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차가운 병원 의자에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여전히 울고 계셨다.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잃었으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고 그런 어머니를 보는 나도 마음이 아팠다.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완쾌할 줄 알았는데 세상을 떠났으니 나는 모든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우리는 언제나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고 아버지는 나를 미워했지만 결국 나의 아버지였기에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괜찮아?”이때 우현수가 내 옆에 앉으며 물었다.그는 한 시간쯤 전에 도착했다. 지금껏 나를 걱정해 준 적이 없기에 나는 갑작스러운 관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괜찮아.”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아버지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나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이미 상처받을 대로 받았거나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들 하나둘씩 무너지는 가운데 나만 멍하니 버티고 있었다.이때 발소리가 들리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도언이가 나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내가 잘못한 건 있지만 그날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고 생각했다.“왜?”“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실 때 어머니가 청아한테 전화했어. 아마 곧 도착할 거야. 아직 아빠가 돌아가신 걸 몰라.”그녀의 이름만으로도 우현수는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따뜻했던 위로가 다시 차갑게 식어갔다.“알았어.”나는 대충 대답했다. 굳이 더 할 말이 없었다.몇 년 동안 청아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것이다.“청아한테 잘해.”어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잖아요.”“그건 네 생각이고. 9년 전 네가 배신해서 청아가 우리 집을 나갔잖아. 또다시 그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젠 네 아빠도 돌아가셨고 우리는 서로 챙기면서 살아야 해.”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과거의 일을 다시 언급하는 게 너무 싫었다. 어리석었던 행동의 대가를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픔과 괴로움이었다.도망치고 싶었고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두 사람을 뚫어지게 보고만 있었다. 이글거리는 두 사람의 눈빛을 보자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둘이 포옹하는 모습도 그리고 우현수가 청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모습도 모두 지켜봤다. 우현수는 청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는 키스하지 않고 단지 이마를 청아의 이마에 대고 있었다.그는 따뜻한 가족의 품속에 돌아온 사람처럼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우현수는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만약 이곳이 병원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아직 부부였다면 그는 나를 배신했을까?부정하고 싶었지만 또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는 한청아였으니까. 우현수는 청아를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갈 사람이다.더는 견딜 수 없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순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덜 아플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 또한 내 탓이다. 애초에 사랑해서는 안 될 남자를 사랑한 내 잘못이다.“제발 그만. 이 고통을 멈춰줘.”나는 내 소원을 들어줄지도 모를 어떤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대답도 없었고 구원도 없었다.나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크게 숨을 쉬려고 해도 턱턱 막혀왔다. 나는 천천히 죽어가는 것 같았고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 같았다.“이게 바로 사랑해서는 안 될 남자를 사랑한 결과야.”한도언이 조롱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도언아, 뭐 하려는 거야? 청아한테서 떨어지라고 경고하거나 나를 비웃는 거라면 꺼져. 돌아가. 꼴 보기 싫으니까.”나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내가 울고 있는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도언이는 나의 말에 살짝 놀랐다. 