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의 어깨에 손을 얹은 권하윤은 마치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눈가가 흠뻑 젖어있었고 도톰한 입술은 너무 짓씹어 피가 떨어질 것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심지어 살짝 웨이브진 머리마저 마구 흐트러져 나른한 분위기를 냈고 잔뜩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은 일부러 유혹할 때보다 더 매혹적이었다.“도준 씨…….”혀로 볼을 꾹 밀던 민도준은 손가락을 권하윤의 머리카락 사이에 끼워 넣더니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세게 문질렀다.“나를 홀리라는 거 아니야. 제대로 해.”하지만 권하윤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이에 그녀는 머리털이 비쭉 곤두서 잔뜩 힘을 주며 민도준의 가슴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민 사장님, 저 급한 일정 때문에 얘기는 나중에 해요.”곧이어 민도준의 색욕 섞인 웃음소리가 문을 관통한 채 공태준의 귀에 들어갔다.“그래요. 제가 바빠서 배웅하지는 못하겠네요. 다음에 봐요.”이를 꽉 악문 공태준은 애써 참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떠나려는 순간 문 안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앞으로 내디디려던 발이 마치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붙어버렸다.서늘한 복도와 달리 방 안은 후끈 달아올랐다.민도준은 문틈을 슬쩍 흘겨보다가 다시 눈을 내리깔아 자기 아래에 눌려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하, 여자들 앞에서는 참 매너 있단 말이야.”공태준이 떠났다는 소리에 권하윤의 팽팽하던 정신은 그제야 풀렸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의 손등이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톡톡 쳤다.“공태준도 떠났는데 약속 지킬 때가 되지 않았나?”“무슨…… 약속…….”“내가 권 여사와 만나지 않으면 앞으로 내 말 듣겠다고 했잖아. 설마 후회해?”권하윤은 할 말을 잃었다.‘이게 어딜 봐서 만나지 않은 거냐고? 상대가 죽어서 못 만난 거지.’그녀의 눈동자에서 반항을 보아낸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불복하는 거야?”“그럴 리가요.”권미란은 죽었지만 공태준이 아직 남아있다.심지어 민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담배를 피워 대는 민도준의 얼굴에 드리운 미소는 담배 연기에 감싸져 흐릿해졌다.“그래요. 직접적으로 말하죠. 혹시 우리 제수씨한테 관심 있어요?”공태준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민도준의 목덜미에 난 손톱자국을 슬쩍 흘겨보더니 살짝 웃음기 섞인 눈을 들며 입을 열었다.“네.”곧이어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민도준은 담배를 테이블에 눌렀다.“하. 가주님이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인정해 버리니 적응이 안 되네요. 어디 얘기나 좀 들어봅시다. 이야기가 감동적이라면 제가 제수씨를 가주님한테 드릴지 또 누가 알겠습니까?”“오해한 것 같네요. 권하윤 씨는 처음 뵙는 분이니 이야기라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두루두루 제 이상형과 부합되는 것뿐입니다.”“오-”공태준의 담담한 대답에 민도준은 끝 음을 길게 끌었다.“그렇군요. 그거 뭐라더라? 첫눈에 반한 거, 맞죠?”주위에 흩뿌려지는 담배 연기에 공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첫눈에 반했든 마음에 들든 제가 포기하기를 바라면 직접 말씀하세요. 죄를 묻는 듯 캐물을 필요 없습니다. 민 사장님이 마음에 둔 사람이라면 당연히 빼앗지 않을 테니까요.”“그 말은 오히려 가주님이 저한테 양보한다는 소리로 들리네요.”“그럴 리가요.”권하윤한테 관심 없는 듯한 공태준의 무덤덤한 태도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경성에 얼마간 머물 예정인가요?”“공씨 가문의 리조트가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아 한번 보러 왔습니다. 휴식할 겸.”“오, 그렇다면 한동안 머물 예정이라는 뜻이군요?”“네. 그럴까 합니다.”민도준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래요. 그렇다면 경치 구경하는 걸 방해하지 않을게요.”“다음에 봐요.”-민도준이 다시 옆방으로 돌아왔을 때 소파 위에 누워있는 여인은 아직 깨지 않았다.하지만 뭔가 슬픈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댔다.그리고 곧바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살짝 흐느끼는 여자의
