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443화

작가: 은별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0-29 19:42:56
유시아는 빨간색으로 된 초대장을 만지며 그 위에 찍힌 남운대 배지를 바라보았는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꽃다운 시절을 보냈던 남운대, 한때 스승이었던 선생님이 아직도 수업을 가르치고 있을 수도 있고 엄격했던 기숙사 선생님도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임재욱을 쫓아다녔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몇 년간 시간이 흐리긴 했지만 뭐가 달라졌을까?

문득 지금의 남운대가 궁금해졌지만 그와 함께 두려움도 밀려왔다.

임재욱은 남운대의 저명한 교우로서 지금은 대우 그룹의 총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남운대에 다닐 때도 걸출한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던 사람이다.

장학금을 싹쓸이하고 농구도 식은 죽 먹기로 잘했으며 모든 학과에서 ‘A’를 받았던 엄친아 중의 엄친아이다.

마치 전설 속의 인물과 같다고 할까?

그런 임재욱과 달리 유시아는 지금 내놓을 만한 게 없다.

남운대에 다녔을 때는 나름대로 우수한 편이었지만 중도에 퇴학하면서 학업을 그만두게 되었다.

감옥에서 나온 뒤, 남운대에 복학 신청을 제출한 적이 있지만 매몰차게 거절을 당했었다.

좋았던 기억보다는 아팠던 기억이 많은 곳이라 유시아는 망설이게 되었다.

“그냥 재욱 씨 혼자 가요...”

유시아는 초대장을 다시 임재욱에게 밀어 넣었다.

“화실에 수업도 있고 그럴 시간이 없어요.”

눈치가 빠른 임재욱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망설이는 이유는 알게 되었다.

가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자기한테 수없이 거절을 당했던 곳일 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졌던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다르다.

명성이 자자했던 남운대의 임재욱은 지금도 여전히 대우 그룹의 총책임자로 카리스마가 넘친다.

“시아야...”

임재욱은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나랑 같이 가자. 꼭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과거를 잊을 수 없다면 차라리 그 과거를 직면해 보는 건 어때?”

유시아에게 많은 걸 빚진 임재욱은 시발점인 그곳에서 빚을 천천히 갚기 시작해야 한다
잠긴 챕터
앱에서 이 책을 계속 읽으세요.

관련 챕터

  • 사랑이라는 죄로   제444화

    말하다 보니 유시아는 점점 감개무량해지기 시작했다.“오랜만에 온 게 맞는 것 같아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해있을 줄이야.”임재욱은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마침내 그녀의 손을 잡고 덩달아 감개에 빠지는데.“너뿐만 아니라 나도 참 오랜만이야.”졸업하자마자 임태훈이 찾아와서 정운시로 가야만 했으니 말이다.그 뒤로 별의별 일들을 다 겪으면서 다시는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을 새가 없었다.유시아가 감옥에 들어가고 나서 임재욱은 더더욱 이 도시를 멀리하게 되었다.업무상 필요한 곳이고 꼭 가야만 했던 출장지였어도 회사 동료에게 모두 떠맡겨 버렸다.유시아 이름으로 된 화실을 짓는 것에 대해서도 임재욱은 직접 현장에 오지 않았었고 모든 걸 온라인으로 소통했다.무엇을 피하고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그 역시 선뜻 답을 뱉어낼 수 없었다.어느 한 순간부터 그 모든 건 습관이 되어 있었고 자기도 모르게 그 습관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하지만 초대장을 받게 되는 순간 그 습관을 어겨 한 번 직접 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유시아가 싫다고 해도 직접 몰래 와서 볼 생각이었다.다행인 것은 유시아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이다.늦은 밤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호텔에 도착했다.시간도 애매하고 하여 임재욱은 배달 앱을 열어 야식을 주문했다.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일찍 일어나서 케쥬얼한 커플 옷으로 맞춰 입고 선글라스까지 꼈다.캠퍼스 커플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택시에 올라 남운대로 행했다.남운대는 총 다섯 개 교육구로 나누어져 있고 유시아 화실은 바로 미술과 강의동 가장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인테리어가 정교한 것이 전형적인 고딕 건축 스타일이다.유시아 화실은 이미 대외로 개방되었다.때때로 미술과 사생들이 삼삼오오 참관하러 오기도 하고 나지막이 의논하는 모습도 보였다.남운대 화실이 아니라 유시아 화실이라는 명명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것이다.화실을 둘러보면서 유시아는 수많은 작품

