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진행하시죠. 저는 잠깐 실례할 게요.”이 말을 끝으로 던의 화면은 검게 변했다.그걸 본 진소혜는 슬쩍 고개를 들어 확인하고는 아쉬운 듯 투덜거렸다.“나를 감독하겠다면서 영상 통화는 왜 껐대요?”이에 권하윤은 손가락을 쪽쪽 빠는 소혜를 보며 완곡하게 말했다.“급한 일이 있나 보죠.”“그렇구나. 아쉽다.”잘생긴 남자를 보지 못하자 소혜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1시간 내에 시스템을 복구해야 하기에 이내 일에 다시 집중했다.시간은 그렇게 1분1초 흘러갔다. 그러다가 거의 1시간이 다 되어가자 확신에 차서 말하던 하윤마저 걱정이 앞섰다.그런데 또 소혜를 방해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으며 소혜의 정수리를 바라볼 뿐이었다.“탁!”그때 엔터키를 누르는 맑은 소리가 들려오더니 소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다 됐어요!”그 다음은 두 시스템을 비교해 사고 당일 대체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확인해 보는 작업이었다.소혜의 컴퓨터 액정에서 수많은 코드가 번뜩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어지러워졌을 텐데 소혜는 오히려 더 흥분한 듯했다.“알아냈어요!”소혜는 끝내 시스템을 가리키며 말했다.“그날 시스템이 작동할 때 갑자기 이상 신호가 잡히면서 교란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갑자기 오차가 생겨 폭발 시간이 앞당겨 지면서 발사하기도 전에 폭발한 거고요.”“이상 신호 때문에 교란이 일어났다고요? 혹시 어디서 잡힌 신호인지 알아낼 수 있나요?”“그건 좀 어렵지만 위치 확인은 가능해요. 이정도로 강한 신호는 신호소에서 보낸 게 틀림없어요. 신호소를 하나하나 배제해 보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그래요. 그러면 제가 알아 볼게요.”마침내 돌파구를 찾자 하루 종일 누적되었던 피로도 싹 풀렸다.그때 경비 아저씨가 하윤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저기요, 이제 문 닫을 시간이에요.”하윤은 그제야 자기가 지금 방송국 로비에 앉아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미안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방송국 건물을
파도가 끊임없이 소리를 내며 갑판 위에 오르려고 하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지기를 반복했다.선밖 밖의 요란함은 두꺼운 철벽에 막혀 안으로 새어 들어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안, 웬 남자가 두 다리를 꼰 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보고싶어요.][어제보다 더 보고싶어요.]손가락이 대화 창을 클릭하고 문자를 적으려는 찰나,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애교가 많은 여자네요. 어쩐지 도준 씨가 계속 걱정한다 했어요.”도준이 눈꺼풀을 들자 빨려 들어갈 듯한 검은 눈동자가 나타났다.“이렇게 말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네.”“그동안 쌓인 게 많으니 화 내는 것도 당연해요.”여자는 붉고 투명한 와인을 잔에 따라 도준에게 한 잔 건넸다.하지만 도준은 그 잔을 받지 않았다.“축하주가 아니더라도 기념주는 마셔야 하지 않겠어요?”도준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더니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더러워서 싫어.”그 말에 여자도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몇 년 안 본 사이에 도준 씨는 하나도 안 변했네요.”도준은 희뿌연 담배 연기를 뱉어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분명 앉아 있지만 사람을 내려보는 듯한 착각이 들기까지 했다.그러는 그쪽은 많이 변한 것 같네. 더 구역질나.”“칭찬 고마워요.”여자는 와인잔을 흔들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액체가 와인잔 내벽에서 빙글 돌았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사이, 여자는 잔을 통해 도준을 바라봤다.“누구는 뭐 애교 부려서 문제 해결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아요? 아쉽게도 저는 그런 팔자가 아니란 게 문제죠.”“만약 당신이 하윤 씨였다면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배신 때렸겠지. 그것도 이익을 가장 많이 챙기는 쪽으로. 제 목숨 부지하려고.”도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잔을 흔들던 여자의 손이 순간 멈췄다. 마치 속내를 들킨 것처럼.하지만 여자는 곧바로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한 순간 모든 감정이 사라진 것처럼 원래의 모습을 드러냈다.“그 여자가 도준 씨 곁에 있는 것도 목적이 있어
