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말을 하던 태준은 갑자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던 은채의 부탁이 생각나 말을 삼켜버렸다.말을 하다 마는 태준을 보자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말 못하겠나 봐?”태준은 하윤의 실망하는 표정에 이내 부정했다.“그런 건... 아니에요.”그도 그럴 게, 태준의 눈에 하윤은 늘 착하고 무해한 사람이었으니까. 한참 생각하던 태준은 끝내 실토하기로 결심했다.“은채가 수술할 때 가족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그 뒤의 말을 하윤은 듣지 못했다. 그저 머릿속에 온통 태준이 병원에 가면 내일 할 수술이 보통 수술이 아니라는 걸 눈치챌 거라는 생각뿐이었다.마침 정오의 태양이 내리쬐는 바람에 하윤은 눈앞이 아찔해났다.고개를 숙이고 내면의 당황함을 애써 숨기며 이 상황을 어떻게 막을지 부단히 머리를 굴렸다.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윤을 보더니 이랬다 저랬다 하는 저한테 실망한 줄 알고 말을 덧붙였다.“속이려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가 임종 직전에 동생을 잘 돌보라는 유언을 남겼거든요. 하지만 수술 후면 남남으로 지내자고 말했어요.”하윤은 두 사람이 연을 끊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태준이 그 수술에 영향을 끼칠까 봐 불안할 뿐.하지만 그렇다고 내색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간단한 수술인 줄 알고 있는 와중에, 가뜩이나 총명한 공태준과 공은채에게 틈이라도 보이면 발각되기 십상이니까.마음을 가라앉힌 하윤은 고개를 들고 침착하게 말했다.“친동생이니 관심하는 건 이해해. 난 바빠서 이만 가볼게.”이윽고 말을 마친 뒤 곧장 떠나갔다. 저한테 등을 보인 하윤의 뒷모습을 보며 태준은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차 안.남기는 태준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화내던가요?”태준은 점점 멀어져가는 실루엣이 시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끝내 대답했다.“내 탓이야. 연을 끊었다고 했으며서 제대로 끊어내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니까.”태준의 뒤를 항상 따라다니기에 당연히 태준이 은채와 남매의 연을 끊으려 한다는
요즘 가을은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귀가하곤 하는데, 그 목적은 하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마침 밖에서 파파라치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급히 들어오지 않았을 거다.가을은 얼른 목도리를 위로 당기며 제 얼굴을 더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그때, 하윤이 위아래로 꽁꽁 싸맨 여자를 훑어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을 걸었다.“혹시 진가을 씨 아니세요?”이미 들킨 마당에 더 이상 모른 체하고 있을 수도 없는지라, 가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어,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가을은 상대가 가을이라는 걸 확인하자 곧장 자리를 내주었다.“마침 잘 됐네요. 할 얘기가 있었는데.”할 얘기가 있었다는 짤막한 한마디에 가을은 심장이 요란스럽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할 얘기?’한민혁의 본처에게 불륜을 들켜 치욕을 당하던 악몽이 현실로 한 발 다가왔다.하지만 잘못을 했으면 인정해야지 숨을 수는 없었다.결국 가을은 큰 결심을 내린 듯 이를 악물었다.’“그래요.”30층.가을은 제 집보다 몇 배나 더 화려한 하윤의 집 내부를 보고 속으로 감탄했다.‘하윤 씨처럼 예쁜 여자가 그런 남자를 만나는 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돼지가 황금 돼지였을 줄이야.’하윤은 테이블 쪽으로 향하더니 다정하게 물었다.“뭐 마실래요? 오렌지 주스 아니면 따뜻한 차?”‘따뜻한 차?’‘만약 얘기하다 화가 뻗쳐 물이라도 뿌리면 내 얼굴 망가지는 거잖아...’덜컥 겁이 난 가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오렌지 주스요.”잠시 뒤, 하윤은 주스를 가을 앞에 놓고는 그 옆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가을 시, 혹시 민혁 씨 알아요?”‘왔구나.’가을은 할 수 없이 눈 딱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하윤이 저를 뭐라 욕하든 참아야 하노라고 속으로 암시했다.하지만 이미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긴장해하는 가을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하윤은 민혁을 도와 말하기 시작했다.“사실 민혁 씨가 가끔 말은 좀 짓궂게 해도 사람은 진짜 좋거든요.
