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혼자였다. 역시 꿈이었나 보다. 우현수가 침대에서 나와 함께 잤을 리가 없지. 병원에서 잠든 이후로는 기억이 거의 없었다. 링거를 너무 많이 맞아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너무 어지러워서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몇 분 후에야 겨우 일어나 욕실로 걸어가 샤워했다. 병원 특유의 냄새를 빨리 씻어내고 싶었다.할 일이 너무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휴대폰도 없고 차도 없었다. 경찰이 내 휴대폰이 땅에 떨어지면서 부서졌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몇 주 동안 휴가를 받았지만 복귀 전에 차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옷을 다 입고 나니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팠다.‘젠장, 진통제부터 먹어야겠네.’계단을 내려가면서 며칠을 어떻게 버틸지 고민이 됐다. 몸에 기운이 없어서 무슨 일을 하려 해도 금세 힘이 빠져버렸다.나는 주방에 가서 간단히 아침을 만들었다. 정말 긴 잠을 자고 싶었다. 주방 아일랜드 식탁 대신 거실로 가서 편하게 먹기로 했다.머리를 다친 게 이렇게나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억지로 밍밍한 음식을 먹고 진통제를 삼켰다. 소파에 누워서 잠깐 눈을 붙이려는데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누군지 모르겠지만 짜증이 났다. 지금은 문까지 걸어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님을 맞이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냥 자고만 싶었다.무시하려 했지만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무시해도 되겠지? 내가 자고 있다고 생각하고 돌아가겠지?’그렇게 생각했지만 또다시 초인종이 울렸다.나는 한숨을 내쉬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쁜 여자였다. 검은 머리에 초롱초롱한 눈 그리고 주먹만 한 얼굴에 도톰한 입술까지."어...누구세요?"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 문틀에 기대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살짝 웃으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혹시 수아 씨가
“저는 서진수라고 해요. 한도언의 여자 친구예요.”나는 순간 그녀를 집에 들인 것을 후회했다.“이만 나가 주세요.”나는 또 가족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다 똑같았다.“제발 제 말 한 번만 들어주세요.”그녀가 애원해 봤자 나는 마지못해 그녀의 말을 듣기로 했다.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나는 원래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편인데 서진수는 조금 달랐다.“솔직히 말해서 도언이가 잘못한 건 알아요. 제가 도언이를 사랑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수아 씨가 무슨 잘못을 했든 그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되죠.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동안 수아 씨를 찾아뵙고 싶었지만 날 거절할까 봐 두려웠어요. 그런데 수아 씨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있을 수 없었어요. 모르는 사람의 말을 믿기란 참 힘든 거죠. 하지만 저에게 기회를 준다면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나는 소파에 다리를 올리고 팔걸이에 기대어 앉았다.“도언이는 진수 씨가 여기 온 걸 알아요?”“제가 하는 일에 간섭하는 타입은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여기 온 건 알고 있어요. 저희는 서로 비밀이 없거든요.”서진수가 도언이를 사랑하는 건 분명했다. 도언이는 다른 사람들에겐 좋은 사람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늘 상처만 주는 존재였다.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고 마치 내를 죄수처럼 대했다.서진수를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면 후회될 것 같았다. 이제는 내 주위 사람들을 더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더 이상 그들을 내 삶에서 밀어낼 수는 없었다.“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그거 지켜주면 기회를 줄게요.”마침내 나는 말했다.어쩌면 약기운 때문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일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상황이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것 같았다.“조건이 뭐죠?”“도언이나 제 가족 얘기는 절대 하지 마세요. 더 이상 엮이기 싫어요.”그러자 서진수는 잠시 망설였다. 언니 동생으로 지내려면
차에서 내리자 나는 저택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손은 떨리고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가방에 서류가 있음에도 나는 아직도 그와 이혼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서류를 전해주고 아들을 데려오면 모든 것이 끝난다.집 안으로 들어서자 희미했던 목소리는 점점 더 뚜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부엌 근처에 멈춰 섰다. 그들의 대화는 너무 선명하게 들렸고 분위기는 차가웠다.“왜 저랑 엄마랑 같이 살기 싫은 거예요?”지훈이가 아빠에게 물었다. 아들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아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지만 이혼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우리의 결혼은 처음부터 잘못된 거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다.“지훈아, 너도 알잖아. 난 네 엄마랑 같이 못 살아.”남편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결혼 생활 내내 그는 나에게 한 번도 부드럽게 말한 적이 없었다. 항상 차갑고 무뚝뚝한 목소리였다.“왜요?”“별 이유가 없어.”남편은 중얼거렸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는 그의 모습이 상상이 갔다. 지훈이가 더 이상 질문하지 않도록 애쓰는 모습 말이다. 하지만 지훈은 내 아들이고 피는 속일 수 없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많았고 질문하는 것을 좋아했다.“엄마를 사랑하지 않으세요?”너무나도 단순한 질문이지만 나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래서 한발 물러서서 벽에 기대어 대답을 기다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나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 지훈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사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과연 우리 아들에게 진실을 말할 것인지 그게 궁금했다.그는 목을 가다듬으며 시간을 끌었다.“지훈아...”“엄마를 사랑하냐고요?”지훈이는 마지막이라는 듯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자 남편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너를 낳아줘서 고맙지.”
