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방 안에 불이 켜지지 않아 권하윤은 당연히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공태준을 위해 준비된 휴게실이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게다가 공태준이 홀에서 식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휴게실에서 쉬고 있다는 게 더욱 놀라웠다.“죄송합니다. 방을 잘못 들어온 것 같네요. 바로 나갈게요.”권하윤은 차마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그녀는 뻔뻔하게 대답했다.하지만 그녀가 나가려고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찰나,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들려왔다.“저 지금 약을 붙이고 있어서 움직이기 불편해서 그러는데 혹시 물 좀 가져다줄 수 있나요?”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살짝 돌려 확인하니 공태준이 확실히 소파에 누운 채 이마에 약봉지를 얹어 놓고 있어 두 눈이 가려진 상태였다.그제야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바로 나가고 싶었지만 너무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가 상대가 눈을 뜨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테이블에 놓인 물을 그에게 건넸다.“자요.”상대가 물병을 잡지 못하자 권하윤은 침착하게 그의 손바닥에 쥐여주기까지 했다.하지만 물병을 전하는 순간 차가운 손끝이 그녀의 손등을 스쳤다. 흠칫 놀라 손을 뒤로 뺄 때까지도 그 촉감은 여전히 그녀의 손등에 남아있었다.“죄송해요.”너무나 가까운 거리라서 한약 냄새가 권하윤의 코끝을 자극했다. 그건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냄새였다.하지만 그녀는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한 태도를 보였다.“괜찮습니다.”“고마워요.”“네.”대충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난 뒤 권하윤은 곧바로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하지만 방에서 시간을 허비한 탓에 어느덧 몇 분밖에 남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그녀의 손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 심지어 버튼을 여러 번 누른다고 속도가 빨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쉴 새 없이 버튼을 꾹꾹 눌러댔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이 속이 타들어갔다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옥상으로 향하는 몇 초는 지옥 같았다.권하윤은 점점
헬기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권하윤을 속박하고 있던 힘이 스르륵 풀렸다.그 순간 권하윤은 마치 온몸의 힘이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그제야 갈비뼈에서 전해지는 고통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방금 전 민도준이 그녀를 끌어안았을 때 너무 힘껏 발버둥 치면서 다친 듯싶었다.민도준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그녀를 어두운 눈빛으로 빤히 내려다봤다.송골송골 맺혔던 땀방울이 목울대를 타고 흘러내렸고 목덜미에 튀어 오른 시퍼런 핏줄이 아직 가시지 않은 조급함과 함께 펄떡펄떡 뛰면서 점점 온몸에 퍼졌다.이윽고 그는 무릎 한쪽을 꿇고 앉아 절망으로 가득한 권하윤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이젠 해명도 안한다 이건가?”권하윤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녀가 뭐라 말하건 이제 아무 소용도 없었다. 될 대로 되라는 듯한 그녀의 절망스러운 태도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고씨 가문에 신경이 쏠려 하윤 씨를 놓칠 뻔했네. 솔직히 하윤 씨가 내 눈꺼풀 아래에서 도망갈 배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이걸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운이 나쁘자고 해야 할지. 응?”마지막 한 글자를 내뱉는 순간 그나마 부드럽게 턱을 움켜쥐었던 손은 당장이라도 권하윤의 턱을 부스러트릴 것처럼 조여왔다.하지만 권하윤은 그저 눈살을 찌푸릴 뿐 버둥대지도 밀쳐내지도 않았다.그런 절망적인 표정은 오히려 더 거슬리기만 했다.“왜? 이젠 거짓말하기도 귀찮아? 그래, 좋아.”민도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했다.“권 여사를 데리러 간 애들도 마침 돌아올 때가 됐는데 두 사람 회포나 풀게 자리 마련해주지.”권미란의 이름을 듣는 순간 고요하기만 하던 권하윤의 눈동자는 끝내 조금 흔들렸다.바닥에 앉아 있던 그녀는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민도준을 바라봤다.그리고 그때, 민도준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하