“그러니까...”민혁은 가을을 보자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특히 이제 막 인터뷰를 마친 탓에 세련된 메이크업을 한 가을은 연예인 포스를 물씬 풍겨 눈을 뗄 수 없었다.한창 우물쭈물하던 민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겹겹이 쌓여 있는 종이 상자를 보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참! 이사한다면서요? 어디로 가요?”그 말을 들은 가을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걸 물어요? 당신 같은 쓰레기만 안 만났어도 이사까지 할 필요 없었잖아요! 마음에 드는 전세 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민혁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저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 있는데요? 왜 저 때문에 이사해요?”“이사 안 하면요? 쓰리썸이라도 하려고요? 내가 아무리 내연녀 연기를 했어도 그렇지, 진짜 내연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요!”“아니, 이건 그쪽이 그런 능력이 돼도 제 조건이 안 맞는데, 내연녀라니요?”“내연녀가 아니면 뭔데요? 이혼하고 나랑 결혼이라도 할 거예요?”민혁은 가을의 말에 머리가 어지러워 잠깐 휴전하자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잠깐만요. 왜 이렇게 알아듣지 못하겠지? 제가 언제 결혼했는데요?”가을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하, 이제 솔로 행세를 하시겠다? 그쪽 와이프가 나를 내연녀로 채용까지 하던데, 결혼한 걸 부정한다고? 이거 완전 양아치네!”이제야 가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잡은 민혁은 어이없다는 듯 자기를 가리켰다.“내 와이프?”“아니면요? 제 와이프게요?”민혁은 웃픈 현실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배짱이 없거든요. 그 사람 제 형수님이에요, 도준 형 아내. 저는 잠깐 경호원 겸 기사 노릇 하고 잇는 거고.”한창 설명을 하고 있자니 민혁은 입이 바싹 말랐다. 하지만 가을은 오히려 팔짱을 끼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소설을 써요, 아주!”민혁은 조급해났다.“아니, 소설이라니. 하윤 씨는 정말 도준 형 와이프, 내 형수님이라니까요?”“아하, 위층에
이른 아침.병원 의료진들은 한데 모여 곧 있을 대수술을 일사불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그도 그럴 게, 어젯밤 이식을 할 남자애가 갑자기 고열이 나 수술을 강행하면 생명 위험이 있을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에 의사들은 합병증과 같은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먼저 약물로 임시 방편을 취하고 수술 시간을 9시로 앞당겼다. 다행히 충분한 준비 덕에 수술을 앞당기더라도 허둥대지 않았다. 유일한 문제라면 은채에게 이 사실을 설명해야 한다는 거였지만.내부 사정을 알고 있는 주치의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난색을 표했다.“공은채 씨가 워낙 예민하고 조심성 많은 분이라 이렇게 갑자기 수술을 앞당기려면 제대로 된 이유를 대야 할 겁니다. 안 그러면 믿지 않을 테니까요.”도준 역시 밤을 샌 탓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수술에 영향주지 않는 선에서 고통을 줄 수 있는 약을 먹여요.”그 말에 의사는 어리둥절했다. 딱 봐도 그런 방법까지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바로 준비할게요.”그 시각, 병실에서 아침 식사를 마침 은채가 갑자기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을 호소하였다. 결국 검사를 받은 뒤, 도준이 주치의와 함께 은채의 병실에 도착했다.주치의는 미간을 좁힌 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온갖 전문용어를 난발했다.그러고는 이내 엄숙하게 말했다.“지금 은채 씨의 몸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렵습니다.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수술 결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은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정말로 불편함을 느낀 탓에 더 긴장했다.“그럼 지금 몸이 불편한 건 수술에 영향이 있지 않나요?”“지금은 큰 영향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을 지체하면 저희도 장담드릴 수 없습니다.”은채는 일순 당황했다. 너무 어지러운 탓에 머리가 돌지 않아 멍하니 도준을 바라봤다.“이제 어떡해요? 수술을 앞당기면 결과에 안 좋은 영향 끼치
