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 오빠, 왜 이제야 왔어?”민시영은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난 또 바람맞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그럴 리가. 다들 모여있는데 와야지.”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은 민도준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던져버렸다.“탕”하는 소리에 놀란 권하윤은 심장이 쪼그라들어 미처 발견하지도 못했는데 민시영이 잿빛이 된 민승현의 표정을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오빠, 거기 승현이 자리야.”아까 그들 넷만 있을 때 권하윤의 왼쪽에 민승현, 오른쪽에 민시영이 앉았었는데 민도준이 갑자기 나타나 민승현의 자리를 꿰차는 바람에 왼쪽에 고은지 오른쪽에 권하윤이 앉은 셈이었다.다행히 원형 테이블이라서 고은지 옆에 앉았다고 볼 수도 있어 그나마 괜찮았지만 민승현만 난처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민시영의 말에 민도준은 그제야 발견한 듯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이런. 진작 말해주지. 그랬으면 여기 앉지 않았을 텐데.”하지만 내뱉은 말과는 달리 일어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다행히 사람들 앞이라 그런지 민승현은 화를 내지 않고 그저 어두운 표정으로 옆에 놓인 주먹을 그러쥐며 참을 뿐이었다.“자리가 뭔 대수라고. 형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아.”그는 말을 마친 뒤 권하윤의 오른쪽으로 걸어갔고 민시영이 옆으로 자리를 내준 덕에 그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게 되었다.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지금껏 잘 대처하기만 하던 민시영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오늘 이런 자리를 만든 걸 후회했다.하지만 애써 표정을 유지한 채 웨이터를 불러 민도준의 입맛에 맞을 요리를 몇 가지 더 주문했다.그리고 그 시각 민시영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사람은 또 있었다. 민도준이 곁에 앉은 뒤로부터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해진 권하윤은 멍하니 테이블을 쳐다보며 민도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섰다.하지만 민도준의 담배 연기가 하필이면 자꾸만 그녀 쪽으로 불어와 코끝을 자극하는 바람에 쉽게 무시할 수
다른 사람의 귀에는 지극히 평범한 말이었지만 민승현의 귀에는 거슬리기만 했다.하지만 대놓고 반박하지도 못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권하윤은 민승현이 뭔가 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그와 동시에 민승현의 성격상으로 당장이라도 약혼을 엎으며 날뛰어야 할 텐데 계속 참고 있다는 게 의아했다.어색함이 민시영한테까지 전해지자 그녀는 어두운 표정의 민승현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느릿느릿 음식을 짚는 민도준을 번갈아 바라봤다.“미안.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권하윤에게 암시를 보냈다.이에 권하윤도 곧바로 그녀를 뒤따랐다.“시영 언니, 저도 같이 가요.”고풍스러운 디자인의 화장실 안에서 민시영은 권하윤의 손을 잡은 채 따져 물었다.“하윤 씨, 오늘 승현이와 도준 오빠가 너무 이상하던데 혹시 눈치챈 거예요?”“저도 잘 모르겠어요.”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 고개를 젓는 권하윤을 보자 민시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낮게 속삭였다.“내가 하윤 씨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승현이가 도준 형보다 아직 젊다고 해도 민씨 가문 다섯째 도련님이에요. 도준 오빠 때문에 승현이와 틀어지는 것보다는 잘 달래서 다섯째 작은 사모님 신분이라도 유지하는 게 하윤 씨한테 더 유리하지 않겠어요? 하윤 씨만 원한다면 민씨 가문에서 자리 잡는 거 제가 도와줄게요.”말없이 민시영의 말을 듣고 있던 권하윤은 눈을 내리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무슨 소식이라도 들었나요?”“솔직하게 말할게요. 며칠 전 고씨 가문 어르신이 왔었을 때 사실 오빠와 고은지 씨의 약혼에 대한 말이 오갔었는데 오빠가 거절하지 않았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화장실에 놓인 장식 암석 위로 흘러가는 물소리가 일순 멀어지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멍해지는가 싶더니 권하윤은 자신의 상황이 왠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분명 이미 짐작했었는데 직접 듣고 나니 조금 의외였다. 하지만 그녀