민도준은 된다, 안된다 말도 없이 울며 애원하는 권하윤을 빤히 바라봤다.예전의 그녀는 언제나 겉으로 얌전한 모습을 하면서 속으로는 쉽게 길들지 않는 오만함을 숨기고 있어 기회만 있으면 본모습을 드러냈다가 모질게 마음먹고 혼내주려고 하면 또 불쌍한 척 연기하며 가식적인 모습으로 그의 동정을 사곤 했다.하지만 성은우 그놈이 나타난 뒤로 그녀는 완전히 변했다. 온몸의 가시를 바짝 세운 채 그를 경계했고 스스로 자신의 적대심을 잘 숨겼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민도준은 언제나 그녀의 눈에서 원망을 볼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바짝 세웠던 가시와 가식적인 모습마저 모두 뜯어낸 채 처량한 모습으로 그에게 애원하고 있다.심지어 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의 손을 들어 자기 몸에 갖다 댔다.“저 앞으로 별장에서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도준 씨만 기다릴게요. 도준 씨가 보고 싶을 때면 찾아올 수 있게. 네? 제발요, 도준 씨.”긴 속눈썹마저 눈물에 젖어 파르르 떨리는 애처로운 모습을 보자 민도준은 웃으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싫은데.”다정한 동작과 달리 온도 없는 대답에 권하윤은 몸이 굳어버렸다. 일순 눈에 드리웠던 마지막 희망도 점점 점멸되었다.민도준이 얼굴을 만지작대며 눈물을 닦아주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와중에도 권하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자, 이제 하윤 씨 어머니 뵈러 가야지.”그녀는 멍하니 그의 손에 이끌려 몇 발짝 걸었다. 그사이 흐른 짤막한 몇 초간 그녀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도준 씨가 그동안 나와 오랜 시간 어울린 건 그래도 나를 어느 정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의미 아닐까? 내가 만약 공은채 씨의 죽음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친다면 지난날의 인연을 봐서라도 우리 가족은 내버려 두지 않을까?’손바닥 안에 감싸 쥔 작은 손이 점점 차가워지자 민도준은 웃으며 권하윤을 품에 끌어들였다.“벌써 이렇게 겁먹으면 이따가 어떡하려고 그래?”권하윤은 눈을 내리깐 채 여전히 침묵을 유지했다.엘리베이터가 마침 멈춰서자 민
민도준은 씩 웃으며 뻣뻣하게 굳어버린 권하윤을 놀리기라도 하듯 그녀를 앉힌 다리를 들썩였다.“들었어?”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여전히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권하윤을 보자 민도준은 그녀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애들 돌아왔다는데 뭐해? 일어나지 않고?”꼭두각시처럼 끌려 일어난 권하윤은 민도준이 문을 열려는 찰나 그가 옆에 버려두었던 과일칼을 들어 자기 심장을 향해 내리 찔렀다.하지만 예상했던 통증은 전해지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커다란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고 있었고 손목으로부터 팔뚝까지 길게 뻗은 상처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순간 그녀의 머리는 백지장이 되어버렸다. 이윽고 눈을 들자 마침 포악한 기운을 내뿜는 민도준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왜…….”“죽고 싶으면 다른 곳에서 죽어. 내 앞에서 죽지 말고.”말하면서 그녀를 힘껏 밀치는 순간 한민혁이 마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너무 한순간에 벌어진 터라 권하윤은 긴장할 새도 없었다. 하지만 들어온 한민혁은 그녀보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심지어 민도준이 피가 철철 흐르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걸 보는 순간 그는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민도준은 그런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왜? 마음에 들어? 너도 하나 그어줄까?”“아니, 그럴 필요 없어.”부르르 떨면서 대답하는 한민혁을 바라보며 민도준은 담배를 입에 갖다 댔다.“사고라도 난 거야?”민도준이 대충 짐작한 듯하자 한민혁은 눈을 질근 감으며 입을 열었다.“그게, 권 여사와 권효은을 운송하던 차량이 브레이크 고장이 났대.”“죽었어?”“응…… 차가 마침 가로로 부딪히는 바람에 뒷좌석에 앉아 있던 권 여사와 권효은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그 소식에 권하윤의 심장은 세게 요동쳤다. 겨우 한고비 넘겼다는 안도감과 갑자기 벌어진 일에 대한 막연함이 함께 몰려왔다.그렇다고 권미란과 권효은이 안타까운 건 아니었다. 지금껏 두 사람이 저지른 짓만 생각하면 이건 어찌 보면 업보였다.‘하지만…
