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은 씩 웃으며 뻣뻣하게 굳어버린 권하윤을 놀리기라도 하듯 그녀를 앉힌 다리를 들썩였다.“들었어?”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여전히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권하윤을 보자 민도준은 그녀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애들 돌아왔다는데 뭐해? 일어나지 않고?”꼭두각시처럼 끌려 일어난 권하윤은 민도준이 문을 열려는 찰나 그가 옆에 버려두었던 과일칼을 들어 자기 심장을 향해 내리 찔렀다.하지만 예상했던 통증은 전해지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커다란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고 있었고 손목으로부터 팔뚝까지 길게 뻗은 상처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순간 그녀의 머리는 백지장이 되어버렸다. 이윽고 눈을 들자 마침 포악한 기운을 내뿜는 민도준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왜…….”“죽고 싶으면 다른 곳에서 죽어. 내 앞에서 죽지 말고.”말하면서 그녀를 힘껏 밀치는 순간 한민혁이 마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너무 한순간에 벌어진 터라 권하윤은 긴장할 새도 없었다. 하지만 들어온 한민혁은 그녀보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심지어 민도준이 피가 철철 흐르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걸 보는 순간 그는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민도준은 그런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왜? 마음에 들어? 너도 하나 그어줄까?”“아니, 그럴 필요 없어.”부르르 떨면서 대답하는 한민혁을 바라보며 민도준은 담배를 입에 갖다 댔다.“사고라도 난 거야?”민도준이 대충 짐작한 듯하자 한민혁은 눈을 질근 감으며 입을 열었다.“그게, 권 여사와 권효은을 운송하던 차량이 브레이크 고장이 났대.”“죽었어?”“응…… 차가 마침 가로로 부딪히는 바람에 뒷좌석에 앉아 있던 권 여사와 권효은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그 소식에 권하윤의 심장은 세게 요동쳤다. 겨우 한고비 넘겼다는 안도감과 갑자기 벌어진 일에 대한 막연함이 함께 몰려왔다.그렇다고 권미란과 권효은이 안타까운 건 아니었다. 지금껏 두 사람이 저지른 짓만 생각하면 이건 어찌 보면 업보였다.‘하지만…
권하윤은 일순 멍해졌다.따라서 그녀의 막연한 눈빛에 민도준은 눈을 치켜올렸다.“왜? 모른 척하는 거야?”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민도준이 권하윤을 오해한 거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공태준이 그녀를 도와주다니 정말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그때 민도준이 그녀의 코끝을 살짝 누르며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아까 내가 CCTV에서 뭘 봤을 것 같아? 우리 욕심쟁이 여우가 옆방으로 숨어들어 한참 동안 나오지 않더라고. 어디 말해 봐.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빌었길래 공태준이 나서서 도와줬는지? 아까처럼 울면서 빌었어? 아니면…….”허리에 슬쩍 두른 팔에 일순 힘이 들어가더니 얼마쯤 벌어져 있던 거리가 바싹 좁혀지며 민도준의 가슴에 부딪혔다.이윽고 권하윤의 귓가에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른 걸 했어?”그제야 권하윤은 민도준이 자기를 의심한다는 걸 알아챘다. 그것도 공태준 앞에서 꼬리 쳤다고 말이다. 생각만 해도 황당한 일이었다.하지만 더 이상의 오해는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녀는 쉰 목소리로 애써 설명했다.“그런 거 아니에요. 아까는 한민혁 씨를 피하려고 빈방을 찾다가 그 방만 열려 있길래 들어간 거예요.”“그래? 그러면 내가 오해한 거네?”말은 이렇게 했지만 남자의 말속에 담겨있는 압박감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그런데 그것도 도와준 거 맞잖아.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권하윤은 이내 그의 눈길을 피했다.“약혼식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 아마 벌써 돌아가셨을 거예요.”“걱정할 거 없어.”민도준은 다정하게 권하윤의 귓불을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나랑 할 얘기가 있어 아직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헛걸음하지는 않을 거야.”남자의 말에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혀 애원하는 눈빛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그녀의 눈빛을 받은 민도준은 이내 눈썹을 들어 올렸다.“얼굴 마주 보고 인사하고 싶지 않아?”권하윤은 있는 힘껏 머리를 저었다.이에 민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렇다면 다른
