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아는 서둘러서 그대로 했다.소천학은 부끄러워하며 입을 열었다.“염무현 씨에게 또 웃음거리가 되었군요. 사람이 늙었으니 역시 쓸모없는 것 같아요.”그는 이번에 몇 번째로 염무현앞에서 치유단을 복용했는지는 스스로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너무 창피했다.염무현은 손을 내저으며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어르신, 그런 말씀 마십시오. 몸은 아직 정정하시니 앞으로 오래 사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뒤에 앉아서 쉬세요. 제가 운전할게요.”소천학은 다급하게 말했다.“어찌 그러겠어요. 치유단을 먹어서 아무렇지도 않으니 제가 할게요.”그는 염무현이 운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염무현의 운전 실력이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다.이곳은 지형이 복잡하고 산을 휘감는 도로여서 기술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다.조심하지 않으면 절벽에서 떨어져 차가 부서지고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걱정하지 마세요. 전 할 수 있어요.”염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웬만한 지프차는커녕 탱크와 헬기로 바꾼다고 해도 염무현에게는 식은 죽 먹기다.몇 분 후 소천학은 완전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마음속에는 존경의 뜻이 싹텄다.염무현의 운전 기술은 그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속도를 유지하면서도 코너를 돌 때마다 여유로워 차창 밖을 보지 않는다면 대평원을 달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소천학은 염라대왕의 이름이 괜히 지어진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마치 염무현에게는 할 줄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았다.전에 소천학의 계획 때로라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일 것이다.하지만 지금 염무현이 차를 운전하니 초저녁에 도착해버렸다.눈앞에는 푸른 창용산이 있고 산기슭에는 몇 집이 듬성듬성 살고 있었다.넓은 타작 마당에는 지프차와 상용차를 중심으로 다양한 종류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번호판도 제각각이었고 현지 번호판 몇 대를 제외하면 모두 외제 차이다.가장 먼 곳은 뜻밖에도 제주도에서 왔다.차 외에도 임시로 설치한 텐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사람이 이렇게 많은가요?”현장의 상황은
남지혜가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보였다.이를 보고 위기감을 느낀 소정아는 이내 염무현의 팔을 꼭 껴안았다.이로부터 염무현이 자기 것이라고 내세우고 싶었다.“그러면 너무 실례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냥 저희끼리 할게요.”염무현은 이전과 같은 태도로 완곡하게 거절했다.사실 소천학은 캠핑 기구를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계획대로라면 산기슭에 있는 고향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아침에 산에 들어갈 예정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고향 집은커녕 바깥 공터마저 빼앗긴 상황이다.텐트를 치려면 길 양쪽으로 혹은 고향 집 마당으로 가야 한다.중요한 건 소천학이 텐트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그럼 차 안에서 하룻밤 묵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 사람이 한 차에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뭐가 실례입니까.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이까짓 것쯤이야말로 은혜를 갚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남지혜는 그들의 궁핍한 상황을 알아차린 듯 간파하지 않고 그저 아까의 열정을 유지하고 있었다.“염무현 씨.”소천학은 염무현에게 눈짓을 했다.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아요. 남지혜 씨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만약 염무현 혼자라면 차에서 하룻밤 묵는 것은 물론 황량한 교외와 야외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소정아라는 여자아이와 소천학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는 걸 고려하여 어쩔 수 없이 승낙한 것이었다.“잘됐네요.”남지혜는 기쁨에 겨워 급히 세 사람을 한 고향 집으로 불러들였다.“마침 잘 오셨어요. 밥이 거의 다 돼가고 있었거든요. 이 집 할머니는 젊었을 때 부엌데기를 하셔서 나이는 드셨지만 솜씨는 살아 계십니다.”마당에 있으면 음식 향기를 맡을 수 있다.이것은 여행길에 지친 세 사람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경계심이 가득했던 소정아의 얼굴은 바로 코를 훌쩍이는 모습으로 바뀌었다.식탁에 가득 찬 음식을 보면서 소정아는 자신도 모르게 검지를 움직였다.베이컨, 소시지, 각종 말린 버섯은 이곳의 가장 일반적인 재료이지만 지역 특성이 강하다.세심