아침 7시, 어젯밤의 서늘함이 채 가시지 않아 밖은 제법 쌀쌀했다.바다 부근은 공기마저 짭짤한 비린내가 났다.하윤은 어제 산 신호 표시기를 꺼내 들고 지도를 따라 걸으면서 진소혜와 통화했다. “여기 맞아요?”“잠깐만요, 확인해 볼 게요.”“주파수가 달라요. 다음 신호탑을 한번 확인해 봐요.”“…….”끝내 소혜는 시뮬레이션 효과로 신호탑 하나를 확정 지었다.“아마 이 신호탑일 거예요.”“알았어요. 제가 이 근처에서 수소문해 볼게요.”전화를 끊은 뒤, 하윤은 곧바로 인근 주택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했다.“안녕하세요. 통신서비스 업체에서 조사 나왔습니다. 혹시 최근 핸드폰 신호가 안 잡혔던 적이 있나요?”“괜찮았는데요. 인터넷 속도가 조금 느리긴 했어요.”“괜찮았어요.”“데이터가 항상 부족해요…….”그렇게 한 소년이 사는 집에 방문했을 때, 소년은 곧바로 표정을 구겼다.“신호가 대체 왜 이래요? 신호 때문에 결승에 오르지도 못했잖아요!”그 순간 하윤은 희망을 발견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당시 상황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저희가 상황에 따라 보상해 드릴게요.”“보상이요?”소년은 그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어, 그건 됐어요. 그냥 게임이라서 뭐 그리 손해 보는 것은 아니에요.”“그래도 저희 회사 측 문제이니 보상은 꼭 해드릴게요. 혹시 신호에 문제가 생긴 게 언제였는지 기억해요?”소년은 그날 신호 때문에 경승 진출을 하지 못한 게 기억에 남았는지 바로 기록을 보여줬다.“자요. 이 날이에요.”날짜와 시간을 대조해 보자 그 날은 마침 시험 훈련이 있었던 날과 일치했다.만약 누군가 신호탑에서 일을 벌였다면 인근 주민에게도 피해가 갔을 게 뻔하다.물론 눈 앞의 소년 한 명으로는 많이 부족했지만 증거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하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알겠습니다. 전화 번호를 남겨주시면 5천 원 상당의 전화 요금을 보상해 드릴게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 아파트 건물주한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상
조씨 저택 거실.웬 노인이 눈살을 찌푸린 채 손에 든 자료를 보고 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조관성의 아버지 조명섭이다.하윤은 다소 고지식해 보이는 조명섭을 보며 잔뜩 긴장했다. 조명섭이 자기의 목적을 오해라도 하거나 정계에서 물러난 지 너무 오란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봐 걱정이었다.조용한 분위기 속, 숨소리와 종이 펼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뒤 부분을 볼수록 노인의 표정이 점점 풀어지더니 끝내 상냥한 표정으로 하윤을 바라봤다.“이 증거들을 수집하느라 고생했네.”“아닙니다. 조 국장님과 도준 씨의 누명을 풀려면 당연한 일인걸요.”조명섭은 하윤의 말에 흐뭇하게 웃었다.“의리 있는 처자군.”물론 하윤이 이렇게 하는 건 자기 애인을 위해서지만 들을 수록 마음에 들었다.“하지만…….”노인의 눈빛은 한 순간 날카로워졌다.“증거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게 아니겠지?”“그건…….”하윤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확실히 원래 시스템 복제도 그렇게 사적으로 비행기 잔해에서 시스템을 손에 넣어 복구한 것도 그렇고, 모두 합법적으로 얻은 것은 아니다.하윤은 간곡한 눈빛으로 조명섭을 바라봤다.“역시 어르신의 눈은 속일 수가 없네요. 사실 내일이면 재판이 있는데 조 국장님의 죄가 확정되면 모든 걸 되돌릴 수 없을까 봐 그럽니다. 그 사람들의 죄를 물을 수만 있다면 불법적으로 증거를 수집한 죄는 제가 따로 받겠습니다.”조명섭은 윤을 몇 초간 바라보더니 그녀의 진심을 보아냈는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약하기만 한 계집애인 줄 알았는데 남자 하나 때문에 고생이군. 내가 인생 선배로써 어찌 젊은 처자에게 짐을 떠맡길 수 있겠나?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자네를 책망하는 게 아니네. 내가 물론 자네를 믿긴 하지만 이 모든 게 합법적인 수단으로 얻어낸 증거가 아니라 상대에게 꼬리를 잡힐 수 있다네.”하윤은 조명섭의 말에 다급해졌다.“그러면 이것은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당연히 그건 아니라네.”조명섭은 잠깐 침묵하다가 말을