민도준의 어깨에 손을 얹은 권하윤은 마치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눈가가 흠뻑 젖어있었고 도톰한 입술은 너무 짓씹어 피가 떨어질 것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심지어 살짝 웨이브진 머리마저 마구 흐트러져 나른한 분위기를 냈고 잔뜩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은 일부러 유혹할 때보다 더 매혹적이었다.“도준 씨…….”혀로 볼을 꾹 밀던 민도준은 손가락을 권하윤의 머리카락 사이에 끼워 넣더니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세게 문질렀다.“나를 홀리라는 거 아니야. 제대로 해.”하지만 권하윤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이에 그녀는 머리털이 비쭉 곤두서 잔뜩 힘을 주며 민도준의 가슴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민 사장님, 저 급한 일정 때문에 얘기는 나중에 해요.”곧이어 민도준의 색욕 섞인 웃음소리가 문을 관통한 채 공태준의 귀에 들어갔다.“그래요. 제가 바빠서 배웅하지는 못하겠네요. 다음에 봐요.”이를 꽉 악문 공태준은 애써 참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떠나려는 순간 문 안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앞으로 내디디려던 발이 마치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붙어버렸다.서늘한 복도와 달리 방 안은 후끈 달아올랐다.민도준은 문틈을 슬쩍 흘겨보다가 다시 눈을 내리깔아 자기 아래에 눌려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하, 여자들 앞에서는 참 매너 있단 말이야.”공태준이 떠났다는 소리에 권하윤의 팽팽하던 정신은 그제야 풀렸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의 손등이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톡톡 쳤다.“공태준도 떠났는데 약속 지킬 때가 되지 않았나?”“무슨…… 약속…….”“내가 권 여사와 만나지 않으면 앞으로 내 말 듣겠다고 했잖아. 설마 후회해?”권하윤은 할 말을 잃었다.‘이게 어딜 봐서 만나지 않은 거냐고? 상대가 죽어서 못 만난 거지.’그녀의 눈동자에서 반항을 보아낸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불복하는 거야?”“그럴 리가요.”권미란은 죽었지만 공태준이 아직 남아있다.심지어 민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담배를 피워 대는 민도준의 얼굴에 드리운 미소는 담배 연기에 감싸져 흐릿해졌다.“그래요. 직접적으로 말하죠. 혹시 우리 제수씨한테 관심 있어요?”공태준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민도준의 목덜미에 난 손톱자국을 슬쩍 흘겨보더니 살짝 웃음기 섞인 눈을 들며 입을 열었다.“네.”곧이어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민도준은 담배를 테이블에 눌렀다.“하. 가주님이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인정해 버리니 적응이 안 되네요. 어디 얘기나 좀 들어봅시다. 이야기가 감동적이라면 제가 제수씨를 가주님한테 드릴지 또 누가 알겠습니까?”“오해한 것 같네요. 권하윤 씨는 처음 뵙는 분이니 이야기라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두루두루 제 이상형과 부합되는 것뿐입니다.”“오-”공태준의 담담한 대답에 민도준은 끝 음을 길게 끌었다.“그렇군요. 그거 뭐라더라? 첫눈에 반한 거, 맞죠?”주위에 흩뿌려지는 담배 연기에 공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첫눈에 반했든 마음에 들든 제가 포기하기를 바라면 직접 말씀하세요. 죄를 묻는 듯 캐물을 필요 없습니다. 민 사장님이 마음에 둔 사람이라면 당연히 빼앗지 않을 테니까요.”“그 말은 오히려 가주님이 저한테 양보한다는 소리로 들리네요.”“그럴 리가요.”권하윤한테 관심 없는 듯한 공태준의 무덤덤한 태도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경성에 얼마간 머물 예정인가요?”“공씨 가문의 리조트가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아 한번 보러 왔습니다. 휴식할 겸.”“오, 그렇다면 한동안 머물 예정이라는 뜻이군요?”“네. 그럴까 합니다.”민도준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래요. 그렇다면 경치 구경하는 걸 방해하지 않을게요.”“다음에 봐요.”-민도준이 다시 옆방으로 돌아왔을 때 소파 위에 누워있는 여인은 아직 깨지 않았다.하지만 뭔가 슬픈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댔다.그리고 곧바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살짝 흐느끼는 여자의
