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욱 씨 회사에 일이 좀 생겨서 급하게 돌아온 거예요.”의문이 풀린 이채련은 웃으며 말했다.“그랬구나. 남자가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어. 다 너랑 잘살아 보겠다고 그러는 거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같이 지내면서 서로 이해하는 법도 익혀야 하는 거야.”유시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문득 전에 임재욱이 했던 말도 떠올랐는데.만약 대우 그룹을 날려 버리면 이채련의 병원비를 지급할 능력도 없고 유시아에게 좋은 생활도 줄 수 없다고 했었다.두 사람의 말이 맞았다. 돈은 중요한 일부분이라는 것.점심에 유시아는 병원에 남아 이채련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다 먹고 나서 휠체어에 이채련을 앉혀 정원으로 나가 산책을 하기도 했다.그렇게 오후가 다 되어서야 유시아는 차를 타고 병원을 떠났다.남운대에서 돌아온 뒤로 임재욱은 늘 야근했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한서준과 임청아의 약혼식이 열리는 그날에서야 시간을 쪼개서 유시아를 데리고 약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두 사람의 약혼식은 대우 그룹 기하에 있는 7성급 호텔에서 진행되었다.귀한 손녀의 약혼식이라 임태훈은 원래 호텔 안에 있던 모든 것을 옮겨 버리고 거의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새로 장식까지 했다.그뿐만 아니라 정운시에서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을 모두 초대해 왔고 기자들까지 불렀다.귀한 소녀 임청아의 약혼식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셈이다.이토록 성대하고 원만한 약혼식임에도 불구하고 흠 하나가 있었다.그건 바로 한서준의 부모님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임씨 가문 하인의 말로는 한서준의 부모님이 워낙 한서준을 달갑게 보지 않고 있었고 며느리로 들어오게 될 임청아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는 편이라 아예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그들의 결정과 행동은 임씨 가문 전체의 불만을 자아냈다.정운시에서 상류 계층에 속하는 임씨 가문인데, 임태훈의 귀한 손녀로 정운시에서 명성이 자자한 천금일 뿐만 아니라 예쁘고 기질 또한 뛰어난 임청아인데...그 외모가 얼마나 뛰어나고 아우라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그래?”임재욱은 되물으며 음흉한 표정으로 말했다.“급할수록 직진해야 하는 거 아니고? 나 매일 밤 직진하는데?”“...”평소에 세상 차가워 보이는 남자가 인제 19금 드립도 마구 날리고 있다.자기가 알고 있던 임재욱이 맞는가 싶기도 했다.이제 막 반박하려고 하던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두 사람을 한사코 노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유시아는 그 사람의 시선을 마주하며 보았는데,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정유라가 보였다.정유라는 지금 웃는 듯 마는 듯 유시아를 보고 있다.임재욱과 ‘이혼’한 건 사실이나 두 가문의 친분으로 임씨 가문에 이와 같은 일이 있게 되면 정유라는 무조건 오게 되어 있다.시선이 마주치고 난 뒤 유시아는 아랫입술을 살포시 사리 물고 더 이상 임재욱과 장난을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려 무대 위에 있는 한서준과 임청아를 바라보았다.임재욱은 이런 자리에 별로 흥미가 없는 편이라 아주 산만했다.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축제이겠지만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서.하여 그는 유시아의 손을 잡아당겨 만지작거리며 모든 신경을 그녀에게 쏟아부었다.함께 하는 커플 팔찌를 보고서 어린아이처럼 웃기도 하면서.바로 그때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발신자 번호를 확인하고서 그는 유시아의 손을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산만한 그와 달리 유시아는 무대 위에 있는 두 사람에게 신경이 집중되어 있어서 그가 언제 떠났는지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결혼식이 끝나고 나서야 옆자리가 한동안 비어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는데.핸드폰에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시아야, 갑자기 해외에서 바이어가 와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강 비서 차 타고 먼저 집에 가. 나 기다리지 말고.]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방해하지 않기로 하고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문 앞으로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정유라가 보였다.유시아가 나오는 것을 정유라는 성큼성큼 다가와 입을 열었는데.“시야 씨, 재욱 씨랑 같이 온 거 아니