내가 반박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태양은 밝게 빛나고 있었고 나는 익숙한 길을 따라 차를 몰고 갔다. 성당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모두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온 듯했다.장례식을 돕는 사람은 없었지만 주위를 둘러봤더니 모든 것이 준비 완료된 상태여서 시름이 놓였다. 나를 키워준 은혜에 마지막으로 보답할 기회라고 생각했다.예배가 시작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사람들이 앉은 반대쪽에 가서 앉았다. 가족들과 같이 앉으면 어색할 것 같았고 청아 곁에는 더 앉고 싶지 않았다.“엄마, 왜 여기 앉아요? 할머니 옆에 앉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지훈이가 가족들이 앉아 있는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물론 사람들은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가족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앉을 자리가 없잖아. 우리는 그냥 이쪽에 앉자.”나는 거짓말했다. 지훈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 내 옆에 앉았다. 익숙한 향수 냄새에 나는 깜짝 놀랐다. 우현수가 왜 청아 옆에 앉지 않고 이쪽에 앉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우현수 때문에 상처받고 화가 나서 같이 앉고 싶지 않았다.“아빠.”지훈이는 속삭이듯 그를 불렀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은 우리를 쳐다보았다.나는 그들을 째려보며 신경 쓰지 말라고 눈치를 줬다.“내가 엄마랑 아빠 사이에 앉아도 돼요?”지훈이가 귓속말로 나에게 말했다. 숨 막히는 어색함을 없애줄 지훈이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재빠르게 지훈이와 자리를 바꾸었고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우리는 모두 언젠간 이 세상을 떠나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삶을 살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지는 우리의 몫이죠. 이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고 떠나게 될까요? 아니면 후회만 남긴 채 떠나게 될까요?”목사의 말을 듣자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죽는다면 누가 나의 장례식에 올까? 사람들은 과연 신경 쓸까? 아니. 어쩌면 축하 연회를 열겠지. 지훈이만 슬퍼할
[우현수의 시각]나의 전처이자 지훈이의 엄마가 칼에 찍혀 피를 흘리며 차가운 묘지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이 순간 한수아에게 한 번도 느껴보진 못한 감정을 느꼈다.칼을 든 남자들이 달려왔을 때 나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수아가 지훈이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혼자인 청아에게 달려갔다. 청아를 위해서라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경찰은 곧 도착해서 범인을 잡았다. 한 경찰이 구급차를 부르라고 소리치자 나는 누가 다쳤는지 뒤돌아봤다. 하지만 수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수아가 다친 모습을 보자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모든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경찰은 수아를 안전하게 구급차에 실었다. 수아의 상태를 확인 못 하게 한 경찰의 태도에 화가 났다. 수아는 나의 아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처이다.하지만 나 자신에게 가장 많이 화가 났다. 나는 수아를 지켜야 했다. 만약 수아에게 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나는 지훈이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나의 전처이자 지훈이의 엄마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평생 갈 것이다.그래서 나는 병원 복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수아는 응급실로 실려 간 이후로 아무 소식도 없었다.“제발... 아무 일도 없었으면...”시어머니인 최미숙이 기도하면서 말했다. 이렇게 수아를 걱정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한도철이 돌아간 후 최미숙은 많이 부드러워졌다.지훈이만 빼고 우리 모두 병원에 도착했다. 한도언과 청아는 최미숙 곁에 앉았다.나는 너무 불안했다. 지훈이를 위해서라도 수아가 무사해야 한다고 속으로 기도했다.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모른다. 고개를 들었더니 수아가 보였다. 그녀는 간호사 데스크에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왼쪽 팔은 붕대로 감겨 있었고 신용카드를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수아는 가방을 든 채로 미간을 찡그리며 힘겹게 핸드폰을 꺼내려 애를 썼다.“수아야.”우리 곁을 지나칠 때 나는 핸드폰을 보고 있는 수아를 불렀다. 그러자 수아는 고개를 들었다.