권하윤이 눈을 떴을 때 날은 어슴푸레 밝아왔다.그녀는 너무 오래 자서 깨질 것만 같은 머리를 문지르면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그렇게 얼마간 물을 맞고 나서야 무겁던 몸뚱아리가 조금 가벼워졌다.시계를 보니 어머니와 동생이 이미 도착했을 시간이었다.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을 켜보니 이미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일반적인 광고 문자 같아 보였지만 그 안에는 그들끼리 미리 짜놓은 암호가 들어있었다. 이미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문자였다.고용인도 아마 오랜 경험으로 그녀가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뭔가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 이렇게 조심히 행동하는 것인 듯싶다.권하윤은 먼저 문을 잠그고 그것도 불안한지 욕실 안으로 들어가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전화가 연결되기 바쁘게 건너편에서 이시영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언니, 왜 안 왔어? 어디 있는 거야? 나 언니 찾으러 갈래!”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양현숙이 딸의 전화를 빼앗았다. 그녀는 애써 자제하는 듯했지만 목소리에는 여전히 조급함이 묻어있었다.“너 지금 안전한 거 맞아?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지?”“저 괜찮아요. 그저 당분간 만나러 가지 못할 뿐이에요. 먼저 오빠와 합류하세요. 오빠 쪽도 더 이상 미루면 안 되니까.”권하윤이 안전하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양현숙은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슬픔은 쉽게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권하윤이 걱정할까 봐 애써 억누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마. 우리를 데려다준 사람이 오늘 상황 확인해 보러 갈 거랬어. 만약 일이 순조롭다면 아마 내일에 바로 네 오빠 데려올 수 있어.”‘내일…….’너무 많이 놀라고 실망한 전적이 있기에 권하윤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일에 저도 모르게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그러면서 오빠가 지금 있는 곳은 평범한 병원이고 권씨 가문의 명령으로 오빠를 치료해 줄 뿐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고 애써 최면을 걸었다.그렇다면 권씨 가문이 몰락한 지금, 그들이 오빠를 놓아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권하윤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엄화진은 권하윤을 힐끗 바라봤다. 보아하니 그녀의 고민도 없는 말투에 살짝 의심을 품는 듯했다.그도 그럴 것이, 권씨 가문은 오랜 세월 경성에 자리 잡고 있던 재벌가로서 망했다 할지라도 남은 자산이 천문학 숫자에 달한다. 재벌가 고문 변호사로 일해오던 엄화진마저 본 적 없는 액수를 권하윤은 고민도 없이 포기했으니 의심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그렇다고 그녀는 고객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아니다.오히려 계약서를 덮으며 알았다는 간단한 답변을 내놓았다.확인차 권희연에게 전화해 결정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동의했다. 심지어 권하윤이 그녀 대신 남겨두겠다던 배상금마저 거절했다.이미 권씨 가문 사람이 아니니 권씨 가문의 것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며 말이다.덤덤한 말투를 보니 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때문에 권하윤도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권하윤이 통화를 끝내기 바쁘게 엄화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이 자산 외에도 체인 레스토랑, 요양원, 그리고 온천 펜션이 남아있습니다. 확인해 본 결과 모두 적자가 계속되고 있는데, 만약 기부를 원하신다면 레스토랑은 영업을 중지하는 걸 권장드립니다. 물론 가게 임대료 기간이 아직 남아 있어 조금 낭비이긴 하지만 계속 오픈하기보다 문을 닫는 게 손해가 가장 적습니다.”“온천 펜션 같은 경우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부지도 넓지만 온천을 제외하고 특별한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주위에 이미 다른 리조트가 들어서 계속 영업하려면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해야 하는데 그만큼 빨리 수입을 창출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행히 권씨 가문의 개인 부지라서 원하신다면 그곳에 다른 사업을 해보실 수는 있습니다.”권하윤은 위치를 슬쩍 확인해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고마워요.”“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엄화진은 이 말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가 떠난 뒤, 권하윤은 얇은 종이 쪼가리 몇 장을 꽉 잡은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오전 8시, 아침 해