늦은 밤, 그린레이크.홀로 1층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유시아.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으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10시가 넘었음에도 임재욱은 돌아오지 않았다.심지어 전화 한 통도 없었다.허씨 아주머니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부엌에서 걸어 나왔다.우유를 테이블 위에 놓고 나지막이 입을 여는데.“아가씨, 인제 그만 올라가셔서 쉬세요.”“네... 고마워요...”유시아는 우유를 건네받고 한 모금 마시고는 덧붙였다.“아직 졸리지 않아서 그래요. 재욱 씨 오는 거 보고 자려고요.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재욱 씨 오면 제가 알아서 챙겨줄게요.”한사코 자기 뜻을 견지하는 유시아를 바라보며 허씨 아주머니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가 담요 하나를 가지고 내려왔다.유시아에게 담요를 건네주고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밤은 점점 깊어지고 텅 빈 거실은 유난히 쌀쌀했다.에어컨을 켜고 있음에도 한겨울의 추위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담요로 몸을 꼭 감싼 채 소파에 기대었다.시간이 흐를 수록 서서히 졸음도 밀려왔다.그렇게 잠자리에 들려고 하던 그때 누군가가 얼굴에 뽀뽀를 하는 것처럼 간지러웠다.뒤로 살짝 피했는데 갑자기 몸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그 사람이 유시아를 들어 안아 위층으로 향했다.유시아는 마침내 천천히 눈을 떴는데, 익숙한 그의 턱과 목젖이 보였다.자기도 모르게 두 팔로 남자의 목을 살포시 감싸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오늘도 많이 늦었네요.”“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야근 좀 하고 왔어.”임재욱은 말하면서 침실로 들어와 그녀를 포근한 침대 위로 살포시 내려놓았다.이윽고 그 위로 확 덮쳐왔는데.“왜 아직 자지 않은 거야? 혼자서 밤새 드라마 보기로 한 거야?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유시아는 웃으며 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 순간 갑자기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가 풍겨왔다.“소독수 냄새! 재욱 씨 몸에서 소독수 냄새가 진동해요.”순간 임
유시아를 꼭 안고서 임재욱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뽀뽀했다.“내일 당장 혼인 신고하러 가자. 회사 일 마치는 대로 아주 보란 듯이 성대하게 결혼식도 올리고. 어때?”유시아는 겹겹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치하지만 진지하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약속해요.”유치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행동에 임재욱은 마냥 기쁘기만 하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살포시 걸었다.“약속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유시아는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저는 절대 어기지 않을 자신 있어요.”“나도 마찬가지야.”말하면서 임재욱은 또 그녀의 손등에 뽀뽀했다.“하도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네가 나한테 프러포즈 할 줄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오늘 밤, 잠 이루기는 틀린 것 같아. 내일 혼인 신고할 때 사진도 찍어야 할 건데, 우리 둘 다 다크서클 짙으면 어떡하지? 구청 직원분들한테 포토샵이라도 좀 해달라고 부탁해야겠어.”그러자 유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말했다.“재욱 씨는 어떤 모습이어도 멋있어요.”단 몇 마디 말로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을 마친 두 사람은 잠이 오지 않았다.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일찍 일어나 아침도 먹지 않고 구청으로 달려갔다.뜨거운 여름은 연애하기 딱 좋은 계절인 것만 같았다.날이 뜨거운 만큼 사람들의 마음도 달아오르니.일찍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구청 앞에서 열 쌍이 넘는 커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다들 하나같이 서로에게 기댄 채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유시아는 임재욱의 팔짱을 끼고 그의 어깨에 기대어 서서히 또 정신이 다른 데로 팔리기 시작했다.어젯밤 호텔 문 앞에서 정유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신서현에 대해서 또다시 언급했었던 정유라.‘신서현 씨는 이미 죽었는데...’‘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잖아... 근데 어떻게 재욱 씨 빼앗아 간다는 거지?’신서현 말고는 임재욱의 가슴을 흔들리게 할 여자가 없다.‘아니야, 정유라가 나한테 거짓말했을 거야.’‘구멍가게도 아니고 대우 그룹이 좀 커야 말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유시아는 구청 밖에서 임재욱이 했던 ‘맹세’를 떠올리면서 쓴웃음을 짓게 될 것이다.