그건 다름 아닌 공태준의 차였다.태준의 차가 길모퉁이를 돌아 병원 쪽으로 오는 걸 보자, 하윤은 얼른 손에 쥐고 있던 옥수수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다행히 태준의 차도 마침 빨간 신호등에 걸려 시간은 충복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방법으로 태준을 막지 않으면 상황을 악화할 수 있다는 부담감이 매우 컸다.그렇다고 도준이 저를 위해 그동안 열심히 계획을 세우고 애써줬는데, 태준 때문에 모든 게 망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그 사이, 빨간 신호등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9, 8... 3, 2, 1.그리고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뀐 찰나, 하윤은 마음을 굳게 다지고는 도로를 향해 돌진했다.운전을 하고 있던 남기는 이제 막 엑셀을 밟으려던 찰나 갑자기 뛰어는 여자 때문에 놀라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심장 떨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 지나자, 남기는 곧장 차에서 내려 상대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보더니 놀란 듯 다시 차 안으로 향했다.“가주님, 이시윤 씨입니다.”하윤은 바닥에 반쯤 누운 채 뒷좌석의 문이 열리는 걸 곁눈질로 확인했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태준의 눈빛에는 당황함이 가득 담겨있었다.“윤이 씨, 괜찮아요?”‘안 괜찮아.’사실 남기가 제때에 브레이크를 밟은 덕에 차는 그저 하윤을 살짝 스친 것뿐이다. 심지어 넘어진 것도 하윤이 일부러 넘어진 거고.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하윤은 제 팔꿈치를 감싸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괜찮아.”그러면서 ‘씩씩한 척’ 일어서더니 다시 휘청거렸다.무의식적으로 하윤을 안으려던 태준의 행동은 손을 뻗은 순간 부축으로 바뀌었다.“조심해요, 다치지 말고. 우리 가서 검사 받아요.”태준이 저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하자 하윤은 곧장 거절했다.“아니야.”그러고는 태준이 의심할까 봐 이내 말을 덧붙였다.“그 둘이 꼭 붙어있는 걸 직접 보라고? 차라리 죽으라고 해.”태준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다른 병원으로 가요.”
하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설마 공은채가 보통 수술이 아닌 이식수술을 받는 걸 아나?’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하윤은 태준을 바라봤다.“무슨 말 하는 거야?”태준은 하윤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나 병원 못 가게 하려고 막는 거 알아요.”그 말을 들은 순간 하윤은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그리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망했다’였다.그때, 하윤의 놀란 듯한 표정을 본 태준이 나지막하게 말을 덧붙였다.“괜찮아요. 이해해요. 은채가 민도준 씨 빼앗아 갔으니 미워하는 것도 당연하고. 하지만 나 이미 은채랑 연을 끊겠다고 했으니 솔직히 갈 필요도 없어요.”불규칙적으로 마구 요동치던 하윤의 심장은 그제야 조금 진정되었다.‘그러니까 지금 공은채가 도준 씨를 빼앗아 갔으니 내가 공은채 오빠인 저를 붙잡아 놓고 있다는 거잖아.’다시 제 목소리를 되찾은 하윤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되물었다.“알면서 왜 따라왔어?”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태준의 목소리는 마치 막이 쓰인 듯 희미하게 들렸다. 하지만 뭘 말했는지 하윤의 귀에 똑똑히 흘러 들었다.“윤이 씨가 원하는 거면 난 뭐든지 학 거예요. 그러니까 나 너무 미워하지 마요.”태준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하윤은 왠지 태준이 어딘가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제 더 이상 집요하게 밀어붙이기 보다는 적당한 거리에 멈춰 서서 상대에게 공간을 주는 느낌이랄까?하윤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공태준, 우린 불가능해.”“알아요.”태준은 가볍게 대답했다.“그래도 괜찮은 친구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하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태준을 죽일 듯 미워하다가 경계하는 데 이르면서 하윤은 보통 친구로 지낼 수 잇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매번 저와 도준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태준을 친구로 받아들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그런데 지금, 태준의 진심 어린 모습을 보자 하윤은 왠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은채가 정말 수술대에서 죽기라