권하윤이 눈을 떴을 때 날은 어슴푸레 밝아왔다.그녀는 너무 오래 자서 깨질 것만 같은 머리를 문지르면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그렇게 얼마간 물을 맞고 나서야 무겁던 몸뚱아리가 조금 가벼워졌다.시계를 보니 어머니와 동생이 이미 도착했을 시간이었다.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을 켜보니 이미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일반적인 광고 문자 같아 보였지만 그 안에는 그들끼리 미리 짜놓은 암호가 들어있었다. 이미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문자였다.고용인도 아마 오랜 경험으로 그녀가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뭔가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 이렇게 조심히 행동하는 것인 듯싶다.권하윤은 먼저 문을 잠그고 그것도 불안한지 욕실 안으로 들어가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전화가 연결되기 바쁘게 건너편에서 이시영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언니, 왜 안 왔어? 어디 있는 거야? 나 언니 찾으러 갈래!”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양현숙이 딸의 전화를 빼앗았다. 그녀는 애써 자제하는 듯했지만 목소리에는 여전히 조급함이 묻어있었다.“너 지금 안전한 거 맞아?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지?”“저 괜찮아요. 그저 당분간 만나러 가지 못할 뿐이에요. 먼저 오빠와 합류하세요. 오빠 쪽도 더 이상 미루면 안 되니까.”권하윤이 안전하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양현숙은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슬픔은 쉽게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권하윤이 걱정할까 봐 애써 억누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마. 우리를 데려다준 사람이 오늘 상황 확인해 보러 갈 거랬어. 만약 일이 순조롭다면 아마 내일에 바로 네 오빠 데려올 수 있어.”‘내일…….’너무 많이 놀라고 실망한 전적이 있기에 권하윤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일에 저도 모르게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그러면서 오빠가 지금 있는 곳은 평범한 병원이고 권씨 가문의 명령으로 오빠를 치료해 줄 뿐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고 애써 최면을 걸었다.그렇다면 권씨 가문이 몰락한 지금, 그들이 오빠를 놓아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권하윤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엄화진은 권하윤을 힐끗 바라봤다. 보아하니 그녀의 고민도 없는 말투에 살짝 의심을 품는 듯했다.그도 그럴 것이, 권씨 가문은 오랜 세월 경성에 자리 잡고 있던 재벌가로서 망했다 할지라도 남은 자산이 천문학 숫자에 달한다. 재벌가 고문 변호사로 일해오던 엄화진마저 본 적 없는 액수를 권하윤은 고민도 없이 포기했으니 의심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그렇다고 그녀는 고객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아니다.오히려 계약서를 덮으며 알았다는 간단한 답변을 내놓았다.확인차 권희연에게 전화해 결정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동의했다. 심지어 권하윤이 그녀 대신 남겨두겠다던 배상금마저 거절했다.이미 권씨 가문 사람이 아니니 권씨 가문의 것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며 말이다.덤덤한 말투를 보니 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때문에 권하윤도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권하윤이 통화를 끝내기 바쁘게 엄화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이 자산 외에도 체인 레스토랑, 요양원, 그리고 온천 펜션이 남아있습니다. 확인해 본 결과 모두 적자가 계속되고 있는데, 만약 기부를 원하신다면 레스토랑은 영업을 중지하는 걸 권장드립니다. 물론 가게 임대료 기간이 아직 남아 있어 조금 낭비이긴 하지만 계속 오픈하기보다 문을 닫는 게 손해가 가장 적습니다.”“온천 펜션 같은 경우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부지도 넓지만 온천을 제외하고 특별한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주위에 이미 다른 리조트가 들어서 계속 영업하려면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해야 하는데 그만큼 빨리 수입을 창출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행히 권씨 가문의 개인 부지라서 원하신다면 그곳에 다른 사업을 해보실 수는 있습니다.”권하윤은 위치를 슬쩍 확인해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고마워요.”“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엄화진은 이 말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가 떠난 뒤, 권하윤은 얇은 종이 쪼가리 몇 장을 꽉 잡은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오전 8시, 아침 해