권하윤은 일순 멍해졌다.따라서 그녀의 막연한 눈빛에 민도준은 눈을 치켜올렸다.“왜? 모른 척하는 거야?”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민도준이 권하윤을 오해한 거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공태준이 그녀를 도와주다니 정말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그때 민도준이 그녀의 코끝을 살짝 누르며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아까 내가 CCTV에서 뭘 봤을 것 같아? 우리 욕심쟁이 여우가 옆방으로 숨어들어 한참 동안 나오지 않더라고. 어디 말해 봐.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빌었길래 공태준이 나서서 도와줬는지? 아까처럼 울면서 빌었어? 아니면…….”허리에 슬쩍 두른 팔에 일순 힘이 들어가더니 얼마쯤 벌어져 있던 거리가 바싹 좁혀지며 민도준의 가슴에 부딪혔다.이윽고 권하윤의 귓가에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른 걸 했어?”그제야 권하윤은 민도준이 자기를 의심한다는 걸 알아챘다. 그것도 공태준 앞에서 꼬리 쳤다고 말이다. 생각만 해도 황당한 일이었다.하지만 더 이상의 오해는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녀는 쉰 목소리로 애써 설명했다.“그런 거 아니에요. 아까는 한민혁 씨를 피하려고 빈방을 찾다가 그 방만 열려 있길래 들어간 거예요.”“그래? 그러면 내가 오해한 거네?”말은 이렇게 했지만 남자의 말속에 담겨있는 압박감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그런데 그것도 도와준 거 맞잖아.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권하윤은 이내 그의 눈길을 피했다.“약혼식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 아마 벌써 돌아가셨을 거예요.”“걱정할 거 없어.”민도준은 다정하게 권하윤의 귓불을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나랑 할 얘기가 있어 아직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헛걸음하지는 않을 거야.”남자의 말에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혀 애원하는 눈빛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그녀의 눈빛을 받은 민도준은 이내 눈썹을 들어 올렸다.“얼굴 마주 보고 인사하고 싶지 않아?”권하윤은 있는 힘껏 머리를 저었다.이에 민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렇다면 다른
민도준의 어깨에 손을 얹은 권하윤은 마치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눈가가 흠뻑 젖어있었고 도톰한 입술은 너무 짓씹어 피가 떨어질 것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심지어 살짝 웨이브진 머리마저 마구 흐트러져 나른한 분위기를 냈고 잔뜩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은 일부러 유혹할 때보다 더 매혹적이었다.“도준 씨…….”혀로 볼을 꾹 밀던 민도준은 손가락을 권하윤의 머리카락 사이에 끼워 넣더니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세게 문질렀다.“나를 홀리라는 거 아니야. 제대로 해.”하지만 권하윤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이에 그녀는 머리털이 비쭉 곤두서 잔뜩 힘을 주며 민도준의 가슴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민 사장님, 저 급한 일정 때문에 얘기는 나중에 해요.”곧이어 민도준의 색욕 섞인 웃음소리가 문을 관통한 채 공태준의 귀에 들어갔다.“그래요. 제가 바빠서 배웅하지는 못하겠네요. 다음에 봐요.”이를 꽉 악문 공태준은 애써 참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떠나려는 순간 문 안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앞으로 내디디려던 발이 마치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붙어버렸다.서늘한 복도와 달리 방 안은 후끈 달아올랐다.민도준은 문틈을 슬쩍 흘겨보다가 다시 눈을 내리깔아 자기 아래에 눌려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하, 여자들 앞에서는 참 매너 있단 말이야.”공태준이 떠났다는 소리에 권하윤의 팽팽하던 정신은 그제야 풀렸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의 손등이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톡톡 쳤다.“공태준도 떠났는데 약속 지킬 때가 되지 않았나?”“무슨…… 약속…….”“내가 권 여사와 만나지 않으면 앞으로 내 말 듣겠다고 했잖아. 설마 후회해?”권하윤은 할 말을 잃었다.‘이게 어딜 봐서 만나지 않은 거냐고? 상대가 죽어서 못 만난 거지.’그녀의 눈동자에서 반항을 보아낸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불복하는 거야?”“그럴 리가요.”권미란은 죽었지만 공태준이 아직 남아있다.심지어 민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담배를 피워 대는 민도준의 얼굴에 드리운 미소는 담배 연기에 감싸져 흐릿해졌다.