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수의 시각]수아는 나를 차갑게 바라봤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순간 나는 살짝 실망했다.“왜 왔어?”수아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나는 억지로 그녀의 집에 들어섰다. 10년 동안 함께 살았던 여자인데 지금은 나를 마치 낯선 사람처럼 취급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 적막함을 깨트릴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나는 깁스한 수아의 팔을 보며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게다가 주말은 내가 지훈이를 돌볼 시간이니 말이다.방금 떠난 수아의 집에서 떠난 그 남자를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수아가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다니.“아까 그 사람은 뭐 하러 여기 왔어?”나는 애써 분노를 참으며 물었다. 그 남자가 경찰이고 수아의 목숨을 구한 건 알지만 선을 넘은 행동인 것 같았다. 그리고 수아 곁에서 맴도는 게 싫었다.“너랑 무슨 상관이야.”“내 아들이 집에 있는데 아침부터 다른 남자를 초대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혹시 여기서 자고 간 거야? 그래서 방금 떠난 거야?”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가 헤어진 지 몇 달 만에 지훈이가 있는 자리에서 다른 남자를 데리고 오다니.그러자 수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네가 청아를 집으로 불러들일 때 내가 뭐라고 했어? 그러니까 내 일에 끼어들지 마.”나는 수아를 노려보며 말했다.“청아는 달라.”“뭐가 다른데?”수아는 일부러 모른 척하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나를 비꼬는 것처럼 말이다.“아. 청아는 네가 사랑하는 여자지.”나는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갈았다. 나에게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듯 툭툭 쏘아댔다.“지훈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난 이제 싱글이야. 내가 누구를 집에 데려오든 내 마음이야. 이건 내 집이거든. 우현수, 넌 날 조종할 수 없어. 난 소개팅도 하고 데이트도 할 거야. 평생 싱글로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그 말을 듣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왜
“내가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어? 내가 너에게 거짓말한 적 없다는 거 알잖아. 내가 청아를 사랑했던 건 너도 알고 있었잖아.”수아는 화가 난 듯 행주를 던졌다.“그런데 왜 나랑 같이 잤어? 정말 역겨워. 내가 왜 너한테 반했을까?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는지 모르겠어.”수아의 말을 듣자 화가 나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결혼하고 잠자리를 가졌지만 그건 단지 육체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비록 수아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니었다.“옛날이야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니야. 지훈이에 관해 이야기하러 왔어.”나는 계속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게 지쳐 화제를 바꾸기 시작했다. 하려던 말을 하고 당장 떠나려 했다. 아니면 나중에 후회할 만한 말을 하거나 행동할지도 모른다.지훈이를 언급하자 수아는 갑자기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수납장을 열고 약병을 꺼냈다. 한 손으로 뚜껑을 열더니 알약 두 개를 입에 넣고 삼켰다. 라벨을 읽어보니 진통제였다.“팔은 좀 어때?”“할 말이나 해. 가식적인 관심인 거 우리 둘 다 알고 있으니 연기 그만해.”수아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책상을 치며 소리칠 뻔했다.“야! 한수아!””왜? 난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거야. 말할 거야? 안 할 거야? 안 할 거면 나가. 지훈이가 깨나면 문자 보낼게.”수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나는 다치지 않은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았다. 그녀는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빠르게 손을 뺐다.“다치지 마!”수아는 버럭 화를 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계속 이렇게 싸워야만 하는 걸까? 우리 사이에는 아직 지훈이가 있는데 말이다.“네가 이러니깐 내가 청아에게 마음이 갔던 거야.”나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러자 수아의 표정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차갑게 변했다.“할 말 있으면 하고 없으면 꺼져. 내 집에서 나를 모욕하고 청아와 같이 비교하는 걸 참을 수 없어. 그게 왜 내 탓인데? 우린 이혼했어. 사랑이 뭔지 뭐 그딴