창밖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간호사가 다급하게 달려 들어왔다.“지금 옥상 계류장에 헬기 두 대가 도착했어요.”그 말에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하, 곧 죽어가면서 일을 참 많이도 벌렸네.”전화 건너편에 있던 하윤은 그 소리에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왜요? 무슨 일이에요?”“괜찮아. 집에서 기다려. 나한테 할 변명 생각해 놔.”“어? 잠깐..., 여보세요?”하윤은 다급히 핸드폰을 들었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졌다.한편, 도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밖을 향해 걸어갔다.병원 옥상에 이미 수십 명의 경호원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들은 딱 봐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모든 경호원이 양 옆으로 쫙 갈라져 길을 내자 정장을 입은 남자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남자의 꼿꼿한 자태와 날카로운 시선이 특히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헬기에서 맨 마지막에 내린 사람을 보자 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이게 누구야? 곽씨 가문 큰 도련님 아닙니까? 왜요? 뭐 병이라도 보러 왔나?”상대는 다름 아닌 곽도원의 큰아들 곽준호였다.하지만 아무리 이 곳에 왔다 해도, 아버지의 옛 사랑의 딸 때문에 온 입장이라고 밝히기에는 상황이 우스워 눈살을 찌푸렸다.“아버지가 심장이 안 좋은데 여기에 국내 최고의 의료진이 모여 있다고 해서 문의차 들렀습니다.”문의라고는 하지만 경호원을 이렇게 많이 대동한 걸 보면 아니라는 게 뻔했다.그에 반해 도준은 혼자였다. 경호원 한 명도 데려오지 않은 채 나들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웠으며 눈에 뵈는 게 없는 듯 오만하기까지 했다.심지어 준호가 데려온 사람들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준호의 체면을 갈기갈기 찢었다.“물론 여기에 심장외과 쪽으로 가장 뛰어난 의료진이 있는 건 맞지만, 심장질병만 치료하지 마음의 상처까지 보듬어주는 곳은 아니거든요.”그 일을 입에 담자 준호의 얼굴은 순간 어두워졌다.“민 사장님, 언행에 주의해 주세요. 농담에도 정도
몇시간 전.은채는 겉으로 수술을 앞당긴다는 소식에 아무런 의견도 없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워낙 의심이 많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기에 자기가 ‘위독’하다는 문자를 태준과 곽도원한테 미리 보내 놓았다.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곽도원이 여전히 염옥란을 그리워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말을 더 보탰다.‘어머니께서 임종 직전에 저더러 아저씨한테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퇴원하는 직접 전달해 줄게요.’ 라고 말이다.부하가 그 문자를 곽도원한테 회보할 때, 현장에 준호도 있었다.당시, 곽도원이 여옥란에게 마음이 있다는 소문은 해성의 대부분 사람이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에 반해 준호의 어머니가 얼마나 참하고 훌륭한 아내이자 어머니였는지는 조금도 알려진 바 없다.이 일 때문에 준호는 어릴 때부터 입이 싼 동년배들과 얼마나 싸우고 다녔는지 모른다, 심지어 커서 사람들의 인식속에서 그 일이 점차 사라질 때까지 이어졌으니.솔직히 준호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평생의 응어리를 풀어드리라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온 거다....수술실은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게다가 모든 게 아직까지는 순조롭다.도준은 복도 벽에 몸을 기댄 채 수술실 앞을 맴도는 준호를 빤히 바라봤다.그러다 한참 뒤, 준호가 뒤돌아 물었다.“공은채를 제 눈으로 직접 봐야겠네요.”도준은 그 말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왜요? 병상 옆에서 응원이라도 해주려고요?”순간 눈빛이 어두워진 준호는 도준을 빤히 노려보았다.“설마 민 사장님 산하에 있는 병원에 CCTV도 없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죠?”“아하, CCTV요? 아쉽지만 고장났어요.”애써 화를 짓누르던 준호는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CCTV도 없다면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네요.”그 뜻을 알아들은 조수가 이제 막 무전기를 꺼내 들려고 할 때, 도준이 남자를 막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준호 도련님, 잠깐 얘기 좀 나누시죠?”준호는 도준과 얘기를 나눌 정도로 친분이 있는 정도가 아니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