“신의님,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여자 때문에 포기할 자리가 아닙니다. 신의님만 원하시면 모델이고 배우고, 설사 한 나라의 공주라고 해도 다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서해 교도소, 이곳은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거물만 가두기로 유명한 특별한 교도소이다.철창 앞에서 한 노인은 한참 젊은이에게 연신 굽신대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노인은 상업계의 선두 주자인 전태웅이었다. 그는 한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재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단호하고 매정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그런 사람이 글쎄 염무현을 위해 아무 죄명이나 쓰고 복역하러 왔다.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상황이다.전태웅의 뒤로 교도소 내의 모든 교도관과 죄수들이 줄을 지어 한 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염무현을 붙잡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죄수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을 제패했다.염라대왕. 생사부와 같은 의술을 가졌다고 하여 붙여진 염무현의 별명이다. 그의 손에는 두 개의 검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목숨을 살리는 메스이고, 다른 하나는 목숨을 앗아가는 비수이다. 어쩌면 생사검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평화로운 세상에서 그는 생의 신이 될 것이고, 전란의 불꽃이 튀는 세상에서 그는 사의 신이 될 것이다.“하아, 당신은 몰라요...”철창 앞에서 염무현은 우뚝 서 있었다.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그의 아내 양희지의 모습 말이다.4년 전의 결혼식장에서 양희지는 흑심을 품고 신부 대기실에 쳐들어간 변태 때문에 험한 일을 당할 뻔했다. 다행히 처남이 술병으로 변태의 머리를 내리친 덕분에 그녀는 무사할 수 있었다.아내를 지켜주지 못한 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염무현은 처남 대신 교도소에 들어갔다. 지난 4년 동안 비웃음으로 가득한 세상을 혼자 버텨내야 했을 양희지를 떠올리면, 아무리 신으로 숭배받는 그라고 해도 가슴이 답답한 것이 숨이 잘 올라오지 않았다.“희지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만큼 우리가 나누는 감정도 소중하죠. 명예와 권력같이 세속적인 것은 우리
“좀 늦네...”염무현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텅 빈 주변을 둘러봤다. 그가 4년 동안 그려오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양희지도 약속처럼 그가 출소하자마자 달려와서 안아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양희지가 괜히 급하게 운전하다가 사고라도 당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기다렸다.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하늘에서는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야 차 한 대가 그의 앞으로 와서 멈춰 섰다.염무현은 빠른 걸음으로 마중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사람은 그가 기다리던 양희지가 아닌, 그녀의 친구 조윤미였다.“윤미 씨가 어떻게 왔어요? 희지는요?”조윤미는 한 손으로 우산을 든 채 차갑게 말했다.“양 대표님은 오지 않으셨어요. 저는 이제 대표님의 비서이니, 조 비서님이라고 불러줘요. 그리고 이건 대표님이 전해달라고 하신 물건이에요.”조윤미는 염무현에게 서류를 건네줬다. 이혼 합의서라는 커다란 다섯 글자는 눈이 아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염무현도 놀란 듯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금방 미소를 되찾으면서 말했다.“장난인 거 다 알아요. 희지한테 얼른 나오라고 해줘요.”조윤미의 얼굴에는 언짢은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장난 아니거든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도 있듯이, 4년도 마찬가지예요. 염무현 씨 당신은 이제 우리 대표님과 어울리지 않아요.”“그게... 무슨 말이죠?”염무현은 조윤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한결같이 냉정했다.“지금의 당신은 우리 대표님과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요. 양 대표님은 서해 최고 미녀 대표이사로 불리고 있어요. 당신의 존재는 대표님의 명성에 누가 될 뿐이에요. 대표님의 회사를 위해서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떠나줘요. 괜히 근처를 맴돌면서 걸림돌이 되지 말고요.”“내 존재가 뭐 어떻다고요?”“염무현 씨는 전과자인 반면, 양 대표님은 대기업의 대표이사예요. 차도, 집도, 쓰는 물건도 전부 최고급이죠. 대표