  • 사랑이라는 죄로   제445화

    그 뒤로 남운대 미술과에 떡 하니 붙은 유시아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유병철은 직접 딸을 남운대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의 가장 큰 꿈은 해외로 유학을 가는 것이었다.하지만 남운대 교환 학생의 정액은 한정되어 있고 요구도 만만치 않았다.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지 그대로 뽑히게 되는지 모든 건 미지수였다.그럴 때마다 유병철은 늘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안을 해주었었다.“괜찮아. 교환 학생으로 가지 못하면 자비로 가면 돼.”“한두 푼도 아니고...”유시아는 매번 쓴웃음을 지으며 꿈과 점점 멀어져 갔었다.미술은 거의 돈을 태우는 듯한 학과라고 보면 된다.관련 도구도 가격이 만만치 않고 해외로 유학하러 가려면 학비에 생활비까지 적어도 몇천만 원은 든다.유병철은 늘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유시아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희망을 주었다.“돈은 모으면 그만이야. 걱정하지 마.”평소에 한두 푼씩 꼼꼼하게 모아 유병철은 작은 아파트를 사고 나서 남은 돈을 모두 한 카드에 넣었다.그는 장난삼아 유시아에게 드림 카드라며 말한 적도 있다.하지만 대학을 마치기도 전에 꿈을 향해 다가가기도 전에 유시아는 감옥으로 향하게 되었다.‘만약 아빠가 살아 계신다면 나 보고 실망하겠지?’정성껏 키워주셨는데 남자 하나 때문에 모든 걸 잃었으니 말이다.자랑으로 여기시면서 힘든 세월을 살아오셨는데, 자아까지 잃어버린 유시아이니 말이다.이런저런 생각이 들면서 유시아는 서서히 쓸쓸해지기 시작했다.어두워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임재욱은 입술을 사리물었다.유병철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은 듯 유시아를 데리고 다른 작품 앞으로 걸어갔다.점심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남운대 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유시아가 화실에서 하도 오래 있어서 식당으로 향했을 때 음식들은 거의 바닥이 나 있었다.임재욱은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다른 곳을 제안했다.“먹자골목으로 가지 않을래?”“아니요.”유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그냥 있는 대로 대충 먹어요.”식당 음식을 먹은 지 오래된 그녀는

  • 사랑이라는 죄로   제446화

    걷다 보니 커플 아이템으로 가득한 가게들이 줄줄이 나타났다.그중에서 연세가 꽤 있어 보이는 할머니께서 알록달록한 끈으로 손수 팔찌를 만들고 계셨다.화려한 색채에 끌려서인지 유시아는 홀린 듯 다가가 그중의 한 팔찌를 콕 집었다.“이거 사요.”기념으로 가져가려고 하는 마음이었다.평소에 두 사람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남운대에 올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임재욱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 사자.”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웃으셨다.“두 사람 연인이지? 두 사람만을 위한 팔찌를 만들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봐. 자, 이런 디자인인데...”할머니느 말씀하시면서 이미 만들어 놓으신 디자인을 보여 주었다.“한 사람 하나씩 팔에 꼭 끼고 다니도록 해.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행복하게 잘 지내.”유시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임재욱이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네, 그렇게 할게요.”말하면서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들어 할머니께 드렸다.유시아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분홍색 줄은 그렇게 할머니의 손놀림에 따라 어느 정도 예쁜 디자인으로 갖춰지기 시작했다.두 사람의 팔목 두께에 따라 팔찌 길이를 조절하며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한 특별 디자인까지 첨부했다.“절대 빼는 안 돼. 어딜 가나 꼭 하고 다녀야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거야.”손목에 예쁘게 ‘나타난’ 팔찌를 보며 유시아는 웃었다.실은 아주 드문 디자인이었다. 예쁜 것 외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그런 팔찌.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번 임재욱이 선물해 주었던 어메랄드 팔찌보다 훨씬 예쁘고 소중했다.이때 유시아의 손을 꼭 잡고 임재욱이 웃으며 말했다.“시아쌤, 할머니 말씀 들으셨죠? 절대 빼는 안 돼요.”손을 맞대고 팔찌가 이어지자 특별히 첨부한 디자인인‘하트’가 맞춰지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대표님도 절대 빼면 안 돼요.”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다가 두 사람은 남운대 근처에 있는 유명한 음식점

