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이 방에서 나왔을 때 민승현은 마침 방문 앞에 서 있었다.하지만 고작 몇 분 사이에 그는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잘생긴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고 온몸에서 광기를 뿜어내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하고 말이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를 가볍게 무시한 채 좋은 형처럼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가자, 내려가서 얘기해.”거실.민도준은 털털하게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하지만 민승현은 오히려 여유로운 그와는 달리 잔뜩 얼어붙은 채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분명 그의 집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손님처럼 안지도 서지도 못한 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기 집인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하는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그때 민도준이 건너편 소파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리며 입을 열었다.“멍하니 서 있지 말고 앉아.”“두 사람 언제부터야?”민승현은 끝내 참지 못 하고 낮게 소리쳤다.하지만 민도준은 귀찮은 듯 고개를 돌리며 거리를 조금 유지하더니 그를 힐끗 바라봤다.“승현아, 너도 이젠 어린애가 아닌데 매사에 그렇게 감정조절 못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할 말 있으면 해, 소리치지 말고.”그런데 이미 이성을 잃은 민승현은 민도준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새 던져버렸는지 높게 소리쳤다.“둘이 진작부터 붙어먹었지? 그렇지?”자기의 형과 약혼녀가 자기 몰래 뒤에서 붙어먹으며 한민혁을 내세워 그를 바보로 만든 것만 생각하면 그는 사람을 죽이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하지만 잔뜩 흥분한 그와 달리 민도준은 여유롭게 담뱃재를 털어버리며 조금의 미안함도 없는 미소를 지었다.“같은 식구끼리 붙어먹는다니, 듣기 좀 거북하네. 네가 바쁜 것 같아 내가 대신 제수씨 돌봐준 것뿐이야.”그 말에 민승현은 피가 거꾸로 솟았고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돌봐줬다고? 돌봐준다는 사람이 침대에까지 끌어들여? 형! 권하윤은 형 제수씨야. 내 약혼녀고 내 여자라고!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쯧.”참을성을 잃은
기다리다 지친 한민혁은 민도준의 번호를 보는 순간 반가운 듯 전화를 받았다.“도준 형, 형 지금 통화 가능해?”“응. 해원에 무슨 일 있어?”“아니 그게…… 형이 시킨 대로 공태준을 죽어라 감시했는데…… 이상한 점이 없던데? 그냥 하던 대로 행동하기만 하고. 내가 건너 건너 알아봤는데 공태준은 권하윤 씨를 만난 적도 없고 누구인지도 모른대.”“음?”민도준의 눈에는 일순 흥미가 흘러나왔다.“그런데 걱정 마. 내가 다른 방법 생각해서 요 며칠 내로 반드시 알아낼 테니까.”“그럴 필요 없어. 돌아와.”“뭐?”한민혁은 민도준의 뜻밖의 명령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나 아직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는데 이대로 돌아가라고?”“딱 보면 상대가 나를 경계하고 있는데 네가 무슨 수로 알아내려고? 아예 공태준 머리라도 열어보게?”한민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내가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지 못해서 공태준한테 발각된 거야?”“너랑은 상관없어.”민도준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희뿌연 연기 속에서 알 수 없는 눈을 번뜩였다.그날 그가 일부러 권하윤더러 소리를 내게 한 건 일부러 상대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그때 공태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 더욱이 지금 그가 보이는 모든 행동도 그와 권하윤이 서로 모르는 관계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하지만 공태준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바로 과유불급,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것.만약 그가 진짜로 권하윤과 모르는 사이라면 자기가 아끼는 부하가 권하윤 때문에 목숨을 잃었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을 리 없다. 이미 모든 일을 알고 있어 아무것도 알아볼 필요가 없다면 모를까.“혹시 해원에서 문태훈 만났어?”느닷없는 민도준의 물음에 한민혁은 한숨을 내쉬었다.“말도 마. 나도 그 자식을 통해 뭐라도 좀 알아내려 했더니 전원이 계속 꺼져 있더라고. 다른 사람한테 물어봤더니 출장 갔대.”민도준은 피식 웃었다.‘출장? 하늘나라면 모를까.’전화를 끈 민도준은 이미 끝까지 타 손을 뜨겁
