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권하윤은 깜짝 놀랐다.조관성 정도의 지위면 용의자에 그치는 단계에서 공개적인 재판까지는 열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혹시 죄가 확정됐어?”“아직은 아니에요. 그런데 재판에서 만약 조 국장한테 유리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으면 이번 재판에서 판결이 날 거예요.”‘조 국장이 만약 유죄로 판결이 나면 도준 씨가 살아 있다고 해도 빠져나올 수 없어.’‘상황이 이미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잖아.’식사 내내 하윤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식사가 끝난 뒤, 방으로 돌아갈 때도 태준이 반 발짝 뒤에서 따라 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윤이 씨.”마침 문 앞에 도착했을 때 태준이 하윤을 불렀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윤은 태준을 발견하고는 어색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야?”하늘에 걸린 달이 쏟아내는 달빛이 마침 태준의 어깨에 드리워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동시에 언제나 사람을 멀리하던 하윤의 경계심 가득한 얼굴에 부드러움을 더해주었다.순간 가슴이 쿵쾅거리자 태준은 하윤에게 이 정원을 기억하냐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마저 생겨났다.2년 전, 하윤은 바로 이 정원에서 자꾸만 끊기는 하모니카 소리에 맞춰 춤을 췄었다.이미 기둥까지 썩은 낡은 집을 모두 뜯어 고치고 하윤을 괴롭히던 사람에게 벌을 내렸으니 이제 다시 알아갈 수는 없는지 태준은 물어보고 싶었다.너무 진하다 못해 흩어지지도 않고, 거의 30년 가까이 갇혀 있던 감정들을 껍데기 속에서 꺼내 하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하지만 온 정신이 다른데 팔려 있는 듯 허공에서 맴도는 하윤의 눈을 본 순간 파도처럼 몰려오던 감정도 점점 가라앉아 씁쓸함만 남았다.결국 다시 여상스러운 미소를 지은 태준이 말했다.“아니에요. 일찍 자요.”하윤의 그림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태준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조금만 더 기다리자. 아직 때가 아니야.’……다음날.떠들썩한 창 밖의 소리에 깨어난 하윤은 눈을 뜬 순간 자신이 아직도 구치소에
공아름은 분노에 눈이 멀어 권하윤의 질문이 이상하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감히 그 일을 언급해? 너만 아니었으면 도준 씨가 할머니 심기 건드리는 일도 없었을 거고, 그러면 할머니도 추 부장과…….”“아름.”분노에 찬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 공아름은 언제 나타난지도 모를 공태준과 마주쳤다.오빠를 조금 무서워하는 공아름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하지만이미 공아름의 말에서 공씨 가문과 추형탁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낸 하윤은 태준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심지어 그 눈빛은 예전 그 어느때보다도 더 차가웠다.그 순간 태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메이드를 바라봤다.“아가씨 모셔가.”“싫어, 나 안가. 저 여자를 곁에 두면 오빠도 피해 입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도 피해를 준다는 거 몰라서 그래?”“…….”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다가 들리지 않고 나서야 태준은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휴식하는 데 방해됐죠?”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태준을 차갑게 바라봤다.“연기력 참 대단하네. 추형탁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 잘난 연기력으로 나를 여기까지 끌어온 거야? 다음은 뭐? 추형탁을 도와 나한테서 칩을 빼내 갈 작정인 건가?”“저한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전에 제 말 좀 들어볼 수 있어요?”“무슨 말?”하윤은 싸늘하게 웃었다.“충분히 많이 말했으면서. 이제는 공씨 가문 가주고 아니고 또 내가 추형탁 손에 넘어가는 걸 바라지 않는다며?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제 말 다 진심이에요. 저 이제 정말 가주 아니에요. 집안의 모든 일은 이제 할머니께서 결정하고 있어요.”하윤이 여전히 믿지 않자 태준은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그날 민 사장의 행동이 할머니의 자존심을 건든 건 사실이예요. 