[한수아의 시각]“왜 거기에 가야 해요? 저는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요.”지훈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불만이 가득했다. 처음에는 나와 우현수가 같이 가는 줄 알고 신났지만 말이다.학교 측에서는 우리의 상황을 이해해 주면서 어머니께 수업 자료를 보내주며 지훈이가 뒤처지지 않게 해주었다.“말했잖아. 이번 여행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여행이야.”경찰서장과 이야기한 후 나는 그들이 따뜻한 해변으로 갈 거라고 확신했다.“해변으로 갈 거야. 네가 우리한테 휴가 보내 달라고 마침 졸랐잖아.”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해변이라는 단어를 듣자 지훈이는 갑자기 표정이 밝아졌다. 지훈이는 바다를 엄청 좋아한다. 셋이 같이 몰디브에서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는 일주일 동안 울었던 적도 있었다. 지훈이는 그곳으로 이사하길 원했고 우리가 그 제안을 거부하자 혼자 몰디브에 남겠다고 애원했다.나는 지훈이가 내 삶에 가져다준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엄마,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지훈이가 갑자기 물었다.“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있어?”“그건 없죠.”지훈이는 눈을 반짝이며 환하게 웃었다.“그럼 괜찮아요. 저 이제 삐지지 않을게요.”“왜 삐졌어?”“엄마가 저랑 같이 가지 않아서요. 하지만 나중에 합류하면 되잖아요.”나는 나중에도 가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훈이가 슬퍼할까 봐 하려던 말을 삼켰다.“이제 가자. 안 그러면 늦어.”나는 다치지 않은 한쪽 어깨로 가방을 메고 지훈이의 작은 캐리어를 들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지훈이도 자기 가방을 메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택시를 부르려던 찰나에 초인종이 울렸다. 지훈이가 열기 전에 내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지훈이는 늘 상대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문을 여는 경향이 있었다. 상대가 답하지 않거나 모르는 목소리면 열지 말라고 몇 번 주의를 줬으나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문을 열자마자
우현수는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서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째려봤지만 나 역시 겁을 먹지 않기로 다짐하고 물러서지 않았다.“난 안 나가. 그러니까 취소하고 내 차에 타. 지금 당장.”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나도 화가 치밀어 오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참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네가 뭔데? 응? 내가 네 강아지야? 시키면 다해야 해?”나도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다. 수년 동안 우현수는 나를 쥐락펴락했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무엇을 얻었을까? 화를 억누르고 나답지 살지 못했는데 결국에는 이 지경이 되었다. 얻은 건 아무것도 없고 오직 고통과 상처만 남았다.“한수아...”우현수는 경고하듯 말했다.“또 싸우는 거예요?”지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슬픈 표정으로 서 있는 지훈이를 발견했다. 나랑 우현수가 싸우는 모습을 지훈이에게 보이는 게 너무 싫었다. 지훈이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 말이다.“아니야. 싸우는 게 아니야. 뭐 좀 토론하고 있어.”나는 우현수에게 눈치를 줬다.“그렇지?”우현수도 나처럼 노아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사람이었다. 그 역시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환하게 웃었다.“그럼. 네 엄마가 팔을 다쳐 운전을 못 해서 우버를 불렀대. 하지만 나는 너희 둘을 데려다주고 싶었어.”우현수는 지훈이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왜 우리 아빠랑 같이 안 가요?”나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천장을 바라봤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지훈이 때문에 나는 매우 난처했다. 그리고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아니야. 같이 갈 거야.”나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지훈이 때문에 이런 일까지 하다니.“야호!”지훈이는 환호하며 거실로 달려가 다시 가방을 챙기고 나왔다.“여기서 기다려.”나는 우현수에게 말하고 지훈이의 짐과 내 가방을 가지러 갔다. 나는 거실을 조금 정리한 후 짐을 챙겼다. 마지막으로 한
“어머니가 너를 찾으시던데. 만났어? 통화했어?”그러자 나는 짜증을 냈다.“말이 왜 이렇게 많아? 평소처럼 나를 무시해 주면 안 돼?”우현수는 운전대를 꽉 쥐며 이를 갈았다. 그는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순한 양처럼 행동하던 내가 이런 말을 하니 익숙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는 이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나는 우현수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서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의 이상형인 청아처럼 되려고 애썼다. 사랑스러운 아내가 되려고 모든 걸 다했다. 하지만 이젠 진정한 나로 살고 싶었다.나는 그 생각에 절로 미소를 지었다. 우현수가 화를 낼수록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진정되는 것 같았다.다시 정적이 흘렀다. 