권하윤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리고 처음 드는 생각은 자기가 조명섭한테 증거를 가져다준 일이 탄로났다는 거였다.하지만 공미란이 이렇게 묻는다면 아직 확신을 갖지 못했다는 판단이 섰다.‘나를 미행하다가 내가 조씨 저택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이렇게 묻는 게 틀림없어.’정리된 생각에 하윤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격분하여 말했다.“당연히 어떻게 하면 당신 들 민낯을 폭로할지 물어봤죠!”하윤의 말이 떨어지자 이곳저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건 분명 주제 넘은 하윤을 비웃는 웃음이었다.“하, 조 국장도 무너졌는데 은퇴한지 한참이나 되는 노인네를 찾아가서 뭐 하려고?”경멸에 찬 공미란의 말투에 하윤은 속으로 안도하면서 분노한 듯 더 버럭 소리쳤다.“없는 사실을 지어내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들 꼭 천벌 받을 거예요!”하윤의 천박함에 공미란은 그녀에게 완전히 흥미를 잃은 모양이었다.“끌고 가서 제대로 손 봐줘.”‘손 봐준다고?’‘사람 함부로 때리는 게 어디 있어?’“왕 사모님은 인터넷 안 하시죠? 저 사흘 뒤 인터뷰가 잡혔거든요. 저 지금 인터넷에서 꽤 유명해요. 이런 때에 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 주위 사람들이 저 대신 신고할 거예요.”하윤은 말하면서 공미란을 빤히 쳐다봤다.“아무리 그래도 추 부장과 손을 잡은 이 관건적인 시기에 함부로 파트너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데.”불경스러운 하윤의 행동에 공미란의 얼굴은 그늘이 드리웠고 눈동자도 점점 어두워졌다.……결국 하윤은 어두운 방 안에 갇히게 되었다.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방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는 순간 깊은 어둠이 찾아왔다. 어찌나 어두웠는지 빛 한줄기조차 흘러 들지 않았다.아무 소리도 나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하윤은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시도했지만 발을 떼자마자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중력감이 순간 사라지면서 팔꿈치가 바닥을 쿵 하고 찧는 순간 하윤은 밀려오는 고통에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더 이상 한
“혹시 우리가 전에 했던 거래를 기억해요? 제가 만약 하윤 씨가 진실을 찾는 걸 도와주면 하윤 씨는 제가 공씨 가문 가주와 결혼하는 걸 도와주겠다고.”“네. 그런데 공태준은 이제 가주가 아니잖아요.”“이제 곧 다시 원래 자리 찾을 거예요.”‘이제 곧…….’권하윤은 그제야 뭔가를 알아차린 듯 되물었다.“그러니까 공태준은 공씨 가문에 일이 터질 걸 알고 일부러 가주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거예요?”“아마도요.”‘쳇, 하마터면 나 때문에 물러났다는 말 믿을 뻔했잖아.’“하지만 공태준 씨가 한 말 모두 거짓은 아니에요.”고은지의 말에 하윤은 자기가 소리 내어 말했다는 것을 인지했다.그때 은지가 비아냥 섞인 목소리고 말을 이었다.“그런 지위에 있는 남자들한테는 그 정도도 사랑이에요.”‘도준 씨는 아니거든요.’하윤은 속으로 반박했다.민도준은 하윤을 위하는 듯 눈속임을 쓰지 않는다.은지는 하윤이 믿지 않자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다.“하지만 이번 거래에 앞서 하윤 씨가 저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요.”상대한테 보이지는 않겠지만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뭔데요?”“저 한동안 이곳을 떠나 있고 싶은데,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은지의 말에 하윤은 어리둥절했다.“요즘 교통도 편리한테 떠나는 것도 제 도움이 필요한가요?”“제가 떠난다는 건 아무도 저를 찾을 수 없도록 기록을 지워달라는 거예요. 거래 조건으로 공씨 집안에서 들은 모든 소식을 말해 줄게요.”솔직히 은지가 소식으로 거래하지 않는다 해도 하윤은 전에 도움받은 걸 갚아야 했다.“최선을 다해 볼게요. 다른 사람한테 들키기 싫다면 던 씨에게 도움을 청하면 될 거예요. 던 씨는 배가 있으니 바다로 은밀히 빠져나가면 들키지 않을 거예요.”“네, 고마워요.”은지는 약 2초간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제가 말해줄 소식은 공은채와 관련된 거예요.”공은채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하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공은채라는 세 글자는 불행의 시작이자 전에는 감히 언급하기도 꺼림칙했던 이름이다.게