그 웃음 뒤에는 부러움도 깃들여 있다.역시나 그 어느 때라도 하느님은 임재욱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유시아에게는 지옥을 선물해 주었다.회가 거듭날수록 점점 더 잔인하고 끔찍한 지옥을.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지옥을. ...혼인 신고는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모든 절차를 끝내기까지 30분 정도밖에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구청에서 나온 두 사람의 손에는 혼인 신고서가 들어 있었다.어젯밤 잠은 설쳤으나 사진은 그나마 잘 나온 편이었다.커플 셔츠로 맞춰 입은 두 사람의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아닌 찬란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구석 자리에 구청의 낙인까지 제대로 박혀 있었다.또 한 번의 결혼으로 두 사람 모두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채 레스토랑으로 가서 축배를 들기로 했다.한껏 즐기고 나서 임재욱은 그녀를 데리고 임씨 가문 고택으로 향했다.혼인 신고를 했다는 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니 임태훈에게 이 좋은 소식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아니면 외면할지 임재욱은 이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그냥 모든 절차를 일일이 밟고 싶었다.고택 안은 쓸쓸해 보일 정도로 넓은 편이다.평소에 임태훈과 임청아 두 사람만 이곳에서 지내고 있는데 주인보다 하인이 몇 배나 더 된다.그러나 오늘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다.하인은 두 사람을 안쪽으로 모시고 다과를 내놓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어르신께서 아가씨랑 싸우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엄청 화가 난 상태세요.”임재욱은 그 말을 듣고서 눈살을 찌푸렸다.“뭐 때문에 싸운 건데요?”그가 알기로 임태훈은 유일한 손녀를 끔찍이 여겨 평소에 못된 소리 한번 하지 않았었다.임청아가 한서준 좋다고 기어이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도 임태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성대하게 약혼식까지 준비해 주었다.이쯤에서 만족할 법도 한 임청아인데, 대체 무슨 일로 싸웠는지 궁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에 익숙해진 임재욱이기에 임태훈은 두 사람을 강제로 갈라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임재욱의 뜻대로 하게 놔두는 것이다.아니면 그 불만이 화로 돌아온 임청아를 공격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후회해도 소용없다.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다소 의외인 임태훈의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고마움은 표시했다.그와 동시에 임태훈에게 진지한 모습으로 약속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시아랑 행복하게 지내면서 조만간에 꼭 증손자 안겨드릴게요.”말하면서 그는 고개를 돌려 유시아를 바라보았다.예쁘고 작은 유시아의 얼굴은 이미 화끈 달아올라 먹음직스럽게 익은 복숭아와 같았다.저녁이 다가오자, 임태훈은 두 사람에게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다.그래도 집으로 찾아온 ‘손님’이니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저녁 내내 임청아는 위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하인의 말에 따르면 지금 위층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있다고 했다.임태훈은 임청아에게 음식을 좀 가져다주라며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고 어쩔 수가 없다는 듯이 멋쩍게 웃었다.“참, 저놈의 성질머리는 평생 고칠 수 없을 것 같아.”그러다가 임재욱과 유시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덧붙였다.“내가 죽고 나면 너희들이 좀 수고해 줘. 청아 잘 부탁한다. 오빠인 네가 많이 참아주고 그래. 성질만 좀 더러울 뿐이지 심성은 착한 아이니 많이 보살펴주고 그래.”왠지 모르게 이제 곧 숨을 거두게 될 사람이 남기는 유언과 같았다.인제 제법 연세도 있으시고 반년 사이에 병원에도 자주 오고서 그러한지 미리 하는 당부하는 것 같기도 했다.건강이 최우선이라고 일단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오면 그 뒤로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린다.자기보다는 훨씬 젊은 임재욱이라 젊은이에게 굴복하고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젓가락을 들고 있던 임재욱의 두 손은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얼어붙었다.“네, 그렇게 할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임태훈은 그제야 고개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하는 임재욱을 바라보며 유시아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아뿔싸! 