우리 둘은 말없이 앉아 있었고 지훈이는 만화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시간 뒤 우리는 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지훈이의 손을 잡고 우현수는 짐을 내렸다.“빨리 바다로 가고 싶어요.”지훈이는 흥분한 상태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그래. 빨리 가자. 우리 지훈이가 가고 싶다는데.”우현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다치지 않은 나의 한 쪽 팔을 잡고 어머니 쪽으로 나를 끌고 갔다.그쪽에는 경찰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몇 명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지훈이는 모두에게 인사했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굳이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우현수는 짐을 가져와 한 경찰관에게 건넸고 청아, 도언이와 우지찬 옆으로 갔다. 그리고 청아 쪽으로 돌아서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이마에 키스했다.나는 모른 척했다. 우현수가 나를 무시한 것과 내가 느끼는 고통은 모두 거짓이라고 나를 속이며 위로했다.왜 굳이 내 앞에서 저런 행동을 할까? 지훈이가 비행기에 타기 전까지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수는 없는 건가?“5분 뒤 출발할게요.”조종사라고 짐작되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모두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내가 평소처럼 굽신거릴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예상을
지훈이가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혼자의 삶에 적응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었다.지훈이는 내 삶의 전부였기에 그가 없으니 나는 너무 허전했다. 예상대로 나는 혼자 씩씩하게 지내지 못했다. 마치 난파선처럼 바다에서 떠도는 느낌이었다. 나는 매일 지훈이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렸다. 지훈이의 달콤한 목소리를 들으면 나는 한결 차분해지고 에너지를 얻게 된다.공항에서 헤어진 후 나는 우현수에 대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내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의 자리가 있었지만 우리 사이에는 미래가 없었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더 이상 살 수는 없었다.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칼에 찔렸거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없으니 아마 모두 무사한 것 같았다.퇴근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누군가와 부딪혔다.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죄송합니다.”나는 사과하며 떨어진 책을 주웠다. 오늘은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 그저 집에 가서 자고 싶었다.“괜찮아요.”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유재인이었다.그는 내가 떨어뜨린 책을 함께 주웠고 우리는 동시에 일어섰다. 그의 환한 미소를 보자 나도 모르게 같이 웃었다.“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유재인은 경찰 제복을 입고 있었고 정말 멋져 보였다. 내는 남자를 멀리하겠다고 다짐했지만 눈을 흐뭇하게 해주는 미남들까지 보지 않겠다는 건 아니었다.“아이들에게 펜타닐을 파는 사람이 있다는 신고를 받았어요.”유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했다.“근데 수아 씨는 여기 선생님이에요?”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네.”나는 갑자기 신경이 쓰였다. 억만장자의 아내와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지만 나는 가르치는 일이 좋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반대가 심하셨다. 내가 청아처럼 변호사가 되거나 도언이처럼 사업가가 되길 원하셨다. 아마 나를 더 싫어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그럼 무슨 과목을 가르치세요?”그는 진심으로 궁금한 듯 물
우리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너무 어색해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그는 마치 나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의 강렬한 시선을 피하고자 고개를 돌렸다.“재인아!”뒤돌아보니 다른 경찰관이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다.“곧 갈게.”유재인은 짧게 대답하고 다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오늘 참 예쁘네요. 이렇게라도 만나서 너무 반가워요. 또 연락드릴게요.”“네...”이때 그는 갑자기 나에게 포옹하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남아 멍을 때렸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장을 보러 갔다. 시장은 학교에서 멀지 않아서 걸어가기로 했다.깁스를 풀었지만 어깨가 여전히 쑤시고 아팠다. 그래도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사야 할 물건들을 떠올리며 걸어가는데 머릿속에는 온통 유재인과의 대화였다.