길모퉁이에 서 있는 차 안.조수석에 앉은 이남기가 권하윤을 바라봤다.“인사가 늦었네요, 이남기라고 합니다. 은우 형과 마찬가지로 공태준 가주님의 사람입니다.”서은우라는 이름 세 글자를 듣는 순간 권하윤의 심장은 욱신거렸다.하지만 그런 고통은 공태준이라는 세 글자를 듣는 순간 경계로 바뀌었다.‘공태준? 공태준의 사람이 나를 왜 찾아왔지? 설마 뭔가 눈치챘나?’이남기는 그녀의 의심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저는 은우 형과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만약 은우 형이 없었다면 저도 지금까지 살지 못했을 거고요.”권하윤은 상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돌렸다.“죄송하지만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저는 왜 찾아오셨죠?”“은우 형한테서 많이 들었습니다, 이시윤 씨.”“…….”놀라기도 잠시, 권하윤은 애써 감정을 억제하며 입을 열었다.“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저 권 씨예요, 권하윤이라고 불러주세요.”그녀의 말과 함께 공기 속에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그러던 그때.“제 말 안 믿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은우 형이 저에게는 은인이나 마찬가지라서 형의 유해를 해원에 데려가고 싶어요. 만약 권하윤 씨가 알고 있다면 저한테 알려주세요.”말을 마친 뒤 이남기는 그녀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남기고 가버렸다. 그가 남기고 간 쪽지에 쓰인 숫자를 보는 순간, 권하윤은 눈앞이 어질해 났다.사람은 정말 이상한 생물인 듯싶다. 분명 성은우가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유해라는 두 글자를 듣는 순간 그녀는 가슴이 미어질 것처럼 아프니 말이다.아마 그의 시신을 보지 못해 아직 살아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어 그럴지도 모른다.하지만 이남기의 말은 그녀를 현실로 끌어왔다.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할 수 없도록 말이다.‘은우는 나 때문에 죽은 거야…….’그녀는 운전대에 엎드려 등을 한껏 움츠러뜨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그 시각, 멀지 않은 차 안.“가주님.”“물어봤어?”“네, 하지만 시윤 씨는 모르는 듯
안방에 들어가 보니, 민상철은 침대에 누워있는 대신 정신을 바짝 차린 채 중앙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한눈에 봐도 뭔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그때 강수연은 권하윤을 떼어내야 한다는 마음에 적극적으로 입을 열었다.“아버님, 저희는 왜 부르셨어요? 혹시 발표할 일이라도 있나요?”하지만 민상철은 언짢은 듯 그녀를 흘겨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강수연도 그제야 자신이 너무 조급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그러던 그때, 민상철은 흐릿한 눈으로 권하윤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훑어보았다.“혼자서 권씨 가문을 맡게 됐으니 고생이 많다.”권하윤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충 마무리됐습니다.”“음,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장 집사한테 말해두거라.”그녀는 당연히 이런 겉치레적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리 없다. 때문에 그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렇게 한참 얘기하다가 민상철은 손에 걸린 염주 팔찌를 돌리며 겨우 본론으로 들어갔다.“네가 우리 승현이와 약혼한 지도 꽤 됐지 아마? 약혼식 때 두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 있으면 정식으로 식을 치르게 하겠다고 하다 보니 지금까지 미뤄졌구나.”암시가 섞인 말에 강수연은 똑똑한 척 끼어들었다.“아휴, 그때 약혼을 너무 급하게 치렀죠. 사실 그저 두 집안 아이들이 잘 지내다 보니 같이 모여서 밥 한 끼 한 것뿐이니 약혼식이랄 것도 없습니다.”권하윤은 순간 웃음이 났다. 강수연의 말은 그녀와 민승현의 약혼은 무효이니 이 기회에 파혼하는 게 당연하다는 뜻이었다.하지만 이건 그녀가 바라던 바인지라 반박을 하지않고 민상철의 대답을 기다렸다.그런데 그때.“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민상철은 오히려 버럭 화를 냈다.그의 반응에 강수연은 어리둥절했다.“아버님…….”“약혼이 무슨 어린애들 장난인 줄 아나? 경성 사람들이라면 두 사람이 약혼했다는 거 다 알 텐데 그걸 없던 일로 하겠다고?”평소에도 위엄있는