“나 가봐야 해. 지훈이를 좀 봐줘.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어.”나는 가방을 들며 멍하니 말했다.“알았어. 어머니가 오면 나도 곧 병원으로 갈게.”나는 멍해져서 우현수의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한 채 아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집을 떠났다. 병원으로 운전하기 시작했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다.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나를 신경 쓰지도 않았고 나에게 관심을 주지도 않았다. 한청아는 나의 여동생이고 한도언은 나의 남동생이다. 청아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도언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두 사람은 가문의 공주와 왕자였다. 나는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 외톨이었다.모두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난 누구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공부와 운동을 아무리 잘하고 동아리 활동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따내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낯선 외부인 같았다.9년 전 사건 이후로 나는 가족과 거의 관계를 끊었다. 한도언은 나와 말도 섞지 않았고 아버지와 함께 나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기까지 했다. 어머니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나에게 말을 걸거나 전화를 걸었다. 청아와는 9년 동안 만나거나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청아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한 말은 난 죽은 존재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청아는 더 이상 나를 언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지금 아버지가 칼에 찔렸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향하고 있지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이런 큰 일이 벌어지면 충격이라도 받아야 하나? 아니면 슬퍼해야 하나?평생 나를 외면한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까?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 내가 이상한 걸까?병원으로 가는 내내 나는 어린 시절의 일들을 생각했다. 그 상처와 아픔은 여전히 생생했다. 가족에게 외면당한 고통은 아마도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나는 가족에게 외면당하고 남편과 시댁에게
나는 차가운 병원 의자에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여전히 울고 계셨다.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잃었으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고 그런 어머니를 보는 나도 마음이 아팠다.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완쾌할 줄 알았는데 세상을 떠났으니 나는 모든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우리는 언제나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고 아버지는 나를 미워했지만 결국 나의 아버지였기에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괜찮아?”이때 우현수가 내 옆에 앉으며 물었다.그는 한 시간쯤 전에 도착했다. 지금껏 나를 걱정해 준 적이 없기에 나는 갑작스러운 관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괜찮아.”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아버지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나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이미 상처받을 대로 받았거나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들 하나둘씩 무너지는 가운데 나만 멍하니 버티고 있었다.이때 발소리가 들리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도언이가 나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내가 잘못한 건 있지만 그날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고 생각했다.“왜?”“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실 때 어머니가 청아한테 전화했어. 아마 곧 도착할 거야. 아직 아빠가 돌아가신 걸 몰라.”그녀의 이름만으로도 우현수는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따뜻했던 위로가 다시 차갑게 식어갔다.“알았어.”나는 대충 대답했다. 굳이 더 할 말이 없었다.몇 년 동안 청아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것이다.“청아한테 잘해.”어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잖아요.”“그건 네 생각이고. 9년 전 네가 배신해서 청아가 우리 집을 나갔잖아. 또다시 그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젠 네 아빠도 돌아가셨고 우리는 서로 챙기면서 살아야 해.”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과거의 일을 다시 언급하는 게 너무 싫었다. 어리석었던 행동의 대가를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픔과 괴로움이었다.도망치고 싶었고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두 사람을 뚫어지게 보고만 있었다. 이글거리는 두 사람의 눈빛을 보자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둘이 포옹하는 모습도 그리고 우현수가 청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모습도 모두 지켜봤다. 우현수는 청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는 키스하지 않고 단지 이마를 청아의 이마에 대고 있었다.그는 따뜻한 가족의 품속에 돌아온 사람처럼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우현수는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만약 이곳이 병원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아직 부부였다면 그는 나를 배신했을까?