유재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우현수와 너무 달랐다. 그동안 나를 예쁘다고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비록 유재인은 늘 다정하게 나를 대해줬지만 나는 그게 진심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내 남편조차 나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다른 남자들도 그러지 않을까?‘한수아, 왜 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난리야.’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유재인은 아마 예의상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멋진 남자가 나 같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일 리가 없으니까.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나는 내 외모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쓸데없는 기대를 하고 싶지 않았다.드디어 시장에 도착했다. 혼자 살고 있었으니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들을 빠르게 구매하고 계산을 마친 후 가게를 나섰다.오늘은 어깨가 아파서 차를 몰고 출근하지 않았다. 택시를 잡고 집을 가려던 순간 우현수와 청아를 발견했다.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청아가 무슨 말을 하자 우현수는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정말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순간 아픈 추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내 앞에서는 한
“오늘 하루 어땠어?”나는 전화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운 채 청소하며 지훈이와 통화했다. 많이 불편했지만 적어도 어깨 상태는 이제 훨씬 나아졌다.“너무 재밌어요!”지훈이는 흥분된 어조로 소리쳤다.“방금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이제 미끄럼틀 타러 가요! 바로 바다로 이어진 그런 미끄럼틀!”지훈이의 신나는 목소리에 나도 행복해졌다. 그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니까. 그가 안전하게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내가 그랬잖아. 재미있을 거라고.”나는 청소를 포기하고 소파에 앉았다. 온전히 지훈이랑 통화하고 싶었다.“엄마는 어때요? 주말 잘 보내고 있어요?”사실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여덟 살짜리 내 아들이 나보다 더 재미있게 지내고 있었다. 나는 갈 곳도 없고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만날 사람도 없었다.동료들이 가끔 나를 모임에 초대하곤 했지만 내가 계속 거절하자 더 이상 초대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진심으로 나를 알고 싶어서 초대한 게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들을 초대할 때 내가 거기 있어서 초대한 것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뭐 그냥 그렇지. 청소나 좀 하고 있어”나는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지훈이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엄마 나처럼 나가서 재미있게 놀아야죠. 나 없다고 집에만 있으면 안 돼요.”지훈이의 잔소리에 나는 피식 웃었다.“알았어. 청소만 끝내고 나면 나갈게.”나는 거짓말을 했다. 청소를 끝내면 아마 영화나 보고 야식이나 먹겠지. 아니면 그냥 푹 잘 것이다.“알았어요. 외할아버지가 저를 부르네요.”“그래 빨리 가봐. 이따 다시 통화하자.”“할머니가 엄마한테 안부 전해 달래요.”“그래. 미끄럼틀 조심히 타.”나는 어머니의 안부 인사를 완전히 무시하며 말했다.지훈이는 전화를 끊고 신이 난 상태로 미끄럼틀을 타러 갔다. 내가 어머니의 안부 인사를 무시한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훈이는 아버지와 똑같이 평소에는 굉장히 민감한 성격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완전히 놀이에 빠져 있었다.나는 미소를
“저는 서진수라고 해요. 한도언의 여자 친구예요.”나는 순간 그녀를 집에 들인 것을 후회했다.“이만 나가 주세요.”나는 또 가족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다 똑같았다.“제발 제 말 한 번만 들어주세요.”그녀가 애원해 봤자 나는 마지못해 그녀의 말을 듣기로 했다.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나는 원래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편인데 서진수는 조금 달랐다.“솔직히 말해서 도언이가 잘못한 건 알아요. 제가 도언이를 사랑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수아 씨가 무슨 잘못을 했든 그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되죠.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동안 수아 씨를 찾아뵙고 싶었지만 날 거절할까 봐 두려웠어요. 그런데 수아 씨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있을 수 없었어요. 모르는 사람의 말을 믿기란 참 힘든 거죠. 하지만 저에게 기회를 준다면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나는 소파에 다리를 올리고 팔걸이에 기대어 앉았다.“도언이는 진수 씨가 여기 온 걸 알아요?”