[한수아의 시각]등이 뻐근하고 팔이 쑤시는 통증에 잠에서 깨어보니 지훈이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제 TV를 보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밤새 나를 돌보겠다고 진지하게 말한 모습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나는 지훈이가 깨날까 봐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아침 8시쯤이라 지훈이가 일어나기 전에 아침을 준비해야 했다.아래층 부엌으로 내려가 잠시 서서 한 팔로 아침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팬케이크를 만들 재료를 꺼내려던 순간 어제의 일이 갑자기 생각났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깨에 붕대를 감지 않고 팔에 깁스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저 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기절 후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무척 당황했다. 의사와 간호사가 괜찮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칼에 깊게 찔렸지만 심각한 부상은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운이 좋았다고 한다. 만약 부위가 조금만 더 아래였다면 심장을 관통했을 것이다.그들은 상처를 소독한 후 꿰매고 팔을 깁스에 고정했다. 나는 항생제와 진통제를 처방받았고 의사는 다음 진료 때까지 팔을 높게 들고 다니라고 했다.팬케이크를 만들면서 나를 구해준 남자가 생각났다. 누구인지 알아내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내 가족들이 내 안전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때 나를 챙겨준 유일한 사람이다.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누구인지 더 궁금했다. 한때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한테서 상처를 너무 받았기 때문이다.문을 열고 보니 어제 본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처음으로 눈에 띈 건 그의 크고 까만 눈동자였다. 내가 본 눈동자 중 가장 맑은 눈동자였다.어제는 충격과 아픔 때문에 주의 깊게 보지 않았지만 그는 정말 잘생겼다. 키는 190cm 정도 되었고 적당한 근육의 소유자였다. 날렵한 턱선과 매끈한 피부 그리고 짙은 갈색 머리까지 더해져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그의 카리스마에 나는 한 번 더 눈길을 줄 수밖에 없었다.“안녕하세요.”나는
[우현수의 시각]수아는 나를 차갑게 바라봤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순간 나는 살짝 실망했다.“왜 왔어?”수아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나는 억지로 그녀의 집에 들어섰다. 10년 동안 함께 살았던 여자인데 지금은 나를 마치 낯선 사람처럼 취급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 적막함을 깨트릴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나는 깁스한 수아의 팔을 보며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게다가 주말은 내가 지훈이를 돌볼 시간이니 말이다.방금 떠난 수아의 집에서 떠난 그 남자를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수아가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다니.“아까 그 사람은 뭐 하러 여기 왔어?”나는 애써 분노를 참으며 물었다. 그 남자가 경찰이고 수아의 목숨을 구한 건 알지만 선을 넘은 행동인 것 같았다. 그리고 수아 곁에서 맴도는 게 싫었다.“너랑 무슨 상관이야.”“내 아들이 집에 있는데 아침부터 다른 남자를 초대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혹시 여기서 자고 간 거야? 그래서 방금 떠난 거야?”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가 헤어진 지 몇 달 만에 지훈이가 있는 자리에서 다른 남자를 데리고 오다니.그러자 수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네가 청아를 집으로 불러들일 때 내가 뭐라고 했어? 그러니까 내 일에 끼어들지 마.”나는 수아를 노려보며 말했다.“청아는 달라.”“뭐가 다른데?”수아는 일부러 모른 척하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나를 비꼬는 것처럼 말이다.“아. 청아는 네가 사랑하는 여자지.”나는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갈았다. 나에게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듯 툭툭 쏘아댔다.“지훈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난 이제 싱글이야. 내가 누구를 집에 데려오든 내 마음이야. 이건 내 집이거든. 우현수, 넌 날 조종할 수 없어. 난 소개팅도 하고 데이트도 할 거야. 평생 싱글로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그 말을 듣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왜