부정하고 싶었지만 또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는 한청아였으니까. 우현수는 청아를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갈 사람이다.더는 견딜 수 없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순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덜 아플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 또한 내 탓이다. 애초에 사랑해서는 안 될 남자를 사랑한 내 잘못이다.“제발 그만. 이 고통을 멈춰줘.”나는 내 소원을 들어줄지도 모를 어떤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대답도 없었고 구원도 없었다.나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크게 숨을 쉬려고 해도 턱턱 막혀왔다. 나는 천천히 죽어가는 것 같았고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 같았다.“이게 바로 사랑해서는 안 될 남자를 사랑한 결과야.”한도언이 조롱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도언아, 뭐 하려는 거야? 청아한테서 떨어지라고 경고하거나 나를 비웃는 거라면 꺼져. 돌아가. 꼴 보기 싫으니까.”나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내가 울고 있는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도언이는 나의 말에 살짝 놀랐다. 내가 반박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태양은 밝게 빛나고 있었고 나는 익숙한 길을 따라 차를 몰고 갔다. 성당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모두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온 듯했다.장례식을 돕는 사람은 없었지만 주위를 둘러봤더니 모든 것이 준비 완료된 상태여서 시름이 놓였다. 나를 키워준 은혜에 마지막으로 보답할 기회라고 생각했다.예배가 시작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사람들이 앉은 반대쪽에 가서 앉았다. 가족들과 같이 앉으면 어색할 것 같았고 청아 곁에는 더 앉고 싶지 않았다.“엄마, 왜 여기 앉아요? 할머니 옆에 앉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지훈이가 가족들이 앉아 있는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물론 사람들은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가족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앉을 자리가 없잖아. 우리는 그냥 이쪽에 앉자.”나는 거짓말했다. 지훈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 내 옆에 앉았다. 익숙한 향수 냄새에 나는 깜짝 놀랐다. 우현수가 왜 청아 옆에 앉지 않고 이쪽에 앉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우현수 때문에 상처받고 화가 나서 같이 앉고 싶지 않았다.“아빠.”지훈이는 속삭이듯 그를 불렀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은 우리를 쳐다보았다.나는 그들을 째려보며 신경 쓰지 말라고 눈치를 줬다.“내가 엄마랑 아빠 사이에 앉아도 돼요?”지훈이가 귓속말로 나에게 말했다. 숨 막히는 어색함을 없애줄 지훈이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재빠르게 지훈이와 자리를 바꾸었고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우리는 모두 언젠간 이 세상을 떠나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삶을 살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지는 우리의 몫이죠. 이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고 떠나게 될까요? 아니면 후회만 남긴 채 떠나게 될까요?”목사의 말을 듣자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죽는다면 누가 나의 장례식에 올까? 사람들은 과연 신경 쓸까? 아니. 어쩌면 축하 연회를 열겠지. 지훈이만 슬퍼할
[우현수의 시각]나의 전처이자 지훈이의 엄마가 칼에 찍혀 피를 흘리며 차가운 묘지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이 순간 한수아에게 한 번도 느껴보진 못한 감정을 느꼈다.칼을 든 남자들이 달려왔을 때 나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수아가 지훈이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혼자인 청아에게 달려갔다. 청아를 위해서라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경찰은 곧 도착해서 범인을 잡았다. 한 경찰이 구급차를 부르라고 소리치자 나는 누가 다쳤는지 뒤돌아봤다. 하지만 수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수아가 다친 모습을 보자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모든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경찰은 수아를 안전하게 구급차에 실었다. 수아의 상태를 확인 못 하게 한 경찰의 태도에 화가 났다. 수아는 나의 아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처이다.하지만 나 자신에게 가장 많이 화가 났다. 나는 수아를 지켜야 했다. 만약 수아에게 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나는 지훈이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나의 전처이자 지훈이의 엄마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평생 갈 것이다.그래서 나는 병원 복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수아는 응급실로 실려 간 이후로 아무 소식도 없었다.“제발... 아무 일도 없었으면...”시어머니인 최미숙이 기도하면서 말했다. 이렇게 수아를 걱정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한도철이 돌아간 후 최미숙은 많이 부드러워졌다.지훈이만 빼고 우리 모두 병원에 도착했다. 한도언과 청아는 최미숙 곁에 앉았다.나는 너무 불안했다. 지훈이를 위해서라도 수아가 무사해야 한다고 속으로 기도했다.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모른다. 고개를 들었더니 수아가 보였다. 그녀는 간호사 데스크에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왼쪽 팔은 붕대로 감겨 있었고 신용카드를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수아는 가방을 든 채로 미간을 찡그리며 힘겹게 핸드폰을 꺼내려 애를 썼다.“수아야.”우리 곁을 지나칠 때 나는 핸드폰을 보고 있는 수아를 불렀다. 그러자 수아는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