“제가 하는 일에 간섭하는 타입은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여기 온 건 알고 있어요. 저희는 서로 비밀이 없거든요.”서진수가 도언이를 사랑하는 건 분명했다. 도언이는 다른 사람들에겐 좋은 사람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늘 상처만 주는 존재였다.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고 마치 내를 죄수처럼 대했다.서진수를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면 후회될 것 같았다. 이제는 내 주위 사람들을 더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더 이상 그들을 내 삶에서 밀어낼 수는 없었다.“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그거 지켜주면 기회를 줄게요.”마침내 나는 말했다.어쩌면 약기운 때문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일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상황이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것 같았다.“조건이 뭐죠?”“도언이나 제 가족 얘기는 절대 하지 마세요. 더 이상 엮이기 싫어요.”그러자 서진수는 잠시 망설였다. 언니 동생으로 지내려면
눈을 떠보니 혼자였다. 역시 꿈이었나 보다. 우현수가 침대에서 나와 함께 잤을 리가 없지. 병원에서 잠든 이후로는 기억이 거의 없었다. 링거를 너무 많이 맞아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너무 어지러워서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몇 분 후에야 겨우 일어나 욕실로 걸어가 샤워했다. 병원 특유의 냄새를 빨리 씻어내고 싶었다.할 일이 너무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휴대폰도 없고 차도 없었다. 경찰이 내 휴대폰이 땅에 떨어지면서 부서졌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몇 주 동안 휴가를 받았지만 복귀 전에 차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옷을 다 입고 나니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팠다.‘젠장, 진통제부터 먹어야겠네.’계단을 내려가면서 며칠을 어떻게 버틸지 고민이 됐다. 몸에 기운이 없어서 무슨 일을 하려 해도 금세 힘이 빠져버렸다.나는 주방에 가서 간단히 아침을 만들었다. 정말 긴 잠을 자고 싶었다. 주방 아일랜드 식탁 대신 거실로 가서 편하게 먹기로 했다.머리를 다친 게 이렇게나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억지로 밍밍한 음식을 먹고 진통제를 삼켰다. 소파에 누워서 잠깐 눈을 붙이려는데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누군지 모르겠지만 짜증이 났다. 지금은 문까지 걸어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님을 맞이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냥 자고만 싶었다.무시하려 했지만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무시해도 되겠지? 내가 자고 있다고 생각하고 돌아가겠지?’그렇게 생각했지만 또다시 초인종이 울렸다.나는 한숨을 내쉬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쁜 여자였다. 검은 머리에 초롱초롱한 눈 그리고 주먹만 한 얼굴에 도톰한 입술까지."어...누구세요?"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 문틀에 기대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살짝 웃으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혹시 수아 씨가
“무슨 말이야?”우현수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난 네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잖아.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수아랑 집에서 놀고 있어야지, 안 그래?”나는 청아의 말이 자꾸 떠올라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우현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 지금 싸우려고 그러는 거지? 난 싫어. 그냥 퇴원하고 집에 가자.”“날 싫어하는 주제에 왜 도와줘? 필요 없어! 그냥 꺼져. 우현수, 너도 여기 있기 싫잖아.”“정말? 내 도움이 필요 없다고? 그럼 어떻게 혼자 퇴원 수속을 할 건데? 넌 친구도 없잖아.”“재인 씨가 날 데려다줄 거야.”나는 친구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유재인은 내가 부탁하면 와줄 것 같았다.그러자 우현수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돼.”그는 진지하게 말했다.“선택해. 나랑 같이 돌아가거나 아니면 병원에 며칠 더 있어. 유재인은 절대 안 돼.”“대체 왜 이래? 날 떨쳐내려고 그렇게 애쓰더니 이제 와서 왜 악착같이 붙어있어? 난 청아랑 엮이는 게 싫어.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다고.”그가 자꾸 나한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면 청아는 내가 그를 유혹하려 한다고 오해할 게 뻔했다.“그나저나 그날 네가 공격당했을 때 청아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청아를 집에서 내쫓았어?”“청아가 다 말해주지 않았어?”나는 어이가 없었다.“네 얘기도 듣고 싶어.”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갔다.“굳이 들을 필요 없잖아. 어차피 넌 내 말을 안 믿을 거고, 항상 청아 편만 들 테니까.”“수아야...”나는 문을 쾅 닫고 천천히 옷을 입었다. 옷을 다 입고 나니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눈앞이 흐릿해졌다.그리고 문을 나서며 벽을 짚고 힘겹게 걸었다. 우현수는 도우려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간호사가 두고 간 휠체어로 걸어가 앉았다. 의사가 퇴원 절차를 모두 설명했으니 이제 나가면 그만이었다.나는 백을 들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빨리 가. 더 이상 서로 얼굴 볼 필요