  • 사랑이라는 죄로   제447화

    유시아를 지그시 바라보며 임재욱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이윽고 미리 준비해 놓은 츄레이닝 복을 꺼내서 전해 주었다.턱까지 지퍼를 올릴 수 있는 그런 보기만 해도 답답한 느낌을 주는 츄레이닝 복.여행하는 동안 차려입으려고 가지고 온 예쁜 원피스들은 순간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유시아는 그만 참지 못하고 임재욱한테 솜 주먹을 두어 번 날렸다.“일부러 그런 거죠? 이 더위에 츄레이닝 복이 웬 말이에요! 원피스 입고 싶었는데...”허허 웃으며 임재욱은 너스레를 떨었다.“요즘 자외선이 좀 강해야 말이지. 네가 혹시나 햇볕에 그을려 피부 상하게 될까 봐 특별히 준비해 온 거야.”유시아는 옷을 건네받으며 그를 확 밀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옷을 갈아입고 츄레이닝 복에 어울리는 올림머리도 예쁘게 감아올렸다.메이크업을 확인하려고 거울을 보고 있을 때 전화를 받는 임재욱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일로 하는 전화라고 생각하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여기로 오기 전에 이미 모든 걸 맡겨놓고 온 거라.문을 열고 나가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가 보였는데, 표정이 무척이나 어두웠다.순간 당황해하며 유시아가 물었다.“무슨 일이에요?”“문제가 좀 생겨서 지금 당장 정운시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임재욱은 소파에서 일어서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한 얼굴로.“시아야, 미안해. 식물원은 다음에 가야 할 것 같아. 일 끝나는 대로 내가 꼭 보상해 줄게.”내심 실망하긴 했지만 일이 먼저니 유시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알았어요. 얼른 티켓 끊어요. 전 짐이나 챙길게요.”말하면서 그녀는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짐이 워낙 많지도 않아 정리하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가장 빠른 시간으로 티켓을 끊은 임재욱은 콜택시를 불러 그녀와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휴가를 떠나는 모든 이들처럼 두 사람은 이곳으로 올 때 여유가 넘쳤었다.하지만 갑자기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서 이코노미석에 앉아 갈 수밖에 없었다.비행기 안은 여객들의 목소리가 아울러져 유난