강민정이 무의식적으로 사실을 말하려던 찰나 누구라도 아는 사람이 생기면 2층에서 뛰어내리는 거로 끝내지 않을 거라던 민도준의 경고가 갑자기 귓가에 맴돌았다.이에 몸을 흠칫 떤 그녀는 최대한 억울한 목소리로 민승현을 설득했다.“오빠, 그게 무슨 말이야? 나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겠어.”“못 알아듣겠다고?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봤어!”자초지종을 들은 강민정은 민승현이 스스로 발견했다는 사실에 살짝 안도했다.하지만 민승현의 분노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왜 권하윤이 한민혁 그 자식이랑 바람피운다고 나 속였어? 대체 무슨 목적이야?”강민정이 민씨 저택에서 쫓겨난 뒤로부터 민승현은 줄곧 그녀에게 차갑게 대했다.오늘만 하더라도 그녀의 집으로 들어오기 바쁘게 소리부터 질러대며 그녀 탓을 하는 민승현의 태도에 강민정은 억울하고 눈물이 났다.“오빠, 내가 어떻게 새언니 때문에 오빠를 속이겠어? 오빠를 위해서 내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오빠는 어쩜 나를 믿지 못해?”“너…… 왜 이래?”그제야 강민정의 깁스를 한 강민정의 다리와 반쪽 가면을 쓴 그녀의 얼굴을 본 민승현은 놀란 듯 되물었다.여전히 자기를 걱정하는 듯한 상대의 목소리에 강민정은 곧바로 이것저것 살을 보태 자기가 겪은 일을 하소연했다.물론 다리와 얼굴에 난 상처는 자기가 권하윤과 민도준이 바람피운 걸 목격하여 상대가 자기를 협박하려고 때린 거라고 둘러댔다.“그 두 사람이 나 협박했단 말이야. 오빠한테 말하지 말라고.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잘못했어.”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데다가 성년이 되자마자 바로 몸과 마음을 자기한테 바친 강민정이 이런 꼴을 당하자 민승현은 마음이 약해져 곧바로 그녀를 부축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여전히 분노가 담겨있었다.“만약 네가 내 돈 뜯어내서 그 그림만 사지 않았으면 쫓겨날 일도 없었잖아. 이런 일도 당할 리 없고.”“오빠, 그게 아니야. 그 그림은…….”“됐어!”민승현은 귀찮은 듯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민도준
아침밥을 장미꽃으로 장식된 테이블에 놓고 과일 주스를 따르는 민승현의 모습을 본 권하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의아한 듯 퉁명스럽게 던진 말에 민승현은 고개를 돌려 권하윤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그의 눈에는 분노와 한이 스쳐 지나갔다가 이내 가라앉혔다.“내가 특별히 너를 위해 아침을 차렸으니 얼른 와서 먹어.”“네가? 나를 위해 준비했다고? 너 괜찮아?”권하윤의 반응에 화가 치밀어 오른 민승현은 버럭 소리쳤다.“내가 계속 집에 안 들어온다고 했으면서 다시 들어와 아침까지 차려줬는데 이런 태도야?”하지만 그의 말에 권하윤은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내가 어떤 태도였으면 좋겠는데? 평소에 관심도 없이 밖에서 술 마시고 여자 끼고 놀다가…….”옆에 뜯어놓은 배달 음식 포장지를 힐끗 바라보더니 그녀는 말을 이었다.“배달 음식을 아침이랍시고 준비해 준 거에 무릎 꿇고 절이라도 해야 해?”그녀는 민승현이 당연히 그녀의 말에 여느 때처럼 호통을 치며 문을 부수고 나갈 줄 알았는데 민승현은 오히려 어두워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화를 참고 있었다.그리고 몇 초 뒤.“내가 전에 널 너무 냉대했어.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야. 먼저 앉아서 밥 먹어.”민승현의 이러한 변화가 권하윤은 너무 놀라워 귀신이라도 들린 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하지만 어찌 됐든 민시옇은 명의상으로 그녀의 약혼남이었기에 권씨 집안의 위험을 해결하지 않은 한 여전히 다섯째 작은 사모님 타이틀이 필요했다.때문에 권하윤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올라가서 옷 좀 갈아입고 올게.”그 순간 민승현은 권하윤의 슬립원피스에 가려진 허리를 보며 음침하게 눈을 접었다.식탁에서 먹는 아침은 어색할 만큼 조용했다.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게 얼마 만인지 가늠도 안 갈 지경이었으니까.게다가 민승현은 권하윤이 뭔가 낯설게 느껴졌다.그녀는 오늘 베이지색 목폴라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섹시한 차림은 아니었