뜨거운 열기가 몸에 닿자 권하윤은 화들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고 허둥지둥하던 찰나 마침 민도준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어두운 빛을 마주친 순간 그녀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민승현도 밖에 있어요. 우리 나가요.”몇 번 버둥댔지만 그녀는 민도준의 품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오히려 강박적인 힘에 눌려 그의 가슴에 바싹 붙었다.딴딴한 몸과 부드러운 몸이 서로 부딪히는 순간 심장이 쿵쿵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승현이가 있는 게 더 좋지 않아? 내가 보냈던 문자 잊었어? 다음번에 꼭 그렇게 하다던 거.”“그건!”장난기 섞인 남자의 목소리에 권하윤은 수치스러운 동시에 화가 나 귓불까지 붉어졌다.“저를 꼭 이렇게 놀려야 속이 시원해요?”민도준은 그저 권하윤에게 가벼운 장난을 칠 생각이었는데 자기 품에 안겨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오히려 더 건드리지 않으면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비좁은 공간과 희미한 불빛은 민도준의 짓궂은 면을 증폭시켰고 그의 갑작스러운 동작에 놀란 권하윤은 황급히 그를 밀어냈다.“이러지 마요.”“말 들어. 그래야 빨리 끝나지.”야릇한 손길에 권하윤은 진짜로 겁을 먹었다.그도 그럴 것이 민도준이 매번 흥이 날 때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으니 말이다.만약 민승현 혹은 고은지가 기다리다 못해 그들을 찾으러 와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보던 권하윤은 작은 손을 민도준의 어깨 위에 올려놓으며 한껏 누그러든 태도로 그를 달랬다.“어제…… 저 아직도 아파요.”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권하윤의 태도에 민도준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정말 여우 맞네. 어쩜 이리 상황 파악이 빠르지?’“왜? 내가 어제 아프게 했다 이거야?”“네.”상대가 아까처럼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자 권하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가 잘못했네.”시원하게 사과하는 민도준을 보자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그리고 다음 순간 자기의 그런 예감이 들어맞았
방 안.순식간에 빈 세 개의 좌석을 보자 민승현은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물론 권하윤이 민시영과 함께 화장실에 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민도준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미 한번 충격을 받은 머리는 저도 모르게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밀회하는 장면을 그려내기 시작했다.‘설마 시영 누나가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시선따위 의식하지 않는 건가?’권하윤이 민도준의 품에 안겨 오던 장면을 본 뒤로부터 그의 가슴에는 마치 불덩이가 쌓인 듯 쉽게 꺼지지 않았고 오장육부도 매일매일 타들어 가는 느낌이다.입을 열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을 것만 같아 참다못한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하지만 고은지도 옆에 있었기에 대충 변명거리를 찾아 던졌다.“저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요.”“제가 그쪽이라면 지금 가보지 않을 거예요.”거의 식사 내내 한마디도 꺼내지 않던 고은지가 갑자기 던진 말에 민승현은 잠시 멍 해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소리죠?”차가운 눈빛이 민승현에게 떨어지더니 잇따라 감정 하나 섞이지 않는 목소리가 민승현의 가슴을 후벼팠다.“우리 다 알잖아요. 두 사람 뭘 하고 있는지.”체면이 갈기갈기 찢어진 민승현은 순식간에 버럭 화를 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고씨 집안사람이 알긴 뭘 안다고. 그렇게 헛소리하면서 우리 집안에 발 들일 생각을 하는 거예요?”분노 가득한 그의 모습에도 고은지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당연하죠. 그래서 더 가보지 않는 거예요.”너무나도 냉정한 고은지의 반응에 민승현은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저 창피한 일을 모르는 사람 앞에서 들켰다는 것에 쪽팔리고 화가 났다.“그쪽은 언제 발견했는데요?”“방금요.”고은지는 말하면서 텅 빈 자리를 쓱 둘러봤다.하지만 발견했다는 건 어찌 보면 정확하지 못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민도준은 지금껏 숨길 생각조차 없었으니까.만약 그가 권하윤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