  • 사랑이라는 죄로   제448화

    두 사람의 집인 만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려놓아야 뭔가 화목해 보일 것 같았다.노트북으로 사진을 일일이 다 옮기고 나서야 졸음이 밀려와 유시아는 바로 침대로 올라가 자려고 했다.밤새 숙면을 취한 유시아는 깨어나자마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침을 먹으려고 내려갔는데, 부엌 테이블 쪽에 앉아 있는 임재욱이 보였다.슈트를 차려입은 그는 지금 당장 출근하려는 그런 모습이었다.“시아야, 잘 잤어?”임재욱은 먼저 인사를 건넸다.“좀 더 자지 그랬어.”“잘 잤어요.”유시아는 대답하고서 테이블로 다가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언제 온 거예요?”“새벽에 왔어. 네가 하도 깊이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았어.”임재욱은 말하면서 그녀를 향해 웃었다.“내가 다른 식으로 널 깨웠다면, 넌 아마 아직도 자고 있을걸?”아침부터 훅 들어온 임재욱의 너스레에 유시아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테이블 밑에서 그를 호되게 밟았다.“뭐라는 거예요!”임재욱은 웃으며 잔에 남아 있는 커피를 깨끗하게 마시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난 출근하러 간다. 화실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오늘 계속 집에 있을 거야? 아니면 나가서 놀 거야?”“현우 어머니 뵈러 가고 싶은데요.”임재욱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연세도 있으신 데 사람이 얼마나 그립겠어. 아들도 잃고 돈도 잃고 친척들마저 멀리하고 있잖아.”전혀 생각하지 못한 그의 말에 유시아는 웃었다.“오늘따라 마음이 엄청 넓네요?”전 남편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그가 당연히 싫어할 줄 알았으니 말이다.임재욱은 웃으며 말했는데.“어르신이랑 굳이 그럴 필요는 없잖아.”말하면서 고개를 숙여 얼굴을 유시아의 입가로 기울였다.“자, 뽀뽀. 얼른 출근하러 가야 해.”다행히 하인들도 없어서 유시아는 그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됐어요. 얼른 가 봐요.”임재욱은 그녀의 이마에 ‘답례’를 하고서 차 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아침을 먹고 난 뒤 유시아도 위층으로

  • 사랑이라는 죄로   제449화

    “재욱 씨 회사에 일이 좀 생겨서 급하게 돌아온 거예요.”의문이 풀린 이채련은 웃으며 말했다.“그랬구나. 남자가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어. 다 너랑 잘살아 보겠다고 그러는 거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같이 지내면서 서로 이해하는 법도 익혀야 하는 거야.”유시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문득 전에 임재욱이 했던 말도 떠올랐는데.만약 대우 그룹을 날려 버리면 이채련의 병원비를 지급할 능력도 없고 유시아에게 좋은 생활도 줄 수 없다고 했었다.두 사람의 말이 맞았다. 돈은 중요한 일부분이라는 것.점심에 유시아는 병원에 남아 이채련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다 먹고 나서 휠체어에 이채련을 앉혀 정원으로 나가 산책을 하기도 했다.그렇게 오후가 다 되어서야 유시아는 차를 타고 병원을 떠났다.남운대에서 돌아온 뒤로 임재욱은 늘 야근했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한서준과 임청아의 약혼식이 열리는 그날에서야 시간을 쪼개서 유시아를 데리고 약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두 사람의 약혼식은 대우 그룹 기하에 있는 7성급 호텔에서 진행되었다.귀한 손녀의 약혼식이라 임태훈은 원래 호텔 안에 있던 모든 것을 옮겨 버리고 거의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새로 장식까지 했다.그뿐만 아니라 정운시에서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을 모두 초대해 왔고 기자들까지 불렀다.귀한 소녀 임청아의 약혼식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셈이다.이토록 성대하고 원만한 약혼식임에도 불구하고 흠 하나가 있었다.그건 바로 한서준의 부모님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임씨 가문 하인의 말로는 한서준의 부모님이 워낙 한서준을 달갑게 보지 않고 있었고 며느리로 들어오게 될 임청아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는 편이라 아예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그들의 결정과 행동은 임씨 가문 전체의 불만을 자아냈다.정운시에서 상류 계층에 속하는 임씨 가문인데, 임태훈의 귀한 손녀로 정운시에서 명성이 자자한 천금일 뿐만 아니라 예쁘고 기질 또한 뛰어난 임청아인데...그 외모가 얼마나 뛰어나고 아우라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 사랑이라는 죄로   제450화