양희지가 남도훈과 만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이때 벤츠 한 대가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뒷좌석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걸친 아름다운 여자가 내렸다. 그녀의 쭉 뻗은 다리는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인간계를 벗어난 우아한 아우라는 여신을 연상케 했다.4년의 세월은 마치 양희지만 피해 간 것 같았다. 아니, 커리어우먼 특유의 강한 기운만 남기고 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희지야...”염무현은 환한 표정으로 양희지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무의식으로 뒤로 피하면서 시선을 돌렸다.“미안, 급한 일이 있어서 좀 늦었어. 조 비서, 일은 어떻게 됐지?”양희지의 차가운 모습은 마치 낯선 이를 대하는 것 같았다. 조윤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부랴부랴 그녀를 향해 우산을 기울이며 말했다.“염무현 씨랑 얘기하는 중이었어요. 대표님은 남도훈 씨랑 만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여기까지 와도 괜찮으신 거예요?”“괜찮아. 이쪽 일 먼저 해결할 정도의 여유는 있어.”양희지는 이제야 염무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옷이 비에 흠뻑 젖은 것을 보고 약간 복잡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금방 다시 차가워졌다.“오랜만이야, 무현아. 너도 알다시피 난 성격 급한 사람이니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네가 우리 집안을 위해 한 일은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우리가 함께 한 시간도 소중히 간직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리가 부부로서 같이 지내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양희지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 마치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남편이 아닌 협력 상대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우리 이혼하자.”이는 상의도 통보도 아닌, 그냥 명령이었다.“연애할 때도, 결혼할 때도, 너희 집안사람이 내 앞에 무릎 꿇고 처남 대신 교도소에 가달라고 할 때도, 넌 가만히 있더니...”염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결을 파고들고 있었지만, 그는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지금 와서 좀 아닌 것 같다고?”양희지는 약간 주저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
양희지는 드디어 원하던 이혼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상상했던 것처럼 기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꿋꿋이 말했다.“내 앞에서 자존심 챙길 필요 없어. 체면 따위가 뭐라고 위자료를 거절해. 지금 거절하면 무조건 후회할 거야. 그러니 조 비서한테 남겨두라고 얘기할게. 필요할 때 조 비서한테 연락해서 받아 가면 돼.”양희지에게 완전히 실망한 염무현은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양희지는 가슴이 비수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팠다.“조 비서, 내가 과연 맞는 선택을 한 걸까?”“그럼요. 걸림돌을 차내야 대표님의 꿈을 이룰 수 있죠. 대표님은 업계 최고의 사업가가 될 분이세요. 반대로 염무현은 그냥 한낱 전과자일 뿐이고요. 대표님과는 말 섞을 자격도 없어요. 그런 사람은 대표님께 방해만 될 거예요.”조윤미의 말을 들은 다음에도 양희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어쩐지 아주 중요한 것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눈치 빠른 조윤미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대표님, SJ그룹의 아가씨를 만나 뵙고 싶다고 하셨죠? 이건 아주 중요한 기회예요. ZW그룹과 SJ그룹은 오래전부터 협력 관계였으니까, 남도훈 씨만 붙잡을 수 있다면... 참, 대표님 이제 출발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데이트에 지각하면 안 되죠.”양희지가 짧은 시간 동안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SJ그룹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녀는 SJ그룹이 자신에게 왜 이토록 잘해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의 YH그룹보다 잘난 회사는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어떤 프로젝트는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돈을 벌지 못하면 바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양희지는 조윤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가족들에게 이혼 사실을 알렸다....서해시, 히스턴 호텔의 스위트룸.염무현은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침묵에 잠겼다.‘이혼이라니... 작은아버지랑 작은어머니한테는 어떻게 설명하지?’염무현은 서해에 따로 친