“내가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어? 내가 너에게 거짓말한 적 없다는 거 알잖아. 내가 청아를 사랑했던 건 너도 알고 있었잖아.”수아는 화가 난 듯 행주를 던졌다.“그런데 왜 나랑 같이 잤어? 정말 역겨워. 내가 왜 너한테 반했을까?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는지 모르겠어.”수아의 말을 듣자 화가 나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결혼하고 잠자리를 가졌지만 그건 단지 육체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비록 수아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니었다.“옛날이야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니야. 지훈이에 관해 이야기하러 왔어.”나는 계속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게 지쳐 화제를 바꾸기 시작했다. 하려던 말을 하고 당장 떠나려 했다. 아니면 나중에 후회할 만한 말을 하거나 행동할지도 모른다.지훈이를 언급하자 수아는 갑자기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수납장을 열고 약병을 꺼냈다. 한 손으로 뚜껑을 열더니 알약 두 개를 입에 넣고 삼켰다. 라벨을 읽어보니 진통제였다.“팔은 좀 어때?”“할 말이나 해. 가식적인 관심인 거 우리 둘 다 알고 있으니 연기 그만해.”수아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책상을 치며 소리칠 뻔했다.“야! 한수아!””왜? 난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거야. 말할 거야? 안 할 거야? 안 할 거면 나가. 지훈이가 깨나면 문자 보낼게.”수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나는 다치지 않은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았다. 그녀는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빠르게 손을 뺐다.“다치지 마!”수아는 버럭 화를 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계속 이렇게 싸워야만 하는 걸까? 우리 사이에는 아직 지훈이가 있는데 말이다.“네가 이러니깐 내가 청아에게 마음이 갔던 거야.”나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러자 수아의 표정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차갑게 변했다.“할 말 있으면 하고 없으면 꺼져. 내 집에서 나를 모욕하고 청아와 같이 비교하는 걸 참을 수 없어. 그게 왜 내 탓인데? 우린 이혼했어. 사랑이 뭔지 뭐 그딴
[한수아의 시각]“왜 거기에 가야 해요? 저는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요.”지훈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불만이 가득했다. 처음에는 나와 우현수가 같이 가는 줄 알고 신났지만 말이다.학교 측에서는 우리의 상황을 이해해 주면서 어머니께 수업 자료를 보내주며 지훈이가 뒤처지지 않게 해주었다.“말했잖아. 이번 여행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여행이야.”경찰서장과 이야기한 후 나는 그들이 따뜻한 해변으로 갈 거라고 확신했다.“해변으로 갈 거야. 네가 우리한테 휴가 보내 달라고 마침 졸랐잖아.”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해변이라는 단어를 듣자 지훈이는 갑자기 표정이 밝아졌다. 지훈이는 바다를 엄청 좋아한다. 셋이 같이 몰디브에서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는 일주일 동안 울었던 적도 있었다. 지훈이는 그곳으로 이사하길 원했고 우리가 그 제안을 거부하자 혼자 몰디브에 남겠다고 애원했다.나는 지훈이가 내 삶에 가져다준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엄마,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지훈이가 갑자기 물었다.“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있어?”“그건 없죠.”지훈이는 눈을 반짝이며 환하게 웃었다.“그럼 괜찮아요. 저 이제 삐지지 않을게요.”“왜 삐졌어?”“엄마가 저랑 같이 가지 않아서요. 하지만 나중에 합류하면 되잖아요.”나는 나중에도 가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훈이가 슬퍼할까 봐 하려던 말을 삼켰다.“이제 가자. 안 그러면 늦어.”나는 다치지 않은 한쪽 어깨로 가방을 메고 지훈이의 작은 캐리어를 들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지훈이도 자기 가방을 메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택시를 부르려던 찰나에 초인종이 울렸다. 지훈이가 열기 전에 내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지훈이는 늘 상대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문을 여는 경향이 있었다. 상대가 답하지 않거나 모르는 목소리면 열지 말라고 몇 번 주의를 줬으나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문을 열자마자
“저는 서진수라고 해요. 한도언의 여자 친구예요.”나는 순간 그녀를 집에 들인 것을 후회했다.“이만 나가 주세요.”나는 또 가족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다 똑같았다.“제발 제 말 한 번만 들어주세요.”그녀가 애원해 봤자 나는 마지못해 그녀의 말을 듣기로 했다.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나는 원래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편인데 서진수는 조금 달랐다.“솔직히 말해서 도언이가 잘못한 건 알아요. 제가 도언이를 사랑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수아 씨가 무슨 잘못을 했든 그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되죠.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동안 수아 씨를 찾아뵙고 싶었지만 날 거절할까 봐 두려웠어요. 그런데 수아 씨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있을 수 없었어요. 모르는 사람의 말을 믿기란 참 힘든 거죠. 