청아가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누가 들여보냈지? 난 청아가 여기 있는 게 너무 싫었다. 나랑 가까이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잠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니깐.“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네가 깡패들 손에 죽이 전에 내가 먼저 널 죽도록 괴롭힐 거야. 네 아들도 포함해서 말이야. 곧 지훈이가 나를 엄마라고 부를걸?”우리가 진짜 자매가 맞긴 한 걸까? 내가 청아에게 못된 짓을 한 건 알지만 이렇게까지 벌을 받아야 할까? 그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고 생각했다.“청아야, 넌 참 못났어.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아둬. 지훈이는 절대 너를 엄마로 생각하지 않을 거야. 공항에서 너를 무시했던 거 기억 안 나? 넌 그 애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현수랑 결혼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거고.”그러자 청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표정이 이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상관없어. 어쨌든 현수는 밤마다 나랑 같이 자. 난 곧 임신할 거야. 그러면 현수는 널 그리고 네 아들도 잊겠지. 내 아이들만 인정하게 할 거라고. 솔직히 현수가 널 사랑한 적은 없잖아. 네가 옆에 있어도 아마 내 생각만 했겠지.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그녀의 말이 가슴을 후벼팠지만 난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엔 오직 지훈이 생각뿐이었다. 청아를 엄마라고 부르게 만들겠다고? 나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그리고 근처에 있던 꽃병을 집어 던졌다. 청아는 비명을 지르며 피했고 꽃병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그때 도언이가 방으로 들어왔다.“미쳤어?”청아가 소리쳤다.“둘 다 당장 나가!”나도 같이 소리쳤다.이때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어리둥절하게 우리를 바라봤다.“누나 무슨 일이야?”도언이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난 그의 상냥함조차 싫었다.그가 날 얼마나 무시하고 차갑게 대했는지 그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 날 누나로 대해준 적도 없다. 늘 청아에게만 다정했고 보란 듯이 나한테 그걸 또 자랑했다.“네 그 잘난 작은 누나한테
[한수아의 시각]“엄마, 보고 싶었어요. 왜 전화 안 했어요?”지훈이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묻어났다.나는 당장이라도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내가 아직 여기에 있고 그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미안해. 엄마가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아빠 폰으로 전화하는 거야.”“그럼 영상통화 할 수 있어요? 보고 싶어요.”지훈이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병실에 누워 있는 날 보여줄 수는 없었다. 지훈이가 걱정할 테고 당장 집에 오겠다고 할 것이다.게다가 내가 표적이 된 상황에서 그를 위험에 빠뜨릴 순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지금은 안 돼. 여기에서 영상통화를 못 한대.”나는 거짓말을 했다.“그런 룰이 어디 있어요? 왜 안되는데요?”지훈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지훈이가 화가 난 걸 알았지만 그저 넘기기로 했다.“지훈아...”“보고 싶단 말이에요. 아빠가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랑 말하면 영상통화 할 수도 있잖아요. 아빠라면 다 할 수 있잖아요.”울먹거리는 지훈이의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이때 우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날 보고 있었다. 지훈이도 우현수라는 이름 하나면 다 해결된다는 걸 알 나이가 된 것 같다.“이번엔 안 돼. 대신 내일 카톡으로 통화하자.”“정말이죠?”“정말이야. 약속.”오늘 퇴원하면 내일쯤 통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알았어요. 엄마. 내일 얘기해요. 사랑해요.”“나도 우리 지훈이를 사랑해. 잘 자.”“할머니가 바꿔 달라...”나는 그 말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지금 엄마랑은 절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우현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나가달라고 그렇게 말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간호사에게도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간호사에게 자기를 쫓아내면 병원 영업을 정지시키겠다고 위협했다.그는 매일 찾아왔다. 이렇게 자주