공혜리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지난번 신의님 덕분에 불치병을 치료한 뒤로 아버지는 줄곧 정정당당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셨어요. 그게 신의님의 당부라고 하시면서요. 해다마다 2000억 원씩 기부하는 건 물론이고, 보육원과 학교도 얼마나 지었는지 몰라요.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조만간 기부금도 늘일 생각이래요. 제 아버지 진짜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이번에도 꼭 부탁드릴게요. 신의님께서 도움을 주실 수만 있다면, 저희 집안에서 세세 대대 은혜를 갚으면서 살게요.”지난 시간 동안 공혜리는 얼마나 많은 전문가를 찾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전부 실망스러운 대답만 돌아왔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공규석이 3년 전에는 어떻게 불치병을 치료했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때는 잠깐 나갔다 들어오더니 운 좋게 완치됐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공혜리는 당연히 그 핑계를 믿지 않았다. 공규석이 그날부터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생전 안 하던 일을 하는 것도 줄곧 이상하게 여겼다.그녀의 의문은 공규석의 금고 속에서 일기를 발견한 다음에야 완전히 풀렸다. 그 정도의 고수라면 정체를 숨기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공규석을 구하기 위해서는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은둔 고수의 연락처를 찾아야 했다.그녀는 일기를 한참 뒤진 다음에야 전태웅도 언급된 것을 발견했고, 그를 통해 염무현의 연락처를 받았다. 염무현이 순순히 응해줄 거라는 생각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규석을 위해서는 어떠한 실례라도 범할 수 있었다.설명을 듣고 나서 약간 마음이 흔들린 염무현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네요. 알겠어요, 우리 언제 한번 만나죠.”“감사합니다, 신의님!”공혜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 인사를 했다. 반대로 염무현은 아주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다른 규정은 변함 없어요.”이 말인즉슨 병을 치료하고 싶다면 직접 찾아오라는 뜻이었다. 그는 종래로 누군가를 치료하기 위해 찾아가는 사
“뭐? 하루에 몇백만 원씩 하는 스위트룸에 있다고? 개자식, 감히 우리 희지 돈을 이런 식으로 낭비해? 아무래도 네가 들은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은 모양이야.”서아란은 염무현이 쓰는 돈이 아까워서 손이 다 벌벌 떨릴 지경이었다. 양준우도 마찬가지로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그러니까! 난 스위트룸이라는 걸 구경도 한 적 없어!”모자는 곧바로 기세등등해서 히스턴 호텔로 출발했다....같은 시각, 염무현은 호텔에서 느긋하게 천 가방을 정리했다. 가방 안에는 여러 가지 은행의 블랙카드만 해도 수십장이 있었다.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50%의 재산을 내놓아야만 염무현을 의사로 청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그는 10%만 남기고 나머지 90%는 전부 기부했다. 그런데도 천문학적인 금액이 남았다.그의 재력으로 양희지는 얼마든지 평생 놀고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듯 편한 길을 놔두고 굳이 힘든 길을 선택했다.블랙카드 말고는 그가 사부님에게서 물려받은 자그마한 가방이 있었다. 이는 노루 가죽으로 만든 가방인데, 침술 도구를 보관하는 데 쓰였다.사부님에게서 받은 유일한 물건인 노루 가죽 가방은 그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이 가방을 물려준 계기로 그의 사부님은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쾅쾅쾅!급박한 노크가 들려오자, 염무현은 당연히 공혜리가 도착한 줄 알고 문을 열었다.“준우랑 어머님이 여긴 어떻게...?”염무현은 잠깐 멈칫하면서 물었다. 그가 자신을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원래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서아란은 급기야 인상까지 썼다.“왜, 우리가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어디서 감히 우리 누나 돈으로 잡은 스위트룸에서 잘난 척이야!”양준우는 염무현을 팍 밀치더니, 당당하게 소파로 가서 앉았다. 서아란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너랑 희지 일은 우리도 들었다.”“네, 저희 이혼했어요.”“흥, 알면 됐다! 희지도 참 박복하지. 어쩌다 너 같은 개자식을 만났을까. 네가 시간을 낭비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