하지만 저에게 기회를 준다면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나는 소파에 다리를 올리고 팔걸이에 기대어 앉았다.“도언이는 진수 씨가 여기 온 걸 알아요?”“제가 하는 일에 간섭하는 타입은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여기 온 건 알고 있어요. 저희는 서로 비밀이 없거든요.”서진수가 도언이를 사랑하는 건 분명했다. 도언이는 다른 사람들에겐 좋은 사람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늘 상처만 주는 존재였다.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고 마치 내를 죄수처럼 대했다.서진수를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면 후회될 것 같았다. 이제는 내 주위 사람들을 더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더 이상 그들을 내 삶에서 밀어낼 수는 없었다.“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그거 지켜주면 기회를 줄게요.”마침내 나는 말했다.어쩌면 약기운 때문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일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상황이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것 같았다.“조건이 뭐죠?”“도언이나 제 가족 얘기는 절대 하지 마세요. 더 이상 엮이기 싫어요.”그러자 서진수는 잠시 망설였다. 언니 동생으로 지내려면
눈을 떠보니 혼자였다. 역시 꿈이었나 보다. 우현수가 침대에서 나와 함께 잤을 리가 없지. 병원에서 잠든 이후로는 기억이 거의 없었다. 링거를 너무 많이 맞아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너무 어지러워서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몇 분 후에야 겨우 일어나 욕실로 걸어가 샤워했다. 병원 특유의 냄새를 빨리 씻어내고 싶었다.할 일이 너무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휴대폰도 없고 차도 없었다. 경찰이 내 휴대폰이 땅에 떨어지면서 부서졌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몇 주 동안 휴가를 받았지만 복귀 전에 차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옷을 다 입고 나니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팠다.‘젠장, 진통제부터 먹어야겠네.’계단을 내려가면서 며칠을 어떻게 버틸지 고민이 됐다. 몸에 기운이 없어서 무슨 일을 하려 해도 금세 힘이 빠져버렸다.나는 주방에 가서 간단히 아침을 만들었다. 정말 긴 잠을 자고 싶었다. 주방 아일랜드 식탁 대신 거실로 가서 편하게 먹기로 했다.머리를 다친 게 이렇게나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억지로 밍밍한 음식을 먹고 진통제를 삼켰다. 소파에 누워서 잠깐 눈을 붙이려는데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누군지 모르겠지만 짜증이 났다. 지금은 문까지 걸어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님을 맞이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냥 자고만 싶었다.무시하려 했지만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무시해도 되겠지? 내가 자고 있다고 생각하고 돌아가겠지?’그렇게 생각했지만 또다시 초인종이 울렸다.나는 한숨을 내쉬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쁜 여자였다. 검은 머리에 초롱초롱한 눈 그리고 주먹만 한 얼굴에 도톰한 입술까지."어...누구세요?"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 문틀에 기대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살짝 웃으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혹시 수아 씨가
“무슨 말이야?”우현수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난 네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잖아.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수아랑 집에서 놀고 있어야지, 안 그래?”나는 청아의 말이 자꾸 떠올라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우현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 지금 싸우려고 그러는 거지? 난 싫어. 그냥 퇴원하고 집에 가자.”“날 싫어하는 주제에 왜 도와줘? 필요 없어! 그냥 꺼져. 우현수, 너도 여기 있기 싫잖아.”“정말? 내 도움이 필요 없다고? 그럼 어떻게 혼자 퇴원 수속을 할 건데? 넌 친구도 없잖아.”“재인 씨가 날 데려다줄 거야.”나는 친구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유재인은 내가 부탁하면 와줄 것 같았다.그러자 우현수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돼.”그는 진지하게 말했다.“선택해. 나랑 같이 돌아가거나 아니면 병원에 며칠 더 있어. 유재인은 절대 안 돼.”“대체 왜 이래? 날 떨쳐내려고 그렇게 애쓰더니 이제 와서 왜 악착같이 붙어있어? 난 청아랑 엮이는 게 싫어.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다고.”그가 자꾸 나한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면 청아는 내가 그를 유혹하려 한다고 오해할 게 뻔했다.“그나저나 그날 네가 공격당했을 때 청아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청아를 집에서 내쫓았어?”“청아가 다 말해주지 않았어?”나는 어이가 없었다.“네 얘기도 듣고 싶어.”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갔다.“굳이 들을 필요 없잖아. 어차피 넌 내 말을 안 믿을 거고, 항상 청아 편만 들 테니까.”“수아야...”나는 문을 쾅 닫고 천천히 옷을 입었다. 옷을 다 입고 나니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눈앞이 흐릿해졌다.그리고 문을 나서며 벽을 짚고 힘겹게 걸었다. 우현수는 도우려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간호사가 두고 간 휠체어로 걸어가 앉았다. 의사가 퇴원 절차를 모두 설명했으니 이제 나가면 그만이었다.나는 백을 들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빨리 가. 더 이상 서로 얼굴 볼 필요