할머니는 지금껏 그런 모욕을 당한 적이 없거든요. 그 때문에 정치에는 손댄 적 없던 분이 추 부장까지 찾아가 손을 잡았어요.”그날…….하윤도 모르는 사이, 공씨 집안, 추형탁 그리고 멀리에 떨어져 있는 민재혁까지 진작 손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권하윤은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밖에 그녀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이 도처에 깔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으니까.때문에 하윤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상권을 지날 때 기사더러 차를 멈추게 했다.화창한 날씨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선글라스나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유독 하윤만 태양 아래에 꼿꼿이 서 있었다. 마치 이러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지는 것처럼.하지만 그런 안도감도 잠시뿐이었다. 곧바로 주위 모든 사람이 의심스러웠고 자기를 감시하는 것 같았다.공태준의 개인 저택에서 나오는 순간 추형탁이든 민재혁이든 절대 하윤을 놓아주지 않을 텐데 어떻게 자기를 보호해야 할지도 막막했다.‘난 절대 죽어서는 안 돼. 잡혀서도 안 되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그렇게 주위를 경계하고 있을 때 어깨가 갑자기 무거워져 하윤은 고개를 홱 돌렸다.“누구야?”이남기는 하윤이 이렇게 큰 반응을 할 줄 몰랐는지 잠시 멍해 있다가 뒤로 물러났다.“윤이 씨.”“남기 씨가 여긴 어떻게.”“가주님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한동안 저택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 싫은 사람 마주칠 일 없을 거라면서요.”이남기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았지만 마음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분명 가주이면서 하윤 앞에서는 항상 고개 숙이고 작아지고, 심지어 가주 자리까지 포기하는 태준이 이해되지 않았다.그런데 하윤은 그런 가주님을 한 번도 제대로 봐주지도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윤이 시를 안 건 가주님이 먼저였는데. 가주님이 민도준보다 못한 게 뭔데?’눈은 감정의 창구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눈만 보면 그 사람의 감정을 알 수 있다.때문에 하윤도 당연히 이남기의 불만을 눈치 채고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대신 고맙다고 전해줘요. 그리고 저 따라오지 마세요.”이남기는 하윤이 거절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경고했다.“만약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추 부장 손에 잡힌 뒤에는 가주님도 손 쓸 수 없을 겁니다.”
아침 10시.방송국 건물은 권하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썰렁했다.기자라면 뉴스거리를 찾거나 취재를 하기 위해 모두 외출 중이라 오직 몇몇 기자들만 남아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때문에 누군가 기사를 내 달라고 찾아온다면 늑대 무리에 떨어진 고기나 다름없다.몇 분도 안 되는 사이, 한 여기자가 사람들을 뚫고 하윤을 맞이했다.“혹시 녹음해도 될까요?”“네. 하세요.”“그럼 시작하세요.”아직 이번 주 기사 건수를 채우지 못한 여자는 하윤이 어떤 대단한 뉴스거리를 가져왔는지 몹시 기대하는 눈치였다.하지만 하윤은 응원하는 듯한 기자의 눈빛에 더욱 긴장했다.“어, 제가 말할 얘기는 지난지 한참 돼서 아직도 보도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이성호 교수의 딸입니다. 음악가였던 저의 아버지는…….”한참 동안 듣고 있던 기자는 뭔가 생각났는지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혹시 이시윤 씨?”“네, 맞아요.”하윤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보통 그 정도의 큰 뉴스가 나면 기자들은 당사자를 인터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때 이 방송국에서도 하윤에게 연락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그런데 방송국 전체가 나서서 인터뷰 따려던 사람이 자기한테 이렇게 찾아왔으니 기자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여기 사람들이 많아 불편할 텐데, 혹시 접대실로 가서 말씀 나눌까요?”지나치게 우호적인 기자의 태도에 하윤은 괜히 몸서리를 쳤다.“어, 네.”……인터뷰 과정은 매우 순조로웠다. 아직 시효가 지나지 않은 큰 뉴스는 보통 각 플랫폼에 널리 배포된다.그 때문인지 인터뷰가 끝난 뒤 기자는 매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습니다. 혹시 방송사 측에서 해줬으면 하는 요구는 있나요?”“혹시 우리 아버지가 근무하셨던 학교도 인터뷰해줄 수 있나요?”그 말에 기자는 하윤을 빤히 응시했다.그 눈빛에 하윤은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혹시 어렵나요?”“…….”하윤은 당연히 상대가 거절한 것으로 착각했지만 기자는 오히려 속으로 쾌재를