강수연은 밖으로 나가기 전 권하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민승현에게 어렵게 차려진 기회를 권하윤이 망칠까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하지만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기는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권하윤의 행동에 그녀는 일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발만 동동 굴렀다.그러던 그때.“크흠.”경고가 섞인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민상철의 어두운 눈과 마주치자 강수연은 더 이상 꾸물거리지 못하고 목을 한껏 움츠린 채 도망치듯 사라졌다.분명 사람 하나 줄었을 뿐인데 공기는 일순 희박해졌다.민상철은 역시나 오랫동안 비즈니스계를 주름잡던 인물이라 그런지 아무리 연세가 있다해도 카리스마가 줄지 않았다. 더욱이 이 순간 권하윤에게 겁을 주려는 생각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언의 압박만 가했다.그렇게 침묵이 지속되는 동안 권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물론 압박감 때문은 아니었다. 민도준과 오랫동안 지내다 보니 이런 압박감쯤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다.그것보다는 민상철이 갑자기 그녀와 민승현의 결혼을 밀어붙이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다.권씨 가문이 진 뒤로 그녀는 일반 가정집 여식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권씨 가문에 아직 남은 돈이 있다고는 하지만 민씨 가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아니다.‘설마…… 민도준 씨 때문인가?’하지만 생각해 보니 또 그런 건 아니었다. 민상철이 팔에 염주를 차고 있는다고 마음이 부처님 같은 건 아니기에 그녀와 민도준 사이의 관계를 알았다면 당장 그녀를 처리하면 그만이지 민승현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으니까.‘민씨 가문 정도면 나를 처리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텐데.’그렇게 한참 동안 생각하던 그때, 민상철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내가 왜 너랑 승현이 결혼을 밀어붙이는지 알겠느냐?”권하윤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말씀해 주십시오.”“흥, 역시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어 무서울 거 없다 이건가?”그 말에 권하윤의 심장은 철렁 가라앉았다. 솔직히 민상철이 일부로 떠보는 건지 아니면 이미 확답을 얻은 건지 긴가민가했다.하지만 그녀가
민상철의 낯빛은 순간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뜻이냐? 설마 거절하겠다는 뜻이냐?”권하윤은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거절이라니요. 할아버님께서 저한테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제가 거절하면 너무한 거죠. 권씨 가문이 이렇게 됐는데도 저를 받아주고 잘먹고 잘 살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하니 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게 있다면…….”권하윤이 말끝을 흐렸지만 민상철은 당연히 이해했다. 그녀가 민도준이 방해를 할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을.한편, 권하윤은 말하면서 민상철의 눈치를 살폈다.솔직히 그녀가 이 한마디를 내뱉은 건 엄청난 모험이다. 만약 민상철이 그녀가 귀찮다고 생각해 뒤탈을 없애려고 한다면 그녀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하지만 그녀는 도박을 하는 거다. 물론 뭔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민상철이 아직은 자기 목숨을 함부로 하지 않을 거라고.침묵이 이어질수록 권하윤의 심장도 따라서 쪼그라들었다.그녀를 바라보는 민상철의 눈빛은 마치 붉게 물든 칼날 같아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녹이 쓸어 사용할 수 없어 보이지만 찬찬히 보면 그 붉은 자국이 모두 핏자국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권하윤은 심지어 민상철이 이미 자기를 죽이려고 결정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민상철의 덤덤한 말투가 귀에 들려왔다.“그렇다면 어찌해야 한다는 거냐? 네 뜻을 말해보거라.”그 말에 권하윤은 겨우 낮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 모든 게 저 때문에 일어났으니 제가 떠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하.”민상철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떠나려는 거니? 아니면 시간을 벌려는 거니?”권하윤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물론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녀가 어렵사리 민도준이라는 뒷배가 생겼으니 그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민상철의 그런 의심을 한두 마디로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때문에 권하윤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다.이에 그녀는 눈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