청아가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누가 들여보냈지? 난 청아가 여기 있는 게 너무 싫었다. 나랑 가까이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잠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니깐.“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네가 깡패들 손에 죽이 전에 내가 먼저 널 죽도록 괴롭힐 거야. 네 아들도 포함해서 말이야. 곧 지훈이가 나를 엄마라고 부를걸?”우리가 진짜 자매가 맞긴 한 걸까? 내가 청아에게 못된 짓을 한 건 알지만 이렇게까지 벌을 받아야 할까? 그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고 생각했다.“청아야, 넌 참 못났어.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아둬. 지훈이는 절대 너를 엄마로 생각하지 않을 거야. 공항에서 너를 무시했던 거 기억 안 나? 넌 그 애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현수랑 결혼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거고.”그러자 청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표정이 이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상관없어. 어쨌든 현수는 밤마다 나랑 같이 자. 난 곧 임신할 거야. 그러면 현수는 널 그리고 네 아들도 잊겠지. 내 아이들만 인정하게 할 거라고. 솔직히 현수가 널 사랑한 적은 없잖아. 네가 옆에 있어도 아마 내 생각만 했겠지.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그녀의 말이 가슴을 후벼팠지만 난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엔 오직 지훈이 생각뿐이었다. 청아를 엄마라고 부르게 만들겠다고? 나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그리고 근처에 있던 꽃병을 집어 던졌다. 청아는 비명을 지르며 피했고 꽃병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그때 도언이가 방으로 들어왔다.“미쳤어?”청아가 소리쳤다.“둘 다 당장 나가!”나도 같이 소리쳤다.이때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어리둥절하게 우리를 바라봤다.“누나 무슨 일이야?”도언이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난 그의 상냥함조차 싫었다.그가 날 얼마나 무시하고 차갑게 대했는지 그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 날 누나로 대해준 적도 없다. 늘 청아에게만 다정했고 보란 듯이 나한테 그걸 또 자랑했다.“네 그 잘난 작은 누나한테
[한수아의 시각]“엄마, 보고 싶었어요. 왜 전화 안 했어요?”지훈이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묻어났다.나는 당장이라도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내가 아직 여기에 있고 그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미안해. 엄마가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아빠 폰으로 전화하는 거야.”“그럼 영상통화 할 수 있어요? 보고 싶어요.”지훈이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병실에 누워 있는 날 보여줄 수는 없었다. 지훈이가 걱정할 테고 당장 집에 오겠다고 할 것이다.게다가 내가 표적이 된 상황에서 그를 위험에 빠뜨릴 순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지금은 안 돼. 여기에서 영상통화를 못 한대.”나는 거짓말을 했다.“그런 룰이 어디 있어요? 왜 안되는데요?”지훈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지훈이가 화가 난 걸 알았지만 그저 넘기기로 했다.“지훈아...”“보고 싶단 말이에요. 아빠가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랑 말하면 영상통화 할 수도 있잖아요. 아빠라면 다 할 수 있잖아요.”울먹거리는 지훈이의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이때 우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날 보고 있었다. 지훈이도 우현수라는 이름 하나면 다 해결된다는 걸 알 나이가 된 것 같다.“이번엔 안 돼. 대신 내일 카톡으로 통화하자.”“정말이죠?”“정말이야. 약속.”오늘 퇴원하면 내일쯤 통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알았어요. 엄마. 내일 얘기해요. 사랑해요.”“나도 우리 지훈이를 사랑해. 잘 자.”“할머니가 바꿔 달라...”나는 그 말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지금 엄마랑은 절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우현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나가달라고 그렇게 말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간호사에게도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간호사에게 자기를 쫓아내면 병원 영업을 정지시키겠다고 위협했다.그는 매일 찾아왔다. 이렇게 자주