오해하고 말았어!’“그런 거 아니에요.”유시아는 힘껏 발버둥 치고 나서 나지막이 말했다.“그냥 그때 그 상처... 아직도 남아 있는지 궁금해서 그래요.”만약 유시아가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면 임재욱은 까맣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자기 몸에 그녀가 남긴 흔적이 있다는 것을.상처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었다.그리고 수시로 임재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유시아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으며 무의식중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소현우까지 죽이면서 그녀를 벼랑 끝으로 밀어버렸다고.임재욱은 단 한 번도 유시아를 탓하지 않았고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조차 없었다.임태훈이 알고 나서 일을 크게 벌리며 서서히 임재욱의 권력 밖으로 나간 것뿐이다.살짝 달아오른 유시아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임재욱은 웃었다.그녀의 손을 잡고서 아주 정확하게 그 상처 위에 올려 놓았다.“아직 있어. 여기에.”따뜻하고 매끈한 피부 위에 살짝 위로 튀어나온 옅은 상처...유시아는 손끝으로 그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많이 아팠었죠?”그때 하얀색 타일이 모두 빨갛게 물들일 정도로 피를 흘렸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고통에 겨워 얼굴이 일그러졌음에도 임재욱은 그녀를 죽이지 못했다.칼을 가슴팍으로 찔러 버리지 못한 유시아처럼.“시아야, 이미 다 지나간 일이야.”임재욱은 그녀의 손을 도로 떼어내면서 꼭 끌어안았다.이마에 뽀뽀를 하면서 거듭 강조했는데.“다 지나갈 거야. 시아야, 믿어줘...”유시아는 그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다음날, 임재욱은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지 않았고 두 사람은 오래간만에 같이 아침을 먹었다.이윽고 임재욱은 출근하러 가고 유시아는 이채련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혼인 신고한 소식도 알릴 겸.유시아를 병원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아침 회의가 있다면서 나중에 다시 인사드리러 오겠다고 하고는 차를 돌렸다.바쁘다고 하는 그를 강제로 잡지
“그래.”이채련은 유시아를 꼭 안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시아야, 꼭 행복해야 해. 꼭 행복하도록 해.”병원에서 나온 유시아는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이채련 주치의 말에 따르면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고 많아야 2, 3개월이라고 했다.먹을 수 있는 것이 없고 겨우 먹는다고 한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리 토해내고 있는 이채련은 지금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을 뿐이다.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인제 더 이상 없고 진통제로 환자가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하는 게 전부다.생명이 한계에 다 이르고 있으니, 유시아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그중에서 터득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나마 건강한 몸을 소중히 잘 아끼는 것이다.적어도 유시아에게는 더 스케치 화실이 있으니 말이다.화실에 이르렀을 때 수업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안내 테스크 직원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시아쌤, 일찍 오셨네요?”유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토실이 보려고 일찍 왔어요.”말하면서 그녀는 포장해 온 밀크티를 직원에게 건네며 덧붙였다.“자, 이건 오늘의 보너스예요.”안내 데스크 직원은 갑작스러운 밀크티에 감동이라도 한 모습을 보였다.“어머, 보너스도 있고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유시아는 웃으며 뜸을 들였다.“좋은 일이 있긴 한데, 조금 지나서 나중에 다시 알려줄게요.”결혼식을 올리게 되면 더 스케치 화실 직원들에게 선물을 돌릴 생각이다.위층으로 올라간 유시아는 먼저 재무 사무실로 가서 토실이를 보았다.새로 사 온 옷을 입히고 사료도 먹이고 기분이 한껏 좋아져 사진도 찍어 주었다.그렇게 토실이와 짧지만, 행복했던 시간을 보내고 수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교한 학원들이 잇따라 화실로 들어오기 시작하고 수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퇴근 시간이 다 되기 전에 임재욱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오늘 저녁에 손님과 식사 자리를 가져야 한다면서 마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