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혁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훑어보더니 시선을 권하윤에게 멈췄다.“도피처로는 꽤 지낼만 하겠네. 그런데 그건 알아야지, 언젠가 햇빛을 볼 날이 올 거라는 거.”맞는 말이다.현재 조관성이 아직 완전히 직위를 박탈당한 게 아닌 데다, 해원에서 손을 썼다가 꼬투리라도 잡힐까 봐 아직은 몸을 사리고 있는 추형탁 때문에 지금은 그나마 상황을 늦출 수 있지만 조솬성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다면 이 곳도 더 이상 하윤을 보호하지는 못할 거다.하지만 하윤은 민재혁을 보며 비아냥거렸다.“추형탁은 아는지 모르겠네요. 아주버님이 겉으로는 자기와 손을 잡고 뒤에서는 이런 짓이나 꾸미고 있는 거.”하윤의 말에 민재혁은 여전히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제수씨인데 내가 설마 무슨 짓이라도 할까? 칩을 다른 사람 손에 넘기는 것보다야 나한테 넘기면 내가 제수씨 남은 평생 잘 살게 도울 수도 있는데.”민재혁의 같잖은 말에 하윤은 웃음만 나왔다.“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해요?”“도준이 이미 목숨 부지할 수 있는 부적 적도는 준 거로 아는데. 이대로 죽으면 그 재산도 물거품이 된다는 거 잊지 말아야지.”‘재산…….’‘동림 부지를 말하는 건가?’그제야 하윤은 도준이 기어코 그 땅을 하윤의 명의로 바꿔 놓은 이유를 알았다.그것은 단지 재산일 뿐만 아니라 하윤을 지켜줄 부적이기도 하다.만약 도준이 언젠가 하윤을 보호해줄 수 없게 되면 그 땅을 이용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테니까.도준은 언제나 제멋대로이며 남의 목숨, 심지어는 자기 목숨마저 벌레 보듯 하는 사람이다.다른 사람 같으면 한번 길을 떠날 때마다 경호원을 줄줄이 데리고 다니겠는데 도준은 늘 로건만 데리고 심지어 가끔은 로건조차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그런데 그런 그가 하윤을 위해 보호막을 겹겹이 쳐준 거다.순간 눈시울이 시큰거려 눈물이 흘러내리려 했지만 하윤은 애써 참았다.“칩을 갖고 싶다고요?”민재혁은 하윤이 이제야 생각을 고쳤다고 생각했는지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래.”“좋아요. 칩은 도
모두가 자고 있는 탓에 그 누구도 하윤이 발버둥 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점차 적어지는 산소에 눈앞에 환각이 생겨 나고 급기야 눈 앞이 하얗게 변하기까지 했다.‘안 돼, 이렇게 죽을 수 없어.’권하윤은 점차 발악을 멈췄다.“…….”그제야 하윤의 입과 코를 막고 있던 사람들이 눈빛을 교환하며 손의 힘을 풀었다. 하지만 그때, 하윤이 눈을 뜨며 힘껏 소리쳤다.“사람…… 읍…….”하윤의 위에 있던 사람이 재빨리 옷으로 하윤의 입과 코를 다 시 막았지만 잠깐 사이에 내지른 비명에 다른 사람들이 이미 깨어났다.“당신들 뭐 하는 거야?”장옥분은 심각한 상황에 얼른 큰 소리로 외쳤다.“여기 사람 죽여요! 빨리 오세요!”소리를 들은 교도관은 곧바로 현장에 도착해 일을 벌인 두 사람을 데려갔다.하윤도 피해자로서 당연히 조사실로 끌려갔다.솔직히 하윤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두 사람을 전에 만난 적이 없고 심지어 두 사람이 수감되기 전 대화 한 번 나누어 본 적 없다.그런데 두 사람은 한사코 하윤에게 원한이 있어 홧김에 그런 일을 벌였다고 주장했다.결국 두 사람은 곧바로 감옥으로 연행되었고 하윤은 다시 원래 방으로 돌아왔다.장옥분은 다시 돌아온 하윤을 무척 걱정했다.“자기, 괜찮은 거야?”“괜찮아요.”하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그 두 사람 미친 거 아니야? 구치소에 와서도 사람을 해치다니…….”하윤은 자기가 잠자던 곳을 보며 서늘한 눈빛을 내뿜었다.두 사람은 미친 게 아니다. 하윤에게 경고하는 거지. 구치소에 있다고 한들 절대 안전한 게 아니라는 경고.지금 생각해보면 두 사람은 하윤의 목숨까지 노린 것은 아닌 듯했다.하지만 만약 생명이 위독해지면 하윤은 병원으로 이송될 거고 그러면 당연히 구치소에서 벗어나게 될 테니 놈들이 손쓸 기회가 더 많아질 거다.‘또 만재혁인가 보네. 나를 밖으로 몰아내려고.’한 번의 위기는 넘겼지만 하윤은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미재혁은 한 번 실패하면 또 다시 시도할 테니까.이번에 행운이 따랐다