유재인은 수아의 오른쪽에 앉아 여러 장의 카드를 펼쳐놓고 있었다. 수아는 살짝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있고 얼굴엔 상처가 있었지만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런데 내가 들어오자 그녀의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나가.”수아가 차갑게 말했다. 다시 차가운 수아로 돌아온 것 같았다.“싫어.”나는 차분하게 대답하며 그녀의 왼쪽에 앉았다.수아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고 눈빛은 화로 가득 찼다. 어제까지는 분명 괜찮아 보였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너도 그리고 저 둘도 나갔으면 좋겠어. 꼴도 보기 싫어. 나가.”수아는 청아와 한도언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뭔가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어제는 평온했는데 오늘은 완전히 달랐다. 수아를 두 사람에게 맡긴 게 실수였던 걸까?“수아 씨, 진정하세요. 아직 회복 중이라 화를 내면 안 돼요.”유재인이 나서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러자 그녀의 눈빛은 부드러워졌고 방금 전의 분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유재인의 손에서 수아의 손을 당장이라도 빼앗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왜 화가 나는 걸까?수아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으니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이 장면이 날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걸까? 왜 그녀가 유재인을 바라보는 눈빛을 보자 나는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이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경찰서장이 들어왔다. 유재인은 수아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서장님.”유재인이 인사했다.“그래. 재인아.”서장은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우리에게 다가왔다.“수아 씨,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수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유재인은 다시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날 공격당했을 때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나요?”서장이 펜을 꺼내며 물었다.“아니요. 별다른 일 없었어요. 평범한 날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먹고 교회에 갔어요.”“그 전날은요? 낯선 사람을 본 적 있나요?”수아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자세를
나는 청아를 쳐다봤다. 한도언은 그녀 옆에 서 있었는데 마치 지옥에서 도망친 사람 같아 보였다.“깨어났어요?”한도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사고 때문에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렸다. 한도언은 누나를 잃을 뻔했기에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아니요.”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현수야 집에 가. 가서 샤워하고 옷 좀 갈아입고 와. 너 지금 좀비 같아 보여.”청아가 말했다.“안 갈 거야.”나는 반박했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난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네가 이러다 지쳐서 쓰러지면 큰 일이야. 그냥 집에 가. 가서 씻고 나와.”청아는 계속 나를 설득했고 한도언도 말을 덧붙였다.“누나 말이 맞아요. 우리가 여기 있을 테니 집에 다녀오세요.”나는 수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당장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빨리 샤워하고 돌아와도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알겠어. 그럼 수아 곁을 떠나지 마.”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쁜 놈들이 다시 수아에게 공격할 수도 있으니 나는 많이 걱정되었다. 한도언은 수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청아는 나를 차갑게 바라봤다.내가 일어나 떠나려 할 때 청아는 나의 팔을 덥석 잡았다.“수아는 괜찮을 거야.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야.”청아는 미소를 지으며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 우리가 다시 만나기로 한 이후로 그녀는 내 뺨, 턱 그리고 이마에 자주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은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9년 동안 꿈꿔왔던 일이었음에도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그 키스 자체가 완전히 잘못된 행동인 것 같았다. 내가 왜 갑자기 이럴까? 청아는 내가 거의 10년 동안 꿈꿔왔던 여자인데 말이다.나는 집에 도착하고 제일 빠른 속도로 샤워했다. 옷을 입던 중 한도언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수아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면서 나는 잠깐 낮잠을 자기로 했다. 나는 며칠 동안 잠