[다음번엔 꼭 그럴게.]“…….”문자를 삭제하기 바쁘게 차는 어느새 권씨 저택에 도착했다.민승현이 당연히 자기를 이곳에 내려주고 떠나갈 줄 알았지만 따라 내리는 걸 보고 권하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나랑 같이 들어가게?”“약혼한 사이에 내가 들어가는 것도 안 돼?”그의 말에 권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집에 온 건 건강검진을 받으러 오라는 권미란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인데 민승현이 따라 들어가면 당연히 불편할 게 뻔했다.“너도 같이 들어가겠다면 내가 먼저 어머니한테 말해놓을게. 네가 왔는데 점심은 같이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아참, 그리고 할머니도 전에 너 보고 싶다던데 오늘 나랑 같이 할머니 뵈러 가는 건 어때?”일부러 이것저것 말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민승현은 표정이 어두워졌다.어르신들을 만나는 것도 귀찮은 일인 데다 권씨 가문 같은 말단 재벌가에 예의를 차리며 대접하는 척해야 하는 것조차 귀찮고 가치가 없었으니 말이다.“됐어. 그걸 다 끝내려면 하루도 모자라겠네. 혼자 들어갔다가 나와, 밖에서 기다릴게.”권하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권미란은 집에 없었다. 그저 그녀의 검진을 맡을 사람만 집에 남겨뒀을 뿐,권씨 가문은 집안 여자들의 몸에 대해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관리하고 통제했다.때문에 이런 검진도 권하윤은 처음 겪는 게 아니었기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그저 어제 민도준이 너무 몰아붙여 가정의를 마주하기 껄끄럽고 어색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생리는 언제 끝났어요?”권하윤은 아무 생각 없이 대충 대답했다.하지만 의사는 그 말을 듣자 다짜고짜 그녀에게 주사를 놓았다.뾰족한 바늘을 피부에 찔러넣으면서 의사는 아무 감정 없는 로봇처럼 말을 이어갔다.“이건 임신 확률을 높이는 주사예요. 이걸 맞으면 몸이 약간 불편하고 배와 허리가 아플 수 있는데 정상 반응이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사모님께서 사흘에 한 번씩 임신할 때까지 맞으라고 하셨으니까 주기적으로 집에 오시고 여기 주의사항대로 잠자리를 가지면 임신에 도움이
민도준도 온다는 말 한마디에 분위기는 갑자기 묘해졌다.하지만 민승현의 반응은 권하윤보다 훨씬 컸다.이에 이상함을 느낀 민시영은 눈웃음을 지으며 농담을 내뱉었다.“뭐야? 도준 오빠가 온다니까 고양이 만난 쥐처럼 왜 그래? 이렇게 컸으면서 아직도 오빠가 무서워?”그저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민승현은 마침 꼬리라도 밟힌 듯 펄쩍 뛰며 반응했다.“누가 무섭대? 그저 놀랐을 뿐이야! 됐어, 얼른 들어가자.”말을 마친 민승현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디며 먼저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민시영은 의아한 눈빛으로 권하윤을 힐끗 바라봤다.그 시각 권하윤도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이 일이 있은 뒤 레스토랑으로 들어간 네 사람의 분위기는 여전히 이상했다.다행히 민시영이 계속 대화를 이어간 덕에 분위기가 너무 싸해지지 않았을 뿐.하지만 대화 도중 권하윤은 민시영이 고은지와 약속을 잡고 함께 다닌 게 이번 한 번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하긴. 고은지야말로 민도준과 어울리는 진정한 재벌 집 아가씨이니 민시영이 그녀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당연했다. ‘나 같이 명분 없는 사람은 그저 옆으로 물러나야지 어쩌겠어.’그렇게 대화를 나눈 지도 약 반 시간 정도 지났는데 민도준이 여전히 얼굴을 비치지 않자 민시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도준 오빠가 또 우리 바람맞히려나 보네. 아니면 우리 먼저 음식부터 주문해요.”나머지 세 사람도 그녀의 말에 다른 의견이 없었다. 특히 민승현은 민도준이 오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듣자 마치 무거운 짐이라도 내려놓은 듯 가벼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잠시 뒤, 웨이터가 어떤 음료를 주문하겠는지 물을 때 민시영은 권하윤을 바라보며 장난조로 말했다.“다섯째 숙모가 두 사람 곧 좋은 소식 있을 거라던데, 두 사람은 술 먹지 마.”“그래. 그럼 아무 음료나 시켜 줘.”민승현은 마음이 흔들린 듯 대충 얼버무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고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구석진 곳으로 가더니 술집에서 알게 된 친