오랜만에 느끼는 따스함에 권하윤은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코트에서 나는 깊은 우드 향을 맡았다.순간 실망감이 밀려왔고 얇은 코트가 마치 태산처럼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공태준은 하윤의 초췌한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봤다.“괜찮아요?”하윤은 태준의 부축을 치하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지금 나 꺼내 주는 게 설마 칩 때문이야?”태준은 하윤의 등에 손을 얹으며 문을 열었다.“저는 그저 윤이 씨가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에요.”쨍쨍 내리 쬐는 햇볕 아래, 신선한 공기가 얼굴을 스치자 달짝지근한 내음이 느껴졌다.오랜만에 느끼는 햇살 때문에 눈시울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흘러내렸다.눈 앞을 막고 있는 문을 나서면 자유이자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다.태준은 하윤을 재촉하지도 강요하지도 않고 대신 문을 받친 채 하윤의 선택을 기다려 주었다.태준의 이런 신사적인 모습에 하윤은 뜬금없이 웃음이 났다.‘나한테 선택의 기회가 있기는 할까?’사건에 새로운 진전이 있다면 언젠가 풀려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오늘은 태준이 왔다지만 내일은 또 민재혁이 올 수도 있었다.……구치소를 떠나는 차 안에서 하윤은 길가에 우뚝 솟은 건물들과 사람들을 관찰했다. 참으로 낯서면서도 익숙했다.하윤을 감싸고 있던 껍데기가 점점 벌어지면서 가장 연하고 부드러운 상처를 드러낸 채 시련을 이겨내라고 강요하는 듯했다.하윤의 옆에서 하윤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태준도 수많은 감정이 스쳐지나는 듯했다.그러다가 차가 어느 한 곳을 지날 때, 하윤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차 세워요.”운전석에 앉아 있는 이남기는 백미러로 태준을 힐끗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을 본 후에야 차를 길가에 세웠다.하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해변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이것은 작은 해변가다. 갈라진 물줄기가 먼 곳으로 이어지는 바다.바다의 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자꾸만 하윤의 얼굴을 때렸다.“그날 시험 훈련을 하던 곳 여기 아니에요.”하윤도 알고 있다. 그저 도준과 조금이나마 가까이 있
이남기를 제지하고 난 공태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신경 쓰지 마요. 이번 훈련이 실패한 게 영향이 꽤 크고 또 기밀과 관련이 되어 있기도 하여 대외적으로는 비밀이거든요. 제가 한번 알아보고 소식이 있으면 알려 줄게요.”그 말에 잠깐 생각하는 동안 이남기의 한마디가 권하윤을 일깨워 주었다. 지금 태준은 하윤에게 빚 진 게 하나도 없다고, 하윤을 곁에 두는 건 오히려 함께 안 좋은 일에 연루될 수 있다고 말이다.밖을 내다보던 하윤은 웬 호텔을 지날 때 입을 열었다.“여기서 내릴 게. 당신 뒤에는 공 씨 가문도 있잖아. 당신과 있으면 내가 불편하니까 먼저 가 볼 게.”말을 마친 하윤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잠깐만요.”마침 그때 태준도 다른 차 문으로 내리면서 미소 지었다.“불편할 거 없어요. 저 지금 공 씨 집안 가주가 아니에요.”“그게 무슨 뜻이지?”“저는 지금 그저 공태준이라는 뜻이에요. 제가 그저 오래 알고 지낸 친구라 생각하고 잠시 얹혀 산다 행각하면 안 돼요?”나무가 울창한 숲길, 태준은 놀란 듯 묻는 하윤을 지그시 바라봤다.이윽고 하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더니 약 한 걸음 정도 남은 거리에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던 씨도 지금 구조 작업 중이잖아요. 살아 있어야 좋은 소식도 듣지 않겠어요?”“…….”공씨 저택.하윤은 제 발로 이 곳을 다시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두터운 대문, 담장 너머로 자란 나뭇가지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하윤의 기억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그때의 어두운 기억들과 가족을 위해 죽어라 뛰어다녔던 나날들이 눈앞에 선했다.문이 열리자 장미꽃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정열의 붉은색이 기억 속 고풍스러운 석상을 대체했다.하윤은 공 씨 저택에 이렇게 강렬한 색감이 쓰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장미꽃 정원뿐만 아니라 값비싼 나무로 만든 창문 틀마저 커다란 통 유리창으로 바뀌어 있었고 곳곳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한 번도 밝은 적 없던 하윤의 기억 한구석을 비추었다.전혀 다른 인테리어에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이 들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전화는 연결되었다.