“그래요. 직접적으로 말하죠. 혹시 우리 제수씨한테 관심 있어요?”공태준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민도준의 목덜미에 난 손톱자국을 슬쩍 흘겨보더니 살짝 웃음기 섞인 눈을 들며 입을 열었다.“네.”곧이어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민도준은 담배를 테이블에 눌렀다.“하. 가주님이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인정해 버리니 적응이 안 되네요. 어디 얘기나 좀 들어봅시다. 이야기가 감동적이라면 제가 제수씨를 가주님한테 드릴지 또 누가 알겠습니까?”“오해한 것 같네요. 권하윤 씨는 처음 뵙는 분이니 이야기라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두루두루 제 이상형과 부합되는 것뿐입니다.”“오-”공태준의 담담한 대답에 민도준은 끝 음을 길게 끌었다.“그렇군요. 그거 뭐라더라? 첫눈에 반한 거, 맞죠?”주위에 흩뿌려지는 담배 연기에 공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첫눈에 반했든 마음에 들든 제가 포기하기를 바라면 직접 말씀하세요. 죄를 묻는 듯 캐물을 필요 없습니다. 민 사장님이 마음에 둔 사람이라면 당연히 빼앗지 않을 테니까요.”“그 말은 오히려 가주님이 저한테 양보한다는 소리로 들리네요.”“그럴 리가요.”권하윤한테 관심 없는 듯한 공태준의 무덤덤한 태도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경성에 얼마간 머물 예정인가요?”“공씨 가문의 리조트가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아 한번 보러 왔습니다. 휴식할 겸.”“오, 그렇다면 한동안 머물 예정이라는 뜻이군요?”“네. 그럴까 합니다.”민도준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래요. 그렇다면 경치 구경하는 걸 방해하지 않을게요.”“다음에 봐요.”-민도준이 다시 옆방으로 돌아왔을 때 소파 위에 누워있는 여인은 아직 깨지 않았다.하지만 뭔가 슬픈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댔다.그리고 곧바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살짝 흐느끼는 여자의
권하윤이 눈을 떴을 때 날은 어슴푸레 밝아왔다.그녀는 너무 오래 자서 깨질 것만 같은 머리를 문지르면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그렇게 얼마간 물을 맞고 나서야 무겁던 몸뚱아리가 조금 가벼워졌다.시계를 보니 어머니와 동생이 이미 도착했을 시간이었다.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을 켜보니 이미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일반적인 광고 문자 같아 보였지만 그 안에는 그들끼리 미리 짜놓은 암호가 들어있었다. 이미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문자였다.고용인도 아마 오랜 경험으로 그녀가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뭔가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 이렇게 조심히 행동하는 것인 듯싶다.권하윤은 먼저 문을 잠그고 그것도 불안한지 욕실 안으로 들어가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전화가 연결되기 바쁘게 건너편에서 이시영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언니, 왜 안 왔어? 어디 있는 거야? 나 언니 찾으러 갈래!”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양현숙이 딸의 전화를 빼앗았다. 그녀는 애써 자제하는 듯했지만 목소리에는 여전히 조급함이 묻어있었다.“너 지금 안전한 거 맞아?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지?”“저 괜찮아요. 그저 당분간 만나러 가지 못할 뿐이에요. 먼저 오빠와 합류하세요. 오빠 쪽도 더 이상 미루면 안 되니까.”권하윤이 안전하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양현숙은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슬픔은 쉽게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권하윤이 걱정할까 봐 애써 억누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마. 우리를 데려다준 사람이 오늘 상황 확인해 보러 갈 거랬어. 만약 일이 순조롭다면 아마 내일에 바로 네 오빠 데려올 수 있어.”‘내일…….’너무 많이 놀라고 실망한 전적이 있기에 권하윤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일에 저도 모르게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그러면서 오빠가 지금 있는 곳은 평범한 병원이고 권씨 가문의 명령으로 오빠를 치료해 줄 뿐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고 애써 최면을 걸었다.그렇다면 권씨 가문이 몰락한 지금, 그들이 오빠를 놓아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권하윤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