길모퉁이에 서 있는 차 안.조수석에 앉은 이남기가 권하윤을 바라봤다.“인사가 늦었네요, 이남기라고 합니다. 은우 형과 마찬가지로 공태준 가주님의 사람입니다.”서은우라는 이름 세 글자를 듣는 순간 권하윤의 심장은 욱신거렸다.하지만 그런 고통은 공태준이라는 세 글자를 듣는 순간 경계로 바뀌었다.‘공태준? 공태준의 사람이 나를 왜 찾아왔지? 설마 뭔가 눈치챘나?’이남기는 그녀의 의심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저는 은우 형과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만약 은우 형이 없었다면 저도 지금까지 살지 못했을 거고요.”권하윤은 상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돌렸다.“죄송하지만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저는 왜 찾아오셨죠?”“은우 형한테서 많이 들었습니다, 이시윤 씨.”“…….”놀라기도 잠시, 권하윤은 애써 감정을 억제하며 입을 열었다.“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저 권 씨예요, 권하윤이라고 불러주세요.”그녀의 말과 함께 공기 속에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그러던 그때.“제 말 안 믿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은우 형이 저에게는 은인이나 마찬가지라서 형의 유해를 해원에 데려가고 싶어요. 만약 권하윤 씨가 알고 있다면 저한테 알려주세요.”말을 마친 뒤 이남기는 그녀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남기고 가버렸다. 그가 남기고 간 쪽지에 쓰인 숫자를 보는 순간, 권하윤은 눈앞이 어질해 났다.사람은 정말 이상한 생물인 듯싶다. 분명 성은우가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유해라는 두 글자를 듣는 순간 그녀는 가슴이 미어질 것처럼 아프니 말이다.아마 그의 시신을 보지 못해 아직 살아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어 그럴지도 모른다.하지만 이남기의 말은 그녀를 현실로 끌어왔다.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할 수 없도록 말이다.‘은우는 나 때문에 죽은 거야…….’그녀는 운전대에 엎드려 등을 한껏 움츠러뜨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그 시각, 멀지 않은 차 안.“가주님.”“물어봤어?”“네, 하지만 시윤 씨는 모르는 듯
안방에 들어가 보니, 민상철은 침대에 누워있는 대신 정신을 바짝 차린 채 중앙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한눈에 봐도 뭔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그때 강수연은 권하윤을 떼어내야 한다는 마음에 적극적으로 입을 열었다.“아버님, 저희는 왜 부르셨어요? 혹시 발표할 일이라도 있나요?”하지만 민상철은 언짢은 듯 그녀를 흘겨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강수연도 그제야 자신이 너무 조급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그러던 그때, 민상철은 흐릿한 눈으로 권하윤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훑어보았다.“혼자서 권씨 가문을 맡게 됐으니 고생이 많다.”권하윤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충 마무리됐습니다.”“음,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장 집사한테 말해두거라.”그녀는 당연히 이런 겉치레적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리 없다. 때문에 그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렇게 한참 얘기하다가 민상철은 손에 걸린 염주 팔찌를 돌리며 겨우 본론으로 들어갔다.“네가 우리 승현이와 약혼한 지도 꽤 됐지 아마? 약혼식 때 두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 있으면 정식으로 식을 치르게 하겠다고 하다 보니 지금까지 미뤄졌구나.”암시가 섞인 말에 강수연은 똑똑한 척 끼어들었다.“아휴, 그때 약혼을 너무 급하게 치렀죠. 사실 그저 두 집안 아이들이 잘 지내다 보니 같이 모여서 밥 한 끼 한 것뿐이니 약혼식이랄 것도 없습니다.”권하윤은 순간 웃음이 났다. 강수연의 말은 그녀와 민승현의 약혼은 무효이니 이 기회에 파혼하는 게 당연하다는 뜻이었다.하지만 이건 그녀가 바라던 바인지라 반박을 하지않고 민상철의 대답을 기다렸다.그런데 그때.“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민상철은 오히려 버럭 화를 냈다.그의 반응에 강수연은 어리둥절했다.“아버님…….”“약혼이 무슨 어린애들 장난인 줄 아나? 경성 사람들이라면 두 사람이 약혼했다는 거 다 알 텐데 그걸 없던 일로 하겠다고?”평소에도 위엄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