민시영이 이렇게 말한 건 아까의 상황을 만회하기 위한 것이다.게다가 평소에도 가끔 농담을 섞어 말하는 터라 과하지도 실례가 되지도 않았다.하지만 말수가 적은 고은지도 웬 영문인지 입을 열었다.“부탁드립니다.”그 한마디에 민도준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갑자기 웃으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입 한번 여는 게 쉽지 않네.”문을 나서던 권하윤은 마침 그 한마디를 듣게 되었다.이윽고 입꼬리를 올리며 문을 닫은 그녀는 뒤에서 느껴지는 민도준의 시선을 막아버렸다.그 시각 이미 몇 걸음 걸어간 민승현은 꾸물대며 느릿느릿 걸어오는 그녀를 보자 참지 못하고 홱 잡아끌었다.“서둘러. 뭘 그렇게 꾸물대?”그는 권하윤을 잡은 채로 레스토랑 문 앞까지 걸어가더니 다급히 그녀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아까 전 권씨 저택 앞에서 기다릴 때도 귀찮고 조급했다면 지금은 조급할 뿐만 아니라 귀신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초조하고 두렵기까지 했다.하지만 그의 행동에 권하윤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곧바로 그를 밀어냈다.“나 희연 언니 보러 가겠으니까 여기에서 헤어져.”마지막 단계만 남은 계획이 이대로 무산되게 둘 수 없었기에 민승현은 당연히 그녀를 놓아줄 수 없었다.“안 돼. 너 무조건 나랑 같이 가야 해!”“나 희연 언니 보러 가겠다고 이미 말도 해뒀어. 너 혼자 돌아가.”조급하게 밀어붙이는 그녀를 보자 권하유은 그가 무슨 일을 꾸민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아 곧바로 몸을 틀었다.“안된다니까! 거기 서!”“민승현! 너 어디 아파?”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약효가 돌았는지 권하윤은 눈앞이 흐릿해졌다.게다가 머리는 누구한테 세게 맞은 것처럼 아프고 무거웠으며 발은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너 괜찮아?”민승현은 그 기회를 틈타 그녀를 걱정하는 듯 조수석에 밀어 넣고 안전벨트까지 채워주고 나서야 문을 닫았다.그 짧은 찰나 권하윤은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분명 네 팔다리가 몸에 붙어 있었지만 그녀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몸속에서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는 마치 명을 재촉하는 부적처럼 육체의 고통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민승현에게 정신적 고통까지 더해졌다.하지만 등이 밟힌 터라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저 눈으로 곁을 힐끗거리며 민도준과 시선을 맞추려고 했다.“도준 형…… 콜록콜록…… 지금 뭐 하는 거야?”그의 목소리는 마치 따져 묻는 듯 분노에 차 있었다.‘분명 나도 같은 민씨 가문 사람인데 왜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데!’만약 민승현의 앞에 있는 사람이 민씨 가문 다른 식구들이라면 그들이 가족의 정을 봐서라도 그의 설명을 들어줄 테지만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이 하필이면 민도준이었다.때문에 대답대신 돌아오는 건 발에 실린 힘이 더 강해진 것뿐이었다.그리고 곧이어 갈비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아무리 그래도 지금껏 호의호식하며 도련님 대접을 받고 또 강수연이 아들이랍시고 매사 그를 위해 모든 일을 해결해 줘 왔기에 민승현은 이런 고통을 견딜 리가 없었다.이윽고 지독한 고통에 그는 끝내 무너지기라도 한 듯 눈물을 흘렸다.“아! 아파! 이거 놔!”“어디가 아픈데?”민도준은 조금도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의아한 듯 되묻더니 발로 민승현의 허리를 꾹 눌렀다.“여기?”“아! 살려 줘!”그러던 그때, 민승현이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버둥대는 바람에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약병이 밖으로 빠져나왔다.곧이어 민도준이 병을 주워 들고 한참을 관찰하더니 아직 반 정도 남은 약을 보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오, 아직 많이 남았네? 이런 걸 떨어트리다니 낭비 아니야?”민승현은 상대가 뭘 하려는 지 깨닫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쯧.”하지만 다음 순간 민도준의 손이 그의 턱을 콱 잡았다.“읍!”짤막한 비명과 함께 턱이 빠지는 바람에 민승현은 더 이상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고통스러운 신음만 내뱉었다.이윽고 닫히지 않는 입안으로 약이 흘러 들어갔고 병이 바닥났다.그제야 민도준은 만족한 듯 일어서며 손을 툭툭 털더니 옆에 떨어진 민승현의 핸드폰을 발로 차버렸다.그리고 비로소 조
