적대심을 잘 숨겼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민도준은 언제나 그녀의 눈에서 원망을 볼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바짝 세웠던 가시와 가식적인 모습마저 모두 뜯어낸 채 처량한 모습으로 그에게 애원하고 있다.심지어 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의 손을 들어 자기 몸에 갖다 댔다.“저 앞으로 별장에서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도준 씨만 기다릴게요. 도준 씨가 보고 싶을 때면 찾아올 수 있게. 네? 제발요, 도준 씨.”긴 속눈썹마저 눈물에 젖어 파르르 떨리는 애처로운 모습을 보자 민도준은 웃으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싫은데.”다정한 동작과 달리 온도 없는 대답에 권하윤은 몸이 굳어버렸다. 일순 눈에 드리웠던 마지막 희망도 점점 점멸되었다.민도준이 얼굴을 만지작대며 눈물을 닦아주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와중에도 권하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자, 이제 하윤 씨 어머니 뵈러 가야지.”그녀는 멍하니 그의 손에 이끌려 몇 발짝 걸었다. 그사이 흐른 짤막한 몇 초간 그녀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도준 씨가 그동안 나와 오랜 시간 어울린 건 그래도 나를 어느 정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의미 아닐까? 내가 만약 공은채 씨의 죽음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친다면 지난날의 인연을 봐서라도 우리 가족은 내버려 두지 않을까?’손바닥 안에 감싸 쥔 작은 손이 점점 차가워지자 민도준은 웃으며 권하윤을 품에 끌어들였다.“벌써 이렇게 겁먹으면 이따가 어떡하려고 그래?”권하윤은 눈을 내리깐 채 여전히 침묵을 유지했다.엘리베이터가 마침 멈춰서자 민
민도준은 씩 웃으며 뻣뻣하게 굳어버린 권하윤을 놀리기라도 하듯 그녀를 앉힌 다리를 들썩였다.“들었어?”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여전히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권하윤을 보자 민도준은 그녀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애들 돌아왔다는데 뭐해? 일어나지 않고?”꼭두각시처럼 끌려 일어난 권하윤은 민도준이 문을 열려는 찰나 그가 옆에 버려두었던 과일칼을 들어 자기 심장을 향해 내리 찔렀다.하지만 예상했던 통증은 전해지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커다란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고 있었고 손목으로부터 팔뚝까지 길게 뻗은 상처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순간 그녀의 머리는 백지장이 되어버렸다. 이윽고 눈을 들자 마침 포악한 기운을 내뿜는 민도준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왜…….”“죽고 싶으면 다른 곳에서 죽어. 내 앞에서 죽지 말고.”말하면서 그녀를 힘껏 밀치는 순간 한민혁이 마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너무 한순간에 벌어진 터라 권하윤은 긴장할 새도 없었다. 하지만 들어온 한민혁은 그녀보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심지어 민도준이 피가 철철 흐르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걸 보는 순간 그는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민도준은 그런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왜? 마음에 들어? 너도 하나 그어줄까?”“아니, 그럴 필요 없어.”부르르 떨면서 대답하는 한민혁을 바라보며 민도준은 담배를 입에 갖다 댔다.“사고라도 난 거야?”민도준이 대충 짐작한 듯하자 한민혁은 눈을 질근 감으며 입을 열었다.“그게, 권 여사와 권효은을 운송하던 차량이 브레이크 고장이 났대.”“죽었어?”“응…… 차가 마침 가로로 부딪히는 바람에 뒷좌석에 앉아 있던 권 여사와 권효은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그 소식에 권하윤의 심장은 세게 요동쳤다. 겨우 한고비 넘겼다는 안도감과 갑자기 벌어진 일에 대한 막연함이 함께 몰려왔다.그렇다고 권미란과 권효은이 안타까운 건 아니었다. 지금껏 두 사람이 저지른 짓만 생각하면 이건 어찌 보면 업보였다.‘하지만…
권하윤은 일순 멍해졌다.따라서 그녀의 막연한 눈빛에 민도준은 눈을 치켜올렸다.“왜? 모른 척하는 거야?”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민도준이 권하윤을 오해한 거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공태준이 그녀를 도와주다니 정말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그때 민도준이 그녀의 코끝을 살짝 누르며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아까 내가 CCTV에서 뭘 봤을 것 같아? 우리 욕심쟁이 여우가 옆방으로 숨어들어 한참 동안 나오지 않더라고. 어디 말해 봐.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빌었길래 공태준이 나서서 도와줬는지? 아까처럼 울면서 빌었어? 아니면…….”허리에 슬쩍 두른 팔에 일순 힘이 들어가더니 얼마쯤 벌어져 있던 거리가 바싹 좁혀지며 민도준의 가슴에 부딪혔다.이윽고 권하윤의 귓가에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른 걸 했어?”그제야 권하윤은 민도준이 자기를 의심한다는 걸 알아챘다. 그것도 공태준 앞에서 꼬리 쳤다고 말이다. 생각만 해도 황당한 일이었다.하지만 더 이상의 오해는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녀는 쉰 목소리로 애써 설명했다.“그런 거 아니에요. 아까는 한민혁 씨를 피하려고 빈방을 찾다가 그 방만 열려 있길래 들어간 거예요.”“그래? 그러면 내가 오해한 거네?”말은 이렇게 했지만 남자의 말속에 담겨있는 압박감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그런데 그것도 도와준 거 맞잖아.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권하윤은 이내 그의 눈길을 피했다.“약혼식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 아마 벌써 돌아가셨을 거예요.”“걱정할 거 없어.”민도준은 다정하게 권하윤의 귓불을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나랑 할 얘기가 있어 아직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헛걸음하지는 않을 거야.”남자의 말에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혀 애원하는 눈빛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그녀의 눈빛을 받은 민도준은 이내 눈썹을 들어 올렸다.“얼굴 마주 보고 인사하고 싶지 않아?”권하윤은 있는 힘껏 머리를 저었다.이에 민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렇다면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