    “그래?”임재욱은 되물으며 음흉한 표정으로 말했다.“급할수록 직진해야 하는 거 아니고? 나 매일 밤 직진하는데?”“...”평소에 세상 차가워 보이는 남자가 인제 19금 드립도 마구 날리고 있다.자기가 알고 있던 임재욱이 맞는가 싶기도 했다.이제 막 반박하려고 하던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두 사람을 한사코 노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유시아는 그 사람의 시선을 마주하며 보았는데,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정유라가 보였다.정유라는 지금 웃는 듯 마는 듯 유시아를 보고 있다.임재욱과 ‘이혼’한 건 사실이나 두 가문의 친분으로 임씨 가문에 이와 같은 일이 있게 되면 정유라는 무조건 오게 되어 있다.시선이 마주치고 난 뒤 유시아는 아랫입술을 살포시 사리 물고 더 이상 임재욱과 장난을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려 무대 위에 있는 한서준과 임청아를 바라보았다.임재욱은 이런 자리에 별로 흥미가 없는 편이라 아주 산만했다.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축제이겠지만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서.하여 그는 유시아의 손을 잡아당겨 만지작거리며 모든 신경을 그녀에게 쏟아부었다.함께 하는 커플 팔찌를 보고서 어린아이처럼 웃기도 하면서.바로 그때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발신자 번호를 확인하고서 그는 유시아의 손을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산만한 그와 달리 유시아는 무대 위에 있는 두 사람에게 신경이 집중되어 있어서 그가 언제 떠났는지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결혼식이 끝나고 나서야 옆자리가 한동안 비어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는데.핸드폰에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시아야, 갑자기 해외에서 바이어가 와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강 비서 차 타고 먼저 집에 가. 나 기다리지 말고.]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방해하지 않기로 하고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문 앞으로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정유라가 보였다.유시아가 나오는 것을 정유라는 성큼성큼 다가와 입을 열었는데.“시야 씨, 재욱 씨랑 같이 온 거 아니

  • 사랑이라는 죄로   제451화

    늦은 밤, 그린레이크.홀로 1층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유시아.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으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10시가 넘었음에도 임재욱은 돌아오지 않았다.심지어 전화 한 통도 없었다.허씨 아주머니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부엌에서 걸어 나왔다.우유를 테이블 위에 놓고 나지막이 입을 여는데.“아가씨, 인제 그만 올라가셔서 쉬세요.”“네... 고마워요...”유시아는 우유를 건네받고 한 모금 마시고는 덧붙였다.“아직 졸리지 않아서 그래요. 재욱 씨 오는 거 보고 자려고요.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재욱 씨 오면 제가 알아서 챙겨줄게요.”한사코 자기 뜻을 견지하는 유시아를 바라보며 허씨 아주머니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가 담요 하나를 가지고 내려왔다.유시아에게 담요를 건네주고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밤은 점점 깊어지고 텅 빈 거실은 유난히 쌀쌀했다.에어컨을 켜고 있음에도 한겨울의 추위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담요로 몸을 꼭 감싼 채 소파에 기대었다.시간이 흐를 수록 서서히 졸음도 밀려왔다.그렇게 잠자리에 들려고 하던 그때 누군가가 얼굴에 뽀뽀를 하는 것처럼 간지러웠다.뒤로 살짝 피했는데 갑자기 몸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그 사람이 유시아를 들어 안아 위층으로 향했다.유시아는 마침내 천천히 눈을 떴는데, 익숙한 그의 턱과 목젖이 보였다.자기도 모르게 두 팔로 남자의 목을 살포시 감싸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오늘도 많이 늦었네요.”“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야근 좀 하고 왔어.”임재욱은 말하면서 침실로 들어와 그녀를 포근한 침대 위로 살포시 내려놓았다.이윽고 그 위로 확 덮쳐왔는데.“왜 아직 자지 않은 거야? 혼자서 밤새 드라마 보기로 한 거야?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유시아는 웃으며 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 순간 갑자기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가 풍겨왔다.“소독수 냄새! 재욱 씨 몸에서 소독수 냄새가 진동해요.”순간 임

최신 챕터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5화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4화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3화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2화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1화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0화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9화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8화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7화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