유재인은 수아의 오른쪽에 앉아 여러 장의 카드를 펼쳐놓고 있었다. 수아는 살짝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있고 얼굴엔 상처가 있었지만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런데 내가 들어오자 그녀의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나가.”수아가 차갑게 말했다. 다시 차가운 수아로 돌아온 것 같았다.“싫어.”나는 차분하게 대답하며 그녀의 왼쪽에 앉았다.수아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고 눈빛은 화로 가득 찼다. 어제까지는 분명 괜찮아 보였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너도 그리고 저 둘도 나갔으면 좋겠어. 꼴도 보기 싫어. 나가.”수아는 청아와 한도언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뭔가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어제는 평온했는데 오늘은 완전히 달랐다. 수아를 두 사람에게 맡긴 게 실수였던 걸까?“수아 씨, 진정하세요. 아직 회복 중이라 화를 내면 안 돼요.”유재인이 나서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러자 그녀의 눈빛은 부드러워졌고 방금 전의 분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유재인의 손에서 수아의 손을 당장이라도 빼앗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왜 화가 나는 걸까?수아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으니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이 장면이 날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걸까? 왜 그녀가 유재인을 바라보는 눈빛을 보자 나는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이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경찰서장이 들어왔다. 유재인은 수아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서장님.”유재인이 인사했다.“그래. 재인아.”서장은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우리에게 다가왔다.“수아 씨,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수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유재인은 다시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날 공격당했을 때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나요?”서장이 펜을 꺼내며 물었다.“아니요. 별다른 일 없었어요. 평범한 날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먹고 교회에 갔어요.”“그 전날은요? 낯선 사람을 본 적 있나요?”수아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자세를
나는 청아를 쳐다봤다. 한도언은 그녀 옆에 서 있었는데 마치 지옥에서 도망친 사람 같아 보였다.“깨어났어요?”한도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사고 때문에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렸다. 한도언은 누나를 잃을 뻔했기에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아니요.”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현수야 집에 가. 가서 샤워하고 옷 좀 갈아입고 와. 너 지금 좀비 같아 보여.”청아가 말했다.“안 갈 거야.”나는 반박했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난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네가 이러다 지쳐서 쓰러지면 큰 일이야. 그냥 집에 가. 가서 씻고 나와.”청아는 계속 나를 설득했고 한도언도 말을 덧붙였다.“누나 말이 맞아요. 우리가 여기 있을 테니 집에 다녀오세요.”나는 수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당장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빨리 샤워하고 돌아와도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알겠어. 그럼 수아 곁을 떠나지 마.”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쁜 놈들이 다시 수아에게 공격할 수도 있으니 나는 많이 걱정되었다. 한도언은 수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청아는 나를 차갑게 바라봤다.내가 일어나 떠나려 할 때 청아는 나의 팔을 덥석 잡았다.“수아는 괜찮을 거야.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야.”청아는 미소를 지으며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 우리가 다시 만나기로 한 이후로 그녀는 내 뺨, 턱 그리고 이마에 자주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은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9년 동안 꿈꿔왔던 일이었음에도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그 키스 자체가 완전히 잘못된 행동인 것 같았다. 내가 왜 갑자기 이럴까? 청아는 내가 거의 10년 동안 꿈꿔왔던 여자인데 말이다.나는 집에 도착하고 제일 빠른 속도로 샤워했다. 옷을 입던 중 한도언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수아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면서 나는 잠깐 낮잠을 자기로 했다. 나는 며칠 동안 잠