병원.“검사 결과 환자분께서 임신을 하기 위해 배란촉진제를 투여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성분을 봤을 때 국내에서 생산된 약이 아니라 부작용도 확인이 어렵고요. 게다가 곧바로 자극성 약물을 복용한 바람에 이상 반응이 생겨 자궁 경련을 유발한 겁니다.”한참 동안 설명하던 여의사는 안타까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확인된 성분만 봤을 때 임신을 촉진할 수는 있지만 부작용이 많고 환자분의 몸에 손상을 가할 수 있는 성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성 촉진제까지 먹었으니 목숨을 건진 게 천만다행이에요.”고통스러운 듯 침대에 웅크리고 있는 권하윤을 보자 민도준은 평소와 달리 여의사의 질책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언제 깨어날 수 있나요?”“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약물을 함께 복용한 것에 대한 임상 사례가 없다 보니 환자분 몸이 버텨주는 데에 달렸습니다.”“음-”때마침 들려오는 권하윤의 신음소리에 민도준은 침대 곁으로 걸어갔다.검사의 편리를 위해 이미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권하윤은 헐렁한 소매 사이로 가느다란 손목을 빼내 자기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었고 머리는 어느새 베개에서 미끄러져 팔 안에 파묻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극도로 불안한 듯한 자세였다.분명 고통이 극에 달했을 법한데도 그녀는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게 하려고 자기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건 그녀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아파도 조심성을 잃지 않는 모습.타들어 갈 것처럼 뜨거운 몸 때문에 입까지 말라 침을 넘길 때마다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옆에서 한참 지켜보던 민도준은 소파에 털썩 앉으며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민 사장님?”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권미란의 목소리에는 조심성이 가득 묻어있었다.그때 민도준이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빙빙 돌리며 건방진 목소리로 대답했다.“권 여사님, 바쁘신가요?”-권하윤이 깨어났을 때 주위는 온통 캄캄했다.막 움직이려 했을 때 가슴에 가로 놓인 팔이 꽉 누르고 있어 꿈쩍도 할
권하윤은 뇌리를 스치는 생각을 이내 부정했다.‘아니야, 아닐 거야. 권미란이 이렇게 쉽게 비밀을 다른 사람한테 말했을 리 없어.’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는 눈을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저희 어머니랑 무슨 대화 했는데요?”“맞혀봐.”“설마 우리의 일은 아니겠죠?”“음흠.”씩 웃으며 말하는 민도준의 모습에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혀왔다. 그녀는 심지어 권미란이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권희연을 열심히 교육하여 소문까지 만들어 냈는데도 민도준을 꿰어내지 못했는데 오히려 가짜인 그녀가 민도준의 눈에 들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것보다도 권미란이 이제 자기와 민도준의 관계를 알았으니 자기를 이용해 민도준에게서 이것저것 떼어내려 할 거라는 게 더 걱정스러웠다.권미란의 손에 가족이 잡혀 있는 이상 그녀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이것 또한 그녀가 민도준과의 관계를 권미란한테 들키지 않으려 애쓴 이유다.자유를 얻기 전에 그녀가 쥐고 있는 패는 오히려 권미란이 그녀를 부려 먹을 이유가 될 테니까.권하윤의 저촉된 정서를 단번에 눈치챈 민도준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장난쳤다.“어린 나이에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아는 게 그렇게 무서워?”“그게…….”잠깐 머뭇거리던 권하윤은 끝내 입을 열었다.“권씨 가문에서 저를 내세워 도준 씨한테 뭐라도 뜯어낼까 봐 그래요.”그녀의 대답이 재밌었는지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문지르더니 웃음기 섞인 낮은 목소리를 뱉어냈다.“하윤 씨도 그랬으면서 권씨 가문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것 없어.”“…….”그의 말에 놀란 권하윤은 호박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그런 그녀의 멍한 표정이 귀여웠는지 민도준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마구 흐트러뜨렸다.“됐어, 놀란 것 좀 봐. 이제 놀리지 않을게.”그러더니 곧바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그저 하윤 씨가 마음에 들었다고 알아서 하라고 했어.”“그것뿐이었다고요?”“당연히 아니지. 그 외에 하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