계속 이어지는 연결음에 하윤은 자기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의아해 몇 번이고 전화 번호를 확인했다.“뚜- 뚜-“연결음이 이어지는 동안, 온 몸의 피가 귀로 몰려드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그러다가 연결음이 끝나며 차가운 기계음이 들려왔다.“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십시오…….”하윤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또다시 걸어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설레던 심장도 점차 진정되었다.‘혹시 도준 씨가 전투기에 탑승할 때 핸드폰을 두고 탑승했나?’‘아무리 핸드폰을 미처 챙기지 못했다고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지나면 베터리가 나갔을 텐데, 왜 전화가 통하는 거지?’분명 민도준이 아직도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지만 전화 연결음이 들린다는 것만으로도 하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긴 거나 마찬가지였다.하윤은 그동안 하고 싶은 말들을 적으면서도 또 지금 핸드폰을 갖고 있는 사람이 도준 본인이 아닐 수도 있어 많은 말은 보내지 못했다.결국 삭제하고 또 삭제한 결과, 꼴랑 몇 글자만 보내게 되었다.[보고 싶어요.]그 문자를 보낸 뒤 하윤은 한참 동안 핸드폰 액정을 바라봤다.하지만 1분1초 흘러 액정이 검게 변하더니 다시 밝아지지 않았다.하윤은 심지어 샤워할 때도 핸드폰을 갖고 욕실로 들어가고, 머리를 말릴 때도 놓칠까 봐 시선은 계속 액정에 고정했다.그 덕에 핸드폰 액정이 다시 번쩍이는 순간 하윤은 얼른 손에 들고 있던 드라이기를 내동댕이 쳐버리고 핸드폰을 잡아 들었다.문자 하나가 도착했지만 모두 알아볼 수 없는 코드로 되어 있어 아무리 봐도 풀 수 없었다.하윤은 알파벳을 조합하고 발음대로 조합하고, 첫 글자로 조합하며 머리를 굴러봤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그렇게 한참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똑똑-하윤은 문을 여는 대신 건너편에 대고 물었다.“누구세요?”“아가씨, 점심 드세요.”“저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에 전소혜의 머리는 한동안 돌아가지 않았다.“오빠가 사고를 당했다고요? 오빠가 무슨 사고를 당해요? 사람 팰 때 껍질이라도 까졌대요?”국내의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소혜를 보자 권하윤은 최근 있었던 상황을 모두 설명했다.아직 도준의 생사조차 확인이 안된다는 말을 듣자 소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언니, 우선 진정해요. 제가 바로 국내로 돌아갈게요.”“아니요. 아직 돌아오지 마요. 지금 여기 상황이 안 좋아요. 게다가 소혜 씨가 지금껏 계속 칩을 개발해 왔으니 소혜 씨가 오면 위험할 수 있어요.”하윤의 말에 소혜는 더 조급해 났다.“그럴 리가요. 칩은 제가 코드를 하나하나 체크해 가며 검사했는데 절대 문제가 생길 리 없어요.”“소혜 씨도 이번 파일럿 시스템 실험에 참여했어요?”“네.”소혜의 말에 핸드폰을 잡은 하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소혜는 칩을 맨 처음 접촉했던 사람이다. 물론 소혜가 주도한 것은 아니지만, 시스템이 시행되기 전모두 꼼꼼히 체크했을 게 뻔하다.이에 하윤은 또 희망을 발견한 듯 따져 물었다.“혹시 그 시스템 따로 백업했어요?”“아니요. 기밀이라서 저도 백업할 수는 없었어요.”“아, 그래요?”실망한 듯한 하윤의 목소리에 소혜는 가슴팍을 퍽퍽 두드렸다.“언니, 걱정하지 마요. 제가 봤던 건 다 기억해요. 저한테 시간을 주면 똑같이 복사해 줄게요.”“정말 잘됐네요. 소혜 씨, 고마워요.”순간 희망을 되찾은 하윤은 흥분에 겨워 말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저기, 우리 오빠 진짜 폭발 사고로 죽은 거예요?”그 말에 하윤은 잠시 침묵했다.“아직 폭발한 비행기를 건지지 못했어요. 건져내기 전까지 저는 도준 씨가 살아있다고 믿어요.”소혜는 하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몰라 시스템 복사를 빨리 해내 증거를 찾아내겠다는 약조만 연신 해댔다.“참, 소혜 씨, 한 가지 일이 또 있는데, 저한테 풀지 못할 암호가 있는데 혹시 봐줄 수 있어요?”“네, 당연히 되죠. 누가 보냈는