“도준 오빠, 왜 이제야 왔어?”민시영은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난 또 바람맞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그럴 리가. 다들 모여있는데 와야지.”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은 민도준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던져버렸다.“탕”하는 소리에 놀란 권하윤은 심장이 쪼그라들어 미처 발견하지도 못했는데 민시영이 잿빛이 된 민승현의 표정을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오빠, 거기 승현이 자리야.”아까 그들 넷만 있을 때 권하윤의 왼쪽에 민승현, 오른쪽에 민시영이 앉았었는데 민도준이 갑자기 나타나 민승현의 자리를 꿰차는 바람에 왼쪽에 고은지 오른쪽에 권하윤이 앉은 셈이었다.다행히 원형 테이블이라서 고은지 옆에 앉았다고 볼 수도 있어 그나마 괜찮았지만 민승현만 난처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민시영의 말에 민도준은 그제야 발견한 듯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이런. 진작 말해주지. 그랬으면 여기 앉지 않았을 텐데.”하지만 내뱉은 말과는 달리 일어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다행히 사람들 앞이라 그런지 민승현은 화를 내지 않고 그저 어두운 표정으로 옆에 놓인 주먹을 그러쥐며 참을 뿐이었다.“자리가 뭔 대수라고. 형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아.”그는 말을 마친 뒤 권하윤의 오른쪽으로 걸어갔고 민시영이 옆으로 자리를 내준 덕에 그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게 되었다.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지금껏 잘 대처하기만 하던 민시영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오늘 이런 자리를 만든 걸 후회했다.하지만 애써 표정을 유지한 채 웨이터를 불러 민도준의 입맛에 맞을 요리를 몇 가지 더 주문했다.그리고 그 시각 민시영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사람은 또 있었다. 민도준이 곁에 앉은 뒤로부터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해진 권하윤은 멍하니 테이블을 쳐다보며 민도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섰다.하지만 민도준의 담배 연기가 하필이면 자꾸만 그녀 쪽으로 불어와 코끝을 자극하는 바람에 쉽게 무시할 수
다른 사람의 귀에는 지극히 평범한 말이었지만 민승현의 귀에는 거슬리기만 했다.하지만 대놓고 반박하지도 못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권하윤은 민승현이 뭔가 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그와 동시에 민승현의 성격상으로 당장이라도 약혼을 엎으며 날뛰어야 할 텐데 계속 참고 있다는 게 의아했다.어색함이 민시영한테까지 전해지자 그녀는 어두운 표정의 민승현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느릿느릿 음식을 짚는 민도준을 번갈아 바라봤다.“미안.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권하윤에게 암시를 보냈다.이에 권하윤도 곧바로 그녀를 뒤따랐다.“시영 언니, 저도 같이 가요.”고풍스러운 디자인의 화장실 안에서 민시영은 권하윤의 손을 잡은 채 따져 물었다.“하윤 씨, 오늘 승현이와 도준 오빠가 너무 이상하던데 혹시 눈치챈 거예요?”“저도 잘 모르겠어요.”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 고개를 젓는 권하윤을 보자 민시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낮게 속삭였다.“내가 하윤 씨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승현이가 도준 형보다 아직 젊다고 해도 민씨 가문 다섯째 도련님이에요. 도준 오빠 때문에 승현이와 틀어지는 것보다는 잘 달래서 다섯째 작은 사모님 신분이라도 유지하는 게 하윤 씨한테 더 유리하지 않겠어요? 하윤 씨만 원한다면 민씨 가문에서 자리 잡는 거 제가 도와줄게요.”말없이 민시영의 말을 듣고 있던 권하윤은 눈을 내리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무슨 소식이라도 들었나요?”“솔직하게 말할게요. 며칠 전 고씨 가문 어르신이 왔었을 때 사실 오빠와 고은지 씨의 약혼에 대한 말이 오갔었는데 오빠가 거절하지 않았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화장실에 놓인 장식 암석 위로 흘러가는 물소리가 일순 멀어지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멍해지는가 싶더니 권하윤은 자신의 상황이 왠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분명 이미 짐작했었는데 직접 듣고 나니 조금 의외였다. 하지만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