“공천하는 공은채를 매우 엄격하게 단속했다고 해요. 물론 처음에는 공은채보다 공아름을 더 아꼈지만 어느 하루 공천하의 생일 파티에 공은채가 어머니의 옷을 입고 나타나면서…….”공천하의 첫 번째 아내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맞아들인 사람이 바로 대단한 뒷배를 가진 재벌가 아가씨인 공아름의 어머니다.계모 밑에서 자란 공태준과 공은채의 생활은 당연히 편치 못했다.일전에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거나 직접 본 공은채는 누군가에게 지배당한 채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았다.그 때문에 항상 차가운 껍데기로 자기한테 걸어올 사람들의 시비를 막아냈는지도 모른다.하지만 고은지가 말하는 공은채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이에 하윤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공은채는 성격이 차갑지 않았나요?”“공은채의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냉미녀로 유명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석이며 선물을 갖다 바치며 구애했는지 몰라요.”은지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그날 파티에서 공은채를 본 사람마다 공은채가 어머니를 닮았다고 했대요.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까지도.”하윤은 은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그러면 공은채가 일부러 자기 어머니를 따라했다는 뜻이에요?”“한 사람의 성격이 갑자기 180도로 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죠.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면서 흉내를 내는 거면 모를까.”……다음날.이른 아침 하늘은 어둑어둑한 데다 보슬비가 투둑투둑 지붕을 내리 쳤다.그때, 공씨 저택 대문이 양쪽으로 천천히 열리더니 공천하 일행이 차를 타고 법원으로 향했다.펼쳐 졌다가 다시 닫히는 시커먼 우산, 평소에는 쉽고 볼 수도 없는 고급차들, 법원 안팎으로 느껴지는 숙연한 분위기, 이 모든 게 오늘 벌어질 일을 예고하고 있었다.오늘이 지나면 별 하나가 저물어 갈 거라는 것을.먹구름이 몰려오는 밖과는 달리, 법원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휴대폰 전등으로 방을 더듬으며 화장실을 찾아 씻은 하윤은 어제 잠을 잤던 매트 위에 앉아 소식을 기다렸다.할 수 있는 건
예전 같았으면 도망친 지 얼마되지도 않아 사용인들에게 잡혔을 테지만 공씨 가문이 무너진다는 소문 때문인지 저택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비 속에서 권하윤은 홀딱 젖은 채 미친 듯 질주했다.하지만 대문에 다다랐을 때 머리채가 누군가에게 잡히더니 뒤로 확 당겨졌다.그건 다름 아닌 어느새 뒤따라온 공아름이었다. 공아름도 하윤 못지 않게 홀딱 젖어 있었다.“감히 어딜 도망 가?”“이거 놔!”두 사람은 어느새 바닥에서 구르며 다투기 시작했다.하윤보다 몸집이 조금 더 있는 공아름은 어느새 우위를 점하고는 미친 듯 하윤을 바닥에 누르며 소리쳤다.“민도준 어디 있어? 당장 나오라고 해!”번개가 밤하늘을 가르는 순간, 아름다운 공아름의 얼굴이 섬뜩하게 번뜩였다.목이 졸린 하윤은 숨을 쉬려고 자꾸만 입을 벌렸고 그때마다 하윤의 입 안에 빗물이 들어갔다.점점 질식해 가는 하윤의 표정을 본 순간 공아름은 더 흥분했다. 심지어 손을 놓기는커녕 하윤의 목을 더 꽉 조이는 탓에 잘 다듬은 그녀의 손톱이 하윤의 살을 파고 들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공아름은 심지어 도준이 하윤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서로 뒹구는 장면까지 상상했다.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오빠를 빼앗아 간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집안까지 망가뜨린 하윤을 공아름은 죽이고 싶었다.벌겋던 얼굴이 쟃빛으로 변하는 사이, 하윤은 바닥을 더듬으며 아무것이라도 잡으려고 노력했다.그러던 그때.“펑!”아름은 손에 잡힌 화분으로 공아름을 세게 내리쳤다.미처 피할 새도 없이 공격을 당한 공아름은 몸을 움찔 하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졌고 그제야 하윤은 공기를 탐하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콜록콜록…….”그렇게 한참 동안 숨을 헐떡이며 호흡을 되찾은 하윤은 바닥이 흥건해질 정도로 흐른 시뻘건 피에 흠칫 놀랐다.‘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다행히 손가락을 공아름의 코 밑에 대보니 미세하지만 호흡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하윤은 얼른 핸드폰을 꺼내 구급차를 부르려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