권하윤은 햇빛이 비치는 나무를 바라보더니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춤 추는 걸 찍읍시다.”춤을 추겠다는 말에 기자는 놀란 듯 하윤을 바라봤다. 이성호의 딸이라면 당연히 악기를 다룰 거라고 생각했는데 춤을 춘다니 실로 놀라웠다.하윤은 오늘 심플한 흰 원피스에 화장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검고 긴 머리를 풀어 헤쳤다.이렇게 열심히 춤을 추는 건 오랜만이라서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몸에 익숙한 동작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자연스레 흘러나왔다.햇빛 아래에서 하늘거리는 치맛자락은 아름다운 호를 그렸고 익숙한 동작은 옛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때의 하윤은 아무 걱정 없는 소녀였다. 가장 큰 고민이라면 아버지가 춤을 배우는 것을 반대하고 매일 무용 수업을 받으려고 아버지를 속여야 하는 거였다.긴 머리카락이 흩날리다가 떨어지며 몸 위에 떨어져야 할 햇빛을 가렸다.아마 예전에 너무 많은 것을 얻어 이제는 점점 잃어가는지도 모른다.아버지를 잃고, 가족과 함께 할 기회도 잃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었다…….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춤으로 승화되었고 또다시 핸드폰 동영상으로 기록되었다.그저 동영상을 찍는 것이었지만 춤이 끝난 뒤 하윤은 몸을 살짝 숙여 인사했다.그렇게 춤이 끝난 뒤, 하윤은 어색한 듯 입을 열었다.“오랜만에 춤을 춰서 조금 서툴러요.”“아니요! 완벽했어요!”여 기자는 흥분한 듯 말했다.“혹시 조금만 저도 이 영상 인터뷰 내용에 담을 수 있나요? 시윤 씨 계정 태그 할게요.”“그래요. 그럼 수고하세요.”하윤은 싱긋 미소 지었다.……기자의 효율이 얼마나 높은지 두 시간도 안 되어 각 플랫폼에 영상을 계시했다.게다가 방송국 계정이라 개인 계정보다 파로워나 관심도가 훨씬 많았고 또 화제성까지 더해져 특종 뉴스나 다름없는 시너지를 냈다.그 때문인지 하윤이 영상을 올린 지 얼마되지도 않아 클릭수가 꽤 늘어났다.[분명 예쁜 춤인데 왜 눈물이 나지?][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투신하고 딸은 2년간 노력 끝에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
“소혜 씨, 지금 중요한 전화가 들어와서 그러는데, 우리 나중에 얘기해요.”“네? 어, 알았어요.”전화를 끊은 진소혜는 순간 풀이 죽었다. ‘대체 누구길래 밤새워 일한 나보다 더 중요한데?’한편, 하윤은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따져 물었다.“혹시 소식 있어요?”“우리의 관계가 인사치레도 없이 보론으로 들어갈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하윤은 더의 말에 크게 숨을 내쉬고는 인내심을 한껏 발휘하여 다시 물었다.“던 씨, 그간 잘 있었어요? 혹시 무슨 일 있어요?”“네. 윤이 씨가 보낸 좌표에서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작은 섬을 발견했고 그 곳에서 전투기의 잔해를 발견했어요. 전에 정신과 상담 받으라는 말은 취소할게요. 정신과 상담 보다는 신 내림 한 번 받아봐요.”“잔해요? 전투기 잔해만 발견됐나요? 사람은 없었어요?”“없었어요.”“그렇군요…….”하윤은 못내 실망했다.하지만 그때 던이 말을 더 보탰다.“윤이 씨도 없는 걸 원하는 거 아니였어요? 비행기마저 산산조각 났는데 만약 민 사장이 있기라도 했다면 더 처참하지 않았을까요? 사람이 비행기보다 더 튼튼할 리는 없을 테니까.”“…….”비행기를 언급하자 하윤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비행기가 산산조각 났다면 혹시 파일럿 시스템은 아직 괜찮아요?”“조종석은 멀쩡한 편이라 시스템도 복구하면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다행이네요, 그럼…….”“그런데 이건 기밀이 연루된 거라 국가에 바쳐야 하거든요.”“잠깐만요!”조관성이 무너진 지금 시스템이 추형탁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바치면 안 돼요. 그것마저 바치면 증거가 없어요!”“그런데 바치지 않으면 제가 위법하는 게 되거든요.”던의 냉정한 말투에 하윤은 말문이 막혔다.던은 하윤과 도준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 두 사람을 위해 위험까지 감수하는 건 확실히 말이 안 되었다.때문에 하윤은 할 수 없이 한 발 물러섰다.“바치는 건 문제없어요. 그런데 혹시 저한테 시간을 줄 수 있어요? 제가 사람을 찾아 복구해보고