[우현수의 시각]“우리 수아는 어때?”최미숙은 애써 울음을 참으며 나에게 걱정스레 물었다.수아가 혼수 상태에 빠진 며칠 동안 우리는 걱정되는 마음에 힘든 나날을 보냈다.“어제 몇 분 동안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이 머리에 부상을 입어 잠시 휴식이 필요하대요.”그러자 최미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도철이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많이 변했다. 최미숙은 수아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수아는 더 이상 가족들과 엮이기 싫었다. 수아는 우리 모두와 관계를 끊고 싶어 했다.“괜찮겠지? 원래대로 회복할 수 있어?”“네. 의사 선생님이 자신 있게 말씀하셨지만 완전히 회복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어요. 아직은 좀 일러요. 이런 머리 부상에는 합병증이 따라올 수도 있다고 했어요.”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 중 하나였다. 나는 수아가 무사하길 바랐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이겨낼 거예요. 저는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수아가 깨어나면 전화할게요. 방금 지훈이를 찾더라고요.”“그래. 소식 꼭 좀 전해줘. 부탁해.”“네.”나는 전화를 끊고 수아를 바라봤다. 수아는 너무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백옥같은 그녀의 피부를 난 왜 이제야 발견했을까? 긴 속눈썹과 앵두처럼 빨간 입술을 왜 그동안 보지 못했을까?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나는 수아를 좋아하지 않았다. 수아가 가까이 오려고 하면 나는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거부했다.하지만 지금의 수아는 주목받을 만큼 매력적이었다.나는 부드러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요즘 자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수아의 맥박을 짚으며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려고 했다.지난 일요일을 떠올리면 나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청아를 조심하라고 수아에게 전화하려 했었다. 하지만 청아는 울며 나에게 와서 수아가 결혼 생활 동안 나와 수도 없이 많은 잠자리를 가졌다고 자랑했다고 말했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수아에게 전화하여 따지려 했다.순간 폭발음과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수아 씨,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걱정했어요.”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금 여기가 어딘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세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병원이죠... 제가 차 문을 열자 강력한 힘에 의해 튕겨 나갔어요. 그 충격으로 머리를 부딪쳤죠.”눈을 뜬 이후로 나는 내가 겪었던 일을 잊으려고 했다. 거의 죽을 뻔한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두려웠다.“맞아요. 차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고 당신은 그 충격으로 튕겨 나간 겁니다.”의사는 잠시 멈칫거렸다.“지금이 몇 년도인지 아시나요?”나는 연도를 말했고 의사는 그것을 받아적었다. 우현수는 내 손을 꼭 쥐었고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그런 눈빛을 처음 보았다. 비록 너무 짧은 순간이었지만 말이다.나는 내 차가 폭발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스트레스와 충격으로 머리가 아파져 오기 시작했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졌다.“연도도 알고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고 현수 씨가 누군지도 알고 있으니 잘 회복된 것 같네요. 하지만 기억 상실증에 걸릴 수도 있으니 추가 검사를 해야 합니다.”“네.”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부상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어깨가 탈구되어 교정을 했고요. 갈비뼈 세 개가 부러졌고 비장이 파열되었으며 외상성 뇌 손상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뇌에 액체가 축적되어 이를 배출해야 했고 약간의 부종도 있었습니다. 어깨에 있던 상처가 다시 벌어져서 다시 꿰맸어요. 현재 가장 큰 걱정은 머리 부상입니다. 지금 어떠세요?”우현수가 내 오른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손으로 머리를 만졌다. 손끝에 붕대가 닿자 나는 이 모든 게 실감이 났다.“제가 얼마 동안 누워있었죠?”“오늘이 네 번째 날입니다. 머리 부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졌어요. 이로 인한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으니 며칠 더 머물며 상태를 확인할 예정입니다. 괜찮겠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지쳐서 다시 잠들고만 싶었다. 의사는 무언가를 적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