전소혜는 스크린을 한번 훑었다.“베냉 코토누의 한 과일가게요.”권하윤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곳이 어디냐고 물으려던 찰나, 소혜가 말을 이었다.“오클랜드의 한 목장, 그리고…….”“잠깐만요.”하윤은 들으면 들을 수록 어리둥절했다.“혹시 한 곳뿐만이 아니에요?”“네. 경위도로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가지라서, 예를 들면…….”“그건 우선 됐고, 도합 몇 가지예요?”“총 137 가지요.”가지수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더는 없자 두 사람은 한 곳 한 곳 확인하기 시작했다.그렇게 소혜가 하나씩 대조하며 확인할 때.“75번째는 바다 위네요.”위치를 받아 적고 있던 하윤은 소혜의 말에 순간 멈칫했다.“바다요? 어느 바다요?”“잠깐만요, 지도 한번 확인해보고요.”전화기 건너편에서 키보드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쾅, 하는 테이블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동해요!”‘동해라면 해원 인근이잖아!’“그 곳일 거예요. 도준 씨가 그 곳에 있는 게 틀림없어요!”하윤이 너무 흥분하자 소혜가 완곡히 주의를 주었다.“이것들은 아직 추측에 불과해요. 코드가 그 의미인지 아닌지도 아직 모르잖아요.”하윤은 자기가 기록했던 수많은 좌표들을 바라보며 씁쓸한 듯 말했다.“알았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저 이미 수없이 실망해서 한 번 더 늘어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어요.”“…….”전화를 끊은 하윤은 곧바로 던의 번호를 눌렀다.이윽고 전후 사정을 숨기고 좌표 부근을 잘 수색해 보면 새로운 발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만 했다.그러자 확인에 찬 하윤의 말투가 이상했는지 던이 예의 있게 물었다.“이 좌표는 어디서 난 거예요?”“꿈에서요.”“…….”하윤은 자기의 말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지만 너무 많은 정보를 알리고 싶지 않아 애써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정말이에요. 저를 도와 도준 씨 찾아준다고 했잖아요. 이 부근은 꼭 확인해 주세요.”약속을 입에 담자 던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리고 이것과 별개로 만약 심리 상담이나 정신과
“재판?”권하윤은 깜짝 놀랐다.조관성 정도의 지위면 용의자에 그치는 단계에서 공개적인 재판까지는 열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혹시 죄가 확정됐어?”“아직은 아니에요. 그런데 재판에서 만약 조 국장한테 유리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으면 이번 재판에서 판결이 날 거예요.”‘조 국장이 만약 유죄로 판결이 나면 도준 씨가 살아 있다고 해도 빠져나올 수 없어.’‘상황이 이미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잖아.’식사 내내 하윤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식사가 끝난 뒤, 방으로 돌아갈 때도 태준이 반 발짝 뒤에서 따라 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윤이 씨.”마침 문 앞에 도착했을 때 태준이 하윤을 불렀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윤은 태준을 발견하고는 어색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야?”하늘에 걸린 달이 쏟아내는 달빛이 마침 태준의 어깨에 드리워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동시에 언제나 사람을 멀리하던 하윤의 경계심 가득한 얼굴에 부드러움을 더해주었다.순간 가슴이 쿵쾅거리자 태준은 하윤에게 이 정원을 기억하냐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마저 생겨났다.2년 전, 하윤은 바로 이 정원에서 자꾸만 끊기는 하모니카 소리에 맞춰 춤을 췄었다.이미 기둥까지 썩은 낡은 집을 모두 뜯어 고치고 하윤을 괴롭히던 사람에게 벌을 내렸으니 이제 다시 알아갈 수는 없는지 태준은 물어보고 싶었다.너무 진하다 못해 흩어지지도 않고, 거의 30년 가까이 갇혀 있던 감정들을 껍데기 속에서 꺼내 하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하지만 온 정신이 다른데 팔려 있는 듯 허공에서 맴도는 하윤의 눈을 본 순간 파도처럼 몰려오던 감정도 점점 가라앉아 씁쓸함만 남았다.결국 다시 여상스러운 미소를 지은 태준이 말했다.“아니에요. 일찍 자요.”하윤의 그림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태준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조금만 더 기다리자. 아직 때가 아니야.’……다음날.떠들썩한 창 밖의 소리에 깨어난 하윤은 눈을 뜬 순간 자신이 아직도 구치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