[우현수의 시각]“우리 수아는 어때?”최미숙은 애써 울음을 참으며 나에게 걱정스레 물었다.수아가 혼수 상태에 빠진 며칠 동안 우리는 걱정되는 마음에 힘든 나날을 보냈다.“어제 몇 분 동안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이 머리에 부상을 입어 잠시 휴식이 필요하대요.”그러자 최미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도철이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많이 변했다. 최미숙은 수아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수아는 더 이상 가족들과 엮이기 싫었다. 수아는 우리 모두와 관계를 끊고 싶어 했다.“괜찮겠지? 원래대로 회복할 수 있어?”“네. 의사 선생님이 자신 있게 말씀하셨지만 완전히 회복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어요. 아직은 좀 일러요. 이런 머리 부상에는 합병증이 따라올 수도 있다고 했어요.”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 중 하나였다. 나는 수아가 무사하길 바랐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이겨낼 거예요. 저는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수아가 깨어나면 전화할게요. 방금 지훈이를 찾더라고요.”“그래. 소식 꼭 좀 전해줘. 부탁해.”“네.”나는 전화를 끊고 수아를 바라봤다. 수아는 너무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백옥같은 그녀의 피부를 난 왜 이제야 발견했을까? 긴 속눈썹과 앵두처럼 빨간 입술을 왜 그동안 보지 못했을까?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나는 수아를 좋아하지 않았다. 수아가 가까이 오려고 하면 나는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거부했다.하지만 지금의 수아는 주목받을 만큼 매력적이었다.나는 부드러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요즘 자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수아의 맥박을 짚으며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려고 했다.지난 일요일을 떠올리면 나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청아를 조심하라고 수아에게 전화하려 했었다. 하지만 청아는 울며 나에게 와서 수아가 결혼 생활 동안 나와 수도 없이 많은 잠자리를 가졌다고 자랑했다고 말했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수아에게 전화하여 따지려 했다.순간 폭발음과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수아 씨,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걱정했어요.”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금 여기가 어딘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세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병원이죠... 제가 차 문을 열자 강력한 힘에 의해 튕겨 나갔어요. 그 충격으로 머리를 부딪쳤죠.”눈을 뜬 이후로 나는 내가 겪었던 일을 잊으려고 했다. 거의 죽을 뻔한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두려웠다.“맞아요. 차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고 당신은 그 충격으로 튕겨 나간 겁니다.”의사는 잠시 멈칫거렸다.“지금이 몇 년도인지 아시나요?”나는 연도를 말했고 의사는 그것을 받아적었다. 우현수는 내 손을 꼭 쥐었고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그런 눈빛을 처음 보았다. 비록 너무 짧은 순간이었지만 말이다.나는 내 차가 폭발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스트레스와 충격으로 머리가 아파져 오기 시작했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졌다.“연도도 알고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고 현수 씨가 누군지도 알고 있으니 잘 회복된 것 같네요. 하지만 기억 상실증에 걸릴 수도 있으니 추가 검사를 해야 합니다.”“네.”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부상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어깨가 탈구되어 교정을 했고요. 갈비뼈 세 개가 부러졌고 비장이 파열되었으며 외상성 뇌 손상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뇌에 액체가 축적되어 이를 배출해야 했고 약간의 부종도 있었습니다. 어깨에 있던 상처가 다시 벌어져서 다시 꿰맸어요. 현재 가장 큰 걱정은 머리 부상입니다. 지금 어떠세요?”우현수가 내 오른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손으로 머리를 만졌다. 손끝에 붕대가 닿자 나는 이 모든 게 실감이 났다.“제가 얼마 동안 누워있었죠?”“오늘이 네 번째 날입니다. 머리 부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졌어요. 이로 인한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으니 며칠 더 머물며 상태를 확인할 예정입니다. 괜찮겠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지쳐서 다시 잠들고만 싶었다. 의사는 무언가를 적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