“계속 진행하시죠. 저는 잠깐 실례할 게요.”이 말을 끝으로 던의 화면은 검게 변했다.그걸 본 진소혜는 슬쩍 고개를 들어 확인하고는 아쉬운 듯 투덜거렸다.“나를 감독하겠다면서 영상 통화는 왜 껐대요?”이에 권하윤은 손가락을 쪽쪽 빠는 소혜를 보며 완곡하게 말했다.“급한 일이 있나 보죠.”“그렇구나. 아쉽다.”잘생긴 남자를 보지 못하자 소혜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1시간 내에 시스템을 복구해야 하기에 이내 일에 다시 집중했다.시간은 그렇게 1분1초 흘러갔다. 그러다가 거의 1시간이 다 되어가자 확신에 차서 말하던 하윤마저 걱정이 앞섰다.그런데 또 소혜를 방해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으며 소혜의 정수리를 바라볼 뿐이었다.“탁!”그때 엔터키를 누르는 맑은 소리가 들려오더니 소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다 됐어요!”그 다음은 두 시스템을 비교해 사고 당일 대체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확인해 보는 작업이었다.소혜의 컴퓨터 액정에서 수많은 코드가 번뜩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어지러워졌을 텐데 소혜는 오히려 더 흥분한 듯했다.“알아냈어요!”소혜는 끝내 시스템을 가리키며 말했다.“그날 시스템이 작동할 때 갑자기 이상 신호가 잡히면서 교란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갑자기 오차가 생겨 폭발 시간이 앞당겨 지면서 발사하기도 전에 폭발한 거고요.”“이상 신호 때문에 교란이 일어났다고요? 혹시 어디서 잡힌 신호인지 알아낼 수 있나요?”“그건 좀 어렵지만 위치 확인은 가능해요. 이정도로 강한 신호는 신호소에서 보낸 게 틀림없어요. 신호소를 하나하나 배제해 보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그래요. 그러면 제가 알아 볼게요.”마침내 돌파구를 찾자 하루 종일 누적되었던 피로도 싹 풀렸다.그때 경비 아저씨가 하윤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저기요, 이제 문 닫을 시간이에요.”하윤은 그제야 자기가 지금 방송국 로비에 앉아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미안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방송국 건물을
파도가 끊임없이 소리를 내며 갑판 위에 오르려고 하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지기를 반복했다.선밖 밖의 요란함은 두꺼운 철벽에 막혀 안으로 새어 들어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안, 웬 남자가 두 다리를 꼰 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보고싶어요.][어제보다 더 보고싶어요.]손가락이 대화 창을 클릭하고 문자를 적으려는 찰나,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애교가 많은 여자네요. 어쩐지 도준 씨가 계속 걱정한다 했어요.”도준이 눈꺼풀을 들자 빨려 들어갈 듯한 검은 눈동자가 나타났다.“이렇게 말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네.”“그동안 쌓인 게 많으니 화 내는 것도 당연해요.”여자는 붉고 투명한 와인을 잔에 따라 도준에게 한 잔 건넸다.하지만 도준은 그 잔을 받지 않았다.“축하주가 아니더라도 기념주는 마셔야 하지 않겠어요?”도준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더니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더러워서 싫어.”그 말에 여자도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몇 년 안 본 사이에 도준 씨는 하나도 안 변했네요.”도준은 희뿌연 담배 연기를 뱉어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분명 앉아 있지만 사람을 내려보는 듯한 착각이 들기까지 했다.그러는 그쪽은 많이 변한 것 같네. 더 구역질나.”“칭찬 고마워요.”여자는 와인잔을 흔들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액체가 와인잔 내벽에서 빙글 돌았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사이, 여자는 잔을 통해 도준을 바라봤다.“누구는 뭐 애교 부려서 문제 해결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아요? 아쉽게도 저는 그런 팔자가 아니란 게 문제죠.”“만약 당신이 하윤 씨였다면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배신 때렸겠지. 그것도 이익을 가장 많이 챙기는 쪽으로. 제 목숨 부지하려고.”도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잔을 흔들던 여자의 손이 순간 멈췄다. 마치 속내를 들킨 것처럼.하지만 여자는 곧바로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한 순간 모든 감정이 사라진 것처럼 원래의 모습을 드러냈다.“그 여자가 도준 씨 곁에 있는 것도 목적이 있어